109.
잠시간 눈을 깜빡거려 보아도 눈앞의 얼굴은 사라지지 않았다. 순간 내가 기절해서 헛것을 보는 건가 싶었지만, 시야가 마냥 깨끗한 걸 보면 그것도 아닌 듯싶었다.
차라리 환상을 보는 것이었다면 이렇게 식은땀이 날 것 같지는 않았을 텐데.
그 순간만큼은 주변의 풍경도 소리도 들어오지 않은 채, 나와 단테만이 존재하고 있는 것 같았다.
“…….”
내가 이름을 부른 것이 무색하도록, 단테는 그 어떤 대답도 없었다. 감정이 너무 많이 섞이다 못해 사라진 듯한 표정도 그렇고, 내 말에 이렇다 할 반응이 없는 것도 그렇고. 나를 감싸고 있는 온기는 익숙했지만, 그 외의 것은 전부 낯설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감정을 읽기 어렵다는 말이 단테의 상태를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말은 아니었다.
맞닿은 몸을 통해, 단테가 빠르게 숨을 들이마시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으니까.
이곳까지 다다른 것이, 그리고 나를 붙잡은 것이 다소 급박하게 이루어졌다는 걸 그 호흡으로 알 수 있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단테의 눈동자가 흔들렸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갑자기 단테가 나를 자기 품에 욱여넣듯이 끌어안았다.
참고로 말하자면, 단테는 그 전에도 이렇게까지 나를 우악스럽게 껴안은 적은 없었다.
“잠, 잠깐만.”
이 정도로 세게 끌어안으면 마냥 안겨 있지도 못한다. 온몸이 아파 올 정도로 조이는 건 둘째 치더라도 숨을 못 쉬겠잖아. 다른 무엇보다 생존 본능이 먼저 솟은 탓에, 반사적으로 몸을 뒤틀었다. 확연한 저항을 단테도 느낀 듯 나를 감싸던 힘이 한층 느슨해졌다.
그 와중에도 내 몸에 닿은 손은 선명하게 뜨거워서, 멍청한 생각이 언뜻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진짜 단테네.
긴장이 풀어지려던 것도 아주 잠깐, 불시에 정신이 확 돌아왔다.
“너…… 잠깐만. 여긴 어떻게 온 거야?”
바깥으로 나왔을 뿐 여전히 우리 앞에는 무너지는 건물이 있었고, 그렇다면 내가 돌아온 것이 아니라 단테가 이곳으로 왔다는 말이 된다.
잠깐 고요해졌던 게 착각이라는 듯 사방이 거대한 굉음으로 가득 찼다. 벽이 무너지고, 바닥이 부서지고, 높디높은 건물이 한낱 잔해로 변하는 소리.
이제 보니 건물의 외형은 안쪽 구조와 마찬가지로 마냥 하얬다. 그리고 그 하얗기만 했던 돌덩이들이, 바로 가까이에서 형태를 잃고 요란히 내려앉고 있었다.
건물이 무너지는 것을 바라보다가 다시 단테에게로 눈을 돌렸다. 그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시끄러운 풍경을 옆에 두고도, 단테는 고개를 돌리는 시늉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보라색 눈동자는 오롯이 나만을 담고 있었고, 나는 꼼짝없이 그 눈을 마주 바라보아야만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영문을 모르겠는데.
다 같이 죽자며 건물이 무너질 것을 예상하지 못했듯, 단테가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다. 아니, 어렴풋이 올 것 같다고 생각하기는 했지. 근데 이렇게 시기적절하게 찾아올 줄은 몰랐다고.
케이드의 도움을 받아 정령의 자취를 쫓아서 온 건가? 하지만 그게 가능했다면 진작 오지 않았을까? 머릿속에서 수많은 물음표가 돌아다니는데, 단테가 곧 나를 땅 위로 내려주었다.
방금 전까지 위태롭게 흔들리던 바닥 위에 있었던 게 거짓말이라는 것처럼, 내 다리는 금세 보드라운 땅 위에서 단단히 자리했다. 짧은 풀잎이 발목 부근을 스치고, 드문드문 들꽃이 피어나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저 건물을 감싸고 있던 ‘껍데기’ 바깥에 이런 풍경이 있을 줄은 몰랐다. 멀거니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드니, 또다시 단테와 눈이 마주쳤다.
단테는 여전히 그 어떤 것에도 대답해주지 않고, 아무 말 없이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 하나 확실한 건 없지만, 이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저 침묵을 마냥 아무렇지도 않게 넘기면 안 된다는 거.
“음…….”
내가 지금 단테의 이름을 부르는 게 잘하는 짓일까, 아닐까. 자칫 잘못하다가는 단테를 자극할 것 같아서, 잠시 말을 꺼내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어색하게 흐르던 침묵을 깨트린 쪽은 결국 단테였다.
“에이.”
한참 만에 불린 내 이름이 어쩐지 오싹한 울림을 담고 있었다. 나는 곧바로 대답하려다가,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아 마른침을 한번 삼켰다.
내가 대답할 때를 놓치든 말든 단테는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듣는 사람으로서는 그대로 도망치고 싶을 만큼 무표정과 어울리지 않는 말이 귓가에 꽂혔다.
“혹시 내가 너 없으면 못 산다는 이야기를 안 해줬던가?”
“…아니, 해줬던 것 같은데…….”
“해줬다고?”
“응.”
“그걸 기억하고 있는데도 이래?”
평소와는 확연히 다른 매서운 어조가 따라붙는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내가 침묵을 지키자, 단테가 재차 입을 열었다.
“그걸 아는데 어떻게 이래?”
“…….”
“내가 너 없이 못 산다는 건, 그건…….”
단테의 목소리가 잠시 잦아드는 듯싶다가.
“상처 같은 건 순식간에 사라지는 몸을 가지고 있든 말든, 그냥 네가 아파할 만한 일은 없어야 한다는 말이었어.”
“단테.”
“그런데 너는 왜 기어이 이런 선택까지 해?”
끝으로 갈수록 문장이 점점 엉망진창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마냥 날카롭기만 하던 말끝이 점점 뭉툭해지고, 나를 붙잡은 손아귀 힘이 점점 더 세게 조여들었다.
“너를 다시 잃을 자신이 없다고 했잖아. 이건 네가 죽어도 살아난다고 해서 전부 해결되는 게 아니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그럴 리가. 나는 속삭이듯이 대답했고, 단테는 그 이후로 다시 말이 없었다.
그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나도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는 말은 의미가 없었다. 애초에 이곳에 온 것 자체가 나의 고집이었고, 혹여라도 내가 험한 일을 당할까 봐 불안해하던 단테를 안심시켰던 것도 나였다.
단테의 믿음을 눈앞에서 깨트린 것도, 나였고.
그래, 인정한다. 죽는 일이 최대한 없기를 바랐지, 죽는 것만큼은 안 된다고 생각하며 발악한 적은 없었다. 그리고 이런 내 심중을 알아차린 것만으로도 단테에게는 충분히 화가 날 만한 일이었을 것이다.
나는 뭐라도 변명을 덧붙이려던 것을 그만두고, 얌전히 시선을 내리깔며 대답했다.
“미안해.”
“…….”
“…다음에는 정말 안 이럴게.”
군더더기 없는 내 사과에 단테는 곧장 무언갈 말하려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어쩐지 눈빛으로 책망이 전해져오는 기분이라, 나는 다소 다급하게 덧붙였다.
“그래도 네 곁에 돌아오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것만큼은 거짓말 안 했어.”
애초에 뛰어내리기를 선택한 것도 최대한 시체가 온전하길 바라서였으니까 말이다. 어떻게 하면 더 빨리 돌아갈지 계속 고민한 것에 대해서는 떳떳이 말할 수 있었다.
내 말에 몇 번 입을 열었다 닫기를 반복하던 것도 잠시, 이내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일단 한고비는 넘겼군.
“…상처를 가볍게 생각하는 버릇도 고치고, 앞으로 이런 일에도 뛰어들지 마.”
언뜻 들으면 단테의 화가 풀린 것 같았지만, 나는 여전히 단테의 기분이 저조하다는 것을 알았다. 하고 싶은 말을 몇 번이고 억눌러서 입 밖으로 낼 만한 문장을 만들어 내고 있다는 것도.
단테의 얼굴 부근을 맴돌던 손을 아래로 내려 목 부근에 갖다 대었다.
데일 것처럼 뜨거운 체온이, 그리고 터질 듯이 뛰는 맥박이 손을 통해 전해졌다.
아무래도 지금 당장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안 되는 것 같지. 나중에 기회가 되면 제대로 붙잡고 말해야겠다.
“이럴 일이 앞으로도 없다면 그럴게.”
“…끝까지 안 그러겠다는 말은 안 하고…….”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마침내 투정처럼 들려왔기 때문에, 나는 희미하게나마 미소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너한테 거짓말을 하는 것보다는 낫잖아.”
내 말에 단테는 차라리 거짓말이 나을 거 같다며 한숨지었다.
한차례 소란이 지나가고 소강상태가 오고 나서야 나는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다. 이제는 완전히 다 무너진 건물 하나와, 그 주변을 드문드문 채운 정체불명의 구멍들.
비로소 제대로 살펴본 바깥은 건물이었던 것의 흔적 빼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뻥 뚫린 평야와 같은 곳이었다.
“혹시 마샤는 어디 갔는지 봤어?”
“아니. 하지만 곧 올 거야.”
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단언하나 싶었지만, 단테가 나를 마냥 안심시키기 위해 빈말을 할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더 묻지 않고, 일단 마샤를 기다릴 작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마샤가 뛰어내린 틈으로 똑같이 뛰어내렸는데도 도착 지점이 다르다는 것은 조금 신기했다. 하긴, 그것만 신기해하기에는 건물이 무언가에 둘러싸여 있던 것부터 신기해해야 하긴 하지.
…그래서 그 벽 같은 건 도대체 어쩌다 깨져나간 거지? 진짜 내가 깬 건가?
아까는 정신이 없어서 넘겼던 의문이 든 순간, 문득 시야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나와 마샤가 빠져나왔던 그 구멍의 뒤편.
“…단테.”
무심코 그곳을 눈에 담던 나는 조용히 단테를 불렀다. 아니, 부르다 못해 먼저 다가가 단테의 소매를 붙잡았다.
그 안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이유를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차올라서.
그것은 마치, 도저히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아득한 무저갱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