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8. (108/181)

108.

유리가 깨질 때보다는 둔탁하고, 대리석이 깨질 때보다는 가벼운 소리였다. 만져보았을 때 단단하고 매끄러운 느낌이었던 것도 그렇고, 생각보다 쉽게 깨져나가는 것도 그렇고. 마치 도자기 표면에 충격을 가한 느낌이었다.

어쩐지 지금처럼 허공에 있는 무언가를 깨트린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때는… 일리난이 나오는 숲이었었나. 아주 짧게 기억을 되짚어보던 것도 잠시, 내가 깨트린 그 부근을 기점으로 바깥 공간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쩌적, 하고 울리는 소리는 건물이 무너지고 있는 지금 같은 상황에선 제법 불길하게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방 안을 살폈지만, 소리의 출처는 역시 건물 안이 아니라 바깥이었다.

새하얀 풍경을 타고 올라가던 균열이 뿌리를 내리듯 빠르게 사방으로 퍼져나가다가.

결국, 균열이 만들어 낸 조각 몇 개가 그 자리에서 버티지 못한 채 아래로 떨어져 나갔다.

“저거……. 설마 바깥이야?”

“그런 것 같은데.”

조각이 떨어져 나간 틈 너머로 보이는 건, 놀랍게도 여기에 온 뒤로 보지 못했던 풍경이었다. 사방이 새하얗게 칠해져 있는 듯했던 아까와는 달리 현실이라고 말할 수 있을 법한, 새파란 하늘과 구름이 비쳐오는 풍경.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우리는 저 틈을 통해서 빠져나가야 한다고. 

단테가 표현하기를, 이 건물은 현실과 유리되어 있다고 했었지. 그렇다면 바깥 풍경이 비치는 지금은 그 유리가 끝나기 시작했다고 보아도 되는 걸까?

빠르게 머리를 굴리는데,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서 있던 마샤가 내 옆에서 신음했다. 

“에이, 너 손이…….”

뒤늦게 고개를 내려 손을 확인하자, 파편에라도 찔린 듯 손등을 가로지르고 난 상처가 보였다.

이것만 보면 꼭 어디서 싸우고 온 사람 같네. 사실 혼자서 주먹질했다가 생긴 상처지만.

“괜찮아. 어차피 조금만 있으면 나아.”

“낫는 게 문제가 아니라……. 잠깐, 밀지 마!”

창문가로 마샤의 등을 떠미니 마샤가 짧게 비명을 질렀다. 무서운 마음은 알겠다만, 다른 방법이 없는 걸 어떡해.

“아마 여기서 빠져나간 뒤에 확인하면 감쪽같이 사라진 상태일걸? 별로 아프지도 않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잠깐, 잠깐만 에이. 우리 진짜로 여기서 뛰어내려?”

“응. 정령이 도와줄 테니까 아마 다치진 않을 거야.”

그렇게 말한 뒤에 동의를 구하듯 정령을 쳐다보니, 정령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처럼 위아래로 몸을 흔들었다.

“봐봐, 도와준다잖아.”

“정령을 못 믿는다는 건 아니지만… 꺄악!”

마샤가 대답하는 순간, 갑자기 건물이 이제껏 느꼈던 것 중 가장 크게 흔들렸다. 천장에서 먼지가 후드득 떨어지고, 벽뿐만 아니라 옆에 있는 기둥에도 위태롭게 금이 가기 시작했다.

넘어지지 않기 위해 일단 창문틀을 붙잡았는데, 등 뒤에서 불길할 정도로 커다란 소리가 들렸다.

착각이 아니라면 뭐가 통째로 떨어진 소리 같은데. 천장이 떨어졌는지, 바닥이 떨어졌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건 뒤도 돌아볼 시간도 없다는 거.

나는 마샤의 어깨를 붙잡고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너무 무서워하지 마. 그냥 건너간다는 생각으로, 같이 뛰어내리면 되니까…….”

하지만 내가 ‘같이’라는 단어를 발음하자마자, 내 곁에서 맴돌던 정령이 갑작스레 몸을 빠르게 흔들었다.

그러고 보면 아까부터 우리 둘 사이를 차례대로 오가는 듯 보였지. 처음에는 그냥 재촉하는 몸짓인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무언가 다른 뜻이 있었나 싶다.

“…혹시 우리 둘을 한꺼번에 도와주지는 못하는 거야?”

안절부절못하던 정령이 곧장 위아래로 크게 몸을 흔들었다. 그러고는 다시 마샤와 내 곁을 차례대로 배회하는 게, 둘이 아니라 한 명씩이라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아까부터 내가 신기할 정도로 정령의 말을 잘 알아듣고 있는 건 둘째치고, 둘이 한 번에 움직이지 못한다면 더 서둘러야 했다.

“마샤, 네가 먼저 가.”

“뭐?”

창밖을 확인하던 마샤가 휙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아까보다 더 얼굴이 창백해져 있는 것이, 죽어도 먼저 가기는 싫다는 기색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생각해도 네가 먼저 나가는 게 맞잖아. 우리 둘 중에 무너진 건물에 갇혀도 살 수 있는 사람을 고른다면, 굳이 고민할 필요도 없이 나인걸.

물론 이 상황에서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낼 만큼 멍청하지는 않았다. 나는 잠깐 조각난 틈 사이로 땅과 건물 사이의 높이를 가늠한 뒤, 침착한 목소리로 마샤에게 말했다.

“너보다는 내가 남는 게 나아. 그러니까 어서.”

“…정말 같이 가는 건 안 돼?”

“응, 그건 안 된대.”

마샤의 옆에서 맴돌던 정령이 시무룩하게 몸을 늘어트렸기 때문에, 마샤도 거기서 말을 더 덧붙이지는 못했다. 

결국, 마샤는 맹렬하게 갈등하던 것을 그만두고 창문틀에 발을 디뎠다.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위태로운 모습 속, 마샤가 마지막으로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빨리 와야 해!”

“응, 밑에서 봐.”

그렇게 이야기하자마자, 마샤가 건물 바깥으로 떨어졌다.

붉은 머리카락이 눈앞에서 사라지자 순간 심장이 철렁했다. 다급하게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미니, 어느새 마샤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떨어지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걸 보면, 아마 저 틈 사이로 무사히 넘어간 거겠지. 

마음 같아서는 안도의 한숨이라도 쉬고 싶었지만, 바로 지척에서 느껴지는 진동 때문에 찰나의 여유조차도 부릴 수 없었다.

내심 건물을 무너트린다던 말은 단순한 협박이고, 이 진동과 흔들림도 불시에 그치기를 바랐는데.

- 쿵!

금방이라도 내가 디디고 있는 바닥이 붕괴해 아래층과 하나로 합쳐질 것 같은 모습을 보아하니, 그럴 일은 죽었다 깨어나도 일어나지 않을 듯했다.

나는 흔들리다 못해 기울어지기 시작한 바닥을 내려다보다가, 창문틀을 밟고 그 위로 올라갔다. 만약에 정령이 돌아오는 것보다 건물이 무너지는 게 빠르다면 맨몸으로라도 뛰어내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아무리 그래도 목숨은 건져야 하니까.

그리고 목숨을 건지지 못한다고 해도, …시체가 더 온전한 쪽을 택하는 게 맞겠지.

이런 생각들은 마치 오랜 버릇과도 같은 거였다. 죽지 않을 거라고 믿는 것보다, 죽음 이후에 어떻게 될지를 떠올리는 것. 

살기 위해 발버둥 치기보다 더 편하게 죽는 방법을 선택하는 것.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서만큼은, 죽음을 떠올리는 것 자체가 마치 잘못을 저지르는 일처럼 느껴졌다.

이건 아마 내 죽음을 그 무엇보다 두려워하는 사람이 생겨서일 터다. 나는 죽지 않는다고 말해도, 그리고 상처가 금방 낫는다고 말해도 한결같이 불안해하는 사람이 있어서.

내 손등에 있었던 상처는 나도 모르는 사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아까 창문틀을 급하게 짚는다고 생겼던 생채기도 마찬가지였다. 

말만 하지 않으면 내가 다쳤다는 걸 단테는 알지 못할 거야. 하지만, 그래도….

괜히 이야기를 꺼내지 않아도, 먼저 다친 곳은 없는지 물어봐 주었으면 좋겠다. 만약에 다친 곳이 없다고 말해도 걱정은 거두지 않았으면 좋겠다. 

안 그래도 불안해하고 있을 사람을 걱정시키고 싶다니, 내가 생각해도 이상하긴 한데. 죽는 것을 떠올리는 일보다는 차라리 이편이 나았다. 아마 단테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물론, 걱정을 받고 싶다는 거지 슬퍼할 일을 만들고 싶다는 건 아니지만.

이 상황에서는 그것조차 내 마음대로 못 정하나 봐, 단테. 나는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는 정령과, 굉음과 함께 기울어지기 시작하는 건물을 느끼면서 중얼거렸다. 내가 여기 온 것만으로도 너는 충분히 힘들어했는데.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물러날 곳은 없었고,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건 결국 한 가지뿐이었다.

“…그래도 죽는 일은 없어야 할 텐데.”

단테를 또 오랫동안 혼자 둘 수는 없으니까.

그렇게 혼잣말한 나는, 풍경이 보이는 틈을 향해 그대로 몸을 던졌다.

빠르게 추락하기 시작하는 몸이 그 어느 때보다 두렵게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 * *

이런 기분을 언젠가 또 느껴본 적이 있다. 이런 순간에 그 당시를 정확히 기억해낼 수 있을 리는 없지만, 다시는 느끼고 싶지 않은 기분이라고 생각했던 것만은 머릿속에 남아 있다.

심장이 귀 옆에 자리한 듯, 온통 정신없는 와중에도 요란하게 울렸다. 뺨을 매섭게 스치는 게 바람인지, 다른 무언가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죽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는 말은 이루어지지 않을 모양이다. 이 정도 높이라면 아마 나는 죽고도 남을 것이다. 

무섭나? 무섭지, 그럼. 온몸이 부서지고도 남을 텐데. 그게 아니더라도 떨어지는 것 자체가 무서워 죽겠는데.

나는 점점 빠르게 떨어지는 몸을 느끼며 곧 찾아올 고통을 예감했고, 나도 모르게 눈을 꽉 감았다.

…하지만, 그 순간 느껴진 건 뼈가 부러지는 아픔이 아니었다.

“…….”

이런 상황에서 느껴질 리 없는 온기가 내 몸을 감쌌다. 거센 힘이 나를 단단히 붙들면서, 덜컹거리던 심장이 공중에 멈춰 서는 기분이 들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잇새로 신음을 흘렸던 것 같다. 그 짧은 소리에 반응하듯, 누군가의 팔이 내 몸을 더 강하게 안아왔다.

익숙한 체향이 코끝을 스친다는 걸 가까스로 알아차렸을 때.

간신히 눈을 떠보니, 방금 전까지만 해도 온통 내 머릿속을 뒤덮었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나에게는 낯설 수밖에 없는, 감정을 읽을 수 없는 표정.

“…단테.”

아주 잠깐이지만, 큰일 났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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