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J3.
여자가 뱉은 말의 의미는 명백했다. 본래의 차원으로 돌려 보내준다는 제안의 거절.
제레미는 그 거절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고작 그게 이유의 전부인가?”
그가 했던 제안은 단순히 고향으로의 귀환만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이건 그녀에게, 오랜 시간을 살았고 또 오랜 시간을 살아가야 할 차원 이동자에게 다시 없을 기회였다.
제레미는 옛친구에게 전해 들었던 그 삶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 이야기를 들을 때 느꼈던 감정은 안타까움보다 극도의 흥미로움에 가까웠으나, 그 불멸이 저주와 다름없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었다.
죽지 않는 몸은 계속해서 그들의 고향에 대해 상기시킬 것이고, 종래에는 그들이 이 세계에 남겨진 이물질 같은 존재라는 걸 스스로 깨닫게 할 테니.
그녀가 이 제안에 긍정의 답을 주기만 했다면, 낯선 곳에 넘어와서 겪어야 했던 고통과 그 고통이 영원히 이어지는 굴레를 끊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난 자네가 감정에 눈이 멀어서 과거를 내다 버리는 인간인 줄은 몰랐는데.”
제레미의 목소리는 부러 숨기지 않은 비아냥을 가득 담고 있었고, 실제로 그는 에이가 굉장히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물론 상대는 지금껏 그래왔듯 그의 말투에 발끈하거나 화를 내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어깨를 한번 으쓱이더니 제레미의 말에 뻔뻔스레 대답했다.
“내다 버린 게 아니라 매몰되지 않은 거라고 해줄래?”
“허.”
이쯤 되니 이해가 되지 않는 걸 넘어 신기하기까지 했다. 원체 탐구욕이 강했던 제레미는, 순간 예상이 엇나간 것에 대한 짜증을 잊을 정도로 강한 호기심을 느꼈다.
차라리 마법의 안전성을 못 믿겠다고 한다면 납득이라도 할 텐데. 물론, 그 납득 뒤로 이어지는 것은 수긍이 아닌 설득이었겠지만.
“마탑주의 수명을 믿고 그러는 건가? 하지만 자네와 달리 그는 확실히 죽을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해. 나중에 그가 삶에 질려 죽음을 선택하면 어쩌려고?”
여자가 이조차 고려하지 않았을 정도로 멍청할 것 같지는 않았다. 제레미는 답답함 반 호기심 반으로 여자의 답을 기다렸고, 오래 지나지 않아 시큰둥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여기까지 와서 네 질문에 하나하나 답해주고 있어야 해?”
그게 비록 제레미의 의문을 해소해주는 대답은 아니었어도 말이다.
어느 새부터인가 여자는 문에 완전히 기대는 듯한 모양새로 삐딱하게 서 있었다. 제레미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귀찮음이 가득 찼고, 곧이어 피곤하다는 듯 한숨까지 내쉬었다.
“잡담은 그만하고 원래 하던 대화나 마무리 짓자. 내가 돌아가겠다고 해야 너도 차원을 이동할 수 있고, 나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답했어. 그럼 이제 끝이지?”
여자가 중얼거리듯 뒷말을 이었다.
“마샤와 내가 나가는 일만 남은 건가?”
그 말을 듣자마자, 제레미는 그 어느 때 보다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천장에 닿을 듯한 웃음소리에 여자가 순간 인상을 찌푸리는 것 같았지만, 제레미는 멈추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 표정에 유쾌해 하며 더욱 미친 듯이 웃었다.
그가 간신히 멈출 수 있었던 건 눈가에 눈물이 맺힐 정도로 웃고 난 뒤였다.
“순진한 소리를 하는군, 자네.”
웃음의 여파가 가시지 않아 목소리가 마구 들썩거렸다. 눈물을 닦아내는 시야 사이로, 이쪽을 가만히 주시하는 여자가 보이는 듯했다.
“내가 이날을 얼마나 기다려 왔는데. 제 발로 들어온 열쇠를 놓아줄 것 같나?”
설마 내가 한 말을 정말로 믿은 건 아니겠지.
제레미가 다시 웃음을 터트렸을 때, 여자가 허탈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냥 보내주면 더 이상할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지.”
“그럼! 그리 싱겁게 끝낼 생각이었다면 이 지경까지 오지도 않았을걸.”
제레미는 곧 느긋한 손짓으로 허공에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지금 시전하는 마법이 여자를 위험에 빠트리리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는데도, 에이는 도망가지도 않은 채 계속해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자리를 벗어나도 의미가 없다는 걸 눈치챈 걸까? 여자가 보이는 얌전한 태도에, 제레미의 기분은 자연스레 너그러워졌다.
“자네는 왜 자네의 몸이 자꾸만 똑같은 상태로 돌아가는지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나?”
그 말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제레미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어차피 여자가 그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음을 알기에.
“그 몸은 자네가 돌아갈 날만을 준비하고 있는 거야.”
“…….”
“사라졌던 구성품이 본디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갔을 때, 한치의 위화감도 없도록.”
그가 밟고 서 있는 마법진에 비하면 그다지 복잡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마법은 손쉽게도 완성되었다. 하지만 제레미는 그 마법진에 곧바로 마력을 불어넣지 않고 설명을 계속했다.
이러나저러나 결과적으로는 그를 ‘도와줄’ 사람인데, 이 정도는 알려줄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차원과 시간은 건드릴 수 없는 금기라고 했었지. 그건 전부 그 두 가지가 너무 섬세한 영역이기 때문에 나온 말이야. 차원과 시간에 있어서는 아주 사소한 어긋남조차 용납되지 않고, 혹 어긋남이 생긴다면 그것을 제자리로 되돌려놓으려 하지.”
그럼, 여기서 문제를 하나 낼까.
제레미의 목소리는 마치 장난을 치는 사람의 것처럼 가벼웠다.
“아주 작은, 미세한 것이라도 자네를 원래의 차원으로 돌려보낼 수 있는 계기가 생긴다면, 차원은 어떻게 반응할까?”
“…….”
“난 지금부터 약간의 억지를 부릴 거야.”
제레미가 손목을 비틀자, 그의 손 위를 떠돌던 마법진이 금세 바닥 아래로 스며들었다. 그와 동시에 바닥을 가득 채웠던 수식과 도형들이 즉각적으로 배열을 바꾸기 시작하고, 가장 바깥에 있는 원이 느릿하게 회전했다.
마치 마법진이 스스로 살아 움직이는 듯한 풍경이었다. 안 그래도 복잡했던 수식들이 움직이기까지 하니 마법진은 더욱 끔찍하게 변했고, 그것을 고스란히 확인한 에이가 눈살을 찌푸렸다.
반면에 제레미는 변하는 마법진 위에서 미동도 없었다. 오히려 마법진의 동태를 계속해서 확인하고, 흐뭇한 미소를 얼굴에 내걸기까지 했다.
“원래라면 자네의 정석적인 동의를 얻었어야 하는 마법이었어. 내가 차원을 이동하겠냐고 말하면, 자네는 ‘그렇다’라고 대답했어야 했지. 다른 곳도 아닌 이 마법진 한가운데에서.”
신이 난 제레미가 바닥을 향해 발을 굴렀다. 바닥을 차는 소리와 함께, 마법진이 파동을 타듯 일렁거렸다.
“하지만 방금 바뀌었어. 이제 자네가 이 마법진 위에 올라오기만 하면 자네가 동의를 한 것으로 간주 될 거야.”
“…진짜 억지긴 하네.”
한참 동안 말이 없던 에이가 황당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제레미는 그 반응에 더욱 신이 나서, 흥분한 목소리로 빠르게 말을 이었다.
“억지면 뭐 어때? 물론 본래라면 마법이 망가지고도 남았겠지만, 지금 내 조력자는 다른 무엇도 아닌 차원인걸.”
“…….”
“그래도 아쉽기는 해. 자네가 마음을 고쳐먹는 게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을 텐데. 이렇게 마력을 낭비해서야, 원.”
마지막 말은 한탄조였으나 진지하지는 않았다. 자신이 말을 잇는 사이 뒤늦게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하는 에이를 발견하고, 제레미가 찢어질 듯한 웃음을 만면에 띄었다.
“도망가지 말고 이쪽으로 오게.”
그 말이 끝나는 즉시, 에이의 곁에서 빠르게 가시덤불이 자라났다.
티를 내지 않았을 뿐 에이가 그를 찾아왔을 때부터 준비했던 마법이었다. 제레미는 가시덤불로 그 발목을 옭아맨 뒤, 그녀를 자신의 앞에 끌고 올 생각으로 마법을 시전했다.
순식간에 그녀의 키를 넘을 정도로 가시덤불이 높게 자라났다. 불길한 마력이 그 안에 깃드는 것과 동시에, 줄기들이 그녀를 향해 빠르게 쇄도했다.
앞으로 이어질 일을 제레미는 기분 좋게,
…바라보려고 했으나.
“…….”
곧이어 제레미의 시야에 들어온 건, 두 눈을 의심하게 만드는 풍경이었다.
온몸을 잡아먹을 기세로 움직이던 가시덤불이 그녀에게 닿기 직전의 상태로 멈춰져 있었다. 계속해서 그 곁을 맴도는 움직임은 여전했지만, 뻣뻣하게 꺾어지는 한이 있어도 여자를 옭아매지는 못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혀 튕겨나는 것처럼.
머릿속에서 뒤늦게 마탑주의 존재가 떠올랐다. 저 여자가 마법을 막도록 도운 건가? 아니면 보호 마법을 걸어 공격을 차단한 건가? 그것도 아니라면 마법 자체를 중간에 끊은 건가.
아니, 아니다. 그런 느낌들은 아니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마치 마법이…….
“너.”
제레미의 시선이 여자를 꿰뚫듯 직시했다.
“몸에 무슨 짓을 한 거지?”
마법은 도중에 막히지도 도중에 사라지지도 않았다. 가시덤불을 자라나게 한 마법진은 여전히 그 자리에 존재했고, 마법의 발현 또한 정상적으로 이루어졌다.
단지 여자에게 그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했을 뿐.
지금, 이 여자에게는 마법이 통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