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2. (102/181)

102.

대화가 어느 정도 일단락된 뒤, 마샤는 눈에 띄게 시무룩해졌다.

아무래도 내가 깊게 고민하는 것 같지 않아서 되려 심란해진 듯싶었다. 눈도 잘 마주치려고 하지 않고, 목소리에도 힘이 없고. 하긴, 이 상황에서 마냥 긍정적으로 반응했다면 그게 더 이상했겠지.

자기 기분을 내게 들키지 않으려고 나름 신경 쓰는 것 같았지만, 원래도 연기에 능숙한 아이가 아니다 보니 자연스레 티가 났다. 

지금 마샤가 무슨 오해를 하고 있을지는 대충이나마 짐작이 되었다. 분명 이미 결정을 내린 게 틀림없다는 둥, 사실 고민을 할 문제도 아니었던 거냐는 둥 하고 있을 터다. 그리고 자기가 뭐라 덧붙여도 소용없을 거라며 땅도 파고 있을 테고.

하지만 나는 그 사실을 모조리 알고 있음에도, 굳이 마샤의 기분을 달래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야 어쩔 수 없는 문제잖아. 여긴 적진의 한가운데나 다름없고, 나는 마법사란 족속이 작정하면 얼마나 음험해질 수 있는지 알고 있다. 일전에 단테가 내게서 도망 다닐 때 깨달은 것 중에 하나지.

대놓고 말해서 그자가 우리의 모든 대화를 엿듣고 있다면 손 쓸 도리가 없었다. 

내 태연함이 진짜가 아니라 일부러 가장한 것에 가깝다는 걸 알아차린다면 좋을 텐데. 내가 너무 천연덕스럽게 행동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마샤가 내 생각보다 땅을 더 깊게 파고 있는 건지 그럴 일은 요원해 보였다.

그냥, 이 모든 일이 끝나게 될 이틀 뒤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때가 되면 마샤를 단단히 붙잡고 말해줘야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건 단 한 가지밖에 없었다고.

그리고 그 선택에 후회하지 않는다고도 말이다.

* * *

J2.

평생 살아온 세월을 걸고 이야기할 수 있었다. 이렇게 설레고 또 다음 날이 기다려지는 이틀은 처음이었다고.

원래 기다림을 굉장히 싫어하는 축에 속했었으나, 이번만큼은 예외였다. 그 여자와의 대화 이후 제레미는 자신의 계획이 성공하리라 반쯤 확신했고, 그렇기에 기다림 또한 마냥 행복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어쩜 이렇게 예상보다도 더 수월한 방향으로, 잡음 하나 없이 흘러갈 수가 있는 건지.

기실 제레미가 이렇게까지 앞으로의 일을 맹신하게 된 이유는 전부 그 여자의 태도에 있었다.

‘…생각할 시간을 줘.’

자신의 옛친구처럼, 돌아간다는 말에 동요하던 가엾은 차원 이동자. 원래 차원으로 되돌려주겠다고 말했을 때부터 혼란스러워하던 그녀는 제레미의 연구실을 보고 새하얗게 질렸었다.

어찌 보면 그것은 잔인한 풍경에 대한 두려움으로 비치기도 했으나, 마수 하나하나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차원 이동 마법에 도움을 줬는지 설명할 때마다 여자의 얼굴은 진중해지곤 했다. 한 마디로, 그의 말을 무시하지 않고 오히려 집중하며 들었다.

온갖 경우의 수를 고려해 실험한 것을 보여주는 행위가 반복되고, 의심이 서려 있던 갈색 눈동자가 점점 경악 내지 납득의 빛을 띠는 것 같다가.

끝에 가서는 결국, 맹렬히 갈등하는 듯한 얼굴로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었다.

어차피 마법진을 점검할 시간이 필요했던 제레미는 그녀에게 하루의 시간을 주었고, 마지막까지 자신의 관대함을 보여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난 자네가 최선의 선택을 하리라 믿네. 마탑주와도 이야기해보고, 그 친구와도 이야기하면서 고민해 봐.’

당연히 마탑주가 마법으로 연락할 방도를 준비해놓았으리라 생각해서 한 말이었고, 막 방을 빠져나가려던 에이는 그의 말에 잠시 멈칫했다.

‘그러다가 내가 당신이 바라는 선택을 하지 않게 되면 어떡할 건데?’

‘그러면 뭐.’

미약한 경계심이 느껴지는 말에 제레미는 부러 시큰둥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냥 자네와 자네의 친구를 풀어주는 거지.’

‘……이렇게 거창하게 일을 벌여놓고 순순히 놓아준다고?’

‘그래.’

당연하게도 여자는 전혀 믿으려 하질 않았다. 다시 의심이 서리기 시작하는 얼굴을 확인하고, 제레미가 있는 힘껏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아까 설명했지 않나. 이 마법은 가장 먼저 차원 이동자 본인의 동의를 필요로 하고, 자네가 거부하는 이상 이 마법은 시작조차 하지 못해.’

제레미는 장난스럽게 검지와 엄지를 붙여 동그라미를 만든 뒤, 자신의 눈가에 갖다 대었다. 멀찍이 서 있는 여자가 마치 자신의 손가락 안에 갇힌 듯한 모습이 되었다.

‘그렇다고 억지로 동의하게 만들기에는 마탑주의 보복이 두려워지는군.’

‘…….’

‘난 지금도 자네에게 걸린 마법이 어떤 것들인지 파악조차 못 하고 있으니 말이야.’

그렇게 말하고 빙그레 웃는 제레미를, 여자는 가만히 바라보았더랬다.

그 이후에 방으로 돌아간 여자가 한 행동들은 특별하다고 말할 게 없었다. 친구에게도 거의 통보식으로 이야기한 뒤, 생각하라고 준 하루도 거의 허공을 바라보며 멍하니 있기만 했다.

그나마 기묘했던 점을 뽑아본다면 마탑주에게 단 한 번도 연락을 취하지 않았다는 것뿐. 하지만 앞으로의 인생을 좌우할 선택이니만큼, 타인의 참견 없이 혼자 결정하길 원해서였다고 생각한다면 이해되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레미에게 가장 기꺼웠던 건 고민을 홀로 간직하는 듯한 그 태도였다. 마탑주나 친구를 소중히 여겼다면, 그렇게 외딴 섬처럼 혼자서 생각을 이어 나가지는 않았겠지. 

정말이지, 남겨질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게 단번에 보이지 않는가.

그 모습을 낱낱이 관찰한 결과로, 제레미는 그녀가 이 차원에 미련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만약 미련이 티끌만큼이나 존재하더라도, 그것이 고향을 향한 그리움을 압도할 정도는 아니라고.

그리하여 제레미는 마침내 기쁜 마음으로 이곳에 섰다.

이 건물에서 가장 넓은 공간이자, 그가 몇십 년을 걸쳐 완성한 마법진 위에.

그는 마지막이 될 마법진 점검을 진행하면서 작게 콧노래를 불렀다. 아마 조금 있으면 그 차원 이동자가 이 자리에 도착할 테고, 하루 동안 열심히 생각한 답을 내놓을 거다. 그리고 예상하건대 그 답은 거의 정해진 거나 다름없었다.

그렇다면 정말 최적의 각본으로 흘러가는 거지. 물론, 만에 하나 그녀가 거절할 상황도 생각하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차피 달라지는 건 없을 테니.”

단지 조금 까다로워질 뿐, 결과는 정해진 거나 다름없다. 벌써 성공에 취한 제레미가 킬킬거리며 웃다가, 곧 도착할 이를 떠올리고 미소를 갈무리했다. 이미 그녀의 선택을 알고 있다는 티를 내봤자 좋을 게 없을 것 같았다.

다 너한테 달려있다며 일부러 저자세로 들어갔던 시간들이 있는데, 마지막까지 완벽해야지. 제레미가 헛기침을 하며 허리를 편 순간, 기다렸던 것처럼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아. 왔는가, 자네?”

제레미는 너무 반색하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그런 그의 얼굴을 여자가 잠시간 바라보았다. 그녀는 노크도 없이 문을 열어젖힌 주제에 함부로 방에 들어오지 않고 문가에 서 있는 채였다.

하긴, 아무 생각도 없이 들어오는 멍청함까지 기대할 수는 없겠지.

원 모양의 바닥, 그 안을 빈틈 없이 채운 마법진을 눈에 담은 제레미가 말없이 웃음을 그렸다.

“선을 밟는 게 꺼려지나? 자네가 그 위에서 구른다고 해도 마법진이 지워질 일은 없으니 걱정하지 마.”

“왜, 바닥에 새겨놓기라도 했어?”

그렇게 묻는 것 치고는 마법진을 자세히 들여다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한 발 더 물러나며, 숫제 노려보듯이 제레미와 눈을 맞추었다.

하지만 제레미는 그 시선을 단지 중요한 선택을 앞둔 이의 긴장감이라고 여기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새겨놓기만 했을까. 건물이 무너지더라도 이 마법진만은 온전하도록 만들었지.”

“…….”

“그러니 뒤늦게 방해가 들어온다고 하더라도 차원 이동은 차질 없이 진행될 거야.”

‘방해’라는 단어는 유독 강하게 발음되었고, 그건 사실 무의식의 발현에 가까웠다. 이 상황에서도 마탑주가 모든 것을 망치러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무의식. 

그 후에도 에이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여기까지 와서도 고민할 거리가 남아있나?”

한결 마음이 여유로워진 제레미가 느릿하게 물었고, 잠시 눈을 깜빡이던 여자가 곧 단조로운 투로 대답했다.

“고민은 아니고, 잠시 딴생각을 좀 했어.”

“무슨 생각?”

음, 하고 소리를 내며 뜸을 들이는 것 같더니.

“마법사들은 머리 어딘가가 잘못되면 그게 마법진에서 티가 난다는 생각.”

“…….”

“이것만 해도 봐. 미치지 않고서야 이런 걸 그릴 수 있을 리가 없지.”

제레미가 평생의 역작이라고 자찬했던, 세심하고도 잘 짜인 게 틀림없는 마법진을 향해 여자가 손짓했다.

“이 안에서 수천 마리의 벌레가 기어 다닌다고 해도 이보다는 덜 징그러울 것 같아.”

“…칭찬의 의미로 하는 말인가?”

순식간에 제레미의 목소리에서 감정이 사라졌다.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해 얼굴이 굳어지고, 미처 숨겨지지 않은 살기가 점점 흘러나왔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고스란히 확인했을 이는 여전히 태연자약했다.

“칭찬? 아니지, 물론.”

“…….”

“이렇게 보기만 해도 정신이 나갈듯한 마법진을 또 본 적이 있었어. 그때 생각한 건데, 나는 아마 그 애가 또 그런 짓을 하지 않는지 평생 감시하고 살아야 할 것 같거든.”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알겠어? 여자가 눈꼬리를 접으면서 웃었다.

“그러니 나는 돌아가지 않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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