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 (100/181)

100.

“아주 오래전에 있었던 일인데.”

남자는 그 ‘아주 오래전’이라는 단어에 자세한 설명을 덧붙이고 싶지는 않은 건지, 단지 이렇게만 이야기했다. 자신이 아직 마탑에 속해있을 때의 일이라고.

“다른 나라로 여행을 갔다가 사귄 친구가 있었다네. 그럭저럭 친하게 지내다가 어느 날 소식이 끊겼어. 들려오는 말로는 죽었다던가, 뭐라던가.”

그가 턱을 괴더니 사뭇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몇 년 뒤에 멀쩡한 모습으로 다시 나타났지.”

그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나는 남자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알아차렸다.

결국 이 ‘재미있는 이야기’라는 게 본론을 위한 초석일 뿐이라는 것도.

“그가 이렇게 말하더군. ‘나는 되살아났다’, 라고 말이야.”

중얼거리는 말은, 내게는 한없이 익숙할 수밖에 없는 내용이었다.

“자신이 차원을 넘어온 순간부터 그런 몸을 가지게 되었다고.”

* * *

J1.

“…이럴 줄 알았으면 그에게 미리 추적 마법을 걸어둘 걸 그랬지. 하지만 난 그러지 않았고, 그 이후로 그를 본 적이 없어.”

제레미는 과거를 되짚던 것을 잠깐 그만두고 건너편에 앉은 여자를 일별했다.

자신은 오래간만에 예전 일을 줄줄이 내뱉을 수 있어서 좋았건만, 상대는 그다지 흥미를 보이는 기색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뚜렷이 지루해하는 것도 아니었고, 그저 아무 감흥 없이 그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는 것 같았다.

자신과 같은 차원 이동자가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는 반응을 보여줄 법도 한데 말이다. 

이것 참, 다루기 까다롭기도 하지. 그는 빙그레 미소를 띠며 여자에게 물었다.

“내 이야기를 똑바로 듣고 있는 건 맞나?”

“왜?”

기껏 들어줬더니 왜 그런 걸 묻느냐는 듯, 여자가 미미하게 질린다는 표정을 했다. 빈말로도 긍정적이라고 할 수 없는 반응과 상반되게 제레미의 기분은 한결 나아져, 그의 목소리가 유쾌함을 담고 올라갔다.

“별 그렇다 할 맞장구도 없으니 이야기할 맛이 안 나잖나.”

“친구의 몸에 인체 실험을 하자고 제안했다가 다시 연락이 끊겼다는 이야기에 맞장구를 어떻게 치라고…….”

그 긴 이야기를 저렇게 한 줄로 요약하는 걸 보니 확실히 이야기를 다 듣긴 한 모양이었다. 여자는 이제 단순히 질리는 걸 넘어 피곤한 사람처럼 한숨을 쉬었고, 제레미는 그 모습에 친절히 다시 한번 차를 권했다. 정말 먹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한 행동이었다.

여자는 고개를 저어 그의 호의를 거절한 뒤,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당신이 왜 그 이야기를 하는 건지 알겠어.”

지금껏 자신이 경험했던 일을 목적 없이 푸는 듯했지만, 사실 제레미는 그 안에 모든 단서를 다 담았다. 옛친구는 상처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몸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도, 죽어도 다시 살아나곤 했다는 것도.

그리고 그 친구는 단 한 순간도 늙지 않았다는 이야기까지.

폭탄에 휘말려 죽은 뒤 다시 살아나 그의 앞에 앉아 있는 여자는 담담히 내뱉었다.

“일전에 똑같은 사람을 본 적 있기 때문에, 내가 차원 이동자라는 것도 알아봤다는 거 아니야.”

“정확하군.”

“하지만 그걸 알아보았다는 게 당신에게 무슨 의미가 있지?”

탁자 어딘가에 고정되어 있던 옅은 갈색 눈동자가 그를 향했다.

“이제 슬슬 나를 왜 여기까지 부른 건지 이야기해줬으면 하는데.”

그 말을 들은 제레미는 입꼬리를 당겨 웃음을 덧그렸다. 조금씩 간을 보며 그가 알아서 실토하기를 기다리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 대화에 진짜 목적이 있다는 걸 피하지도 않는 여자가 신기해서.

어찌 보면 자신은 여자를 한 번 죽인 거나 다름없는데, 여자는 그가 가지고 있을 속셈을 두려워하지 않는 듯했다.

무서움이라는 것 자체를 못 느끼는 인간인 것일까? 아니면 어떤 위협에 처하더라도 마탑주가 자신을 지켜주리라 굳게 믿고 있기에 저러는 것일까.

제레미는 여자가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처럼 그녀에게서 마탑주의 흔적을 찾아보려고 했으나, 그의 시도는 무언가에 가로막히기라도 한 듯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단지 여자에게서 마탑주의 마력이 흐릿하게나마 느껴진다는 것만 어렴풋이 알아차릴 수 있을 뿐.

무슨 보호 마법을 건지는 몰라도 저 나름 애를 쓴 것이 틀림없었다. 습관처럼 자신이 다다르지 못한 경지를 향해 아쉬움이 차올랐으나, 제레미는 그 감정을 곧바로 흐트러트렸다.

그 대단하다는 고대 마법조차 지금은 무용지물일 텐데 열등감을 가질 필요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나는 이걸 물어보고 싶었어.”

제레미는 여자의 반응을 마음껏 관전하기 위해 자세를 편하게 잡았다. 다리를 꼬고 몸을 기대며, 전형적인 구경꾼의 자세로.

“자네는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가?”

그리고 역시나.

마을에서의 일을 꺼낸 뒤로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던 여자가 눈을 크게 떴다. 방금 전처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극적인 행동은 보여주지 않았으나, 표정에서 감정의 변화가 드러났다는 것만으로도 제레미는 못내 만족스러웠다.

일단 흔들림을 보여줬다는 것 자체가 그의 일이 수월하게 풀릴 거라는 사실을 암시했기 때문에.

지금은 자신이 제안하는 입장인 만큼 부드럽게 말하던 것을 그만둘까 생각도 해봤으나, 제레미는 자신의 태도를 유지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러나저러나 눈앞의 여자는 자신의 계획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다. 여자를 잡아두지 못하면 계획은 처음부터 어긋나게 된다. 

제레미는 자칫하면 거만해 보일 수도 있는 자세를 고쳐앉았다.

“빈말로도 그 친구와 깊은 우정을 나누었다고 말할 순 없지만, 그래도 항상 들었던 말이 있었지. 자신이 차원 이동자라는 걸 밝힌 이후로 거의 만날 때마다 하던 이야기였어.”

이제는 생김새조차 흐릿하던 친구를 마음껏 언급하며, 제레미가 과장되게 슬픈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있던 세계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이야.”

“…….”

“죽어도 죽지 않는 몸도, 시간이 지나도 늙지 않는 몸도 다 지긋지긋하다며.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 자신이 두고 온 가족이 그립다고 말했네.”

여자는 고개를 아래로 떨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와 헤어지던 순간까지도 그리 말했는데, 그 마음이 오죽했을까. 나는 그 친구 덕에 원치 않은 불멸이란 무엇일까 생각하게 되었어. 그리고 차원을 건너갈 방법은 정말 없는지도.”

그가 지금 하고 있는 말에 거짓은 없었다. 그 친구로 인해 차원 이동이라는 현상에 흥미가 생긴 것은 사실이었으므로.

다만 지극한 슬픔을 노래하는 듯한 어조와 달리, 실상은 탐욕과 흥미만이 그의 안에 자리 잡고 있었다.

“생각과 고민을 거듭하다가 불완전하게나마 마법 하나를 완성할 수 있었지.”

제레미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 한쪽 면을 차지한 벽을 향해 걸어갔다.

“불완전하다고 말했지만 성공 확률이 희박한 건 아니야. 오히려 아주 높은 축에 속해. 마음 같아서는 마탑주에게 완성도를 확인받고 싶을 지경인걸.”

자신이 이룬 성과에 대해서 언급하자, 굳이 그러려고 하지 않아도 킬킬거리는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어느새 고개를 든 여자는 흔들리는 눈으로 그를 응시하다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시간과 차원은 건드려서는 안 될 금기에 속한다고 들었는데.”

“아, 마탑주가 그런 것도 말해주었나? 통상적으로 그렇게 취급받긴 하지. 그 경지에 이르러서도 겁쟁이라니 통탄할 일이야.”

마탑주를 향한 빈정거림이 거슬리기라도 한 건지, 여자가 얕게 눈을 찌푸렸다. 하지만 제레미는 굳이 자신의 말을 무를 필요성을 못 느꼈으므로, 그저 고조된 어조로 말을 이어나갔다.

“마법에 사용된 수식과 그 양은 간단하다고 말할 수 없지만, 원리는 단순해. 조금 더 고차원의 추적 마법을 필요로 할 뿐.”

“추적 마법?”

“그래.”

제레미는 정중하지만 망설임 없는 손짓으로 여자를 가리켰다.

“본래 있어야 할 차원으로 돌아가는 이를 놓치면 안 되니까.”

“…….”

“듣기 좋게 고친다면 이렇게도 말할 수 있겠군. 차원을 이동하는 것이 하나의 문을 연다고 생각한다면, 자네는 ‘열쇠’ 역할을 하게 되는 거지.”

멋지지 않나? 희열에 젖어 제레미는 진심 어린 웃음을 터트렸다. 여전히 의자에 앉아 있는 여자는 제레미의 기쁨에 공감하지 못하는 기색이었어도.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제레미를 마치 광인 보듯이 쳐다보고 있었으나, 눈에 뵈는 게 없는 제레미는 그것까지 알아차리지는 못했다.

잠시 말을 고르는 듯 주저하던 여자가 이내 질문을 던졌다.

“그 마법이 있으면…. 차원 이동자가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고?”

“그래.”

제레미는 여자에게 다가가려다가, 의자가 뒤로 밀리는 소리를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 어느새 그에게서 멀어진 여자가 의자에 앉은 채 경계심 섞인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기분 나빠할 것도 없는 반응이었다. 여자를 놀리듯 뒷걸음질 친 제레미가 다시 웃었다.

“일단 그걸 설명해주기에 앞서.”

벽과 가까이에 선 그는 보란 듯이 텅 빈 벽에 손을 짚고, 빠르게 마력을 불어넣었다.

“내가 준비한 것을 잠시 보여주도록 할까?”

여자가 인상을 찌푸리는 것과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 벽에서 터질 듯한 빛이 새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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