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시선이 닿는 곳마다 새하얀 색이었던 건 마샤의 방뿐만이 아니었다. 방 밖으로 쭉 뻗어진 복도도 마냥 하얗기만 했고, 아무 장식이 달려 있지 않은 벽부터 뜸하게 보이는 방문들까지 전부 하얀색이었다.
이 공간에서 다른 색이라고 할만한 것은 은은한 노란빛을 띠는 조명밖에 없었지만, 나는 조명색을 바꿀 수 있었다면 저것마저도 하얀색이었으리라 확신했다. 정상적인 사람이 이렇게 빈틈없이 같은 색으로 도배된 곳에서 계속 지낸다면, 정신 어딘가가 이상해질 것만 같은데.
하지만 높은 확률로 이 괴이쩍은 취향의 당사자일 남자는 아무 거리낌 없이 복도를 가로질렀다.
“자, 들어가지.”
그다지 길지 않았던 복도의 끝, 다른 방문들보다 유독 큰 크기의 문을 열어젖히며 남자가 말했다. 들어가라는 말에 순순히 그 안으로 발을 밀어 넣자, 곧 방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애초에 ‘풍경’이라고 할 만큼 눈에 담을 것도 없었지만.
“…음.”
광활한 방 한가운데에 놓여 있는 원형의 탁자와 의자만은 그 안에서 제법 눈에 띄었기 때문에, 저절로 시선이 오래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분명 일상 속에서 흔히 볼 법한 색깔을 가지고 있는 것뿐인데 여기에서는 어색하게만 보인다.
저런 것까지 하나하나 의심하는 내가 이상한 건가?
“급하게 구해오느라 마땅한 걸 찾지 못했지.”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는 듯, 잔뜩 긁히는 목소리가 웃음기를 담은 채 새어 나왔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 아무리 그래도 귀한 손님인데 제대로 된 대접조차 안 하는 건 너무하지 않겠나.”
반가면을 쓰고 얼굴도 제대로 드러내지 않은 꼴이면서 무슨 대접을 운운하는 건지.
“어떤 대접인지는 몰라도 사양하고 싶은데.”
애초에 그 대접이라는 단어도 꺼림칙하게만 들린다. 그러나 남자는, 경계심을 담은 내 대답에도 아랑곳하지 않으며 미소 지을 뿐이었다.
“들어보면 생각이 달라질 거야.”
…속셈을 알 수 없는 말과 함께, 나는 남자와 자리에 마주 앉았다.
탁자 위에는 차와 간단한 요깃거리, 고급스러운 찻잔과 식기가 그럴듯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그건 정말 고상한 사람들이 담소를 즐기기 위해 마련할 법한 모양새를 갖추고 있었고, 남자가 손수 따라준 차에서는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지만.
나는 붉은 찻물을 들여다볼지언정, 찻잔을 입가에 가져다 대는 시늉조차 하지 않았다. 남자 또한 내 태도를 지적하지 않고 여유롭게 차를 들이켰다.
“본론에 들어가기 앞서서.”
남자가 목을 축이는 짧은 시간이 지나간 뒤. 달칵, 찻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울렸다.
“일단 오랜만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군.”
“…오랜만이라고?”
“그래.”
순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나는 남자를 의심스럽게 쳐다보다가, 그 눈초리를 숨길 생각도 하지 않고 툭 내뱉었다.
“나는 당신을 만난 적이 없어.”
“글쎄.”
남자가 정말 당연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듯 굴었기 때문에, 자꾸만 인상이 찌푸려지려고 했다. 남자의 수상한 말에 휘말리면 안 된다는 건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는데도.
그런 나를 앞에 둔 채, 남자는 다시 한번 목을 축였다.
“한번 잘 생각해봐. 자네는 이미 나를 알고 있어.”
생각에 잠겨 과거를 더듬는 듯, 잔뜩 흐려진 목소리가 들렸다. 남자의 시선이 나를 떠나 벽 한 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창문으로 향했다. 바깥이 전혀 보이지 않는 그 광경을 눈에 담으며, 남자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시간이 꽤 지난 탓인지, 단번에 기억해내지는 못한 것 같지만.”
“그게 무슨 소리지?”
붉은 눈동자가 예고 없이 움직이더니 곧 나를 직시했다.
“자네가 살던 마을에서 마주친 적이 있지 않나. 찰나였지만, 서로 어깨를 스치고 지나가기도 했지.”
“…….”
노골적으로 내 반응을 살피며, 남자는 매끄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 마을이 불길에 휩싸이기 전날이었어.”
이렇게 말하면 좀 기억할까? 그리 속살거리는 목소리가 느리게, 하지만 선명히 내 귓가에 들러붙었다.
남자가 말하는 마을이 어디인지 생각해볼 필요도 없었다. 불길에 휩싸였다는 게, 어디 함부로 가져다 붙일 수 있던 말이었던가.
시야 앞에 넘실거리던 연기가 다시 눈앞을 스치는 듯했다.
그 마을에서의 일은 뚜렷이 기억나는 것이 없다. 나는 늘 그래왔던 것처럼 괴롭게 남을 만한 기억은 의식적으로 잊기 위해 노력했고, 이제 그 마을에서의 일상은 안개에 휩싸인 것처럼 흐릿하게만 남아 있었다.
하지만 나는 폭탄이 터지기 전날이라는 말에, 그리고 남자와 내가 마주친 적이 있다는 말에 남아 있는 줄도 몰랐던 기억의 잔재를 끄집어낼 수 있었다.
부딪친 어깨와 스치던 탄내, 집에 돌아오니 깨져있던 마석.
불길, 피, 비명, 소음.
그리고 다시 탄내.
전조도 없이 시야가 핑 돌았다.
혼몽해지던 머릿속이 급작스럽게 맑아진 건, 내 의자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넘어진 후였다.
“아, 자네도 보통의 사람처럼 반응다운 반응을 할 줄 아는 이였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나를 보며 남자는 유쾌하다는 듯 웃었다.
남자의 의도대로 휘둘리고 싶지 않았지만, 통제를 벗어난 감정들이 내 안에서 소용돌이치며 이성을 마비시켰다. 그 자리에 우뚝 서 있는 내 꼴이 얼마나 멍청해 보일지 알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남자의 말대로 나는 저자를 알고 있다.
사람 대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나와 마을 사람들을 몰살시킨 범인으로.
“…네가 마을에 폭탄을 심었어?”
변질자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그 사건과 연관되어 있을 거라는 생각은 했지만. 자신이 직접 마을에 들렀다는 이야기를 들을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남자가 느긋하게 나와 눈을 맞추었다.
“그럼.”
“…….”
“긴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거나 다름없는 날이었는데, 다른 사람한테 맡기면 쓰나.”
남자의 어조에는 한 점의 유감도 없이 즐거움만 담겨 있어서, 자꾸만 그때 있었던 일이 머릿속에서 수없이 되풀이되려고 했다.
숨이 끊어지던 순간을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았는데.
할 수만 있다면 금방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어졌다. 아니, 그것보다는 남자에게 화를 내고 싶은 기분인 것 같기도 했다. 어쩌면 손에 잡히는 대로 모조리 집어 던져 깨트리고 싶은 기분인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바뀌는 충동 속, 실현된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빠르게 흘러가던 호흡이 점점 원상태로 돌아왔기 때문에.
“…….”
습관적으로 떨림을 잠재운 것에 불과했지만, 그것만으로도 평정을 되찾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다. 굳이 크게 심호흡할 필요도 없었다. 나는 마구잡이로 날뛰던 감정들이 점차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것을 느꼈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남자를 바라보았다.
자각하지 못한 사이 주먹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이 풀렸다.
“동요는 이미 끝났나?”
남자는 대놓고 흥이 식었다는 표정을 지으며 몸을 뒤로 기울였다.
“내 생각보다 훨씬 재미없군. 갈무리하는 속도가 너무 빨라.”
“나는 네 재미를 위해서 온 게 아니야.”
어느새 목소리까지 평소대로 돌아와 있었다. 물론, 남자는 그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지만.
“네가 내 친구의 목숨을 운운하면서 대화를 요구했기에 이 자리에 온 거지.”
“이왕 와준 거 뜻대로 굴어주면 얼마나 좋아?”
남자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분명 목소리나 외양으로만 따지면 나보다 한참 나이를 먹은 사람처럼 보이는데, 행동을 보면 재미만 쫓으며 사는 어린아이 같았다.
실제로 내 태도에 대해 불평을 내뱉는 말은 어린애가 떼를 쓰기라도 하는 것처럼 치졸하게 들려오기도 했다.
“자네가 감정적으로 군다면 우리의 대화도 수월하게 이루어질 텐데 말이야.”
“너한테나 수월하겠지.”
굳이 그 장난질에 맞춰줄 필요성을 못 느껴서, 나는 아까보다 더 날카롭게 대답했다. 기세를 죽이지 않고 맞서는 듯한 말에 곧바로 남자의 행동이 멈췄다. 잠시 그 상태로 굳어 있던 남자는 예의 그 관찰하는 듯한 눈동자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 안에서 무시할 수 없는 살기를 느끼고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릴 뻔했으나.
일부러 그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차분하게 남자를 마주했다. 이제 탁자 위에는 다 식은 차와 탐색하는 시선만이 올려져 있을 뿐.
영겁처럼 이어질 것 같던 침묵을 깨트린 건 내가 아니었다.
방금까지 내비치었던 살기를 온데간데없이 감추며, 갑자기 확 고분고분해진 표정으로 남자는 웃었다.
“맞아. 내게만 그렇겠지.”
전조도 없이 급변한 태도에 눈가를 찌푸리는 것도 잠시.
“자네는 그게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으니, 그럼 이제 서로의 합의점을 찾아볼까?”
지금껏 보아왔던 어느 때보다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남자가 나긋하게 말했다.
넘어진 의자를 손짓 하나로 바로 세워주고, 탁자에 놓인 음식을 내 쪽으로 밀어주는 친절을 보이며.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던 분위기는 남자의 기색이 달라진 것만으로도 느슨하게 바뀌었다.
그 일련의 상황을 통해, 나는 그 자리에서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남자가 어이없을 만큼 급작스레 저자세로 나오고 있다는 걸.
못내 자기가 졌다는 듯 구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나와 자신의 격이 달랐다는 듯이 행동하고 있다. 나는 대우 받아야 마땅한 사람이고, 자신은 그 대우를 미리 준비해 온 사람인 것처럼.
아무 대답 없이 그 모습을 가만히 눈에 담고 있을 때였다.
다시 내가 자리에 앉기를 권한 남자는 다 식은 차를 탁자 구석으로 밀어두었다.
“내가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해주지.”
처음 이야기를 시작했을 때처럼, 뜬금없는 소리를 주워섬기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