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순간 나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가, 억지로 팔에서 힘을 뺐다.
“음, 제가 다른 차원에서 온 건 사실인데요.”
입 밖으로 내뱉는 말이 새삼스레 어색하게 느껴졌다. 마치 처음 내 비밀을 타인에게 알리던 때처럼.
최근에 이 사실을 입에 담는 순간이 많아져서 괜찮아진 줄만 알았는데, 과거를 숨기고 살아가던 세월이 마냥 거짓으로 남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자 생각했던 것보다 더 태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걸 어떻게 그 사람이 알죠? 제가 차원 이동자라고 떠벌리고 다닌 것도 아닌데.”
지금 내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은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적다.
마샤, 파견단이었던 세 명, 그리고 단테.
게다가 단테의 일이 아니었다면 단테를 제외한 네 명에게는 알리는 일도 없었을 터다. 그만큼 이건 오랜 시간 동안 철저히 지켜져 온 비밀이었다.
저 중에 남의 사정을 말하고 다닐 만한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걸 어떻게 알아챌 수 있다는 거지? 내가 차원을 이동했다는 사실은 그저 신기함만 불러일으킬 뿐,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특징이나 비범함 따위를 부여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런 내 생각을 부정하듯, 케이드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당신은 어떤 부상이든 한순간에 회복하는 몸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
“만약 그게 다른 차원에서 온 이들의 공통적인 특징이라면, 알아차리지 못할 것도 없죠.”
확인차 물어본다는 어조지만, 이미 답을 확신한 듯한 목소리.
“당신, 상처가 비정상적으로 낫는 순간을 지금껏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고 철저하게 숨겨왔다고 자신할 수 있습니까?”
“……아니요.”
그렇게 대답하는 말에는 내가 듣기에도 힘이 없었다. 폭탄에 의해 몸이 산산조각이 난 이후로 아니래도 범상치 않았던 회복 속도가 기하급수적으로 빨라졌는데, 그 이후로 지금까지 내 몸의 상태를 숨기려고 노력했던 적은 없었다.
상처라고 해봤자 전부 자잘한 생채기 뿐이기도 했고, 애초에 내가 제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단 말이다. 파견단 일행과 처음 만났던 날, 예기치 못하게 상처가 일찍 회복되는 바람에 릴리가 이상함을 느꼈던 적도 있지 않은가.
나는 흉터 하나조차 보이지 않는 팔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당신 말은, 그자가 내 특이체질을 목격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는 말이죠.”
나와 단테 앞에 나타났던 형태처럼, 까마귀의 모습을 한 채 지켜보았다면 내가 그 시선을 알아차릴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 내가 숨기려고 노력을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들켰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 자신의 부주의에 대한 자책감이 올라오려고 해서 자꾸만 한숨이 흘러나왔다.
내 몸이 이상하다고 생각을 했으면 그건 숨기려 들었어야 했는데.
“예.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도, 여전히 의아한 점은 남아 있습니다.”
덩달아 내 팔을 잠시 쳐다보는 것 같던 케이드가 다시 나와 시선을 맞췄다.
“당신이 차원 이동자라는 사실과 그자가 당신을 만나려고 하는 이유에 무슨 연관이 있는지, 그리고 당신과의 대화로 무엇을 알아내려고 하는 건지.”
그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볼 틈도 주지 않고, 곧바로 질문이 이어졌다.
“마탑주에게 달리 들은 건 없습니까?”
“단테한테요? 뭘요, 그 변질자에 대해서?”
그 순간 케이드가 미묘하게 인상을 찌푸리길래, 무슨 심각한 일이라도 떠올랐나 싶었다.
“……당신이 마탑주 이름을 부르는 건 정말 적응이 안 되는군요. 예, 그자에 대해서 말입니다.”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훨씬 실없는 이유에서였지만. 내가 내 남편 이름을 부르는 게 무슨 대수라고 저러는지 모르겠다.
뭘 이런 거에 새삼 어색해하냐는 생각은 일단 미뤄두고, 나는 어깨를 한번 으쓱였다.
“단테는 원래 관심이 가지 않는 것에는 한도 끝도 없이 무신경해지는 사람이에요.”
“그게 무슨 뜻입니까.”
“특별한 접점도 없었던 사람의 특징을 상세히 알 리가 없다는 뜻이죠.”
앞서 단테에게 들었던 정보들을 단테가 기억하고 있었던 것만으로도 신기할 지경이었다. 자기 말로는 타고나게 머리가 좋은 덕이라고 그랬지.
물론 단테의 비서가 그자에 대한 자세한 신상정보가 담긴 서류를 보내오기는 했다만, 안 그래도 정체가 불분명한 사람인데 ‘사실은 이러한 꿍꿍이를 가지고 있음.’ 따위의 정보를 찾아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냥, 무슨 마법 하나만큼은 되게 뛰어나서 지금껏 처분이 힘들었다는 말을…….”
그러고 보니 그게 무슨 마법이었지? 나는 잠시 멈칫했고, 말을 하다가 그만둔 나를 케이드가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의아한 얼굴에 잠깐만 기다려달라는 말을 할 새도 없었다. 분명 들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안 나. 정말 단테가 지나가듯이 말한 걸 주워들은 것처럼.
리사와 단테가 이야기하는 걸 지나가다가 보았을 때 언뜻 들은 거였나?
……그럼 결국 나한테 직접 이야기해준 적은 없다는 거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을 따라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나도 케이드도 알아차린 걸 과연 단테가 몰랐을까, 하는 그런 생각.
결국, 나는 한숨을 쉬면서 케이드에게 말했다.
“일단 방에서 좀 쉬고 오세요. 전 어디 좀 갔다 올 테니까.”
“갑자기 어딜 말입니까?”
통보에 가까운 말에 황당함을 느끼는 케이드를 눈치챘음에도, 나는 단지 문을 향해 걸어가면서 짤막하게 말했다.
“단테 혼내러요.”
얘는 진짜, 불안하면 일단 숨기려고 하는 버릇은 언제 고치려는지 몰라.
* * *
M6.
마샤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친구와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갑자기 집에서 끌려 나왔으니 당연한 말이겠지만, 지금은 이곳이 어디인지를 파악하는 게 조금 더 근본적인 이유로 불가능했다.
창문을 통해 보이는 바깥에 무언가라도 보이면 좋을 텐데. 아니, 적어도 자신이 갇혀 있는 방을 꼼꼼히 눈에 담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밖도 안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정말 작정하고 공간을 비우기라도 한 것처럼.
단지 벽과 바닥, 그리고 하늘과 땅이 새하얗다는 것 자체만 판단할 수 있을 뿐.
이런 게 어떻게 가능한 거지? 방 안의 가구를 완전히 내버리는 것까지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바깥을 아득할 정도로 텅 비게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정말 ‘아무것도’ 없다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풀 한 포기도, 하다못해 자갈 한 줌조차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현실감각이 흐려지는 기분을 고스란히 느끼며, 마샤는 일부러 가쁘게 숨을 내쉬었다. 입과 코를 타고 공기가 흘러들어오자 간신히 꿈이 아니라는 걸 자각할 수 있었다.
또다시 정신을 잃는 일은 없으리라 다짐하며, 마샤는 고개를 똑바로 세우고 그녀의 앞에 서 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온통 새하얗기만 한 공간에 까만 로브를 뒤집어쓰고 우뚝 서 있는 이는, 무시하려야 무시할 수 없는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대체 언제까지 저를 여기에 잡아둘 셈이죠?”
자각하지도 못한 새에 목소리가 날카롭게 새어나갔다. 말을 내뱉자마자 반사적으로 치밀어오르는 두려움에 움찔하면서 입을 다물었지만, 상대는 그다지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애초에 마샤 쪽을 바라보고 있지도 않았으므로.
마구 긁혀서 듣는 것만으로도 인상이 찌푸려지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왜, 불편한 거라도 있나? 배고픔도 아픔도 느껴지지 않을 텐데. 아, 졸리긴 하겠지만.”
괜히 깨어 있으면 말만 많이 할 텐데, 그러면 시끄럽기만 하거든. 중얼거림인지 빈정거림인지 모를 말에, 마샤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처음 납치되었던 때처럼 소리를 마구 지르면서 반항하고 싶었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저 붉은 눈이 서늘하게 빛난다는 것을 알아챈 이후에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마샤는 이번에도 최대한 화를 죽이며, 한참의 시근덕거림 후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며칠이 지난 건지라도 알려줘요.”
“내가 날짜를 알려준 적이 없던가?”
저걸 질문이라고 하나. 마샤는 고개를 휙 치켜들었다가, 소름 끼치는 눈빛을 다시 한번 마주하고 황급히 고개를 내렸다.
애초에 남자는 날짜를 알려주기는커녕, 마샤를 자주 보러 오지도 않았다. 그저 하염없이 이곳에 가둬두고, 가끔 마샤의 상태를 확인하러 올뿐.
게다가 상태를 확인하는 시선에서도 도무지 인간적인 요소라고는 느껴지지 않아서 무섭기만 했다.
하지만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분 건지, 마샤를 찾아온 이후로 꽤 오랫동안 이 방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리고 남자에게 그 어떤 것도 물어볼 틈이 없었던 마샤로서는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아니,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쪽에 가까웠다. 마샤가 납치를 당하던 그 날, 남자의 입에서 자신의 친구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기 때문에.
‘아가씨의 친구가 아가씨를 선택한다면, 아무 일도 없을 걸세.’
마치 안심이라도 시켜 준다는 듯 관대한 어조였지만, 마샤는 오히려 그 말을 듣고 불안해서 미칠 것 같았다.
하지만 마샤가 자신을 납치한 목적에 대해 더 캐물어 보기도 전에, 정말 날짜를 가늠하기라도 하는 듯 느릿한 어투가 그녀의 말문을 막았다.
“궁금하다니까 알려주지. 가만 보자, 아가씨가 이곳에 온 지…… 6일 정도 지났겠군.”
“6일……이라고요?”
“그래.”
시간 참 빠르게 지나가지? 농담과 같은 가벼운 어조와 웃음소리. 차마 대답도 하지 못하는 마샤를 앞에 두고, 남자는 즐겁게도 웃었다.
“원래라면 하루의 시간을 더 줘야 하는 게 맞지만 안 되겠어. 기다리는 건 참 힘든 일인 것 같단 말이야.”
남자가 허공에 손을 뻗어 무언가를 그리던 것도 잠시.
“자, 이제…….”
사람을 조바심 나게 만드는 걸 즐기는 악취미라도 있는지, 상황에 맞지 않게 장난기 넘치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마샤는 눈앞의 상대를 노려보기 위해 애썼지만, 그 노력은 곧 이어지는 말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친구의 목숨을 어떻게 할 셈인지 물어볼까?”
마샤의 눈동자가 커지는 것을 고스란히 지켜보며, 까마귀처럼 검은 남자가 웃었다.
빛이 희미하게 반짝이는 통신구를 든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