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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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 에이 님, 혹시…… 저희가 도움이 되고 싶다고 말씀드리면 불편하실까요? ]

한점 변함이 없는 부드럽고 상냥한 목소리. 차마 피할 수 없는 걱정의 눈빛을 한 몸에 받으며, 나는 잠시 눈을 깜빡였다.

아무래도 의외인 이야기이다 보니 바로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왜 의외냐면, 일단 릴리가 선뜻 도움을 줘도 되냐고 물어 올 줄은 몰랐고.

릴리의 말속에 있는 ‘저희’가 정확히 누구를 칭하는 건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답을 고르느라 침묵이 흐르는 순간에도, 릴리는 나를 재촉하지 않은 채 조용히 기다리기만 했다. 아까 내 사정을 듣고 있을 때 머리가 아파 보이던 건 말끔히 사라진 모습이었다.

정말로 두통이 가라앉은 건지, 아니면 일단 티를 내지 말자고 마음먹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나는 이래저래 생각을 해보다가 그냥 거리낌 없이 물어보기로 했다. 릴리가 대답을 피할 사람도 아닌데 혼자서 가늠해보는 건 시간 낭비지. 게다가 나에게는 그 시간이라는 게 그다지 많지 않다.

“솔직하게 말씀드려도 되나요?”

[ 네. ]

“사실, 어떻게 도움을 주신다는 건지 감이 잘 안 오는 것 같아요.”

사실 릴리뿐만 아니라 다른 누군가도 나에게 도움이 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만약에 손 쓸 여지가 있었다면 이미 단테가 이 상황을 해결했을 거라는 점에서 더욱더.

내 안전을 위한 조치를 해주는 게 최선처럼 보이는데, 그마저도 릴리에게는 여의치 않잖아. 릴리가 쓸 수 있는 마법을 단테가 못 쓸 리가 없을 테니.

나도 알 수 있는 사실을 릴리가 모를 리가 없다. 어쩌면 내 사정을 들은 순간부터 어느 정도 파악이 됐을 터다.

하지만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거지?

대답을 망설이는 릴리의 얼굴이 잠시 곤란한 빛을 띠었다가, 그 직후 모종의 해답을 얻은 듯이 잠잠해졌다.

[ 사실 당사자의 의견도 묻지 않고 이렇게 말씀드려도 되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에이 님을 지키는 데에 마법이 아닌 다른 분야의 힘을 동원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요. ]

“다른 분야라고 하시면…….”

아하. 나는 비로소 릴리의 말을 이해했고, 릴리가 말한 ‘저희’가 누구를 말하던 것인지도 이해했다.

그 모든 것을 이해했기 때문에,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지려는 것을 차마 숨길 수 없었다.

이반의 뛰어난 신체 능력이 이 상황에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닐 테고, 그렇다면 결국 남은 건……. 

“……그런데 그 사람이 저를 도와주려고 할까요?”

나는 농담을 하는 게 아니라 진심을 말한 거였는데, 릴리는 내 말을 듣고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 물론이죠, 에이 님. ]

저 든든한 말을 마냥 믿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 * *

릴리와의 연락이 그 후에도 몇 번이고 이루어진 뒤.

구구절절 이야기를 풀 필요도 없이 결론만 말하자면, 그냥 눈 딱 감고 릴리를 무작정 믿을 걸 그랬다.

릴리가 언급했던 사람…… 그러니까 케이드가, 정말로 내 안전을 위해 정령술을 사용해주겠다고 말한 덕분이었다. 게다가 마탑에 콕 박혀 있는 나를 위해서 친히 여기까지 와주시겠단다.

뭐지? 나를 싫어하는 게 아니었나?

“단테. 너는 괜찮아?”

“뭐가?”

“그 사람이 다시 마탑으로 오는 거 말이야.”

내가 그 사람의…… 호의인지 뭔지가 찝찝한 건 일단 미뤄두고, 단테의 기분부터 물어보았다. 대놓고 신경을 긁었던 사람을 다시 본다는 게 단테에게 어떤 심경으로 다가올지 알 수가 없어서.

하지만 내 두리뭉실한 예상-그냥 안 왔으면 좋겠다, 쫓아내고 싶다-과 달리, 단테는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일단 몸을 구기다시피 낮춰서 내 쓰다듬을 받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지.

마냥 기분이 좋아 보이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이 상황에 불만을 가지고 있는 모습은 또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혼자서 무언가의 타협이라도 한 사람처럼 보였다.

“네가 무사히 갔다 오는 데에 도움을 줄지도 모른다는데, 뭐 어때.”

“그래?”

“응.”

하긴, 나보다도 더 내 안위에 예민한 단테가 자기 기분을 이유로 도움을 거절한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 거다.

이렇게 된 이상 그때 있었던 일은 모른 척하고 넘어가야 하나? 단테가 케이드를 일방적으로 다치게 했던 일은.

내가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단테가 응석 부리듯이 내게 몸을 더 기대왔다.

“하지만 그래도 얼굴은 별로 안 보고 싶어.”

“그래서 내가 나 혼자 마중 나가겠다고 했잖아.”

“……그냥 안내하는 건 리사한테 시키고, 우리는 인사 안 하면 안 돼?”

이동 마법진이 그려진 방까지 따라 들어왔음에도, 단테는 계속해서 성가시게만 굴었다. 얘는 왜 날이 갈수록 말이 안 되는 소리만 하는 것 같지.

“너 계속 이러면 나도 너 대신 리사랑만 만날 거야.”

나는 너처럼 못 도망 다니는 줄 알지? 그렇게 말하고 나서야, 단테가 도망치듯 방을 나갔다. 

진작 저럴 것이지.

수도에서 마탑까지의 길을 고스란히 지나와야 했던 이전과 달리, 단테가 정신을 차린 지금은 이동 마법진을 마음껏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케이드가 마탑으로 온다고 결정을 내린 지 하루 만에 이곳에 올 수 있게 된 거고. 

나는 복잡한 수식과 도형으로 얽힌 마법진을 가만히 구경하다가, 그 마법진에서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한 걸음 물러섰다. 아마 조금만 기다리면 저 마법진 위로 알만한 사람의 모습이 보이겠지.

솔직하게 말하자면, 케이드에게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할지를 잘 모르겠다. 다쳐 있는 사람을 향해 모난 말을 내뱉은 후로 별다른 대화 없이 헤어졌지만, 마냥 적개심을 보이기도 좀 그렇고. 하지만 도움을 준다는 이유로 실없이 환영하는 건 더 별로다.

인간관계는 고민의 연속이라는 게 사실인 것 같아.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다소 무관심한 사람이라는 평을 받는다고 해도, 이 순간만큼은 그 말에 확실히 공감되었다.

애초에 이건 사람이라면…… 다들 그렇지 않을까?

“…….”

“음, 안녕하세요.”

적어도 다른 사람과 정상적으로 교류할 줄 아는 이라면 대판 싸우고 헤어진 사람과 다시 만났을 때 어색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이 말이다.

나는 오랜만에 보는, 그리고 어쩌면 다시는 볼 일이 없을 거라 어렴풋이 생각했던 이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통신구 건너편에서 비치던 릴리의 얼굴이 그러했듯이, 케이드 또한 눈에 띄는 변화는 없는 것 같았다.

그냥… 모노클을 새로 맞춘 것 같고, 머리카락이 어깨를 조금 넘을 정도로 짧아졌고, 표정이 조금 침잠해 있는 정도. 

음. 모노클도 머리카락도 전부 단테가 해 먹은 거나 다름없다는 사실은 무시하기로 했다.

“오랜만이죠, 저희.”

일단 우리를, 정확히 말하면 나의 안전을 위해 와준 사람이기 때문에 얌전히 인사부터 했다. 큰 도움이 되느냐 마느냐를 떠나서 마탑까지 온 성의를 신경 써줘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본 만큼 예의를 차린 대답이 날아오지 않을까 예상했으나, 그 생각은 곧바로 폐기되었다.

“대책 없이 태평해 보이는 건 여전하군요.”

겉치레도 생략하는 익숙한 말투가 내리꽂혔기 때문에.

침잠해 있다고 생각한 얼굴이 어느새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여기서 ‘원래대로’라는 말은, 나와 동행하면서 자주 보여줬던 얼굴을 의미한다. 인상은 팍 찌푸리고, 무언가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말본새나 태도가 여전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동시에 무언가가 달라지기는 했다는 게 어렴풋하게나마 느껴졌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뭔가…….

톡 쏘아붙이는 건 똑같은데, 빈정거리는 어조는 다소 약해진 느낌.

그게 어떻게 약해질 수 있겠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의외로 티가 난다. 

“미리 겁을 집어먹는 것보다는 낫죠, 뭐. 그리고 제가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닌데요.”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적을 독대한다는 사실 자체에 긴장하기 마련입니다.”

“그럼 제가 정상이 아닌 거로 해요.”

이렇게 대답해도 대놓고 답답해하는 표정을 짓는 게 아니라, 그냥 미간을 조금 좁히는 거로 끝나잖아. 예전 같았으면 듣는 사람이 질릴 정도로 쓴소리를 퍼부었을 게 분명한데 말이다.

대책 없이 태평하다고 말하는 걸 보니, 그리고 적을 독대한다는 사실을 언급하는 모습을 보니 릴리에게 상황 설명은 대충 전해 듣고 온 모양이었다.

하긴, 이 사람이 마냥 선량한 사람도 아닌데 이유도 듣지 않고 나를 도와주러 올 리가 있나.

내가 잠시 생각을 이어 나가는 사이, 주변을 둘러보는 것 같던 케이드가 말문을 열었다.

“마탑주는 보이지 않는군요.”

“네. 바쁜 일이 있어서 나와 보지는 못했어요.”

거짓말은 아니다. 실제로 단테는 바빴으니까. 요새는 내 안전을 확실히 보장할 수 있을 만한 방법을 궁리하기에 바빴고, 지금 당장은 아마 내가 자신을 피하는 일을 만들지 않기 위해 바쁘겠지.

그렇지만 다른 때도 아니고 이 사람이 마탑에 처음 오는 날인데, 리사만 내보내자는 건 좀 이상하잖아. 단테.

사실, 이 사람이 마탑에 온 이 순간까지도 구체적으로 무슨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건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애초에 마법이나 정령이나 둘 다 나에게는 신기하기만 할 뿐, 아예 기초부터 이해하지를 못했으니까. 

내 나름대로 릴리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 축약해보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정령과 마법은 서로 다른 분야인 만큼, 만에 하나 단테의 마법에 문제가 생겼을 때는 정령이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사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단테가 건 마법조차 먹히지 않을 상황이라면 어떤 희망도 없지 않을까 싶기는 한데…….

그래도 도움을 거절할 필요는 없었다. 그것도 내 안위가 무사하기를 바라는 이의 도움을.

릴리가 간곡하게 부탁하듯 ‘에이 님은 어떻게든 안전하게 돌아오셔야 해요’라고 여러 번 이야기했는데, 그 말에 별다른 이견은 없다. 나도 내가 최대한 빠르게, 또 상처 없이 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하거든.

아마 눈앞의 사람도 릴리와 내 생각에 동의하기 때문에 여기까지 찾아와 준 거겠지?

역시 최소한의 예의는 지키는 게 낫겠다. 나는 그렇게 다짐했고, 조금 더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기 위해 노력했다.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안부를 물어본 직후, 저 멀리로 향했던 잿빛의 눈동자가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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