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8. (88/181)

88.

잔뜩 굳어 있던 몸이 얼음이 깨지듯 갑작스럽게 움직였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복도로 뛰쳐나가서, 바로 옆방의 문을 열어젖혔다.

“단테!”

마샤와 이야기하는 동안만 기다리고 있으라던 부탁대로, 단테는 방에서 얌전히 앉아있었다. 갑작스레 들이닥친 나를 보고 보랏빛 눈동자가 커지는 듯했지만, 차마 살펴볼 생각도 하지 못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단테의 팔을 온 힘을 다해 붙잡고 있었다. 마치 그게 내 유일한 구명줄이라도 된다는 듯이, 그리고 무언가라도 잡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는 듯이.

도저히 정리되지 않는 머리가 뒤죽박죽 섞인 말들을 무작위로 뱉어냈다.

“마샤가, 단테. 마샤한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아. 통신구에 금이 갔는데, 갑자기…….”

“잠깐. 잠깐만, 에이.”

단언하건대 이렇게 혼란스러워진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감정의 정도로만 따지자면, 단테를 처음 재회했던 그 날만큼이나 혼란스러웠다. 불안감을 이기지 못하고 온전한 생각이 불가능해지는 감각이 점점 내 온몸을 지배했다.

그렇기 때문에 단테가 내 손을 잡았을 때 소스라치게 놀랐던 것 같다. 익숙한 온기가 순간적으로 나를 일깨우는 바람에.

“에이.”

“…….”

경황이 없던 나와 다르게 되레 침착해진 단테가 눈에 들어왔다. 나를 안심시키고자 하는, 나를 단단히 감싸는 온기가 더 선명하게 전해지자, 차츰 몸에서 긴장이 빠져나갔다.

그제서야 비로소 나는, 갈피를 잡지 못하는 정신으로나마 문장에 가까운 말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마샤의 집에 누군가가 침입한 것 같아.”

“…….”

내 말이 떨어진 즉시, 단테의 표정이 변했다. 그 상황을 직접 본 나만큼은 아니었지만,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놀랐다는 사실 하나만은 같았다.

나는 애써 혼란스러움을 내리누르고, 직전에 벌어졌던 일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정리하고자 노력했다. 마샤에게 닥친 일과 내가 본 것, 그리고 내가 들은 것을 한데 모으려고 애를 썼다.

“평소처럼 통신을 하고 있었는데, 누군가가 밖에서 마샤의 집 문을 두드렸어. 아무 말도 없이 문만 두드리는 걸 마샤가 잠깐 확인하러 다녀왔고, 그리고 갑자기…….”

조각날 듯 금이 가던 통신구와 가느다란 비명 소리가 다시금 뇌리를 스쳤다. 

하지만 방금과 다르게, 나는 혼란에 휩싸이는 게 아니라 극도로 침착해졌다. 마냥 불안해하는 것은 지금 상황에 한치의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든 탓이었다.

“마샤가 들고 있던 통신구가 깨지면서 통신이 끊겼어.”

“…….”

“끊기기 직전에 도와달라고, 소리치는 걸 들은 것 같아.”

명료하게 말한 건지는 확신이 서지 않지만, 적어도 상황을 파악하기에는 충분한 설명인 듯싶었다. 단테의 얼굴에서 초조함이 떠올랐다가, 이내 다시금 내 손을 잡아 왔다.

“알았어. 내가 확인하고 올게.”

단단히 손가락을 감싸는 것 같던 힘은 금세 떨어져 나갔다. 가까이서 나와 눈을 맞추며, 단테는 속삭이듯 빠르게 이야기했다.

“너는 여기서 리사랑, 아니. 일단 이 방 안에 있어 줘. 무슨 일이 있었는지 확인하고 올 테니까…….”

“단테.”

여기에 있으라고 말하리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왜 이런 순간에도 나를 두고 가려고 하는지도, 물론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단지 지금만큼은 내가 단테의 말을 들어줄 생각이 없을 뿐이다.

나는 떨어져 나가던 단테의 손을 다시 붙잡고,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갈 거면 나도 데려가.”

“……에이.”

앓듯이 내 이름을 부르는 어조에는 간절함이 담겨있었지만, 순순히 물러설 수 없었다. 단테가 이후에 어떻게 행동할지 뻔히 그려져서.

이 상황에 무작정 네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어야 하냐고 말하는 건 그다지 좋은 선택이 아니다. 단테는 내 말에 미안해하면서도 그러길 바란다고 답할 테고, 그 말에 싫다고 대답하는 순간 말싸움으로 이어질 게 뻔하니까.

나는 최대한 이성적으로 생각하기 위해 잠시 숨을 골랐다.

“나를 여기 둔 이상, 분명 넌 어떻게든 빨리 돌아오려고 하겠지. 네가 대충 확인하고 올 거라는 말이 아니야. 내가 혼자 남겨져 있어도 확실하게, 알아 올 수 있겠냐고 묻는 거야.”

“…….”

“제발, 단테. 이럴 시간 없어.”

시간이 조금씩 흐를수록 간신히 가라앉혔던 불안감이 치고 올라오는 것 같았다. 

만약에 마샤가 다친 채로 집 안에 쓰러져있으면 어쩌지? 칼 같은 날붙이에 찔려서 피를 많이 흘렸다면? 

내가 단테와 이러고 있는 순간에 정말 마샤가 잘못되면 어쩌지.

손마디가 새하얗게 변할 정도로 힘을 주고 있었건만, 어느새 시작한 떨림은 가라앉지 않았다. 내가 눈에 띄게 불안해하자, 아주 짧게 갈등하던 단테도 내 손을 마주 잡았다.

“……알았어. 지금 바로 가자.”

그 말에 제대로 된 대답을 했는지는, 도저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발밑에서 그려지던 마법진이 완성되던 순간, 나는 단테와 함께 빛에 휩쓸렸다.

* * *

눈을 잠시 감았다가 뜨니 그곳은 마샤의 집 안이었다.

정말 놀랄 만큼 빠르게 이동했다는 사실도, 그리고 집주인의 허락도 없이 무단으로 들어왔다는 사실도 그때는 그다지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곧바로 마샤를 찾아 다급하게 걸음을 떼었고, 무언가를 밟고 나서야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내 발밑에 있는 것은 언뜻 보기에 유리 조각처럼 보였지만, 희미한 반짝거림을 품고 있는 파편이었다.

“……통신구가.”

분명 방금까지는 멀쩡했을 터였다. 아니, 멀쩡했다. 적어도 누군가가 마샤의 집 안으로 들어오기 전까지는.

그대로 시선을 올리자, 온전한 부분 하나 없이 처참하게 깨져있는 창문이 눈에 들어왔다.

간신히 테만 남아 있는 창문에서는 거칠게 찢긴 커튼이 매달려 바람결에 흔들리고 있었다. 바로 앞에 놓인 탁자는 창문이었던 것의 잔해에 뒤덮여 엉망이었고, 그 위에 무엇이 놓여 있었는지 도저히 알아볼 수 없었다.

탁자 밑에 의자가 넘어져 있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단테가 내 뒤에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샤가 없어.”

“…….”

“어느 방에서도 기척이 느껴지질 않아. 그렇다고 이 근처에 있는 것도 아니고, 수도 안에서 완전히 사라졌어.”

그런 게, 가능한가? 

나는 가능할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다소 멍하게 생각했다. 아까까지 이곳에서 나랑 이야기하던 사람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게 말이나 되는지.

그런 것이 가능하게 만드는 방법은, 적어도 내가 아는 한 하나뿐이다. 마법.

그와 동시에 단테가 몸을 숙여 통신구 파편을 주웠다.

“……단테.”

이런 상황에서마저도, 단테가 그 파편에 다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걱정되었다. 내가 작은 소리로 단테를 부르자, 단테는 괜찮다는 듯이 나를 잠시 돌아보았다.

파편을 들고 있는 손가락에서 희미하게 빛이 새어 나왔다.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나로서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단테가 자신이 쓴 마법으로 무언가를 확인한 것은 분명해 보였다. 

왜냐면 얼마 지나지 않아 통신구 파편을 쥐어 터트렸으니까.

“단테!”

그 작은 파편이 단테의 손안에서 터져나가는 것을 보고, 과장 조금 보태서 기절할 듯이 놀랐다. 내가 기겁해서 그 손을 붙잡든 말든, 정작 다쳤을지도 모르는 당사자는 터져나간 파편에 별다른 감흥이 없어 보였다.

더 자세히 표현하자면 다른 데에 정신이 팔려서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야, 위험하게 뭐 하는 짓이야!”

“…….”

내가 단테의 손을 붙잡고 확인하는 동안에도 대답이 없었다. 슬쩍 눈만 들어 확인해보니, 지금껏 단테와 함께 지내면서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살벌한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아주 잠깐 내가 함께 있다는 것도 잊은 것처럼 분노한 얼굴로, 단테는 고요하게 중얼거렸다.

“이따위 짓을…….”

다른 말도 더 중얼거린 것 같은데, 목소리가 한껏 낮아져 있어서 가까이에 있는 나에게도 들리지 않았다.

단테의 손에 생채기 하나 없다는 사실을 겨우 확인한 후에, 나는 다시 고개를 들어 단테를 쳐다보았다.

“너 마샤가 어디 간 건지 알아낸….”

어디 간 건지 알아낸 거야? 그렇게 물으려고 했다. 아마 단테가 내 손을 깍지껴서 잡지만 않았다면 제대로 물어보았겠지.

내 모습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스쳐 지나가듯 눈에 담은 단테는 이내 뒤를 돌았다. 여전히 내 손을 꽉 붙든 채로.

“일단 마탑으로 돌아가자, 에이.”

“이렇게 빨리? 잠깐만, 네가 아까 뭘 봤는지는 이야기해줘야지.”

“마탑으로 돌아간 뒤에 전부 설명해줄게. 지금은 여기서 나가자.”

더 이상 여기에 있을 수 없는 이유라도 생긴 것처럼 다급한 말이었다. 혼란스러운 광경에 더불어 급변한 단테의 태도까지, 뭐 하나 이해할 수 있을 만한 게 없었다.

사라진 마샤의 행방이 여전히 걱정스러웠지만, 일단 단테의 말을 순순히 따르려고 고개를 끄덕이는데.

《 돌아가려고? 》

뒤에서 들려오는 낯선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똑바로 몸을 돌리지도 못했던 것 같다. 나를 빠르게 잡아당기는 단테의 손길과 함께 무언가가 박살 나는 소리가 났고,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단테의 뒤에 서 있었다.

비틀거릴 뻔한 걸 간신히 바로 서는 사이에 내 시야로 들어온 건, 아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처참하게 깨져있는 창문.

그리고 창문 바로 옆 벽이 새롭게 부서진 모습이었다.

……지금 단테가 마샤의 집 벽을 부순 건가?

부서진 벽에 매달려있던 액자가 추락하는 걸 보고, 잠깐 정신이 아득해졌을 때.

그 순간이 되어서야 비로소 내 눈에 들어오는 한 형체가 있었다.

《 아, 자네의 인사는 여전히 과격하군. 》

창문틀에 발톱을 박아넣고 우뚝 서서, 부리를 딱딱거리는 모습이 마치 말하는 것처럼 보이는…….

“……까마귀?”

새까만 깃털에 붉은 눈을 가진, 거의 집채만 한 까마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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