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7. (87/181)

87.

그날 저녁, 나는 단테가 방으로 돌아오기 전 들었던 이야기에 대해서 곱씹었다.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따라왔다. 처음 만났던 날 내 집 근처에 쓰러져있던 단테도 생각났고, 마을 사람들이 함께 있던 풍경도 생각났으며, 

또 내가… 죽던 날의 기억도 떠올랐다.

변질자라는 사람들은 잠깐이라도 마탑주 자리를 차지해서, 고대 마법인지 뭔지를 손에 넣는 게 목적이었다고 말했지. 단테를 공격한 것부터 마을에 폭탄을 터트린 것까지, 도저히 제정신인 사람들이 할법한 행동들이 아니었다.

어째 깊게 생각할수록, 얼굴을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향한 증오가 어딘가에서부터 차오르려는 듯했다. 늘 그래왔듯이 금세 가라앉히기는 했지만, 갈 길 없는 분노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아, 이래서 단테가 나한테 알려주지 않으려고 했군.

그 복잡하다면 복잡한 생각들 끝에, 나는 단테가 ‘너까지 불안해할 필요 없다’라고 말했던 의도를 완전히 받아들였다. 그리고 어쩌면 이야기를 듣지 않는 편이 내 심신의 안정에는 도움이 되었을 것 같다는 것도.

하지만 이미 모든 사정을 전해 들었으니, 그리고 며칠 전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똑같이 단테를 다그쳐 이야기를 들으려고 할 거라는 걸 알고 있으니 후회는 없었다. 어쨌든 나도 알고 있어야 할 이야기는 맞잖아.

이 상황에서 내가 바라는 건 결국 한 가지였다. 하루빨리 이 일이 해결되어서, 우리가 헤어지기 전의 일상을 되찾는 것.

정말이지, 아주 작은 일이라도 단테의 불안감을 부추기는 일이 일어나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 * *

“오늘은 도망 안 가네?”

“미안하다고 했잖아…….”

“미안한 건 미안한 거고, 괘씸한 건 괘씸한 거지.”

내 말에 단테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지만, 곁에서 떨어지려는 기색은 없었다. 어쨌든 붙어는 있겠다, 이 말이지.

단테는 요 며칠 동안 열심히 도망치던 것을 하루아침에 그만두었다.

오히려 떨어져 있던 시간을 보상받겠다는 듯, 그 전보다도 열심히 내 옆에 있으려고 했다. 내가 이렇게 캐내지 않았다면 아쉬워하는 쪽은 오히려 단테였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빠른 태도 변화였고, 그런 단테 덕에 나는 차마 심란함을 느낄 새도 없었다.

아니, 들은 이야기를 더 생각해볼 겨를도 주어지지 않았다는 말이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일단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이 거의 사라졌으니까.

“…단테.”

“응.”

“팔이 무거운데 좀 치우면 안 돼?”

솔직히 말하자면 팔만 치우지 말고 그냥 옆으로 비키라고 하고 싶다. 아니, 그냥 좀 다른 소파로 자리를 옮기면 안 되냐고 말하고 싶었다. 

어깨에 팔을 걸치고 반쯤 껴안고 있는 것도 한두 번이지. 어디 앉을 때마다 이렇게 엉겨 붙으니 갑갑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불안해하고 있을 단테를 굳이 떨쳐내고 싶지 않았고, 단테는 그런 내 태도를 귀신같이 알아차렸다. 

한마디로 나를 더 안아왔으면 안아왔지, 떨어지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부러 만족감을 숨기지 않는 단테의 얼굴을 보고, 한숨을 쉴 뻔한 걸 겨우 참았다. 

단테의 속사정을 들은 후부터는 계속 이런 식이었다. 단테는 이제 자신의 불안감을 숨기려고 들지 않았고, 그렇기에 더 내 옆에 붙어있으려고 했으며, 자신을 귀찮아하지 않는 내 태도를 마음껏 누렸다.

단테를 쫓아다니던 때와는 상반되게 좀 떨어져 있자고 사정하게 된 건 내 쪽이었다. 하지만 단테는 내 옆에 계속 있으려고 하는 것도 모자라, 자신이 없을 때면 리사를 내 곁으로 보냈다. 

의도는 뻔했다. 마탑 안에 있으라고 했던 말의 연장선이겠지, 뭐. 아무리 마탑 안이라도 나를 혼자 두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을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과하지 않나? 나는 내 곁에 한시도 떨어지지 않으려는 단테와-그럴수록 단테가 기뻐 보이는 건 덤이었다-덩달아 나를 밀착 감시하기 시작하는 리사 사이에서 생각했다.

단테의 과보호가 도대체 어디까지 갈 셈일까? 

그리고 난 저걸 도대체 어디까지 받아줘야 하는 거지?

사실 명확한 답이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하지만 답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아무렇지 않게 지내기에도 무리가 있었다.

이 은연중에 느껴지는 불편함을 잠깐이라도 해소하기 위해서는 두 개의 선택지가 있었다. 첫 번째, 나 혼자 이 기분을 삭인다. 두 번째, 다른 사람한테 내 기분을 털어놓는다. 

예전의 나였다면 망설일 것도 없이 첫 번째를 골랐을 것이다. 다른 사람과 관계를 쌓는 것 자체를 꺼리고, 남의 도움을 받는 걸 불편하게 여기던 과거의 나라면.

하지만 단테를 만나고 나서, 나는 무작정 타인과 거리를 두던 버릇을 내려놓게 되었다. 이제는 먼 미래에 나 혼자 남겨지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거든.

“……그래서 지금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러니까 이렇게, 마샤를 붙잡고 간결하게나마 내 상황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거고.

마샤는 내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다가 말했다.

[ 그럼 네가 나한테 이것저것 물어봤던 거랑은 관련이 있긴 했던 거네? ]

“응.”

이전에 마샤를 통해 물어봤던 것은, 내가 죽었던 마을에 단테가 나타난 적이 있는지였다. 마샤는 자신이 실제로 본 적은 없었다고 대답했고, 그래도 장례식에 왔었다는 소식을 들은 적은 있었다고 말했었다.

그때까지 나는, 단테가 불안해하는 이유가 그곳에서 뭔가를 더 발견해서 그런 게 아닐까 싶었거든. 음, 결론만 따지자면 비슷하게 맞아떨어지긴 했다.

마샤에게는 ‘단테가 10년 전 일로 아직도 불안해하는 게 맞는 것 같더라’ 정도로만 전달했을 뿐, 전쟁과 변질자들에 관한 이야기까지 하지는 않았다. 

내심 다른 이유가 있는 거 아니냐며 물어올까 봐 걱정했는데, 마샤는 의외로 순순히 수긍했다.

오히려 단테의 유별난 행동에 공감이 간다는 태도였다.

[ 그렇게 싸고돌 만하지. ]

“넌 누구 편이야, 마샤?”

[ 난 이기는 사람 편이야. 그리고 너도 걔가 이해되니까 얌전히 마탑 안에 있는 거잖아? ]

뭐, 틀린 말은 아니었다. 왜 저러는지 알겠으니까 좀 참자는 마음 반, 제발 좀 적당히 하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 반이니까 문제였지.

‘오히려 그런 일을 겪고도 멀쩡한 네가 이상한 거다’라는 마샤의 잔소리를 듣고, 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럼 난 계속 저러는 걸 보기만 해야 해?”

[ 뭐, 시간이 지나면 어련히 알아서 돌아오겠지. 어차피 너는 할 것도 없겠다, 그동안 나랑 수다나 떨면서 놀자. ]

“너 진짜 예전이랑 달리 단테한테 매정하게 군다…….”

마샤는 과거의 자신은 잊으라며 코웃음을 쳤다. 

[ 그나저나 이거, 시간제한 같은 건 없는 거야? 어제 마도구 전문점에 들렀는데, 통신구 가격은 말할 것도 없고 전부 하루 최대 이용 시간이 적혀있더라고. ]

“갑자기 마도구 전문점은 왜?”

[ 써보니까 좋아서 다른 건 또 뭐가 있나 하고…… 아니, 아무튼. ]

얼버무릴 필요 없는데. 나는 머쓱한 표정을 짓는 마샤를 보고 내심 웃었다. 나와 대화할 때마다 통신구의 기능을 신기해하는 것 같더니, 아무래도 마도구 자체가 또 다른 관심사로 자리 잡힌 모양이었다.

마샤는 오히려 통신구를 신기해하지 않는 날 특이하게 보는 듯했지만, 뭘 어쩌겠어. 나는 원래 이런 게 당연하던 세상에서 살았다.

자연스럽게 의식 한편에서 올라오려는 기억을 애써 흐리며, 나는 마샤에게 대답했다.

“글쎄, 단테 말로는 휴대용이 아닌 것 중에서 제일 좋은 걸 골랐다던데. 나도 정확히는 모르겠어.”

[ ……제일 좋은 걸 골랐다고? 그런데 이렇게 시시콜콜한 수다 떠는 데만 써도 되는 거야? ]

내 생각보다도 더 귀한 몸이었네, 이거. 살짝 기가 질린 투를 듣자니 작게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해. 단테가 돈을 청구하는 것도 아니잖아.”

[ 그야 이걸로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너랑 대화하니까…… 잠시만. 누가 문을 저렇게 두드리는 거야……. ]

조금만 기다려. 그렇게 말한 마샤가 내 시야에서 잠시 사라졌다. 

누구세요? 하고 외치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던 것도 잠시, 모퉁이에서 다시 나타난 마샤는 아까보다 얼굴을 조금 더 들이댄 채였다. 아마 일어선 상태에서 고개를 숙였기 때문에 모습이 가까이서 비치는 듯했다.

“무슨 일이야?”

[ 아니, 별일은 아니고. 자꾸 누가 문을 두드렸거든. ]

마샤는 다소 의아하다는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 누군지 물어봐도 아무 대답이 없……. ]

그 순간.

- 쨍!

“……!”

마샤의 얼굴을 비추던 부분에서 커다랗게 금이 갔다. 마치 유리가 깨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소스라치게 놀란 나는 반사적으로 통신구를 붙잡았지만, 깨진 쪽은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 마샤가 가지고 있는 쪽이라는 걸 깨달았을 뿐이었다.

쩌적거리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오고, 통신구의 균열은 점점 커져서 그대로 조각나도 이상하지 않을 듯 보였다.

“마샤! 무슨 일 있어?”

[ ……. ]

대답이 없다. 순식간에 초조함이 온몸을 스치고 지나가 입술을 짓씹었다가, 다시금 목소리를 높였다.

“마샤?”

[ …! 뭐……! …당…. ]

이내 고장 난 것처럼 소리가 마구 일그러지며 들려오기 시작했지만, 조각조각 흘러나오는 단어들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어떻게든 알아들을 수는 있었다.

하지만 통신구가 깨졌다는 당황이 담긴 중얼거림이나, 나는 괜찮다는 말이 들려온 게 아니라…….

가느다란 비명 소리가.

“…….”

그리고 도와달라는 외침이, 통신구를 통해 들려왔다.

그 소리를 알아듣자마자, 그리고 비명이 들린 직후에 통신구의 연결이 끊어지자마자 나는 숨을 삼켰다. 

혼란에 젖어 드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단 하나뿐.

마샤의 집에 누군가가 침입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