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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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머릿속에서 수많은 단어가 한데 모였다가 순식간에 흩어졌다. 단테와 다시 만난 뒤부터 잊고 있었던, 굳이 떠올리려고 하지 않았던 것들이 단테의 말을 듣자마자 일순간 선명해졌다.

하지만 아주 잠깐만 그랬을 뿐, 곧이어 흘러나온 목소리는 내 생각보다도 더 차분했다.

이런 데에 하나하나 충격받기에는 그동안 겪어온 일들이 너무 많았던 탓이었다. 

“…폭탄을 터트린 주범은 왕국 아니었어?”

그래, 분명 마샤에게 그리 전해 들었다. 왕국이 우리가 지내던 마을에 폭탄을 터트리면서 전쟁의 시작을 알렸고, 나를 포함한 마을 사람들이 거기에 휩쓸렸다고.

게다가 전쟁은 이미 끝난 지 오래다. 끝난 것도 모자라서, 뒷수습하기에도 충분한 시간이 흘렀다. 그 증거로 함께했던 파견단 사람들 또한 단테가 제일 큰 골칫거리인 것처럼 굴었지 않은가. 맞서 싸웠던 왕국이 아니라, 오히려 전쟁 중에 그들의 편에 섰던 단테를. 

그런데 왜 단테는 폭탄을 터트린 ‘사람들’이라고 콕 집어서 말하는 거지? 

어렵사리 이야기를 꺼낸 단테는 곧바로 입을 다물며 후회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미 말한 것을 무를 수는 없기 마련이고, 나도 한번 이야기를 듣기 시작한 이상 여기서 끝낼 생각은 없었다.

내 채근에 못 이겨, 단테가 마지못해 털어놓은 사정은 이러했다.

“전쟁 중에 왕국군에게 힘을 보탠, 그들과 물밑에서 결탁한 마법사들이 있었어. 어쩌면 마을 사람들이 첫 희생양으로 정해진 것은 사실상 그 무리가 부추긴 결과일지도 몰라.”

그리고 그들이 마탑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단테는 그렇게만 이야기했지만, 나는 그 추측이 거의 확신으로 굳어졌다는 것을 눈치챘다.

“어쩌다가 그렇게 짐작하게 된 거야?”

“…그 마을에서 터졌던 폭탄은 마석 안에 폭발 마법을 새긴 종류였는데, 그런 걸 만들 수 있을 만한 실력을 가진 사람은 왕국에 없었어.”

그 말을 듣는 것과 동시에, 희미하게나마 뇌리에서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내가 살아났던 날에 마샤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해줬었지.

“노베르 왕국에게 우리가 연달아 패배했던 건, 왕국군 측에 있는 마법사들 때문이었어.”

“마법사?”

“응. 처음부터 왕국군 소속의 마법사들은 아니었고, 일종의 동맹 관계였다고 했었나…. 기억이 잘 안 나네.”

잠깐 마샤와의 대화를 떠올리는 사이, 단테가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러니 전쟁 후에 이어진 진상 규명 조사 또한 왕국 외 세력을 위주로 이어졌고. 조사가 이어지다가 마지막으로 마탑이 남은 거야.”

그 마법사들이 전쟁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종적을 감춘 탓에 수색이 더 어려워졌었다고, 단테는 설명했다.

“그리고 너는 그 조사에 협조하다가 짐작 가는 사람들을 발견한 거고?”

그러니까 이렇게 확언하듯이 이야기하는 거겠지. 단테는 내 말에 잠시 눈을 느리게 깜빡이더니,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변질자들이라고 불리는…… 마탑의 뜻에 반해 마탑에서 퇴출당한 자들이 있는데, 그들이 행방을 감추었던 시기와 왕국군이 전쟁을 시작했던 시기가 얼추 맞아떨어져.”

“흠.”

단테가 불안해하는 원인을 알아내야겠다고 막연히 다짐했을 때는 예상하지 못했던 이야기였다. 어쩐지 머리 한구석이 지끈거리기 시작하려는 것 같은데. 

하지만 이렇게 설명을 들었음에도,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들이 있었다. 

일단 폭탄을 터트린 주범이 마탑과 관련된 자들이라는 게 왜, ‘그 마을이 첫 진격지로 정해진 것이 변질자들이 부추긴 결과다’라는 결론으로 이어지는 건지 모르겠고.

전쟁 중 제국의 편에 섰던 마탑을 조사하는 건 어렵지 않았을 텐데, 왜 마지막에야 조사가 이루어지게 된 거지?

“아무리 종적을 알아볼 수 없었다고 해도 조사가 너무 늦었…….”

나는 거기까지 말하다가, 단테의 안색이 어두워지는 것을 보고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총책임자가 최근까지 제정신이 아니었지. 그런 상황에서 마탑과 관련된 조사가 원활히 진행될 리가 없다.

게다가 단테는 전쟁 중에 밝혀진 주범들만 처리한 후 그 이후로는 마탑에 처박혔다고 했으니까.

전쟁이 끝난 후에는 뭐가 어떻게 진행되든 신경을 썼을 리가 없겠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나는 애써 착잡함을 감추기 위해 잠깐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전쟁에 관한 건 완전히 해결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구나.”

10년 사이의 공백이 있었던 만큼, 나는 알고 있는 게 많이 없다. 내가 깨어난 뒤에는 이미 전쟁이 끝난 뒤였고, 전쟁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내 관심사가 아니었으며, 거의 깨어나자마자 바로 단테를 찾아간다고 정신이 없었다.

그러니 전쟁에 관련된 건 전부 어련히 잘 해결되겠거니, 하고 안일하게 생각했다. 이미 시간이 많이 지났다는 이유로.

하지만 단테의 말을 들으니 그게 아니었다. 어쩌면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세력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으며, 그 세력이 마탑과 관련이 되어있을 수도 있다니.

“그 변질자라는 사람들에 대해서 더 자세히 말해줘.”

고개를 들고 그렇게 말한 순간, 갑작스럽게 단테의 손에서 힘이 들어갔다. 계속해서 그 손을 잡고 있던 내가 일순 당황할 정도로 세게.

평소보다도 더 강한 압박이 느껴지는 것과 동시에, 단테의 목소리가 떨림을 가득 담고 새어 나왔다.

“에이.”

“응.”

단테의 상태가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릴 새도 없었다. 곧이어 무슨 사고 과정을 거친 건지, 나로서는 전혀 이해되지 않을 말을 내뱉었으니까.

“만약에 그 마을이 그렇게 된 게, ……정말 나 때문이면 어떡하지?”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앞뒤가 없는 이야기에 나는 반사적으로 인상을 찌푸렸고, 단테는 초조하게 내 손을 더 세게 부여잡았다.

계속 붙잡혀 있다가는 자국이 남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힘이 들어가는 걸 보니, 아무래도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린 것 같았다.

“그것들이 왕국군을 도와준 게 맞다면 정말 나 때문일지도 몰라. 아니, 나 때문일 거야.” 

“잠깐,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그 마을에 오래 머무르는 걸 보고 내 힘이 약해졌다고 착각했을 테니까, 그래서…….”

“단테!”

나는 횡설수설하기 시작하는 단테를 다급하게 불렀다. 말이 끊어진 단테가 황급히 고개를 들고, 가까운 거리에서 나와 단테의 눈이 마주쳤다.

보라색 눈동자가 마치 나를 다시 만났을 때처럼 이리저리 흔들리고, 순식간에 안색이 창백해졌다.

나는 단테한테 잡혀 있던 손을 빼고 그 혼란스러운 얼굴을 단단히 붙잡았다. 단테가 내 눈을 피하게 두지 않기 위해서.

“그게 왜 너 때문이야. 갑자기 이야기가 왜 그렇게 돼?”

“……변질자들은 꾸준히 마탑주 자리를 노려왔으니까.”

그렇게 말하는 단테의 목소리는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곧이어 단테가 한껏 인상을 찌푸리고, 내 품에 기대듯 고개를 숙였다.

“내가 네 집 앞에 쓰러져 있었을 때, 그때도 변질자들에게 공격을 받은 거였어. 만약에 내가 몸이 다 낫자마자 그곳을 떠났다면 그들은… 그 마을을 알지도 못했을 거야.”

그랬다면 분명……. 단테는 말을 이으려다가 입을 다물었고, 아주 잠깐 침묵이 찾아왔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단테가 나를 열심히 피했던 이유가, 그리고 내게 자신의 사정을 말해주지 않으려고 했던 이유가 어렴풋이 이해되려고 했다.

아마 무의식으로나마 계속해서 생각해왔던 거겠지. 전부 자신의 탓일지도 모른다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탓에 단테의 표정을 알 수가 없어서, 나는 손에 억지로 힘을 주었다. 

순순히 내 손길에 따라 다시 맞춰진 시선은 어느새 물기로 가득 차 흐려져 있었다.

“단테.”

“응.”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너도 알고 있지? 그렇게 속삭였지만, 단테는 대답이 없었다. 단지 얼굴을 점점 더 일그러트릴 뿐.

“죄책감이 들만한 일인 건 알았어. 나도 네 상황이었다면 분명 그랬을 테니까.”

나에게 친절히 대해주었던, 내가 얼굴을 잊기 위해 애써 노력하고 있는 마을 사람들이 생각났다. 

그 사람들이 나 때문에 죽었다면, 게다가 그 사람들과 더불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다면 나는 아마 견딜 수 없었을 테다.

하지만 단테의 자책이 이해되는 것과 별개로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다. 아니, 지금 단테의 상태를 보니 반드시 해줘야 할 말이었다.

“하지만 그건 네 탓이 아니야.”

“…….”

“정말 그 사람들이 너를 노린 거였다고 해도 그건 그것들이 나쁜 거지, 네 탓이 아니라고. 알겠어?”

말을 이을수록 단테의 눈빛이 잠잠해졌기 때문에, 나는 단테가 자책을 그만두는 줄만 알았다. 아니, 죄책감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더라도 지금 당장은 괜찮아졌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단테는 내 말에는 대답하지 않은 채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단테의 불안감을 눈치챘던 이유이자,

“그러니까 마탑 밖으로 나가는 건…… 조금만 기다려줘.”

앞선 사정을 다 들은 이상, 도저히 뿌리칠 수 없을 만한 말을.

단테가 말을 돌리고 있음을 알았지만, 더 캐물어 볼 수 없었다. 어느새 단테의 얼굴은 정말 울 것처럼 변해있었기 때문에.

“그것들을 다 찾아내서, 너를 다시는 해치지 못하게 되면 그때 나가자. 지금은 조금 답답하더라도 이 안에 있어.”

여기가 제일 안전해. 덧붙이며 속삭이는 말은 어쩐지 아주 간절하게 들렸다.

나는 그 말까지 듣고 나서야, 비로소 단테가 내게 들킬 정도로 불안해하던 이유를 깨달았다. 그건 그들이 단테보다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 있어서도 아니었고, 오랫동안 마탑을 괴롭혀오던 세력이어서도 아니었다.

그 불안감의 시작은 결국 나였다. 그 사람들로 인해 내가 죽은 적이 있기 때문에, 만에 하나 또 그런 일이 생길까 봐.

그래서 오랜 시간 나를 잃게 될까 무서워서.

차마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나에게, 단테는 다시금 애원하듯이 속삭였다.

“제발, 에이.”

그 말까지 듣고도 내가 더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결국 나는, 알겠다는 대답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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