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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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뒤에서 안고 있는 탓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 짧은 대답을 받아내니 비로소 단테를 찾았다는 실감이 났다.

내가 너 하나 잡으려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미로 같은 마탑을 얼마나 헤매고 다녔는지 알고 있냐고.

물론, 나를 계속 지켜보던 단테가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새삼스럽게 화가 치밀어 오른 나는 팔에 힘을 주어 더 세게 단테를 붙들었다.

“그동안 나 없이 잘 지냈어?”

아무 행동도 취하지 못한 채 굳어만 있던 단테가 잠시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웃음기가 담겨있는 말인데도 이런 반응인 걸 보면, 내 기분을 눈치챈 건 분명해 보였다.

아니면 단테를 꽉 붙잡고 있는 손길에서 숨기지 못한 분노를 느꼈을지도 모르고.

도와주는 사람 하나 생겼다고 이렇게 쉽게 잡을 수 있을 줄 알았다면, 처음부터 단테가 아닌 리사를 쫓아다닐 걸 그랬다. 단테랑 달리 리사는 비교적 손쉽게 붙잡혔는데. 

나는 리사가 나간 쪽으로 잠시 시선을 주다가, 다시 단테를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어쩔 줄 몰라 하는 단테의 뒤통수를.

“리사는 주인을 안 닮아서 너무 착한 것 같아.”

그 말에 담긴 의미를 단번에 알아챈 단테가 작게 앓는 소리를 냈다.

“이래서 너랑 아예 만나지 말라고 한 거였는데.”

“넌 그것 때문에 괘씸죄 추가야. 입단속 시킨 것도 모자라서 만나는 것도 막아?”

“한번 만나면 이렇게 널 도와주려 할 줄 알았으니까…….”

단테의 목소리가 끝으로 갈수록 점점 작아졌다.

“리사가 날 먼저 도와주려고 한 건 아니야. 그냥 내가 작은 부탁을 했을 뿐이지.”

“…무슨 부탁?”

“네가 나타날 만한 곳에 몰래 데려다 달라고.”

‘주인은 언니를 보는 게 아니면 보통 마탑 최상층에 가 있어요!’

리사의 해맑은 대답이 다시 귓가에 울리는 듯했다. 

처음에는 이래도 되나 긴가민가하는 것 같던 리사는, 나중이 되어서는 자기가 더 신나서 이것저것 도와주려고 했다.

단테가 나를 지켜보고 있는지도 이야기해주고, 다른 일을 하러 간다고 시선을 뗀 것 같으니까 이 틈에 숨어있자고 이야기도 해주고.

심지어 마지막까지 단테에게 말을 걸면서 시선을 끌어주기도 했다. 음, 이렇게 나열하니까 정말 기특한데. 나중에 사탕이라도 하나 들려줘야겠다.

내 이야기를 잠자코 듣던 단테가 곧이어 허탈하게 대답했다.

“너랑 만난 것도 모자라서 주인의 명령을 무시하는 행동까지 하다니.”

“애 혼낼 생각 하지 마. 리사가 도망가던 걸 내가 붙잡은 거니까.”

다시금 흉흉해지려는 내 목소리에 단테는 단지 고개를 저었다. 어째 목소리부터 행동까지 전부 힘이 잔뜩 빠져 있는 게, 나한테 잡힌 순간부터 패배를 인정한 듯한 태도였다.

하지만 뭐 어쩌라고. 저 태도 하나만 보고 안심했다가는 또 언제 도망갈지 모른다. 

내가 마음을 다시 단단히 붙잡는 것과 동시에, 단테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그럼 이제 팔은 풀어주면 안 돼?”

“너 지금 내가 놓아주면 도망갈 거야, 안 갈 거야.”

“…….”

바로 대답하지 않고 머뭇거리는 태도를 보고 다시금 팔에 힘을 주니, 황급한 대답이 따라붙는다.

“안 갈게.”

“네가 한 말이니까 지켜. 이번에 또 도망가면 진짜로 화낼 거야.”

“응…….”

아무리 시무룩하게 대답해봤자 안 봐준다. 손이 하얗게 변할 정도로 꽉 붙잡고 있던 허리를 놓아주자, 단테가 천천히 뒤를 돌았다.

괘씸한 거랑 별개로 오랜만에 얼굴을 보니까 좋기는 했다. 약간 흐트러져있는 머릿결도, 시선을 맞추지 못하고 이리저리 피하는 보라색 눈동자도.

그렇게 열심히 도망 다녔으면 잘 지내기라도 할 것이지, 마음고생이라도 잔뜩 한 사람처럼 안색이 마냥 어둡기만 했다.

나도 모르게 손을 들어 앞머리를 정돈해주자 아무 말 없이 눈만 느리게 깜빡이던 단테가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평소라면 분명 내가 불편하지 않도록 고개를 숙여주는 거라고 생각했겠지만, 오늘은 어쩐지 그런 의도만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내가 단테의 얼굴을 살펴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를 살피는 듯한 시선이 계속해서 닿아 왔으니까.

집요하리만치 이어지던 눈싸움은 내가 손을 내리면서 끝이 났다.

옅은 아쉬움이 담긴 보라색 눈동자를 발견하고, 나는 잠시 황당함을 느꼈다. 왜 오랫동안 나를 못 본 사람처럼 굴어. 오히려 보고 싶어도 널 못 본 건 내 쪽인데.

“이제 네가 왜 그렇게 열심히 피해 다녔는지 이유를 좀 들어볼까?”

내가 그렇게 말하며 미소를 짓는 것과는 반대로, 단테는 한껏 체념한 표정을 지었다.

일단 가까운 곳에 있는 의자를 아무렇게나 끌어다가 단테부터 앉혔다. 삐딱하게 팔짱을 끼고 단테를 내려다보는데, 단테가 머뭇거리더니 손을 휘저어 또 어딘가에서 의자를 가져왔다. 확실히 이쯤 되니 도망갈 것 같지는 않네. 아예 앉으라고 자리까지 내주니 말이다.

하지만 도망치지만 않을 뿐이지, 여전히 대화할 생각은 없는 듯 단테는 마주 앉고 나서도 내 시선을 열심히 피했다.

“아까 리사랑 하는 이야기 다 들었어. ‘일이 다 해결되고 나면’ 나한테 무슨 일인지 다 이야기해주겠다고?”

“……응.”

“그래. 말해줄 생각이 있기는 했구나.”

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다. 모든 일이 해결되고 나서야 아, 그런 일이 있었구나, 해결됐다니 다행이다. 하고 말하는 거로 끝내고 싶지 않다고.

“이왕 말해줄 거 미리 말해주면 좀 덧나?”

“…….”

“단테.”

또 그 답답한 상황의 반복이다. 거짓말도 하지 못하는, 그렇다고 솔직히 털어놓지도 못하는 단테는 그저 입을 다물고, 나는 그런 단테를 일방적으로 추궁하는 상황.

이러다간 저번처럼 아무런 대답도 듣지 않고 끝날 것만 같아서, 부러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단테가 사라져 있던 동안 내가 생각했던 것 중 가장 극단적인 예시를.

“내가 그 일을 해결하는 데 방해가 될 것 같아서 그래?”

물론 단테는 그러지 않으리라는 걸 안다. 내가 정말 방해가 되는 순간이 있어도, 단테만큼은 내가 방해된다고 생각하지 않을 거라는 것도.

내 예상대로, 단테가 화들짝 놀라면서 내 손을 붙잡았다. 단테의 반응을 예상하고 있던 나로서도 내심 놀랄 만큼 빠른 속도였다.

“그런 거 아니야.”

“그런 게 아니면 뭔데. 솔직히 너 한 번도 이런 적 없었잖아. 우리 이제 서로 비밀 안 만들기로 한 거 아니었어?”

어째 말을 할수록 달래는 듯한 말투가 되는 것 같지만, 어쩔 수 없다. 나한테 잡혔을 때부터 기세가 꺾인 걸 보니, 무작정 쥐어 잡고 따지는 것보다는 그냥 단테의 죄책감을 자극하는 게 나을 것 같거든.

내가 작정하고 하는 말이라는 걸 눈치챈 건지 아닌 건지, 단테가 이리저리 흔들리기 시작하는 모습이 고스란히 보였다.

“아예 말해주지 못하겠으면, 왜 나한테 말을 안 해주는지라도 똑바로 이야기해주지 그랬어. 솔직히 좀…….”

내가 얘 앞에서 이런 말까지 해야 하니? 내면 어딘가에서 한숨을 쉬는 것 같았지만, 일단 무시했다.

“좀, 아니. 많이 서운해.”

일부러 그러려고 하지 않아도 시무룩한 말투로 말이 나왔다. 단테는 이제 흔들리다 못해 안절부절못하며 손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있었다.

내 어깨를 감싸려던 손이 떨어져 나가고, 그냥 나를 안아주려고 하다가, 결국 손을 마주 잡는 것으로 끝이 났다. 

예상컨대 아마 자기 나름의 타협안인 것 같았다. 마음이 더 약해지지 않으려는.

하지만 이미 손을 잡았을 때부터 끝난 거 아니야?

어처구니가 없다는 시선을 들키지 않도록 단테의 손만 흘긋 살펴보는 것과 동시에, 다소 뜬금없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말로만 듣던 부부싸움인가, 하는 생각이.

이런 대치 상황에는 어울리지 않는 자각이었지만, 적어도 긴장을 풀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싸움이라기에는 싱겁고, 거창하게 갈등하고 있는 것도 아니지만, 언뜻 보기에는 그렇잖아.

그렇게 생각하니 이 상황이 다소 우습게 느껴져서 저절로 손에 힘이 풀렸다.

“……에이?”

하지만 그런 내 모습이 단테에게는 다르게 다가왔는지, 한참 동안 말이 없던 단테가 주눅 든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왜 불러?”

“……내가 잘못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잘못했다는 말은 저번에도 했잖아? 종이쪽지에다가 정성껏 써서 보냈던데.”

뼈가 박힌 농담에, 단테가 슬쩍 내 얼굴을 살폈다가 다시 눈을 내리까는 것이 보였다.

“그때는 너를 무작정 피했던 일에 대해서 잘못했다고 말한 거였어.”

“그럼 지금은?”

“지금은…….”

단테는 모든 걸 포기한 사람 마냥 흐린 한숨을 쉬었다. 점점 더 기가 죽어가는 단테와는 달리, 나는 마음이 약간 들뜨는 것 같기도 했다. 드디어 단테가 나를 피한 원인을 들을 수 있게 된 듯했으니까.

“잘못했다는 말은 네가 나한테 이야기하지 않으려고 했던 게 뭔지 다 털어놓으면 받아줄게.”

하지만 내가 그렇게 말한 후에도, 단테는 정말 오랫동안 머뭇거렸다. 이런 상황이 되었음에도 그것만은 싫다는 듯이.

내 인내심이 바닥나기 전, 단테는 겨우겨우 입을 열었다.

“내가 왜 너한테 말 안 해주려고 했는지 너도 이해할 거야.”

글쎄, 이렇게까지 열심히 피하면 되려던 이해도 안 될 것 같은데. 그러나 나직하게 이어지는 말에, 나는 하던 생각을 끊어낼 수밖에 없었다.

머리가 일순간 새하얘지는 것 같았기 때문에.

“네가 죽었던 그때, 마을에 폭탄을 터트렸던 사람들의 이야기니까.”

단테의 목소리가 귓가에 무겁게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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