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계속 도망 다니는 단테를 찾으러 다닌 지도 벌써 일주일이 넘었다.
처음에는 단테가 숨기고 있는 것을 듣기 위해서 쫓아다녔지만, 이쯤 되니 이야기고 자시고 일단 도망부터 못 가게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 상태로 놔뒀다가는 평생 얼굴을 못 보고 살 것 같다는 예감이 살살 올라오기 시작했거든.
이런 상황에서 더욱 억울한 건, 나는 단테를 보지 못 하지만 단테는 나를 볼 수 있다는 거였다. 나도 마법을 쓸 줄 알았어야 했는데.
아니면 반지에 담겨있는 것 같은 위치 추적 마법이라도 쌍방으로 해달라고 미리 말해놓을걸!
하지만 뒤늦게 후회해보아도, 단테는 이미 내 앞에 나타나지 않게 된 지 오래였다.
이렇게는 안 되겠다 싶었던 어느 날, 내가 잠들었을 때마다 단테가 찾아온다는 걸 알고 침실에서 밤을 새운 적이 있었다.
자는 척만 하다가는 정말 잠들 것 같으니까 그냥 침대 위에 앉아서 기다려야지. 책을 침대 옆에 쌓아둔 뒤 다 읽을 때까지 잠들지 않으리라 다짐했는데, 동이 틀 때쯤 문 아래로 쪽지가 한 장 들어왔다.
< 내가 잘못했어. 그러니까 밤은 새지 마. >
그냥 어처구니가 없었다. 미안하다는 사람의 태도가 이래?
“잘못했다고 말만 하지 말고 그만 도망 다녀!”
쪽지를 구기면서 문을 열고 소리쳤지만, 역시나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단지 그날부터 나를 살피는 듯한 기척이 더 자주 느껴졌을 뿐.
마음을 풀라는 듯한 선물 공세도, 더 자주 이어졌다.
“…….”
이런 건 왜 주는 건지 모를 만한 것… 예를 들어 보석이나 장신구 따위를 받게 되자, 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상자를 슬쩍 방문 밖으로 밀었다. 필요 없으니 그냥 다시 가져가라는 의미로.
무시할 거면 완전히 무시하고, 또 도망칠 거면 완전히 도망칠 것이지. 눈치 보는 게 더 심해졌을 뿐 모습을 감추는 건 그대로라 답답함만 더 심해졌다.
이대로는 안 돼. 문 앞에 밀었던 상자가 사라진 걸 확인하고, 그 자리에서 다짐했다. 단테를 어떻게든 찾아야 한다고.
짜증이 쌓이다가 분노가 되기 전에 무슨 수를 써야 했다. 아주 잠시라도 단테를 붙잡아놓을 수 있을 만한 수를.
정말 극단적인 방법을 이용해서 단테를 끄집어내야겠다는 생각까지 가기 전에 말이다.
…아무리 나라도 거기까지 가고 싶지는 않았다.
* * *
여느 때처럼 마탑 내부를 탐색, 아니. 산책하고 있었던 날이었다.
단테가 더 철저히 모습을 감추기 시작하면서 점점 옷자락을 보는 일조차 드물어지기 시작하던 시점이었는데, 그날만큼은 무언가 달랐다.
내가 서 있는 곳과 반대편인 복도의 끝, 어떤 형체가 그 주위를 어슬렁거리다 쏙 하고 자취를 감추는 게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언뜻 스쳐 간 시야 사이로, 하얀색의 무언가가 복도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는 게 보이는 듯했다.
무엇인지 제대로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요 며칠 새 단테와의 숨바꼭질에 이골이 난 나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바로 그 옷자락을 따라갔다. 잡는 건 이제 바라지도 않으니까 얼굴이라도 한번 봐야겠다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모퉁이를 돌고 나오는 공간, 아치형의 커다란 창문과 작은 소파가 놓여 있는 곳에 서 있는 사람은 단테가 아니었다.
키가 그보다는 훨씬 작고, 허리께에 흔들리는 푸른 머리카락이…….
“리사?”
며칠간 보지 못했던 말간 얼굴이 뒤늦게 눈에 들어왔다. 무언가 시야에서 사라진다고 하면 단테였던 적이 많아서 순간 착각한 모양이었다.
살짝 열려있는 창문 사이로 바람이 흘러들어오고, 아이가 입고 있는 하얀색 원피스가 부드럽게 살랑거렸다.
리사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띄웠다. 활짝 팔을 벌리며 이쪽으로 달려오려는 듯한 모습에, 나도 반사적으로 그 아이를 안으려고 몸을 낮췄다.
내가 완전히 자세를 잡기도 전에 리사가 그 자리에서 멈춰 섰지만.
“…….”
그 묘한 정지 상태에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를 보고 굳어 있던, 단테와 똑 닮은 리사의 눈동자가 슬그머니 옆으로 구르는 순간, 나는 거의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동안 단테가 도망치는 모습을 너무 자주 본 덕분이었다.
너도 도망가려고 그러는 거구나?
그 깨달음과 동시에 자각할 새도 없이 몸이 먼저 움직였다.
“앗, 언니!”
“어딜 가려고.”
막 왼쪽으로 몸을 꺾던 리사를 거의 옭아매듯 품에 안자, 리사가 짧게 비명을 질렀다. 팔에 살짝 힘을 주면서 허리를 펴는 것만으로도 아이의 몸이 손쉽게 위로 들렸다.
내게 대롱대롱 매달린 리사는 발버둥을 치려는 듯했지만, 그러다간 저도 모르게 나를 때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건지 갑작스레 몸에 힘을 쭉 뺐다.
창문 바로 밑의 소파에 걸터앉아 리사를 내 무릎 위에 앉혔다. 버릇처럼 내 몸에 기대려던 리사는, 이러면 안 된다는 것처럼 돌연 몸을 바짝 긴장시켰다.
아무리 뻣뻣해져봤자 순순히 도망가게 두지 않을 거라는 사실은 변함없었다.
“그렇게 해도 안 놓아줄 거야, 리사.”
“히잉.”
칭얼거리는 소리가 귀엽기는 했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다시 한번 꼬옥 안아주니 리사가 결국에는 긴장을 풀고 편하게 앉는 것이 느껴졌다.
“주인이 언니한테 절대 잡히지 말라고 했는데…….”
“뭐야, 너도 도망 다녔어?”
그냥 바빠서 잘 안 보이는 줄만 알았는데. 차마 어이없음을 숨기지 못하고 리사를 내려다보자, 한껏 울상을 짓고 있는 얼굴이 보였다.
이쯤 되면 괘씸하다. 물론, 리사가 아니라 단테 쪽이.
자기가 도망 다니는 건 본인 의지니까 그렇다 쳐도, 리사한테까지 그렇게 말할 건 또 뭐가 있단 말인가.
마주치자마자 안기려고 할 정도로 날 좋아하는 애인데.
음, 뭐. 볼 때마다 안으려고 하는 점은 단테도 비슷하기는 했다…….
“왜 날 피해야 하는지 이유는 들었어?”
“네.”
리사가 내 눈치를 슬쩍 보더니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언니가 자꾸 뭘 물어보려고 쫓아다니는데, 절대 대답해주면 안 되니까 그냥 만나지 말라고…….”
아, ‘절대’ 대답하면 안 된다고 말할 정도야?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내가 힘없이 웃음을 터트리자, 얌전히 안겨 있던 리사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올렸다.
나를 가득 담은, 호수처럼 투명한 보라색 눈동자가 깜빡거리는 것이 보였다.
“혹시 화났어요, 언니?”
“음, 아니. 리사한테는 화 안 났어.”
“그럼 주인한테는요?”
“단테한테는…….”
화난 지 좀 됐지. 한마디를 더 붙이기보다는 그냥 미소를 짓는 편을 선택했다.
내 얼굴을 힐끗 바라본 리사가 풀이 죽은 얼굴로 고개를 떨궜다.
“화났구나. 사실 그럴 줄 알았어요. 나도, 주인도.”
언니가 화낼 줄 알고 피해 다닌 거예요. 그렇게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죄책감이 가득 담겨있어서, 이 조그마한 아이가 안쓰럽다는 마음이 들었다.
문제가 생긴 건 단테와 나인데 왜 우리 사이에서 마음고생을 하는 건지. 잠시 리사를 부둥켜 안아주자, 리사가 내 품에 가만히 얼굴을 비볐다.
“단테한테만 화난 건데도 속상한 거야?”
“음… 많이는 아니고 조금 속상해요. 저는 주인이 언니를 왜 피해 다니는지 아니까요.”
“그렇구나. 그걸 나한테 말해줄 생각은 없고?”
“……네.”
그럴 줄 알았다. 기대도 안 했기에 실망도 없었고, 단지 리사의 머리를 잠깐 쓰다듬어주었다.
단테도 그렇고, 리사도 그렇고. 숨기고 있는 걸 나한테 말해주지 않으려는 건 잘 알겠는데.
“리사.”
“네, 언니.”
“단테가 왜 나를 저렇게까지 열심히 피할까?”
왜 그게 하필, 끝없이 도망쳐야겠다는 발상으로 이어진 건지는 모르겠다.
이제 순순히 털어놓는 건 바라지도 않는다. 단테가 도망 다녀서 미안하다고 말하며 내 앞에 나타나는 것도, 이제는 바라지 않았다.
물론 단테가 숨기고 있는 게 궁금하지 않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것보다는 일단……. 단테의 얼굴을 잠깐이라도 직접 보고 싶었다.
차라리 정말 알려줄 수 없다고 단호하게 거절을 한다면, 나도 더 추궁하지 못할 텐데. 내가 궁금하다는 이유로 심한 억지까지 부릴 사람은 아니라는 걸, 단테도 나도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단테는 확실하게 거절하기보다 도망을 치는 쪽을 택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자기만 더 힘들 텐데도 말이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심란함이 올라오기도 전에, 리사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내가 당연한 걸 물었다는 듯 천진난만한 목소리로.
“언니가 작정하고 캐물으면 결국 말하게 될 걸 알아서 그래요.”
“…….”
“그리고 추궁을 당하는 게 무서워서? 음, 거절했다가 언니가 상처받을까 걱정돼서?”
이리저리 내뱉던 리사는 한번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내 어깨를 으쓱거렸다.
“나도 확실한 건 모르겠어요. 주인 머릿속은 너무 복잡해. 다른 건 안 그런데, 꼭 언니에 관해서는 생각을 너무 많이 하고 살아요.”
“음……. 그렇구나.”
애늙은이 같은 말이 귀엽다가도, 단테의 감정을 어느 정도 공유받는다던 리사가 이렇게 이야기하니 마음이 복잡해질락 말락 했다.
하지만 마음이 복잡한 거랑 별개로,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나는 어느새 내 무릎 위에서 손장난을 치기 시작하는 리사를 꽉 붙잡았다.
도망가지 말라는 의미였지만, 그냥 안아주는 줄만 알았는지 리사가 나를 마주 안아주었다.
“리사, 내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
“무슨 부탁이요?”
단테가 또 어디선가 듣고 있을 것 같아서 주변을 가볍게 둘러본 뒤, 리사의 귀에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 이야기를 들을수록 리사의 얼굴이 미묘해지는 게 고스란히 보여서 조금 웃겼다.
“어때, 들어줄 수 있겠어?”
“음, 어렵지는 않지만, 그게…….”
들어줘도 되는 거 맞나? 리사가 알쏭달쏭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나는 리사를 고쳐 안으며, 내 쪽으로 완전히 꾀어내기 위해 살살 달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단테가 나를 피해 다니라고 했지, 나를 도와주지 말라는 말은 안 했잖아.”
“음…….”
아까보다는 덜 긴가민가한 표정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단번에 수락의 말을 내주지는 않는다. 아무래도 단테의 사역마인 만큼 완전히 주인의 의지를 반하는 게 거부감이 드는 거겠지.
리사가 더 깊게 생각하다가 이건 안 되겠다는 결론을 내리기 전에, 나는 답을 피할 수 없는 질문을 하나 던졌다.
아무리 어린아이 앞이라지만 이렇게 치졸하게 물어보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진심으로.
“내가 더 좋아, 단테가 더 좋아?”
리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언니요.”
그 안에 담긴 단호함에 저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장난기를 가득 담아서, 나는 리사와 눈을 맞추며 이야기했다.
“그럼 내 부탁 들어줄래?”
단테보다 나를 더 좋아하잖아. 그렇게 속삭이자, 짧게 더 갈등하던 리사는 곧이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대답에 소소하게나마 단테를 이겨 먹은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아진 건 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