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M6.
이웃들이 다 돌아간 뒤에도 단테와 마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5분 남짓한 시간이 흐를 때까지 둘이 한 의사소통이라고는 마샤가 차라도 내올지 물어본 것과, 단테가 고개를 저어 거절의 의사를 내비친 것뿐이었다.
잠시 치열하게 눈치 싸움을 하던 마샤는-마샤 혼자만의 싸움이었지만-결국 침묵을 참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
“……무슨 일로 오셨어요?”
10년 전과 달리, 그리고 아까 그게 놀라게 하지 않으려는 사람 태도냐고 따졌던 것과 달리 어색한 존댓말이 튀어나왔다.
아무리 친구의 남편이라지만 일단 전쟁 영웅이라는 것 같고, 예전과 달리 분위기가 서늘해져 있어서 함부로 말하기가 어려운 탓이었다. 얼굴 자체는 신문의 삽화로 많이 봐서 익숙했으나 딱 거기까지였다.
먼저 찾아온 입장이면서 아무 말 않고 앉아있으니 더욱 서먹하게 느껴졌고.
아까는 어이가 없는 나머지 존댓말을 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지만, 하여튼 그랬다.
그러나 단테의 생각은 조금 달랐는지, 그가 다소 의아한 눈빛으로 마샤를 바라보았다.
“그냥 편하게 말해.”
감정의 고조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 낮고 단조로운 목소리였다.
“에이의 친구잖아. 나한테 예의 차릴 필요 없어.”
“…….”
마샤가 잠시 할 말을 잃은 사이, 단테는 언제 말을 꺼냈냐는 듯 다시금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눈을 내리깔고 다른 곳을 보던 이전과는 달리 이번에는 마샤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마치 다시 질문해보라는 눈빛에 순간 당황했으나, 그렇다고 입을 계속 다물고 있을 수는 없었다. 마샤는 한숨을 한번 쉬고 말투를 고친 채 다시 질문했다.
“무슨 일로 왔어? 에이는 왜 같이 안 왔고?”
혹시 에이한테 무슨 일이 생겨서 혼자 온 건 아니겠지? 문득 불안해진 마샤가 초조하게 단테를 살폈으나, 상대의 얼굴은 단조롭기 그지없었다.
“이쪽으로 보낸 게 있는데 못 받은 것 같아서. 이것만 주고 가려고 혼자 온 거야.”
그렇게 말하면서 기다렸다는 듯이 무언가를 꺼내놓는다. 에이가 무사하다는 생각에 안심하기도 전에, 단테가 건넨 것을 알아본 마샤가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
그가 오기 전까지만 해도 확인해야겠다고 생각했었던, 어느 날부터 집 앞에 놓여 있었던 이상한 상자였다.
배달왔다고 하기에는 수신인도 수령인도 안 적혀 있고, 쓰레기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깨끗했다. 누가 잘못 두고 갔을 수도 있으니 집 앞에 계속 놓아둔 다음 찾아가는 사람이 없으면 뜯어볼 작정이었는데.
“이게 뭔데?”
마샤가 상자를 들고 요리조리 살피는 사이, 단테가 팔짱을 끼고 소파에 편하게 기대며 대답했다.
“마법 통신구.”
“그렇구나, 마법…… 뭐?”
마샤가 고개를 퍼뜩 드니 왜 그러냐는 듯 여상한 시선이 따라붙었다.
마샤의 머릿속에서 소위 부자들이 이용하는 마법 물품들과 그 물품들의 가격이 여럿 스쳐 지나갔지만, 그 생각은 결국 앞에 있는 이가 마탑주라는 사실이 떠오른 순간 끝이 났다.
마샤는 부러 따지지 않고 상자를 탁자에 힘없이 내려두었다. 이 통신구가 자기 집값보다 비쌀 것 같다는 생각을 애써 지우면서.
“이건 왜 보낸 거야?”
“에이가 너랑 연락하고 싶다고 해서.”
“급하게 전해야 할 말이 따로 있거나 이런 건 아니고? 그냥 나랑 연락하고 싶어서 보낸 거지?”
단테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번거롭게 통신구 같은 걸 보내지 말고 그냥 만나러 오면 되는 일 아닌가? 잠깐 그런 의문이 들었으나, 여기까지 올 수 없는 무슨 사정이라도 있겠지 싶었다.
볼일은 정말 그게 다였는지, 마샤가 마법 통신구와 설명서를 꺼내는 것까지 확인한 단테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마 내일 아침쯤 에이가 먼저 연락할 거야.”
“벌써 가?”
오래 있을 거라 생각한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 빨리 갈 줄은 또 몰랐다. 택배라도 전하듯 물건만 주고 가버릴 줄은 더더욱 몰랐고.
그녀가 당황하든 말든 상대는 다시 후드를 뒤집어쓰고는 나갈 채비를 마쳤다.
배웅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주춤거리는데, 단테가 혼잣말이라도 하는 것처럼 작게 중얼거렸다.
“그냥, 오래 머무르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
그 말을 들은 마샤는 멈칫, 일어서려던 자세 그대로 굳었다.
“……그게 무슨 뜻이야?”
“아무것도 아니야.”
단테가 모른 척 몸을 돌리려고 하자, 마샤가 험악하게 인상을 구겼다.
“너, 말 안 하고 가면 에이한테 다 이야기한다.”
말투만 험악할 뿐 협박처럼 들리지도 않는 내용에, 단테는 의외로 재깍 반응했다.
“뭘 이야기할 건데?”
“너 에이 앞에서 내숭 떤다고.”
“…….”
그 말에 말문이 막힌 듯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마샤가 삐딱하게 불량배처럼 쳐다보기를 한참, 이내 작게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숨 쉬면 뭐 어쩔 거야.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얼굴을 더 단단히 굳히는데, 곧이어 들려오는 말에 마샤는 저도 모르게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어찌 보면 내가 전쟁의 상징이나 다름없잖아.”
“…….”
“그런데 내 모습이 계속 보이면, 네가 무슨 기억을 떠올릴지 모르니까.”
마샤는 자신이 무기질적이라고 생각했던 단테의 눈동자가 어느새 곤란하다는 빛을 띠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사실 아예 나타나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았는데, 그렇다고 에이를 보낼 수는 없어서…….”
결국, 여기에 오래 못 있겠다는 게 그녀가 불편할까 봐 빨리 떠나겠다는 뜻이었다는 거다.
그 말을 들은 순간, 여기에만 없을 뿐 단테와 자신의 대화 속에서 꾸준히 언급되던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사람이 희미하게나마 난처한 표정을 짓는 모습 또한.
“아, 진짜!”
참다못한 마샤가 발을 구르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단테가 움찔하는 게 보였지만, 마샤는 차라리 잘 됐다 싶어 그에게 빽 소리쳤다.
“부부가 어떻게 쌍으로 이래?!”
“……뭐?”
“왜 자꾸 배려를 하려고 해, 배려를! 나는 너희가 걱정하는 것 반만큼도 신경 안 쓰는데!”
마샤는 그가 드물게도 놀란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 사실을 신경 쓰는 것보다 지금 느껴지는 답답함이 더 컸다.
부부는 닮는다는 게 이런 거야, 어?
“널 전쟁의 상징이라고 생각하고 무서워한 적 없어. 아니, 오히려 너한테 고마워하고 있다고.”
아까 소리 한 번 질렀다고 색색거리는 숨이 새어 나왔다.
“전쟁을 끝낸 게 너인데 무슨 전쟁의 상징은 전쟁의 상징이야? 아까 찾아왔을 때 너라고 안 밝히고 문만 두드린 것도 그거 신경 쓴다고 그랬지?”
그가 눈을 슬그머니 피하는 것을 보고 마샤는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
“에이도 계속 내 눈치를 보더니, 너희 대체 왜 이래?”
“…….”
“난 에이가 살아 돌아온 게 너무 고맙고, 네가 복수를 대신 해준 것 같아서 고마운데. 왜 자꾸 날 과거에 얽매인 사람으로 만들어?”
그녀가 착잡하게 말하자, 단테가 조심스레 시선을 다시 맞춰오며 물었다.
“…그럼 이제 넌 괜찮다는 말이야?”
“완전히 괜찮지는 않지. 근데 너희가 그렇게 내 눈치를 볼 정도는 아니야.”
절대로. 마샤는 단호하게 손까지 들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배려는 고마운데 그럴 필요 없어. 오히려 너희가 눈치 보면 괜히 더 생각날 것 같거든? 그러니까 어색하게 대하지 말아줄래?”
“……그래, 알았어.”
“에이한테도 똑같이 전해. 내 생각에는 에이도 너랑 똑같이 생각할 것 같아.”
어쩐지 신경 쓰이더라니까. 마샤가 일그러진 표정으로 덧붙이자, 단테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았어, 전해줄게. ……그런데 그 이유만이 아니더라도 빨리 가긴 해야 해.”
“왜?”
마샤의 의아한 얼굴에도 단테는 대꾸 없이 문을 열었다.
“오래 있지 않으려는 이유는 이해했어. 근데 빨리 가야 하는 이유는 뭐야?”
“에이가 지금 혼자 있잖아.”
“걔가 혼자 있는 게 뭐, 아니…… 에이가 어린 애도 아니고.”
거기까지 말하던 마샤는 잠시 말을 멈췄다. 문밖은 분명 깜깜한 밤인데, 몸을 돌리고 그녀를 바라보는 보라색 눈동자는 놀랍도록 선명했다.
티끌 한 점 없는 어둠 속에서 빛나는 눈동자와 표정 없는 얼굴에 목소리가 잦아든 사이.
“다행이야, 네가 괜찮아졌다고 말해서.”
속내를 읽을 수 없었던 무표정은 금세 지워지고, 단테의 얼굴에 흐릿한 미소가 그려졌다.
“하지만 생각해 봐. 네가 아직 10년 전 일이 괜찮지 않고, 어제 일어난 일처럼 생생하게 느껴진다면…….”
한마디 한마디 내뱉을수록 입가의 미소는 짙어졌으나, 마샤는 어쩐지 그가 웃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리고 완전히 안전해진 게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면.”
이유를 알 수 없는 말에 마샤가 잠깐 흠칫했으나, 단테는 단지 고요하게 덧붙였다.
“너라면 불안하지 않겠어?”
* * *
날씨가 조금 흐린 아침, 나는 마샤한테 통신구를 전달했다는 단테의 말을 들었다.
그리고 마샤가 나와 단테에게 뭐라고 신신당부했는지 또한.
“걔 진짜 귀신 같다. 전혀 티 안 냈다고 생각했는데.”
이러면 일부러 마을 사람들 이야기를 꺼내지 않은 의미가 없다. 단테가 잠시 어젯밤 일을 떠올리는 듯 눈을 깜빡거렸다가, 내 말에 작은 목소리로 동의했다.
“음. 눈치가 빠른 것 같기는 하더라.”
아니면 내가 아니라 단테한테서 티가 많이 났나? 간밤에 뭐라고 대화를 나눴는지 모르니까 알 수가 없네. 나는 고개를 기울이다가, 손가락으로 통신구를 가볍게 두드렸다.
“저번에 가르쳐준 대로 쓰면 돼?”
“응.”
그렇게 대답하고는 방을 나가버린다. 음, 평소에는 어떻게든 붙어있으려고 하더니 웬일이지.
친구랑 통화하는 거라고 답지 않게 신경 쓰는 건가, 하며 멀뚱히 문을 쳐다보던 나는 다시 통신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책상에 앉아 단테가 알려준 대로 통신구를 조작하니 금방 불이 들어왔다. 통신구 안에 마샤의 얼굴이 보이는 것을 보고 나는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 에이! ]
“안녕, 마샤.”
[ 야, 내가 네 소식만 얼마나 기다린 줄 알아? 근데 너 괜찮아? 어디 다친 데는 없지? 네 남편이랑은 언제 만났어? 그리고 너 왜 수도에는 안 와? ]
“잠깐만, 좀 천천히 말해 줘.”
오랜만에 보는 마샤는 피곤해 보이는 기색이었으나, 목소리와 표정만은 밝았다. 아무리 괜찮다고 말했다지만 내심 신경이 쓰였는데 다행인 일이었다.
마샤의 질문 하나하나에 대답을 해주면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내가 생각보다 마샤에게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많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만 만나는 건 계속 아쉬움만 남길 것 같다는 사실도.
만나서 이야기할 수 있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그리고 단테랑 내가 수도에 왜 안 가냐면……, 글쎄. 나도 몰라.”
[ 그건 또 무슨 말이야? ]
“단테가 마탑을 벗어나려고 하질 않거든.”
내가 던진 가벼운 질문에 마샤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무언가 떠올린 것만 같은 기색이라 나도 덩달아 입을 다무는데, 마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조용히 내 이름을 불렀다.
[ 에이. ]
“응.”
[ 네 남편이 너무 불안하대. ]
나는 그 말을 듣고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안 그래도 그런 것 같았어. 아니, 모르면 바보지.”
[ 티가 많이 나긴 하더라. ]
오묘한 표정으로 말을 하는 마샤를 바라보다가 책상 위로 턱을 괴었다.
“있잖아, 마샤.”
[ 응. ]
“나는 내가 죽지 않는다고 밝히면 단테가 덜 불안해할 줄 알았거든. 근데 아닌 것 같지?”
[ ……. ]
“다른 이유라도 있는 건가?”
뭐라 대답하지 못하고 나를 살피는 친구의 모습에, 나는 느리게 눈을 깜빡거렸다.
“왜 그런지 알고 싶은데 대답해주지도 않을 테니까……. 어쩔 수 없지.”
나는 생각을 정리하고 마샤를 향해 흐리게나마 웃어 보였다.
“저번에 약속한 대로 단테 끌고 갈게. 그러니까 내가 묻는 말에 대답 좀 해줘.”
단테한테는 물어도 대답 안 해줄 것 같더라. 내가 웃는 얼굴로 덧붙이자, 통신구 속 마샤가 착잡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