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마지막 기억은 분명 창문 틈새로 희미한 푸른빛이 새어 들어오는 어스름한 새벽이었다. 해가 뜨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깜빡 잠이 든 것 같기는 한데, 정확히 언제 잠이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건 지금이 한낮이라는 거.
“음…….”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햇빛이 눈 사이로 들이닥쳤다. 반사적으로 눈을 찌푸리고 고개를 돌리려던 찰나, 어깨 부근에서 무게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따뜻한 체온도.
“…….”
눈을 굴려서 아래를 확인해 보니 단테의 팔이 날 감싸고 있는 게 보였다. 사실, 감쌌다기보다는 얹어놓았다는 표현이 정확했다. 아마 날 안고 있었는데 내가 뒤척이거나 해서 밀려난 거 같지.
밀리는 대로 밀릴 정도면 정말 세상모르고 잠든 듯했다. 아직 잠이 덜 깨 흐린 시야로 조심조심 단테의 팔을 치웠지만, 단테는 여전히 일어나지 않았다.
늦잠을 잔 게 오랜만이다 보니 만사가 귀찮았다. 기상하고 나서 생긴 힘은 간신히 몸을 뒤집은 후에 끝이 났다. 일어나기조차 싫어서 널브러진 자세 그대로 침대 아래에 손을 내리니, 차가운 바닥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만져졌다. 뭔가 부스럭거리고 미끌거리는 게…… 대충 셔츠 같은데.
근데 누구 셔츠인지를 모르겠다. 고개를 바깥쪽으로 돌리거나 팔을 들어 셔츠를 확인하면 될 일이지만, 지금은 그런 일조차 너무 귀찮았다. 셔츠를 만지던 자세 그대로 다시 잠들지 않은 게 대단한 일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이럴 때는 단테가 너무 부러웠다. 얘는 손가락 한번 까닥거려도 뭐가 막 날아다니던데.
하지만 그렇게 마법을 쓸 수 있는 내 남편은 아주 곤히 잠들어 있었으므로, 나는 그냥 이게 누구의 셔츠든 신경 쓰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내 셔츠면 운이 좋은 거고, 단테 셔츠면…… 사이즈가 커서 편하겠지, 뭐.
힘겹게 셔츠를 끌어 올려서 대충 몸에 걸쳤다. 물론 제자리에 팔을 꿰는 데에 각고의 노력이 필요했지만, 결국 제대로 입긴 입었다는 것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헛손질을 너무 많이 하는 바람에 잠이 약간 깬 건 덤이었다.
셔츠를 입고 다시 누워있다가, 이렇게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쯤에야 겨우 몸을 일으켰다. 사실 무리해서 일어날 필요는 없었지만 창밖의 햇빛을 보니 이대로 하루를 날려 먹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이렇게 늦잠 잔 게 몇 년 만이지, 한 백…… 백 얼마쯤 되려나. 상당히 의미 없는 생각을 하며 침대 밑으로 발을 디디는데, 발 언저리에 차가운 감촉이 닿았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방금 일어났고, 아직 생각할 머리가 덜 깨어난 상태였다. 이 말인즉슨, 바닥에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걸 떠올릴 겨를조차 없었다는 뜻이다.
셔츠를 집었을 때부터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떠올렸어야 했는데.
“악!”
예상치 못한 통증이 느껴지자 나도 모르게 새된 비명을 질렀다. 반사적으로 발을 들어서 밑을 확인해 보니, 딱 내가 밟은 위치에 놓인 체스 말이 보였다. 아니, 바닥에 체스 말이 여기 왜…….
잠깐만. 체스 말?
내가 밟은 체스 말이 킹이라는 것을 알아채기도 전, 별안간 내 허리를 강하게 끌어당기는 힘이 느껴졌다.
“…단테?”
눈 깜빡할 사이 시야가 뒤집혔다. 겨우 벗어났던 침대로 되돌아왔다는 사실을 인지한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잠시 눈만 깜빡이다가 고개를 들자, 불안을 가득 담고 나를 응시하는 보라색 눈동자가 보였다.
흔들리는 눈동자로 내 모습을 샅샅이 살펴보다가,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만 짓고 있자 표정을 누그러뜨리며 나를 깊게 껴안았다.
마치 안심이라도 한 태도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뒤늦게 입을 열었다.
“일어났어?”
“……네가 갑자기 소리 질렀잖아.”
“그렇게 크게 지르지는 않았는데…….”
그렇게 말하니 잠깐 얼굴을 보여주는데, 지금 목소리 크기가 중요하냐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음, 바닥에 체스 말이 널브러진 걸 까먹었다가 그대로 밟았거든. 별일 아니었어.”
오늘 늦잠을 자게 된 이유만 떠올렸다면 조심할 수 있었을 테니 확실히 별일 아니었다. 약간 욱신거렸던 발의 통증이 사라지니, 뒤늦게 어제의 일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냥 단테랑 체스 게임을 한판만 하기로 했고, 근데 자기 직전이니까 침대 위에 올라가서 하기로 했으며, 우스갯소리로 진 사람이 이긴 사람 소원을 들어주자는 조건을 덧붙였었다.
그리고 열심히 체스를 두다가…… 아, 근데 누가 이겼지. 이게 기억이 안 나네.
아마 누가 이긴지도 모른 채 체스 게임이 끝난 거 같다. 여유가 없으니 체스판을 고이 가져다 둘 생각도 못 했고, 그래서 그대로 침대 밑으로 엎었고…….
음. 어쨌든 그랬다.
“우리 저번에 카드 게임 하다가도 이러지 않았어?”
“응, 그때는 에이 네가 카드를 밟고 미끄러질 뻔했지.”
“그리고 그때는 네가 이렇게 화들짝 일어나지는 않았었고 말이야.”
그렇게 대답하니 빤히 바라보는 시선이 맞닿는다. 내가 햇살이 내려앉은 단테의 눈가를 가만히 쓸고 있자, 불만이 섞인 듯한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날 깨웠어야지.”
“깨우면, 왜. 치워주게?”
가볍게 던진 말에 단테가 다시 반응했다. 말로 설명할 이유도 없다는 듯 날 껴안고 있던 팔을 들어 손짓하는 것 같더니, 와르륵 하고 무언가 한꺼번에 굴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난장판이었던 바닥이 순식간에 깔끔하게 정돈되고, 나뒹굴던 체스 말들도 모습을 감췄다.
역시 부럽다니까.
“치워줘서 고마워.”
“천만에.”
태연한 대답이 실없이 느껴졌다. 치웠으면 이제 일어날래, 하고 말했다가 목소리가 가라앉았다는 걸 깨닫고 입을 다무는데, 어느새 단테가 나를 다시 내려다보고 있었다.
“……왜?”
“…….”
저 갈등하는 듯한 눈빛 뭐지.
수상쩍은 모습에 슬그머니 눈살을 찌푸리는데, 단테가 다시금 나를 품 안에 넣었다.
“조금만 더 자자. 저번까지는 손님이 있는데 늦잠 자기는 좀 그렇다면서 계속 일찍 일어났었잖아.”
“더 잘 필요는 없는걸, 우리 둘 다 잠이 꼭 필요한 것도 아니고.”
“하지만 자는 게 회복에 도움이 된다며. 어제 힘들었을 텐데…….”
“그만.”
“응…….”
뭉개진 발음으로 대답하는 목소리에는 희미하게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그게 얄미워서 한번 바라봤다가, 눈만 감고 슬쩍 입꼬리를 올리고 있는 모습이 잘생겨서 또 바라봤다가, 결국 단테의 말대로 한숨만 더 자기로 했다.
이불 위에 반짝이며 부유하는 햇빛은 무시하기로 하고 편한 자세를 찾는데, 불쑥 생각나는 게 있어 다시 단테에게 말을 걸었다.
“근데 네 셔츠 되게 크다.”
“아냐, 네가 조그마한 거야.”
“……뭐라고 했니, 지금?”
정말 잠든 건지, 아니면 자는 척하는 건지 단테는 대답이 없었다. 그게 또 어이없어서 단테 얼굴 감상이나 하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 자연스럽게 잠이 들었다.
* * *
이 커다란 마탑에 우리 둘만 남게 된 이유를 간단하게 말하자면 이러했다.
해야 했던 이야기들이 얼추 끝난 후, 이번에는 사람 많은 곳에 가서 살자고 단테가 먼저 말을 꺼냈다. 아마 나를 잃었던 직전의 사건 때문에 외진 곳에 사는 것이 불안한 모양이었고, 나는 그런 단테를 이해했기에 그러자고 대답했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나누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단테가 며칠 동안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더니 대뜸 이렇게 말한 것이다.
“우리 그냥 여기서 살자.”
여기? 사람이라고는 요만큼도 보이지 않는 여기 말하는 건가?
심지어 단테는 수도에 잠깐 내려갔다 오자는 말도 듣지 않았다. 아니, 여기서 살게 되더라도 수도에 한 번쯤은 들러야 할 거 아닌가? 떡하니 자기를 데리러 온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황당한 상황들 사이에서 마치 예상했다는 듯, 릴리는 흐린 미소만 짓고 있었다.
“여기서 사는 건 상관없는데, 한 번쯤 가봐도 나쁘지 않잖아.”
“나쁘지 않지만 좋지도 않지, 에이. 수도에 가면 귀찮은 일뿐이야. 여기만 있는 게 더 안전하기도 하고.”
“야, 너는 마탑주라는 애가 일을 싫어해서 어떡해?”
내 타박에 단테는 웃으며 이렇게 답했다.
“나 일 안 한 지 10년 정도 됐어, 에이.”
자랑이야, 그게? 내가 어이없어하든 말든, 단테는 여전히 웃는 낯으로 서 있을 뿐이었다. 웬만하면 내 말을 들어주던 애가 왜 이렇게 고집을 부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뭐 큰 걸 부탁한 것도 아닌데.
“에이 님.”
계속 미소만 흐리게 짓고 있는,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기미는 안 보이는 릴리가 말했다.
“전에 부탁드린 거 기억나시나요?”
“부탁이요?”
“네.”
그리고 속삭이듯 목소리가 이어졌다.
“마탑주를 수도에 데려가는 걸 도와주세요.”
아, 그 말이 이 말이었구나. 한참 전에 들었던 말이 그때가 되어서야 이해되었더랬다.
* * *
결론만 말하자면, 결국 릴리 일행과 함께 수도로 가는 것은 실패했다. 단테를 물리적인 의미에서 ‘끌고 갈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단테와 나만 남겨진 황량한 마탑에서-단테가 고치기는 했다지만 사람이 적으니 여전히 황량했다-지내게 되었는데, 나는 의외로 나쁘지 않았다고 느꼈다. 아니, 나쁘지 않다는 걸 넘어 오히려 좋았다.
나야 뭐, 여기에 못 본 책도 많고,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남편 얼굴도 있으니 그런데, 정작 여기서 살자고 말한 단테는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모양새였다. 누가 보면 내가 수도로 가지 말자고 한 줄 알겠어.
아까도 그랬다. 애초에 단테가 잠귀 어두운 편은 아니라지만, 그렇다고 작은 소리에 벌떡 일어날 정도는 아니란 말이다.
내가 비명 질렀다고 일어난 것도 그렇고, 살펴본 다음 안심한 것도 그렇고, 일어나지 말라고 다시 재운 것만 해도 그랬다.
그리고 한숨 자고 일어난 다음에는 주위에 둘러놓은 마법진 점검까지.
어제 한 걸 또 하는 단테의 뒷모습을 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저렇게 불안하다는 걸 숨기지도 못할 거면 왜 여기에 있자고 한 거야? 소원대로 사람 많은 곳으로 가면 될 거 아닌가?
그리고 사람 많은 곳으로 치면 수도가 제일이다. 단테도 그 사실을 모르는 건 아닐 텐데.
헤어져 있던 10년 동안, 쓸데없는 데에서 말수가 적어진 남편을 위해 나 혼자 고민해보기로 했다. 무서울 게 없는 단테가 마탑에서 도통 벗어나지 않으려는 이유가 뭐가 있을까.
‘여기만 있는 게 더 안전하기도 하고.’
“아.”
문득 생각난 게 있어 고개를 들자, 또 어떻게 알아챘는지 이쪽을 바라보는 단테의 시선이 느껴졌다.
“왜 그래, 에이?”
마법진을 점검하고 나니 좀 나아졌는지, 아까와 같은 불안감은 말끔히 사라진 얼굴이었다. 노을빛이 스며드는 풍경 사이로 걸어오는 모습은 확실히 전보다 상태가 좋아 보였다.
하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면 또 불안해하면서 날 옆에 끼고 살겠지.
잡힐 듯 말 듯 하는 실마리 사이에서, 나는 단테를 향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단테.”
“응.”
“네 마법 통신구라는 거, 그거 쓰면 마샤랑도 이야기할 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