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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마탑주였다 (74)화 (74/181)

74.

기억은 시간이 지날수록 변색하기 마련이다.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운 순간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충분한 시간이 있다면 잊을 수 있다. 

많은 사람이 으레 그렇게들 말하고, 그 ‘충분한 시간’을 겪어본 단테는 꽤 많은 것을 잊고 살아왔다. 

그런데 왜 너는 잊히지 않는 거지? 

“……테.” 

그녀 자체가 잊히지 않는 것은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그녀로 하여금 느꼈던 감정조차 흐려지지 않는 것은, 단테에게 축복인 동시에 저주였다.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영원한 삶이라고 해야 내가 살아온,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시간을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오래 살게 되었어. 그럼 앞으로도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걸까. 내 옆에 없는 너를 계속 떠올리면서, 오지 않을 사람을 그리워하면서?

“단테.”

이렇게는 못 살 것 같아, 에이. 

하지만 너를 잊고 싶다는 말은 아니야. 당연하지, 네가 나한테 남긴 건 거의 기억밖에 없잖아. 그나마 나에게 남은 거라고는 초라한 돌 하나가 다인데, 너에 대한 기억도 없어진다면 나는…….

“단테!”

단테는 눈을 떴다.

햇빛이 풀밭을 스치고, 바람이 그의 머리카락을 흩트려놓는 어느 오후였다. 딱 기분 좋을 만큼 선선한 날씨, 하늘에서 흘러가는 구름과 멀리서 들려오는 새 소리가 천천히 그의 감각을 깨웠다.

더듬거리며 손이 가는 대로 짚으니, 그는 언제부터인지 나무 그늘에 앉아있는 채였다. 아직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못했음에도 손가락에 스치는 풀잎의 감촉이 유독 선연히 느껴졌다. 

풀 냄새를 맡으며 멍하니 굳어 있는데, 다시금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너 설마 여기서 잠든 거야?”

그 말은 천천히, 하지만 벼락처럼 확실하게 그의 뇌리에 꽂혔다. 

잊히지 않는 목소리, 그리고 잊을 수 없었던 눈동자. 바람에 흔들리는 갈색 머리를 바라보다가, 얼떨결에 눈이 마주쳤다. 단테가 기억하는 그 모습 그대로, 에이는 뚱한 표정을 지으며 그의 앞에 서 있었다. 

그 순간 그가 숨을 멈췄던 것은 분명 누구의 탓도 아니었을 것이다. 

“네가 낮잠 자는 건 처음 보는데. 굳이 숲에서 잠든 이유가 뭐야? 집에 없어서 찾으러 나왔더니만 낮잠이나 자고 있고.” 

“……왜?” 

“그건 내가 해야 할 말 같은데. 난 점심도 못 먹고 너를 찾으러 다녔다고, 단테.” 

왜 네가 이렇게 온전하지?

머릿속에 떠오른 질문에 제대로 된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그렇다고 표정을 갈무리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단테는 오직 에이의 모습만을 살펴보았다.

하얀 팔에는 어떤 생채기도 보이지 않았다. 불에 그슬렸다거나 옷소매가 찢어진 흔적도 없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녀의 얼굴에서 두려움 그 엇비슷한 감정의 편린조차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럴 리가 없었다. 오랜 세월 속에서, 단테는 적어도 그녀가 나온 꿈은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었다. 

에이가 나오곤 했던 꿈에서, 그녀는 빈말로도 멀쩡하지 못했다. 폭탄이 터지고, 누군가가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고, 불꽃이 눈앞을 메우는 꿈에서 그녀는 언제나 같은 결말을 맞이했다. 

꿈에서도 현실에서도, 단테는 늘 에이를 잃은 상태 그대로였다.

하지만 오늘은 왜? 네가 어떻게 이리도 온전하지. 무엇이 달라졌기에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모습을 꿈에서라도 보게 된 걸까.

평소랑 똑같았다고 생각했는데, 몇 날 며칠 밤을 새우다가 제정신이 아닐 때쯤 되어서야 잠에 들었는데 뭐가 달랐던 거지. 단테의 머릿속은 무차별적으로 떠오르는 의문들로 인해 혼란스럽게 섞여들었다.

머릿속을 모조리 긁어 생각해보아도 큰 차이점은 떠오르지 않…….

“아.”

……일리난을.

그래. 일리난을 봤었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환영을 온몸에 두르는 마물. 예상하기는 했지만, 그 마물은 정말로 에이의 모습을 한 상태로 단테의 앞에 나타났었다. 

그리고 자신을 해치지 말라는 듯이, 또한 해치지 못할 거라는 듯이 에이의 얼굴을 하고 그를 향해 웃었다. 

마력에 민감한 그는 그 모습이 모조리 가짜라는 것을 알았고, 그렇기에 그 환각에 속아 넘어가지 않았지만.

끝까지 그 마물을 처리하는 것에는 실패했었다. 일리난이 둔갑한 모습이 어느 평화로웠던 때를 상기시켜 주었기 때문에.

그가 그녀의 옆에 있을 수 있었던 시간을 떠올리게 해줬기 때문에, 그리고 가짜라도 그녀의 모습을 한 무언가를 도저히 해칠 수 없어서.

아무리 진짜가 아니라 그의 기억만으로 이루어진 환영이었다고 해도, 멀쩡한 에이의 모습을 본 것은 뼈에 사무칠 만큼 오랜만이었다.

“야, 너…… 울어?”

그 결과가 이것이다. 꿈에 에이가 온전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

단테는 정말이지, 단단히 미칠 것 같으면서도 이 꿈에서 깨지 않기를 원했다. 

신경을 곤두세워도 경계할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이 순간에 영원히 머무르고 싶었다. 평화라는 단어가 어느 곳보다 어울리는 이 순간에.

무엇보다 지금 단테의 앞에는 그녀가 있었다. 그가 우는 것을 보고 다급하게 몸을 숙이는 그녀가. 

“왜 그래? 어디 아파?”

늘 그랬듯이 에이는 그의 눈물을 닦아주려고 손을 뻗었다. 단테는 대답하지 않고, 그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차가운 손끝에 온기가 닿았다. 꿈에 불과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선명하게 느껴지는 체온이, 그녀의 손에 머무르다가 차츰 그에게로 옮겨왔다. 

손의 감촉과 에이의 걱정스러운 눈빛을 느끼며, 단테는 마구잡이로 할 말을 떠올렸다.

네가 죽었어. 어떤 사람들이 마을에 폭탄을 터뜨렸고, 너를 포함한 모든 마을 사람들이 사라졌어. 마을 하나가 송두리째 없어진 게 전쟁의 시발점이 되어서, 아직도 제국과 왕국은 전쟁 중이야. 웃기지, 이렇게 남 이야기하듯이 말한다는 게. 전쟁에서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인 건 다름 아닌 나일 텐데. 

하지만 그가 동시다발적으로 떠올린 문장 중 어떠한 문장도 그의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단테는 그저 입술만 달싹이며 숨을 몰아쉬었고, 에이는 그런 단테를 잠시간 바라보았다. 옅은 갈색 눈동자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머뭇대는 그를 가만히 담았다. 

마치 기다려주는 것처럼 단테와 함께 침묵하던 그녀가 입을 연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악몽을 꿨어?”

조용한 말에 벼락같이 놀란 단테가 눈을 크게 떴다.

그 반응에 에이는 예상했다는 듯, 그리고 그를 가볍게 타박하려는 듯이 말을 이었다.

“무슨 꿈을 꿨길래 이렇게 놀라. 이런 데서 자니까 악몽을 꾸지. 이거 봐, 식은땀도 나고…….”

“……악몽을,”

“됐어, 말하지 마. 눈빛 흐리멍덩한 거 보니까 아직 잠도 덜 깬 것 같은데, 집에 가기 전에 좀 걷자.”

에이는 단테에게 잡혀있는 손을 뿌리치지 않고, 오히려 그의 손을 꽉 잡으며 잡아당겼다. 여전히 넋이 나간 그에게 재촉하는 말을 건네며 손을 흔들기도 했다. 

그 작은 감각에 겨우 정신이 돌아온 단테가 작은 목소리로나마 대답했다.

여전히, 멍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였다.

“……맞아. 악몽을 꿨어.”

“그럴 줄 알았어.”

“꿈이라고 계속 생각했는데도 현실인 것처럼 생생해서…….”

“어차피 꿈이잖아. 너무 그렇게 신경 쓰지 마.”

다정한 목소리와 함께 그를 똑바로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앞으로는 이렇게 놀라지도 말고.”

그 말에 단테는 눈을 다시금 크게 떴다가, 이내 서서히 표정을 무너뜨리며 웃었다. 

에이는 악몽 따위에 놀라지 말라는 말을 한 거겠지만, 이 상황이 꿈이라는 걸 알고 있는 그에게는 다르게 들렸기 때문에.

그녀의 말대로였다. 에이를 만날 수 있는 밤은 전부 허상에 불과하기에 일일이 놀랄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단테는 영원히 그러지 못할 것이다. 꿈에서 이런 평화로운 풍경을 마주칠 때마다, 그리고 그 속에 있는 그녀를 볼 때마다 일일이 놀라겠지. 

그것은 거의 직감에 가까운 생각이었고, 실제로 그는 그렇게 했다. 버티다 못해 잠이 드는 밤에는 늘 꿈에 에이가 나왔고, 그 배경이 불타는 마을이든, 평화로운 숲속이든 간에 그가 놀라지 않는 일은 없었다. 

“응, 그럴게.” 

“대답은 잘하지.” 

그래도 단테는 자신의 환상 앞에서 그렇게 대답하고, 또 웃으며, 그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오는 꿈을 오래도록 꿨다.

단테가 잠에서 깬 것은, 에이의 손을 계속해서 잡고 있다가 용기 내어 안아달라는 말을 했을 때였다. 

꿈에서도 완전히 닿지 못했다는 사실이 그의 안을 얼마나 참혹하게 헤집어 놓던지.

잠에서 깬 단테는 손쉽게도 슬픔에 빠졌으나, 그날을 기점으로 더 이상 꿈을 꾸는 것을 꺼리지 않게 되었다. 

어떤 식으로든, 끔찍한 풍경 속이든 아무 일이 없는 것 마냥 깨끗한 풍경 속이든 꿈에 그녀가 나타나는 일 자체가 기꺼워졌다. 

마을 사람들 모두가 죽는 모습이 나오는 꿈이어도 결국 그녀를 볼 수 있기 때문에 상관없다는 생각까지 들다니. 단테는 스스로도 자신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자각했고, 사실 사람을 죽이게 되었을 때부터 그렇게 생각해왔지만, 그런 사실들은 이제 대수롭지 않게 느껴졌다.

정상이 아니라면 어떤가, 그가 잘 보이고 싶었던 이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없는 것을. 

그렇게 단테가 꿈에 허덕이는 사이. 시간은 착실하게 흘러갔고, 혼란했던 상황은 점점 정리되어 갔다. 

점차 승기를 잡아가던 제국이 마침내 완전한 승리를 확신하고, 황태자가 제국민들에게 평화를 되찾았다는 연설을 했을 때. 

그리고 에이의 죽음 이후 처음으로 단테가 사람을 죽이지 않은 날, 기나긴 전쟁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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