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이상하게 아까부터 뒷목이 서늘했다.
약간, 그래. 얼마 지나지 않아서 무언가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서늘함이었다. 왜 이러지? 저번에도 말한 것 같지만, 내 불길한 예감은 높은 명중률을 자랑한다.
나는 자그마치 2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단련된 내 감을 믿고-평소에는 부정하기 바빴지만 오늘만큼은 믿기로 했다-차분하게 생각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다짐했다.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겨우 평화로워진 와중에 나를 골치 아프게 한다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어떻게 가만두지 않을지는, 뭐. 차근차근 생각해보면 된다. 방법은 많다. 혼자가 힘들다면 단테한테 부탁해도 되고, 또…….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누군가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에이 누나!”
다급함이 느껴지는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뒤를 돌자, 마구 헝클어져 엉망이 된 붉은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얼굴을 적시는 땀, 흔들리는 눈, 빠른 간격으로 들이마시는 숨. 저 복도 끝에서 나타난 이반은 급하게 달려왔다는 걸 고스란히 보여주는 몰골이었다.
그에 더하여 불안한 표정까지.
“누나.”
겨우 한마디를 내뱉고 다시 숨을 고른 이반이 나를 바라보았다.
“마탑주 좀 말려줘요!”
“…무슨 소리야?”
“마탑주가……. 지금.”
이반이 숨을 내쉴 때마다 말이 끊겨서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단테가 뭐? 뭐, 또.
나는 왜 단테 이름만 나왔는데도 불안해지는 걸까. 도대체 왜?
아, 왜긴 왜겠어.
습관적으로 지끈거리기 시작하는 머리를 애써 무시했다.
“마탑주랑 케이드 형이 싸우고 있어요.”
“어? 아니, 갑자기?”
“이러다가 케이드 형 죽을 것 같아요, 누나. 진짜 죽을지도 모른다고요.”
그렇게 말하는 이반의 눈동자 안에는 두려움과 조급함이 가득했다. 정말로 단테가 케이드를 해치리라 믿는 것처럼.
아무래도 둘이 싸우고 있다는 말이, 가벼운 말싸움이나 신경전을 의미하는 건 아닌 듯했다. 차라리 그런 거라면 나았을 텐데.
분명 아까 동료들과 싸우지 않겠다고 말하던 단테가 생각났다. 내가 하는 말에 그래, 절대 안 싸울게, 하고 대답하던 네 목소리는 참 얌전했더랬다.
그런데, 그냥 싸우는 것도 아니고 아예 반 죽여놓고 있다니.
안 싸운다며, 이 거짓말쟁이야.
아무래도 내가 단테를 너무 쉽게 믿은 모양이었다. 짤막한 생각들이 빠르게 이어지는 와중에도, 나를 바라보는 이반의 눈은 초조함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그 눈을 보고 떠오른 생각은 정말 많았지만,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밖에 없었다.
“……지금 둘이 어디에 있는데?”
뛰어가는 발소리가 다시 복도를 채웠다.
* * *
K5.
시야가 붉은색으로 어지럽게 흩어졌다.
도저히 몇 번째인지 알 수 없는 기침이 또 한 번 목구멍을 넘어오고, 케이드는 그것을 참다못해 뱉어냈다. 쿨럭, 꽤 큰 소리와 함께 입 밖으로 나온 것은 검붉은 피였다. 순식간에 입가가 핏빛으로 물들었다.
사실 입가뿐만 아니라, 그의 몸 전체가 붉은색으로 뒤덮여 있었다. 몸 구석구석을 채우며 너덜거리는 상처들에서는 끊임없이 피가 흘러나왔고, 심지어 복부 쪽에는 꽤 깊은 자상이 남아 있었다. 거대한 칼이 상체를 사선으로 내리그은 듯한 상흔이었다.
온몸이 고통을 호소하는 와중, 과도한 정령 소환의 여파로 머리까지 아파 왔다. 그 덕에 눈앞이 마구 흔들리고, 마탑주의 손 위에 떠도는 보랏빛 마법진이 뿌옇게 보였다가 다시 또렷하게 보이기를 반복했다.
아까부터 오른쪽 팔이 움직이지 않았다. 허리까지 늘어져 있던 하늘색 머리카락은 무자비한 공격을 피하면서 거의 절반 가까이 잘려나갔으며, 안경도 부서진 지 오래였다.
그리고 어쩌면, 방금 벽에 균열이 갈 정도로 처박힌 탓에 갈비뼈가 부서졌을지도 몰랐다.
아니, 부서졌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기침 몇 번 하는 것 가지고 온몸이 아프지는 않았을 것이니.
거친 숨을 내쉬며 주저앉아 있는 그에게, 마탑주가 천천히 다가왔다.
자신의 그림자가 상대를 덮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온 주제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내려다보기만 했다. 그 시선을 견디다 못해 먼저 입을 연 쪽은 케이드였다.
“이제 굳이 책을 보지 않아도 마법 사용이 가능한가 봅니다.”
“…….”
마탑주는 침묵하다가, 이내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원래 모든 마법에 책이 필요한 건 아니야.”
“하긴, 그래. 다른 것도 아니고 공격 마법이라면 당신에게 익숙하기도 할 테니까요.”
전쟁 중에 그렇게 많이 사용했으니. 빈정거리는 말에도 마탑주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이 모습이야말로 비로소 케이드가 아는 얼굴이었다. 공격을 할 때도, 사람을 죽일 때도, 그 어떤 순간에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모습.
저 표정이 바뀌는 꼴을 보고 싶다면 한 사람의 이야기를 꺼내기만 하면 되겠지.
그 사실이 아니꼽기 짝이 없었다. 정말로.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치밀어 올라오는 감정에, 케이드는 누구도 아닌 자신에게 비소를 머금고 싶어졌다.
“용케도 날 봐주고 있군요, 마탑주.”
“…무슨 소리지?”
“모르는 척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날 정말 죽이려고 들었다면 내가 아직까지 살아있지 못했을 거라는 걸 당신도 나도 알고 있으니.”
분명 그를 향해 날라오던 마법은 장난처럼 느껴지지는 않았으나, 동시에 진심으로 느껴지지도 않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를 공격하려는 의도는 확실했으나 죽이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래, 그 덕에 이렇게 숨이 붙어있었지 않은가.
전쟁터에서 그토록 잔인하게 굴었던 사람이었다. 아무리 케이드가 정령을 소환해 대응했다고 하더라도 한 분야의 경지를 뛰어넘은 그에게는 아무것도 아닐 텐데, 마탑주는 케이드의 뼈를 부술지언정 끝까지 죽이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마탑주의 목적은 케이드를 죽이는 것에 있지 않았으니까.
결국 마탑주가 그에게 하고 있는 것은 단순한 화풀이였다.
“내 말에 화가 났습니까?”
빈정거리는 목소리에 마탑주의 눈매가 옅게 찡그려지는 듯했다. 그 반응에 이어지는 또 한 마디.
“그렇다면 당신은 스스로 제 말을 인정한 셈이 되는 거군요.”
이윽고, 마탑주의 얼굴이 천천히 일그러졌다. 그 변화를 확인한 순간 들었던 감정은 유쾌함이었을까, 불쾌함이었을까.
“당신, 헛소리에 화가 나는 사람은 아니지 않습니까.”
케이드가 그 말을 끝으로 작게 웃음을 터뜨리자, 싸늘한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렸다.
“아직 웃을 힘이 남아 있나 보군.”
다시 한번 마탑주의 손 위에 마법진이 나타나고, 마탑주를 올려다보는 케이드의 눈이 긴장감으로 물들었을 때.
차분한 목소리가 그들 사이를 가로질렀다.
“단테.”
그 목소리에 흠칫, 마탑주의 시선이 옆을 향했다.
이내 하얀 손이 마탑주의 손목에 닿고, 난폭하게 일렁거리던 마법들이 순식간에 갈무리되었다. 마치 자신이 마법을 쓴 것을 숨기려는 것처럼 깔끔하고 빠른 무효화였다.
하지만 정작, 고작 손목을 잡는 행동으로 이 상황을 마무리 지은 사람은 이렇다 할 반응조차 하지 않았다.
“그만해. 더 하면 저 사람 죽겠다.”
피범벅인 사람을 앞에 둔 것 치고는 지나친 태연함이었다.
홀린 듯 고개를 올리자 보이는 것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잔잔한 갈색 눈동자.
케이드는 그 눈동자에 깔린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어쩌면 읽고 싶지 않았던 걸 수도 있고.
“안 싸울 거라더니 신나게 싸웠구나.”
케이드를 힐끗거리던 갈색 눈동자가 도르륵 굴러 마탑주를 향했다. 마탑주가 어두운 표정으로 그 시선을 피하기도 잠시.
“일단, 그래.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고.”
에이는 대충 고개를 젓더니 삐딱하게 섰다.
“대체 무슨 일인데?”
“…….”
그 말에 먼저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 *
단테는 끝까지 자신이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말해주려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 일과 전혀 상관없는 이반이나, 황궁에 연락한다고 자리를 비운 릴리에게 앞뒤 사정을 들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내가 이 상황에 대한 요약을 들은 것은 케이드에게서였다.
이 사람에게만큼은 별로 듣고 싶지 않았는데.
“그래서 물어봤습니다. 궁금했으니까.”
“궁금해서 물어봤다고요.”
“예.”
결론부터 말하자면 단테가 화낼만했다. 왜 하필 싸우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은 직후에 이런 사달을 일으킨 건지도 전부 이해되었다.
그렇다고 이 상황이 달갑다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었지만.
모노클은 싸우다가 깨 먹기라도 한 듯 케이드는 가리는 거 하나 없는 맨얼굴이었다. 안경 하나가 사라졌을 뿐인데 뭐가 부끄럽기라도 한 건지, 애써 내 눈을 피하며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려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제 와서 내 눈치라도 보는 건가. 눈치를 보고 있는 게 맞다면, 늦어도 한참 늦었다.
“저기요, 케이드 씨.”
이건 정말 진지하게, 저 사람을 위하는 마음으로 하는 충고였다. 똑같이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두 번째는 없을 테니까.
“선 넘지 마세요.”
당신의 참견은 도가 지나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