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I6.
마탑주의 얼굴이 기대감을 가득 담고 반짝거렸다. 벌써 반응이 궁금하다는 것처럼, 주변까지 환히 밝히는 듯한 눈웃음은 덤이었다.
그 웃음을 본 이반은 조용히, 소름이 돋은 자신의 팔을 문질렀다. 누군가가 기뻐해 주길 바라서 공간을 뜯어 고쳐놓는 마탑주라니. 정말이지 사람을 찢어 죽였다는 명성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었다.
이 정도면 그냥 사람이 바뀐 수준 아닌가? 황당이 반, 경악이 반 담긴 눈으로 마탑주를 힐끔거리다가, 마탑주와 정면에서 눈이 마주쳤다.
왜 대답을 안 하냐는 듯 빤히 마주쳐오는 시선.
그 눈동자에 무언의 압박을 느낀 이반은 황급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 분명 에이 누나도 엄청 좋아할 거예요!”
“그렇지?”
그의 대답에 만족한 듯, 마탑주가 다시 한번 느른한 미소를 내걸었을 때.
이반의 등 뒤에서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여긴 뭐지?”
작은 중얼거림이 들려오고, 누군가가 천천히 안으로 들어섰다. 실내를 꽉 채운 햇빛 탓에 밀색으로 보이는 머리카락 끝이 부드럽게 살랑거렸다.
그 공간에 발을 들이자마자 눈부시다는 표정을 지으며 주춤하던 에이는, 이내 안에 있는 이들을 확인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마탑주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깨달음을 얻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야, 왜 이렇게 눈이 부시나 했네.”
뭐라고?
이반이 자신의 귀를 의심해보기도 전, 에이가 태연한 기색으로 말을 걸어왔다.
“둘이서 뭐 하고 있었어?”
여상히 묻는 말에, 이반은 직전까지 하던 생각-청력 검사를 받아봐야겠다-도 잊어버리고 침묵했다. 자기도 여기서 뭘 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고 대답할 수는 없어서.
마탑주가 누나를 위해서 마법을 쓰는 걸 구경했어요? 음, 뭔가 이상하잖아.
하지만 이반이 대답을 고민하고 있든 말든, 에이는 크게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곧이어 두 사람을 바라보던 시선이 자연스럽게 주변으로 향하고, 잠시 내부를 둘러보던 것 같던 에이가 작게 입을 벌렸다.
잔류하는 먼지가 반짝거리는 정경과, 그 안을 가득 채운 책들. 햇빛을 머금은 갈색 눈동자가 높디높은 책장들을 담았다. 흔치 않게 놀란 표정을 짓던 에이가 천천히 안쪽으로 걸어들어왔다.
천장 끝에 닿을 것만 같은 책들을 확인하려는 듯, 시선은 계속해서 높은 곳을 향한 채였다. 앞에 있는 둘은 신경도 쓰지 않고 오직 위만 바라보는 태도에 이반이 힐끔, 눈을 돌려 마탑주를 살펴보았을까.
마탑주의 표정을 확인한 그는 자신의 시선을 원상태로 되돌려놓으며 생각했다. 괜히 봤다고.
내부를 가볍게 걸으며 구경을 하는 것 같던 에이는 시간이 얼마 지난 후에야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다른 곳은 다 엎어져 있던데 여기만 멀쩡하네.”
툭툭. 에이의 손이 노크하듯 책장에 꽂혀있는 책을 두드렸다.
“처음부터 이랬던 거야, 아니면 방금 이렇게 된 거야?”
투명한 호박색 눈동자가 마탑주를 향했다. 묻는 사람치고는 이미 답을 알고 있는 것만 같은 어조였지만, 그럼에도 마탑주는 순순히 답을 내놓았다.
여전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처럼 웃으면서.
“방금 이렇게 된 거지.”
“원래는 다 부서져 있었어?”
“응.”
“볼만했겠네. 이만한 게 부서져 있었다니.”
에이의 고개가 다시 한번 위를 향하자 마탑주의 표정이 변했다.
“……다시 부술까?”
“뭐? 그런 말이 아니잖아. 기껏 멀쩡해진 걸 왜 부숴?”
“그럼 이대로가 좋아?”
“어, 이대로가 좋아.”
그 말을 끝으로, 잠시 침묵이 찾아왔다. 에이는 입을 다문 채 또다시 눈이 부시다는 표정을 지었고, 그 찡그림에 가까운 표정에 이반도 덩달아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들로서는 어쩔 수 없는 반응이었다.
“……단테. 왜 그런 표정이야?”
“응?”
마탑주가 그 어느 때 본 것보다도 더 환한 웃음을 띠고 있었으니까.
“무슨,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웃고 있잖아.”
에이의 떨떠름한 어조에 이반이 격한 공감의 의사를 표현하기도 전, 예상치도 못한 말이 들려왔다.
“네가 좋다고 말하는 게 좋아서.”
이반은 다시 한번 생각했다. 역시 청력 검사를 받아봐야겠다고.
“그 말만 종일, 수천 번을 들어도 좋을 것 같아.”
그리고 또 생각했다. 두 번 받아봐야겠다고.
결국 전쟁 때 보던 마탑주와 지금 눈앞에 있는 마탑주는 다른 인격을 사용 중이라고 머릿속으로 결론-에 가까운 합리화-을 내리는데, 에이의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들어도 넌더리 난다는 어조였다.
“왜 저래.”
또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 * *
나는 차마 표정을 수습할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단테가 한 말 자체는…… 어찌어찌 이해한다 치더라도, 다른 사람도 같이 있는 자리에서 저런 말을 한다는 게 내 이해의 범주를 벗어나고 있었다.
이반 표정 좀 봐. 안 그래도 어색해하는 것 같던 애가 저런 말까지 들으니 견딜 수 없는 듯했다. 하기야, 그나마 익숙해진 나조차도 왜 저러냐는 생각이 들 정도인데 처음 듣는 사람은 어떻겠니.
하지만 정작, 이반과 나를 차례대로 혼란과 황당에 빠뜨린 당사자는 태연했다.
“진짜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 아니지, 에이?”
오히려 한 점의 표정 변화도 없이 웃는 얼굴 그대로였다.
“응. 그냥 네가 제발 조용히 해줬으면 좋을 것 같아서 한 말이야.”
“어떻게 조용히 해? 다른 때면 몰라도 네가 앞에 있는데…….”
“그만! 알았으니까 잠깐이라도 멈춰. 제발.”
나는 손으로 단테의 입을 막았고, 그제야 단테가 손을 뻗으면 닿을 정도로 가까이 서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얘가 언제부터 내 앞에 있었지? 원래 창문 앞에 서 있었지 않았나?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더 이상 다른 누군가를 세워두고 이런 말을 계속 듣기에는 너무, 너무 쪽팔렸다. 내가 말하는 것도 아닌데 왜 부끄러움은 모조리 내 몫인 건지.
“이반! 아까 케이드 씨가 너 찾던데?”
“아, 그래요?”
당연하지만 거짓말이다. 한 사람을 구해주기 위한 선의의 거짓말. 그 효과는 즉각적으로 나타나, 격하게 이곳에서 탈출하고 싶다는 표정을 짓고 있던 이반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날 찾다니 웬일이래! 전 케이드 형 보러 갈게요! 안녕히 계세요!”
“그래, 잘 가.”
통통 튀는 걸음으로 재빠르게 나가는 모습에 어쩔 수 없이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까지 도망가고 싶었나?
달칵.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고, 금세 내부가 조용해졌다. 이제 좀 낫다 싶어서 단테의 입을 막은 손을 떼었다가,
“부끄러워하는 모습도 진짜 오랜만에 봐.”
다시 막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큰 소용이 없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보라색 눈이 곱게 접히고, 손바닥에 따뜻한 입술이 닿았다. 정말 어쩔 새도 없이 간지러워지는 온기였다.
반사적으로 손가락이 움츠러들었지만, 단테는 내 움직임에 개의치 않았다. 손에서 힘이 빠진 사이 부드럽게 내 손을 떼어낸 단테가 이번에는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눈을 접으며 웃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더 이상 단테의 입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으나, 다행히 단테는 방금 전에 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말을 꺼냈다.
적어도 내가 부끄러워 죽겠으니까 그만 말하라고 외칠 만한 내용은 아니었다.
“여긴 어떻게 왔어?”
“리사가 알려줘서.”
도서관이 어디 있는지를 알려준 건 아니고, 단테의 위치를 알려줬다. 단테한테 물어볼 게 있어서 내가 알려 달라고 부탁했거든.
내 말을 들은 단테가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오늘 아침에 출발한 줄 알았는데 너랑 놀다가 갔나 보네.”
출발했다고? 리사에게는 전혀 듣지 못했던 이야기였기 때문에, 의아함을 담아 단테를 쳐다보았다. 리사가 갈만한 곳이 어디 있다고 그러지?
하지만 그에 대해서 더 캐묻기도 전에, 단테가 내 손을 천천히 잡아끌었다.
“이왕 온 김에 안에도 한 번 구경해볼래? 네가 좋아할 만한 곳이야. 확신해.”
“뭘 믿고 그렇게 확신하는데?”
“너 책 좋아하잖아. 그럼 책이 많은 곳도 좋아하겠지.”
책을 좋아하는 것도 맞고, 책이 가득한 풍경을 좋아하는 것도 맞다. 실제로 내게 안정감을 주는 몇 없는 장소 중 하나가 서점이었다.
그래, 분명 틀린 말은 아니다만…….
단테의 말 속에서 왠지 모르게 느껴지는 위화감에, 잠깐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자 내 눈치를 살피던 단테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좋아하는 거 맞지?”
조심스럽게 물어오는 말에 위화감은 사라지기는커녕 더욱 짙어졌다.
고쳐놓은 걸 다시 부숴놓겠다고 하는 것도 그렇고, 내가 좋아할 거 같은 곳이니까 같이 둘러보자는 것도 그렇고.
내 반응 하나하나에 기뻐하는 것도 그렇고…….
왜 오늘따라 유독 나한테 잘 보이려고 애를 쓰는 것만 같지?
마치 내가 단테의 마음을 알아차린 후와 단테를 받아들이기 전, 그 사이를 보는 것만 같다. 내가 고개를 저으며 단테의 손을 힘주어 잡자, 단테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너 뭔가 바라는 게 있어서 이러는 거야?”
“바라는 거?”
“자꾸 내 눈치를 보는 사람처럼 그러잖아.”
“그런 거 없…….”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하던 단테가 중간에 말을 멈췄다. 그냥 내가 잘못 짚은 건가? 괜한 말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역시나.
“그럼 좋아한다는 말 한 번만 더 해줄래?”
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단테가 은은한 기대감을 담고 나를 쳐다보았다.
어쩐지 눈앞의 얼굴이 얄미워졌다. 잡히지 않은 다른 쪽 손으로 볼을 살짝 꼬집는데, 꼬집힌 얼굴마저도 잘생겨서 한숨이 다 나왔다. 아, 진짜.
“그걸 꼭 들어야겠어?”
“응.”
“정말로?”
또 실없이 웃기는.
당연한 이야기지만, 죽어도 못 해줄 말은 아니었다. 오히려 진심을 담아서 할 수 있는 말에 더 가까웠다.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닌 네가 듣고 싶다는데, 내가 뭘 어떻게 하겠어.
“그래.”
뒷말은, 작은 목소리로 단테의 귀에 속삭여주었다. 아주 작은 목소리였어도 알아듣기에는 충분했는지 단테는 다시금 활짝 웃었다.
말 한마디에 더없이 기뻐하고 있다는 걸 숨기지 않는 얼굴로.
내가 결국 웃어버렸던 것은, 눈앞의 네가 너무 행복해 보였던 탓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