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편이 마탑주였다 (58)화 (58/181)

58. 

단테는 시도 때도 없이 내 머릿속에서 떠오르고는 했다.

나는 단테에 대한 생각들을 부러 외면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술 더 떠서, 억지로라도 단테에 대한 생각들을 하곤 했다. 언젠가 만날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하면서.

그렇게 너를 생각하는 동안, 나는 길을 되돌아갈 뻔하기도 하고 다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위험했다면 위험한 순간들에도 너를 만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내가 죽기 전까지는 너를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여겼으니까.

그래, 전부 내가 죽지 않아서 할 수 있었던 생각이었다.

언제 머물렀냐는 듯 금세 사라져 버리는 상처들. 내가 죽지 않았고, 앞으로도 죽을 일 따위는 없을 거라고 알려주는 몸. 20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나를 쉼 없이 살아가게 했던 것들.

아주 오래전, 이것들을 원망할 때가 있었다. 왜 죽지 않냐고, 앞으로도 이렇게 죽어도 되살아나는 거냐고 자주 울고 했던, 모든 것을 포기하기 전이던 그때.

그때처럼 미워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이 능력은 내게 달갑지 않은 것이었다. 삶을 끊어낼 수 있다면 망설임 없이 그러고 싶었다. 적어도 10년 전, 아니, 너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내가 산산조각이 나 죽은 뒤, 10년이 지난 후 다시 살아났던 그 날.

나는 처음으로 내가 죽지 않는 것에 감사함을 느꼈다.

너를 다시 볼 수 있어서, 되살아난 것으로 너를 찾아갈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

발밑을 메운 것은, 까맣고 까만 마법진들. 그려진 선을 따라 바닥을 깊이 파고 들어간 듯한 그것들은 케이드의 말대로 세상의 모든 마법을 끌어넣은 모양새였다.

그리고 이 마법을 한꺼번에 시전하면 불멸을 얻은 초월자라도 죽을 수밖에 없다고 했었지.

단테가 나를 마물이 만들어 낸 환영으로 착각했던 날, 나에게만 들리도록 작게 속삭였던 문장이 기억났다. 그때는 단테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무언가 숨겨진 의미가 있을 거라고 여겼을 뿐,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못했다.

그야 당연하지, 넌 죽지 않잖아. 죽지 않는다고 네 입으로 직접 말했잖아.

“내가 죽기 전에 나를 만나러 와.”

그런데 그게 단테의 진심이었다는 걸 지금 와서야 깨달아서…….

나를 알아봤든 알아보지 못했든, 네가 죽지 않는다는 사실 하나만 믿고 있는 사람에게 일부러 저따위 말을 속삭였다면 너는 정말 개자식이다. 나를 화나게 하려고 작정한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네가 저런 말을 했다는 것보다 나를 더 끔찍하고 참담하게 만드는 사실이 있었다. 머리가 둔하게 돌아가는 와중에, 그 깨달음 하나만은 선명했다.

아, 그렇구나.

나는 내가 죽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너는 죽을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머리에 차가운 물을 끼얹은 것만 같은 기분에, 나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 * *

I3.

무거워진 분위기 속에, 이분은 어색하게 눈을 굴렸다.

아까 마탑을 에워싸고 있던 ‘그’ 마법진-사실, 마법진이라고 불러도 되는지조차 모르겠다. 그건 거의 자연재해에 가까워 보였으니까-을 본 이후, 이반을 포함한 일행은 그 어떠한 말도 꺼내지 못한 채 침묵을 지키고 있는 상태였다.

사실, 말을 하지 않는다기보다는 한 사람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것에 더 가까웠다. 마탑의 문을 여는 순간까지도 그들은 계속해서 에이를 살폈고, 에이가 무슨 말이라도 꺼내지는 않을지, 아주 작은 소리로 무어라 속삭이기라도 하지는 않을지 주시하며 귀를 기울였다. 차라리 어떤 말이라도 꺼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하지만 에이는 굳은 표정으로 묵묵히 있을 뿐이었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안절부절못하던 이반이 무거운 공기를 견디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

“에이 누나.”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에이가 표정을 알아볼 수 없는 얼굴로 이반을 바라보았다. 평소에도 표정이 없는 편이긴 했지만 지금 이 순간 에이의 표정은 더욱이 낯설었다. 이반은 저도 모르게 긴장하며, 조심스레 말을 이어갔다.

“그,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

“아까 본 마법진…… 그려놓기만 했지, 시전하려는 흔적은 보이지도 않았고. 마탑 주변의 생명체가 죽은 것도 마법진을 그리는 과정에서 스며든 마력 때문일 거라고 했잖아요. 마탑주가 고의로 한 게 아닐 거예요.”

거기까지 말한 이반이, 릴리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릴리에게 말을 이어달라고 부탁하듯 바라보았으나, 저를 쳐다보는 눈빛은 마냥 복잡한 심정을 비춰줄 뿐이었다. 

마법사인 만큼 그 마법진에 이반보다도 더 충격을 받았을 릴리는, 그 어떤 말로도 이 상황을 좋은 말로 포장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하는 수 없이 이반은, 먼저 말문을 연 자신이 스스로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판단하며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솔직히, 말을 이어가면서도 그 스스로도 회의적이었다. 이미 저런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을 때부터 모종의 결심을 한 거나 다름없었을 테고, 에이도 그걸 모를 리 없는데.

하지만 이반은 생각과 모순되는 말을 계속해서 이어 나갔다. 한번 뱉은 말을 멈출 수는 없었으니까.

“마탑주도 아마 진짜로 시전시킬 생각은 안 했을…….”

“이반.”

조용한 목소리에 이반의 입이 딱 다물어졌다.

“위로해주려는 건 고마워.”

“……네.”

“하지만 나는 저 마법진만을 신경 쓰고 있는 게 아니야.”

흔들림 하나 없는 옅은 갈색 눈동자가 이반에게 닿았다.

“단테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런 걸 그려놓았는지에 대해 신경 쓰고 있는 거지.”

에이의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고, 눈빛 또한 투명하고 곧았다. 말을 하는 와중에도 표정 변화 하나 없는 얼굴은 말갛기만 했다.

하지만 그 말을 하는 에이가 마냥 덤덤해 보이지 않았던 건 어째서였을까.

이반이 뭐라 더 말을 잇기 전, 그녀가 다시금 앞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일단 단테를 먼저 찾자. 나도 찾은 후에 어떻게 할지 생각할래.”

“…….”

그 말에 결국 이반도 앞을 바라보고, 정적은 다시 찾아왔다.

* * *

마탑의 입구에서부터 홀까지 가는 길은 생각보다 순탄했다. 쭉 뻗어있는 복도는 그다지 길지 않았고, 가끔 무너지고 부서진 잔해들이 길을 막고 있어서 피해가야 하기만 했을 뿐 큰 위험을 겪지는 않았다.

이상하게도 이반을 포함한 일행들이 지나다니는 길목마다, 누군가 일부러 정리해놓은 것처럼 깨끗했다.

사방의 벽이 죄다 부서져 있고, 본래 마탑을 장식하고 있었을 장식품들이 여기저기서 굴러다니고 있는 꼴을 보면 발 디딜 틈도 없이 길목이 혼잡해야 마땅할 텐데.

잘못하면 다칠 수도 있을 것 같은 날카로운 조각들이 구석으로 밀려 있는 게 묘하긴 했지만……. 마탑주가 일부러 치웠을 리는 없으니, 뭐. 우연이겠지.

편하다면 편하고 찜찜하다면 찜찜한 길이 끝나자, 그들의 앞에는 곧 거대한 문이 나타났다.

여기서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몰라. 이반은 눈앞의 손잡이를 잡으면서, 조금 긴장한 채로 생각했다.

그가 들은 바로는 홀에서 정체불명의 마법들이 날아왔다고 했다. 마탑주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쏜 것 같은, 살기가 가득 담겨있다고 했던 마법들.

도대체 누가 그런 일을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에게 위협이 되리라는 것은 확실했다.

마탑의 입구에 있던 문과 마찬가지로 손쉽게 열린 홀은, 굉장히 엉망이었다. 사방에 찢어진 책들과 종이, 유리 조각들과 먼지들이 널려있었고 간간이 출처를 알 수 없는 핏자국들이 보였다. 

시체는 보이지 않았으나, 핏자국은 있고 시체는 없다는 점이 오히려 더 기분 나쁜 상상을 하게 만들었다.

특히 천장이 눈에 띄게 엉망진창이었다. 매달려 있는 게 신기할 정도로 깨져있는 조명들은 그렇다고 쳐도, 균열이 보이는 천장은 무척 처참하고 위태로웠다. 잘못하다가 다 무너져서 깔려 죽는 게 아닐까, 하고 이반이 생각한 찰나.

그는 균열 사이사이에서 묘한 빛이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어, 케이드 형.”

“무슨 일입니까.”

“저것 좀 보세요.”

이반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케이드가 고개를 돌렸다.

“저기, 균열 사이에 저거……. 얼음 아니에요?”

“…맞는 것 같군요.”

마치 천장을 받치고 있는 모양새로 얼어있는 것은, 멀리서 보아도 분명 얼음이었다. 단단히 얼어있는 얼음은 차라리 광물에 가까워 같아 보였고, 그 무엇보다도 굳세어 보였다.

모두가 그것을 이상하게 바라보고 있던 순간, 이반은 목덜미가 서늘해짐을 느꼈다.

얼음 계열이었지, 아마. 홀에서 날아온다던 정체불명의 그 마법들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긴장감이 이반의 온몸을 휘감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 쨍!

“릴리 누나!”

릴리의 바로 앞에서 얼음덩어리들이 위협적으로 떨어졌다. 산산이 갈리고 조각나며 바닥으로 튀겨진 얼음 파편들은 살갗에 생채기를 내며 지나갔다.

이반은 보호 마법이 단숨에 깨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보호 마법이 이렇게 빠르게 무력화되는 이유는 두 가지. 보호막의 한계치를 능가하는, 강렬한 충격을 받았을 때. 혹은 상대가 강제로 그것을 무력화시켰을 때.

이반이 생각하기에, 지금의 경우는 후자일 것이 분명했다. 누군가가 일부러 보호 마법을 해지한 것이다.

다른 이의 마법을 해지하는 것은 함부로 시도할 수 없는 고위 마법에 속한다. 이런 게 가능한 사람이라면, 결국 마탑주인가? 침착하려고 애를 써봐도 감각이 예민해졌다.

이반이 공격이 날아온 방향을 쳐다보는 것과 동시에, 무언가가 얼음 사이에서 날아올랐다.

얼음이 깨지는 소리와 동시에 얼음 가루들이 허공으로 흩날리고, 조각들이 반짝거리며 날아다녔다. 지금의 처참한 상황과는 대비되는, 마법으로 만들기라도 한 것처럼 절묘하게 아름다운 광경 속.

그 사이로 언뜻 푸른 깃털을 본 것 같다고, 이반이 생각했을 때.

“리사.”

에이가 작게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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