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정말 오랜만에 보게 된 단테는, 그래. 한눈에 보기에도 낯설었다. 나와 처음 만났던 그때에도 보지 못했던 차가운 표정.
너는 내 앞에서 저런 표정을 지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는데.
머릿속이 굳어버리는 느낌에 입을 달싹이던 찰나, 단테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낮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다 죽인 줄 알았는데.”
그 말을 끝으로 손을 뻗는걸, 분명 보았다고 생각했다.
“누나! 정신 안 차리고 뭐 해요, 진짜!”
“아.”
먹먹해진 귓가에 한 번 더 굉음이 울리고, 그와 동시에 이반에게 확 끌어 당겨진 나는 자리에서 억지로 일어났다.
이반의 다급한 목소리와 눈앞에서 연기가 너울거리는 풍경이 전부 거짓말 같았다.
거짓말일 리가 없는데도.
그 순간 눈에 들어온 것은, 까맣게 그을린 땅이었다.
“……저기, 내가 있었던 자리 맞지?”
“네. 안 일어났으면 진짜 큰일 날 뻔했네요, 저 마법 맞았으면 뼈도 못 추렸겠다.”
“저게 무슨 마법인데?”
“저도 몰라요. 근데 음, 딱 봐도 위험한 마법 같은데.”
그러게, 딱 봐도 위험한 마법인데 왜 나는 너한테 이런 걸 묻고 있을까. 무슨 답을 바라고?
답을 알 수 없는 의문들이 뒤섞여 머릿속이 어지러워졌다. 어느새 해가 다 저물어가는 하늘, 검게 불타버린 채로 흩날리는 나뭇잎과 좋게 보아도 엉망인 풍경. 눈앞의 모든 광경이 물에 번진 것처럼 흐릿해지고, 그 와중에 단테만 선명했다.
그래, 아직도 싸늘하게 얼굴을 굳히고 있는 너만.
……다 죽인 줄 알았다는 건 무슨 뜻이지?
“왜 공격했죠? 저 사람, 그러니까…….”
“마탑주?”
“헉, 알고 있네요. 왜 마탑주가 다짜고짜 누나를 공격했죠?”
맨 처음에는 경고만 하려는 것처럼 마법을 빗맞혔는데 누나는 정확하게 공격했어요. 이반이 덧붙인 말에, 나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꽉 쥔 주먹 안으로 식은땀이 맺히는 게 느껴지던 찰나, 이반이 얼떨떨한 목소리로 물었다.
“누나, 마탑주한테 뭐 잘못한 거 있어요? 그래서 누나를 알아보고 저렇게 공격하는 건가?”
“아니지. 날 못 알아봤으니까 공격하는 거지.”
“그게 무슨 말…….”
그래, 단테는 나를 못 알아보고 있었다. 나를 못 알아봤으니 저렇게 굳은 표정을 짓고, 죽일 기세로 공격 마법을 쓰고, 지금도 노려보고 있는 거겠지.
나는 아까 바닥을 구른 탓에 엉망이 되어버린 옷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들어 단테를 바라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단테는 더더욱 싸늘하게 눈매를 굳혔다. 나를 ‘제대로’ 알아보았다면 저런 반응일 리가 없잖아, 실소 섞인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뭐. 예상했던 거였다. 단테에게 나는 죽은 사람이고, 단테가 나를 단번에 알아보지 못할 거라는 생각쯤은 당연히 했었다. 가짜라고 마법을 쏴댈지도 모른다고도 생각했었고.
그래도 너만 볼 수 있다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네가 날 알아보지 못해도, 널 만나기만 하면 전부 괜찮다고 여겨질 거라고……. 그런데 이상하지.
모든 걸 그대로 마주한 지금, 나는 왜 괜찮지 않을까.
깨달음과 의문이 동시에 찾아오자마자, 갑작스레 심장 안쪽이 뜨거운 응어리가 진 듯 울렁거렸다. 아니, 울렁거린다기보다는 부글부글 끓는 느낌이었다. 팔의 상처 때문에 뒤늦게 열이 오르는 걸까. 그럴 리 없는데.
이게 무슨 감정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다지 좋지만은 않다는 건 알겠다. 가슴이 싸늘하게 식는 것과 무언가가 끓어오르는 느낌이 동시에 느껴질 수 있다니, 우습지.
나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뜨린 찰나, 단테의 표정에 금이 갔다.
“……너.”
단테의 표정이 차차 변하다가, 이윽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무어라 말하려 했을 때.
갑작스레 거센 바람이 불어왔다.
“이반!”
“릴리 누나!”
이반의 얼굴이 밝아지고, 릴리의 목소리가 들리는 동시에 녹빛의 반투명한 생명체가 눈앞을 지나갔다. 아까 구멍이 뚫린 곳에서 봤던 정령과 비슷하게 생긴 무언가였다. 그리고 그것과 함께, 릴리와 케이드의 얼굴이 보였다.
저것도 또 다른 정령일까. 케이드가 손을 휘젓는 것과 동시에 사라지는 걸 보니, 정령이 맞는 것 같았다.
거의 날아온 듯한 둘은 땅에 내려앉자마자 우리 앞을 가로막았다. 정확히 말하면, 릴리는 우리를 숨기려는 듯 가로막았고 케이드는 나를 완전히 막아서며 내 시야를 차단했다.
내가 앞을 보기 위해 잠깐 옆으로 비켜섰을 때, 릴리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 * *
L3.
“다짜고짜 공격이라니, 이게 무슨 무례인가요!”
릴리아나는 반사적으로 떨려오는 손을 꽉 눌러 잡으며 외쳤다. 눈앞의 마탑주는 전쟁 때 봐왔던 것과 변함없이, 싸늘한 무표정으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녀는 언제나 저 모습이 낯설었고, 지금도 낯설기 짝이 없었다. 낯선 동시에 두려움이 치솟았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마탑주를 봐왔는데도, 그를 볼 때마다 그녀를 손짓 한 번에 해칠 것만 같다는 불안감을 떨쳐낼 수 없었다.
그렇게 두려워하면 안 된다고 늘 생각했는데도. 릴리아나는 자괴감에 눈을 꾹 감았다가, 이럴 생각을 할 때가 아니라는 걸 상기하고 눈을 또렷하게 떴다.
하필 에이와 이반만 남아 있을 때 마탑주가 나타나다니, 상상도 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자칫하면 여기 있었던 두 사람 모두가 다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반은 강했지만 마탑주에게는 상대도 되지 않았고, 특히 일반인인 에이는…….
그 생각이 미치자마자 릴리아나는 힐끗, 곁눈질로 에이를 살폈다. 다행히도 에이는 흙먼지가 조금 묻어있고 잔상처가 있을 뿐 크게 다치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근데 표정이 왜 저렇지?
릴리아나가 의문을 느끼기도 잠시, 아무 말 없이 서 있던 마탑주가 입을 열었다.
“…마물이 보여서 공격한 것뿐이야.”
“마물이요? 그럴 리가 없을 텐데요.”
마탑주의 말을 이어받은 것은 케이드였다.
“이 주변에는 마물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마차를 세웠습니다.”
“아니, 일리난이 있었어.”
그답지 않은 고집스러운 어조였다.
“지금도 있고.”
그리고 그 어조와 함께 노려보듯 바라본 사람은, 릴리아나의 뒤에 서 있던 사람이었다.
마탑주 못지않게 싸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
“……일리난이라뇨? 저 사람은,”
“내가 마물이라고?”
케이드가 황당해하며 막 입을 여는데, 에이의 조용한 목소리가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태평한 느낌이 들던 평소의 무표정과는 달리, 차가운 기운이 맴도는 얼굴이었다.
“마물?”
에이가 자신이 들은 말을 곱씹듯 다시 한번 중얼거리고, 고개를 똑바로 들어 마탑주를 직시했다. 그리고 그 시선을 받은 마탑주는,
싸늘함을 가장하고 있던 자신의 가면을 깨트렸다.
“뭘 착각하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단테.”
짓씹듯이 나온 목소리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몸을 움찔 떨었고.
“나는 마물이 아니야.”
그를 오롯이 바라보고 있는 눈동자에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너…….”
마탑주의 잇새로 새어 나온 목소리에, 릴리아나는 마침내 생각했다. 그가 저렇게 동요를 하는 것은 처음 본다고.
그는 일리난을 볼 때도 저렇게 울 것 같은 표정을 짓지는 않았는데.
“……누구인데 그 모습을 하고 있어.”
하지만 마탑주는 빠르게 얼굴을 굳히고, 자신의 동요를 감췄다. 그 모습에 에이가 허, 하고 헛웃음을 흘렸다.
“그 모습으로, 그 목소리로…… 말하지 마. 함부로 내 이름 부르지 마.”
마탑주는 최대한 자신의 감정을 숨기려는 듯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결국 애써 정돈했던 보람 없이 다시금 얼굴이 일그러졌다.
“날 그렇게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단 한 명뿐이야…….”
물기 섞인 목소리가 들리는 동시에 확, 보랏빛 바람이 거칠게 불었다. 갑작스럽게 마법을 시전하는 마탑주의 행동에 릴리아나가 당황할 틈도 없이,
“에이 님!”
마탑주가 에이의 앞으로 이동해있었다.
“잠깐, 에이 님. 그 사람한테서 떨어지세요!”
“무슨 짓입니까!”
언제 저렇게 멀어져 있었지? 에이는 분명 그들의 바로 뒤에 서 있었는데, 어느새 손을 뻗어도 닿지 않을 만큼 멀어진 뒤였다. 아마 마탑주가 마법으로 그들을 멀어지게 한 것 같은데,
아.
그렇게 생각한 순간, 마탑주가 에이의 목에 손을 뻗었다.
……목을, 왜. 릴리아나는 새하얘진 머리로 생각했고, 에이의 목이 마탑주의 하얀 손에 붙잡히는 것을 보았다. 그가 마치 힘을 주듯이 팔을 움직이는 것과 동시에, 에이가 얼굴을 한껏 일그러트렸다.
그때서야 릴리아나는, 마탑주가 에이의 목을 조르려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죽이려 하는 거야? 반사적으로 릴리아나가 새된 비명을 지르려고 했을 때.
전혀 예상치 못한, 놀랍도록 태평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단테.”
……목이 졸리고 있다면 절대로 낼 수 없는 목소리.
“정말로 목을 조를 생각이었다면.”
비웃듯이 마탑주의 손을 톡톡 두드리기도 잠시, 에이는 전혀 유쾌하지 않은 어조로 말했다.
“손에 힘을 줘야지.”
“…….”
그리고 마침내, 릴리아나의 눈에 제대로 된 풍경이 들어왔다. 마탑주는 에이의 목을 쥔 채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에이는 담담하게 그 자리에서 서 있었으며, 심지어 마탑주의 손은 덜덜 떨리는 상태였다. 아주 멀리서도, 그 떨림이 눈에 느껴질 만큼 거세게.
곧이어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어쩐지 애절하게 느껴지는 목소리가 들렸다.
“……왜.”
“…….”
“왜, 진짜 같지. 그럴 리가 없는데.”
아주 작은 속삭임이었지만, 폐허에 가까운 처참한 풍경 속에서 누구도 입을 열지 않고 있었기에 그 자리의 모두가 그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마탑주가 고개를 들었고, 릴리아나는 그제야 마탑주의 목소리가 왜 그렇게 떨렸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울고 있었다.
절망과 그리움이 뒤섞인 표정으로, 속절없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때까지 보던 무표정이 모두 위장에 불과했다는 게 느껴질 정도로.
그 표정을 가만히 지켜보던 에이가 입을 열려던 순간,
갑작스레 마탑주의 발밑에 마법진이 떠오르고, 어디에선가 돌풍이 불어왔다. 에이의 목을 감싸고 있던 손이 떨어져 나가는 것과 동시에 마탑주가 뭐라고 중얼거리는 것 같았지만.
그 중얼거림을 듣는 것보다 마탑주가 사라지는 것이 더 빨랐다.
…그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을 보고, 릴리아나는 마치 허상을 본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분명 마탑주는 허상이 아니었고, 순간이동 마법을 써서 그들 앞에서 사라진 것이 분명했다.
폐허를 만든 당사자가 떠난 그 자리, 남은 네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로 한참 동안 서 있었다.
영원할 것 같은 고요 속에서, 처음으로 적막을 깬 것은 다름 아닌 에이였다.
“도망쳤네요.”
감흥 없는 목소리로 한 마디를 내뱉은 에이는 몸을 돌려 그들을 바라보았다.
지고 있는 태양을 등지고 서서, 노을의 붉은빛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말하는 그 모습은 마치.
“그렇죠?”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