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L2.
“마탑주의 심경에 변화가 생긴 것이 분명해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숲에 들어가기 전에 보았던, 아주 거대하고 새까맣고 뻥 뚫린 구멍. 그리 깊지는 않았지만, 워낙 넓어서 빠지면 다시는 나오지 못할 것처럼 보이던 그 구멍을 떠올리자, 릴리아나의 입술이 혼란을 담아 꾹 맞물렸다.
도저히 같은 인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힘에 본능적으로 두려움이 치솟았다. 하지만, 그녀는 이 두려움을 이겨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정면으로 마주쳐야 할 사람의 흔적만을 보고 피하고 싶어서야 되겠는가.
“그 구멍과 숲 모두에서, 마탑주가 일리난을 모조리 죽인 흔적이 있다고 했죠.”
“예, 하지만…….”
하지만 일리난은. 케이드가 망설이듯 말을 덧붙이자, 릴리아나는 복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들은 전쟁 중에도 여러 번 일리난과 마주친 적이 있었고, 당연히 마탑주가 일리난을 마주칠 때 어떻게 반응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그들의 기억이 맞다면, 분명히 마탑주는 단 한 번도.
일리난을 공격하지 못했는데.
……물론, 마탑주의 입으로 일리난을 공격하지 못한 이유에 대해 들은 적은 없었다.
그러니 그들이 추측할 수 있는 거라곤, 마탑주가 일리난을 공격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못한’ 것이라는 사실 뿐.
“어쩌다 일리난을 죽이고 다니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위험한 상태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가 구 마탑에 자진해서 갇힌 이후로는 전혀… 이런 일이 없었는데.”
결국 릴리가 참아왔던 불안함을 내비치자, 케이드가 잠시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겨우겨우 말을 꺼냈다. 말을 꺼내는 그도 영 찝찝하다는 얼굴이었다.
“릴리 님, 저는…….”
“예.”
“상황이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10년간 마탑주의 행적과 지금이 너무 달라요. 현재 급작스러운 움직임을 보이는 만큼… 이성을 잃기 직전의 상태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
“그리고 그가 이성을 완전히 잃는다면, 더할 나위 없이 위험하겠죠.”
그렇게 된다면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하죠? 차마 그리 말하지는 못하고, 그녀는 입을 다문 채 그저 고개를 숙였다. 아름다운 얼굴 위로 어두운 음영이 드리우고, 금세 비통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정말 만약의 경우에 마탑주가 완전히 이성을 잃는다면, 아무도 그를 말리지 못할 것이라는 걸.
그러니 가장 안전한 방법은, 아직 대화가 통하는 그를…….
릴리아나는 눈을 꾹 감았다. 새까만 시야 사이로 붉고 검은 전쟁터의 풍경이 지나가는 듯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서 있던 마탑주의 모습도.
……과연 그를 해칠 수 있을까?
“하지만 최우선으로 해야 할 것은 대화와 교섭이어야 합니다. 마물의 생태계를 교란하는 것을 멈추고, 마탑주의 의무를 행해야 한다고 설득해보는 것이 먼저겠지요.”
“…예,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에이 님이 말하신 대로, 마물의 목에 마석이 박혀 있던 것 또한……. 오직 마탑주에게만 물어볼 수 있을 테니까요.”
릴리아나는 떨리는 목소리를 가라앉히기 위해 심호흡을 했다.
“설득이 통하지 않더라도 대화 이상의 수단을 쓰는 건 최후의 방법이어야 해요. 우리를 위해서라도.”
케이드가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거렸고, 릴리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사방이 나무로 둘러싸인 풍경 속, 그곳에서 보는 저녁 하늘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마차에 두고 온 이반과 에이가 떠올라, 슬슬 돌아가자고 말하려 했을 때.
갑자기 어디선가 굉음이 들렸다.
“……!”
“릴리 님!”
- 쾅!
그들이 서 있는 땅이 울릴 정도로 커다란 소리가 난 직후, 예상치 못한 흔들림에 비틀거린 릴리아나는 진동이 가라앉자마자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들자마자 시야에 들어온 것은, 저 멀리 하늘보다도 더 까만색으로 피어오르는 잿더미들.
마차를 세워두고 온 방향이었다.
“케이드!”
“젠장, 저쪽은…….”
케이드는 초조한 얼굴로 중얼거리더니 주먹을 꽉 쥐었다.
“…근처를 지나간 것 같더니 몸소 나타나실 줄이야. 바람의 정령을 소환하겠습니다, 릴리 님.”
“최대한 빨리 가야 해요. 이반과 에이 님이…….”
“네, 알겠습니다.”
케이드가 손가락을 튕기는 것과 동시에 녹색 빛이 그들 사이를 메웠다.
* * *
“…그때 딱! 케이드 형이 그러는 거예요. 이 탁자 위에 있던 빵 어디 갔습니까? 유통기한이 일주일 지난 거였는데.”
“와. 일주일?”
“네. 저는 그냥 빵에서 눅눅한 치즈 냄새가 난다고만 생각했어요.”
원래 그런 빵인 줄만 알았죠. 애먼 돌을 차면서 퉁명스럽게 덧붙이는 말에, 나는 잠시 웃음을 터뜨렸다. 아, 전쟁 회고담을 들으며 웃는 건 좀 그런가.
전쟁이라고 하면 절망이 가득 찬 음울한 상황이 생각나기 마련인데, 이반이 해주는 이야기들은 그런 진지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전쟁의 참혹함도 이반의 순수함에 희석되기라도 한 듯.
“먹고 아프지는 않았어?”
“다행히 제 위장이 상상 이상으로 튼튼해서 크게 아프지는 않았어요. 케이드 형은 주인을 닮아 몸도 무식한 거라고 욕했지만.”
“그 사람은 맨날 그런 식으로 말하더라.”
“케이드 형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어요. 또 전에는…….”
조잘거리며 이어지던 말이 급작스럽게 뚝 끊겼다. 갑자기 찾아온 침묵에 의아함을 느끼다가, 이반의 얼굴이 아까와 달리 사뭇 굳어져 있는 것을 보고 미간을 좁혔다.
“왜 그래?”
“……어디서 탄내 나지 않아요?”
“탄내?”
탄내라면 아까 그 구멍에서 맡기는 했지만, 지금은 글쎄. 나는 잘 모르겠다며, 옷에 잿더미 냄새가 밴 거 아니냐고 대답하려 했다.
갑자기 무언가가 터지는 듯한 굉음이 들려오지 않았다면 분명 그렇게 대답했겠지.
“에이 누나, 숙여요!”
“무슨,”
이반의 다급한 외침에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는 순간,
- 쾅!
귓가를 울리는 커다란 소리와 함께 등 뒤로 뜨거운 공기가 스쳐 지나갔다.
갑작스럽게 고개를 숙인 탓에 시야가 흔들려서, 마치 온 세상이 뒤집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려 주변을 둘러보자, 나무 사이에서 새까만 연기 같은 것이 피어오르고 있는 게 보였다. 동시에 탄내가 훅 끼쳤다.
내 눈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방금 불타는 나무가 내 등 뒤로 날아간 것 같은데.
“빨리 마차로 숨어요!”
미처 상황 파악을 하기도 전, 이반이 마차에서 자신의 검을 꺼내 들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지만, 뭐가 됐든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달은 나는 마차로 뛰어들어가 문을 닫고 문고리를 꾹 쥐었다.
놀란 심장이 쿵, 쿵, 소리를 내며 조급하게도 뛰었다. 나도 모르게 꾹 쥔 주먹 사이로 식은땀이 맺혀, 손이 서늘한 동시에 뜨거워졌다. 목 뒤를 스치고 지나간 열기가 아직도 그 자리에 남아 있는듯했다.
또 마물인가? 마물이겠지. 이 산길에 다른 사람이 지나갈 리는 없으니…. 아니, 잠깐.
릴리와 케이드는 어디에 있지?
두 사람에게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나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와 동시에 문고리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이 풀려서, 마차 문이 한 차례 끼익하는 소리를 내며 열렸을까.
나는 급작스럽게 치솟아 오르는 불안감에 마차 밖으로 몸을 굴렸다.
“에이 누나!”
“아, 이런 미친…….”
- 쾅!
또다시 굉음이 들리고, 나는 흙먼지 속에서 사정없이 구르다가 간신히 멈추며 콜록거렸다. 구르면서 문짝에 긁히기라도 한 건지 팔에 생채기가 가득했다. 아니, 그것보다는 빙글빙글 도는 머리가 더 문제였지만.
바닥에 엎드려 쓰러진 채로 보는 풍경은 온전치 않은 시야로 판단하기에도 말이 아니었다. 불과 몇 분 전까지는 엄청 평화로운 풍경이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나무도 불타고 마차도 쓰러져있고…….
아, 젠장. 마차 벽에 구멍이 뚫려 있다. 정확히 내가 있던 그 자리에.
미쳤나 봐, 진짜. 마차 문이 열린 순간 당장 몸을 굴리지 않았다면 분명 몸이 뚫려서 죽었을 것이다. 고작 죽지 않았다는 것에 감사함을 느껴야 하는 상황에, 환멸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따끔거리는 손바닥을 무시하고 간신히 상체를 세웠을 때.
저 멀리 떨어진 거리에 있는 누군가가 시야에 들어왔다.
우리 일행은 아닌 것 같은, 어두운 나무들 사이에 서 있어 얼굴을 잘 알아볼 수 없는 사람.
하지만 나로서는, 알아볼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이 긴 여행길에서 내 생각을 온통 지배하고 있던 사람이니까.
이번에는 가짜가 아니라고,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단테.”
신음에 가까운 소리가 내 입에서 흘러나왔다.
* * *
D10.
옅은 갈색 눈을 본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