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어울리지도 않게 왜 보석이 박혀 있지?
마물과 전투를 벌이는 중인 이반과 릴리는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았지만,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보고 있는 나에게는 아주 선명하게 보였다. 나도 모르게 그 보석에 계속해서 시선을 주다가, 저것의 모양이 보석보다는 차라리 돌처럼 투박한 모양새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리고 저 돌 안에서 빛이 깜빡거리며 점멸하고 있다는 것도.
그냥 평범한 보석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하는 순간,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기억이 있었다.
“릴리!”
내가 소리높여 외치자, 마물의 눈을 향해 화살을 쏘던 릴리가 금세 내 쪽으로 달려왔다.
“부르셨어요? 혹시 다치신 건…….”
“아니, 아니에요. 다친 게 아니고.”
빠르게 돌아가는 머릿속을 정리하며, 나는 최대한 차분하게 대답하려고 노력했다. 은연중에 내 생각이 틀리면 어쩌지 하는 초조함이 느껴졌으나, 마물이 계속해서 재생하는 지금 상황에서는 뭐라도 해보는 게 나았다.
“혹시 마석 가진 거 있으세요?”
“마석이요?”
다소 뜬금없는 내 말에도, 릴리는 사뭇 진지한 얼굴로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자신의 품을 뒤적거렸다.
“통신 마법이 새겨져 있는 마석 하나와 혹시 몰라서 챙겨온 예비용이 하나 있기는 한데……. 혹시 이건 왜 찾으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릴리가 손바닥보다도 더 작은 마석 두 개를 내밀었다. 릴리의 손바닥 위에 놓인 주홍색과 남색의 마석을 짧게 살피곤, 릴리를 향해 말했다.
“릴리. 저 마물의 목에 마석이 박혀 있는 것 같아요.”
그렇게 이야기하자 릴리가 곧장 고개를 돌려 마물을 바라보았다. 손가락으로 마석이 박힌 곳을 가리키니, 릴리도 그것을 발견한 듯 작게 침음했다.
“…에이 님 말씀대로네요. 일리난의 몸에 마석이 있다는 건 들어본 적 없는데, 마치 누군가 일부러 박아넣은 것처럼 보여요.”
“혹시 저 마석과 일리난이 갑자기 강해진 것 사이에 연관이 있을까요?”
릴리는 짧게 고민하다가, 이내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안에 무슨 마법이 새겨져 있는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지만, 충분히 가능성 있어요.”
그렇다면, 마석을 깨트리면 마물도 나약했던 원래의 상태로 돌아올까? 확신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으나 시도할 가치는 있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 뭐라도 해봐야지. 저대로 릴리와 이반만 마물과 싸우게 둘 수도 없고.
나는 잠시 남색 마석을 꾹 쥐었다가 손에 힘을 풀었다.
“만약에 저게 마석이라면, 릴리.”
그 순간, 내게 이 사실을 가르쳐주던 누군가의 다정한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 목소리를 다시 듣지 못하게 된 날도 떠올랐고, 그다음 날 벌어진 일도 떠올랐다.
하지만 그 모든 기억 속에서, 나는 다른 게 아닌 오롯이 하나만 생각하려 애쓰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알기로는… 마법이 새겨진 마석끼리 부딪치면 어느 쪽이든 깨지는 거로 알고 있어요.”
내 말을 들은 릴리의 초록빛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그리곤 곧바로, 릴리가 작게 감탄하는 듯한 소리를 냈다.
“마석은 제 마법 계열에서 잘 쓰이지 않아 잊고 있었는데, 확실히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 있는 것 같아요.”
그렇다면. 릴리가 한껏 낮아진 목소리로 덧붙이며 마물의 목을 바라보았다.
“제가 가지고 있는 마석을 이용해서, 저 마물의 목에 달려 있는 마석을 깨트려야겠네요.”
“네.”
하지만 어떻게?
나무보다도 키가 큰 마물의 목에 박힌 마석과 릴리의 마석을 무슨 수로 부딪치게 할 수 있을까. 마물의 키를 가늠해보기 위해 시선을 돌리려던 찰나, 릴리의 손에 들린 활이 보였다. 끊임없이 반짝거리며 존재감을 과시하는 그것이.
머리를 제대로 거치지 않은 말이 곧장 튀어나왔다.
“화살에 마석을 묶어서 쏘는 건 어떨까요?”
내 말을 들은 릴리가 온화한 표정으로 활시위를 튕겼다.
“좋은 생각이에요, 에이 님.”
활을 쏘는 당사자가 좋은 생각이라고 하니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이제 더 망설일 것도 없겠다, 로브를 고정하던 끈의 일부를 잘라내 릴리의 화살에 단단히 묶었다.
“……거리가 너무 먼 것 같은데. 괜찮으시겠어요?”
작은 목소리로 덧붙인 염려에, 릴리가 웃었다. 그건 분명 릴리가 늘상 짓던 미소와는 결이 다른 웃음이었다.
지금까지 본 적 없는, 마치 악동 같이 느껴지는 미소.
“사실 이건 비밀이었지만, 에이 님께만 알려드릴게요.”
소곤거리는 듯한 목소리. 곧 초록색 눈동자가 온전히 일리난의 마석으로 향하고, 활시위가 천천히 당겨졌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정확하게 조준이 되었을 때쯤.
“저는 활을 처음 잡은 순간부터 목표물을 놓쳐본 적이 없답니다.”
확신에 찬 목소리와 함께, 화살이 공기를 가르며 날아갔다.
《 ……! 》
마물의 눈이 홉떠지고, 그 형체가 거대한 몸통을 무너뜨리며 그 자리에서 내려앉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 * *
I1.
이반은 완전히 지쳐서 땅바닥에 눕다시피 주저앉았다.
“와, 진짜. 저 마차까지 못 걸어가겠어요.”
반쯤은 엄살에 가까웠지만, 이런 말을 할 정도로 힘들다는 마음만큼은 진심이었다. 숲 한 번 잘못 들어온 것 가지고 오늘 얼마나 여러 차례 마물을 베고, 넘기고, 찔렀는지.
곁에 서 있던 에이가 그를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며 말을 건넸다.
“업어라도 줄까?”
“누나가 저를요?”
“응.”
이반은 웃음을 작게 터트렸다. 차라리 장난스럽게 이야기하면 덜 웃기기라도 할 텐데, 저 누나는 늘 태연한 얼굴로 저런 농담을 해서 더 우습게 느껴지곤 했다.
“어떻게 업을 건데요? 제가 약간이지만 누나보다 키는 더 크지 않나?”
“그건 매달리는 네가 생각해 봐야지.”
이반이 이번에는 크게 목소리를 높이며 웃었고, 그의 옆에서 쪼그려 앉아있던 에이는 곧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잠깐 주변을 둘러보는 것 같던 에이의 갈색 눈동자가 곧 어딘가로 고정되었다. 가만히 관찰하듯 그곳을 응시하던 에이는 곧 이반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저 사람은 괜찮은 거 맞나?”
“누구요? 아, 케이드 형이요?”
에이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방금까지 에이의 시선이 향했던 곳을 그대로 따라가 보자, 사뭇 얌전한 태도로 릴리에게 상처를 치료받고 있는 케이드가 보였다.
“뭐……. 숲을 헤매다가 나무에 부딪혀서 생긴 상처라는데, 괜찮지 않을까요? 적어도 누나보다는 튼튼할걸요.”
“뒷말만 더 안 붙였으면 그렇구나, 해 줬을 텐데.”
에이가 마치 꼬집기라도 할 듯이 다가왔기 때문에, 이반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그녀를 잽싸게 피했다. 물론, 얼굴 한쪽에는 실실거리는 웃음을 매단 채였다.
더 쫓아갈 생각이 없다는 듯 그대로 팔을 늘어뜨리는 에이를 보고, 이반은 밝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왜요, 혼자서 헤매고 다녔다니까 걱정스러워서요?”
이반의 물음에 에이는 진심으로 의문스럽다는 듯이 대답했다.
“내가 저 사람을 왜 걱정해?”
비꼬는 말이 아니라 정말 왜 그래야 하냐는 투였다. 에이의 반응에 도리어 멋쩍어진 이반은 잠시 눈을 굴렸다.
하여튼 둘이 사이가 별로 안 좋은 것 같단 말이지.
“음, 아니다. 생각해보니 걱정을 좀 하긴 했네.”
“정말요?”
“혹시 크게 다쳐서 경황이 없는 상태일까 봐 걱정했거든.”
이반이 믿지 못하겠다는 눈초리를 쏘아댔지만, 에이는 그저 심드렁한 표정으로 어깨만 한번 으쓱 올릴 뿐이었다.
“정신은 차리고 있어야 말할 수 있을 거 아니야. 자기가 숲에서 뭘 봤는지.”
건조하게 대답한 에이는 곧 기지개를 켰다. 시종일관 무심한 태도를 유지하는 에이가 지나치게 냉담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이반 역시 케이드의 이야기가 궁금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들 중, 마탑주의 흔적을 발견한 것은 케이드 밖에 없었으므로.
‘마탑주가…… 이 근처에 있는 듯합니다.’
마물을 쓰러뜨린 직후, 큰 소리를 듣고 이쪽으로 달려온 케이드가 간략하게나마 자신이 무엇을 보았는지 이야기했다.
‘마치 인위적으로 생긴 듯한 공간에 일리난의 사체들이 들어차 있었습니다. 가슴에는 전부 얼음 조각들이 박혀 있더군요.’
그리고 마침, 릴리와 케이드가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했다.
“마탑주의 마력이 선명하게 느껴지던 걸 생각하면, 그 자리에서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모습은 보지 못했고요.”
“……네, 죄송합니다.”
죄송할 일은 아니에요, 케이드. 릴리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지만, 케이드의 얼굴은 여전히 어둡기 짝이 없었다.
저 형이 저렇게 풀 죽어있는 듯한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은데. 마탑주를 보지 못했다는 이유로 저러는 것 같지는 않고, 뭔가 다른 일이 있었던 듯했다.
무언가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를 것 같은 기분에, 이반은 에이와 케이드를 번갈아 보았다. 이반의 단순한 머리가 ‘차라리 당사자들한테 물어보자!’ 하는 결론을 내리기 전.
“일단 그에 대한 이야기는 숲에서 빠져나간 뒤 하죠. 이반, 그리고 에이 님. 이제 마차로 돌아가요.”
“네.”
릴리가 그들을 부르고, 이반의 생각 또한 거기서 끊겼다.
숲을 빠져나가는 길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그들이 환각에 빠져 같은 자리를 뱅뱅 돌았던 것에 비하면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짧은 거리였고, 그렇기에 일행들은 속도를 늦추는 일 없이 계속해서 나아갔다.
바깥과 가까워질수록 안개가 자욱했던 흐린 풍경이 점차 사라지고, 순식간에 공기가 맑아졌다. 한동안 숲은 별로 들어가고 싶지 않다고, 이반이 어렴풋이 생각한 시점.
그의 왼쪽에서 걸어오고 있던 에이가 갑자기 뒤를 돌았다. 갈색 머리카락이 살랑거리면서 흔들리고, 곧 에이는 그 자리에 멈춰섰다.
뒤에서 뭐라도 발견했나? 그녀가 뒤처지는 것을 확인한 이반이 에이를 불렀다.
“누나?”
“……와.”
뒤를 돌아보니, 무언가에 정신이 팔려있는 에이의 모습이 보였다. 나무 사이에 가려진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누나, 왜 그래요?”
이반이 의아함을 느끼고 에이에게 다가가려고 하자, 에이가 손사래를 치며 이반 쪽으로 다시 돌아왔다.
뭔가에 단단히 질렸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별거 아니야. 또 일리난이 있어서 그래.”
“진짜요?”
“응.”
이반이 눈을 크게 뜨고 에이가 있던 방향을 바라봤으나 그의 시야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저곳에 일리난이 남아 있었나?
의아함에 연신 뒤돌아보았지만, 이반의 눈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저놈의 환영 보여주는 능력만 아니면 이렇게 짜증 날 일도 없는데. 빨리 가자, 이반.”
“음, 네. 알았어요.”
이반은 에이가 잡아끌 때까지 그쪽을 확인하다가, 이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다시 발걸음을 떼었다.
환영을 봤다고?
분명 일리난은 거리가 어느 정도 가까워져야지만 환영을 보여주고, 에이가 환영을 봤다는 건 그녀가 일리난과 꽤 가까이 있었다는 말인데.
에이가 일리난의 환영을 봤다면 이반에게도 일리난이 보였어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일리난의 형체는커녕, 마물의 기색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에이는 무얼 봤단 말인가?
의문이 머릿속에서 가득 찼으나, 곧 변종이라고 부를 법한 일리난을 해치웠다는 것을 다시 상기시킨 이반은 생각을 끊어냈다.
거리와 상관없이 환영을 보여주는 변종도 이 숲에 있나 보지 뭐. 끊임없이 재생하는 일리난도 있는 마당에 환영을 자유자재로 부리는 변종이 없을 이유가 없다.
꺼림칙하게 따라붙는 의심을 가볍게 넘기면서 이반은, 저 멀리 앞서가는 일행들의 뒤를 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