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마치 뼈가 부러지기라도 하듯, 경쾌한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단테의 얼굴로 눈을 크게 뜨는 듯하던 그것은, 내가 후려치자마자 금세 모습을 무너뜨리고 다시 안개처럼 일렁거리며 형체를 흐렸다.
환영이 사라지는 모습이 내심 통쾌해서 한 번만 더 때릴까 고민했던 것도 같다.
하지만 그 짧은 고민에 결론이 나는 것보다, 폭삭 주저앉은 일리난의 뒤쪽에서 무언가를 발견하는 게 먼저였다.
무언가 깨지고 무너지는 소리와, 릴리의 목소리가 섞여서 들려오던 곳.
그곳은 마치, 이 공간의 균열처럼 보였다.
표현이 너무 모호하지만, 저런 표현 말고는 뚜렷하게 설명할 수가 없었다. 공중에 금이 간 자국이 있었고, 그 사이로 숲의 풍경이 언뜻 비치는 듯했으며, 심지어 어떤 소리까지 들려오고 있었다. 희미하게 새어 나오던 목소리는 가까이 다가갈수록 점점 또렷하게 들려왔다.
‘방금 무슨 소리 들리지 않았어요? 빡, 하고.’
그렇게 말하는 이반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나는 그 균열을 향해 손을 뻗었다.
* * *
균열은 정말 그곳에 존재하기만 할 뿐 특별한 감촉이랄 게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내 손에 느껴지는 것이 없는 것과는 별개로, 그것을 만진 게 어떤 이변이라도 일으키긴 한 모양이었다.
손바닥만 한 크기였던 균열은 내 손이 닿자마자 마치 가지를 뻗듯 번져 나가더니, 이윽고 전체로 뻗어 나갔다. 산산조각난 유리창처럼 여기저기 금이 간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그 순간. 그것은 유리가 깨지는 듯한 소리를 내며 완전히 부서져 내렸다.
“에이 누나!”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파악하는 것보다, 기다려왔던 얼굴들을 건너편에서 발견하는 것이 더 빨랐다.
이반이 활짝 핀 얼굴로 나를 부르고, 저 멀리서 다른 곳을 살펴보고 있던 릴리가 황급히 뛰어왔다.
“에이 님!”
…차례대로 한 번씩 이름을 불리고 나서야 찾아오는 안도감이 어찌나 짙던지.
나도 모르게 표정을 누그러뜨리면서 웃었던 것 같다. 내 얼굴을 본 이반이 무사해서 다행이라는 말을 하며 따라 웃었으니까.
릴리와 이반이 뛰어오는 그 잠깐의 시간 동안, 같은 숲속임에도 경계선을 사이에 두고 묘하게 색채를 달리했던 두 풍경은 어느새 자연스럽게 섞여들고 마치 한 공간처럼 합쳐졌다.
그 찰나에 나는, 나를 가둬두고 일행들과 분리시켰던 환각이 완전히 사라졌음을 본능적으로 눈치챘다.
경계선이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 처음 길을 잃었을 때 보았던 금빛의 반짝거림이 다시 한번 내 눈앞에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 반짝거림을 눈으로 쫓기도 전.
“괜찮으세요, 에이 님?”
“네, 멀쩡해요.”
릴리가 한달음에 달려와 내 손을 붙잡았다. 기겁한 얼굴로 숨을 가쁘게 몰아쉬는 릴리를 보니, 그 사이에 마음고생을 많이 한 것만 같아 살짝 멋쩍어졌다. 나는 정말 멀쩡하다 못해 후련해지기까지 했는데. 그런 사정을 알 리가 없는 릴리는 연신 내 몸 구석구석을 살피며 다친 곳이 있는지 확인하는 모양새였다.
다친 쪽은 오히려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 아니, 다른 마물인데도 말이다.
나는 방금 지나쳐온, 여전히 납작 엎드려 있는 일리난을 힐끗 바라보았다가 다시 시선을 앞으로 했다.
“릴리랑 이반은 둘 다 괜찮아요?”
잠시 둘의 얼굴을 살폈지만, 어째 아무렇지도 않은 나와 달리 어디선가 고생하고 온 것만 같은 얼굴이었다. 음, 특히 이반 쪽은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데.
내 생각에 화답하듯, 이반이 온 세상의 피로함을 죄다 끌어안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뇨……. 걸어가면서 일리난을 열 마리쯤 만났어요. 계속 상대하다가 정신을 차려보니까 어느새 이상한 곳에 갇혀서…….”
“오…….”
난 한 마리를 상대하는 것도 힘들었는데 열 마리라니. 다른 대답은 하지 않고 다만 안쓰럽다는 눈빛으로 바라봐주었다.
“아니, 만나는 건 상관없는데 걔들이 왜 자꾸 공격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니까요? 원래 이렇게 공격성 있는 마물이 아닌데. 그쵸, 릴리 누나?”
“…이반이 말한 대로예요. 원래 일리난은 먼저 공격해오지 않을 텐데.”
공격성이 생긴 것뿐만 아니라 전보다 이상하게 강해진 것 같기도 하고……. 릴리가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곧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얼굴색을 달리했다.
“에이 님, 그런데 케이드는……?”
“아.”
그러게, 순간 까먹고 있었네. 내가 이제 생각났다는 듯 감탄사를 내뱉자, 둘의 얼굴이 한껏 불안하다는 표정으로 변했다.
“사실 저도 이 공간에 갇혀 있었는데, 갇히기 전에 갑자기 케이드 씨가 없어졌어요. 아마 저희 둘 다 환각에 휘말렸거나 제가 놓친 것 같은데…….”
“어휴, 이 형은 또 어디 갔대.”
이반은 인상을 찌푸렸고, 릴리는 난처하다는 듯 낯빛을 흐렸다.
“어쩐지 통신을 받지 않으시더라니.”
마탑주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 숲에 들어온 건데, 난데없이 일행끼리 찢어지고 실종되니까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릴리나 이반도 다친 곳은 없어 보이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겠지.
“우리는 케이드 형이 숲에 걸려 있는 환각을 없앤 줄 알았는데. 그럼, 우리는 어떻게 만난 거예요?”
다시 케이드의 행방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 이반이 어리둥절한 기색으로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잠시간 멀뚱멀뚱 서 있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만지니까 깨지던데?”
“네? 뭘 만져요?”
“그냥 허공 어딘가에 금이 가 있는 것 같길래 그걸……. 혹시 못 봤어? 릴리도요?”
둘은 심각한 얼굴로 일제히 고개를 저었다. 혹시 나 사고 쳤어? 슬그머니 불안감이 차오르던 찰나.
“일단, 케이드부터 찾은 다음 숲에서 빠져나가죠. 숲의 환각이 어떻게 생겼으며 또 어떻게 깨졌는지, 일리난이 어쩌다 변화했는지 생각해보는 건 그다음이에요.”
릴리가 상황 정리를 했다. 하긴, 여기서 더 시간을 끌면 위험하지. 고개를 끄덕이자, 릴리가 나를 보며 넌지시 물어왔다.
“혹시 케이드랑 언제부터 헤어지셨나요?”
“시간을 제대로 재보지 않아서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아마 한두 시간 전쯤…….”
거기까지 말하던 나는 순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내 발목에 몰려오는 한기가 느껴졌기 때문에.
반사적으로 시선을 내리니, 눈에 보이는 것은 내 다리가 아닌 자욱하게 낀 안개였다. 정작 보여야 할 다리는 안개에 파묻혀 형체조차 분간되지 않았다.
“에이 님!”
그 사실을 알아차리기 무섭게, 릴리가 내 팔을 잡고 확 끌어당겼다. 갑자기 이반과 릴리의 뒤에 서게 된 나는 상황 파악조차 하지 못한 채 몸을 바로 세웠다. 이내 고개를 들어 그들의 어깨너머를 확인했을 때,
내 시야에 들어온 건.
주변의 나무보다 키가 훌쩍 웃돌 만큼, 거대하고 또 기이하게 변한 일리난이었다.
음, 저거… 내가 아까 때린 놈 맞지?
“어디서 나타났지? 아니, 나타난 건 둘째치고. 갑자기 왜 저렇게 커진 거예요?”
“이반. 상대할 수 있겠어?”
릴리가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이반은 황당하다는 듯이 일리난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크게 내쉬면서 자신의 검을 꺼내 들었다.
“상대할 수야 있죠. 아, 케이드 형 찾으러 가야 하는데…….”
마법진을 재빠르게 그린 릴리가 곧 빛으로 이루어진 활을 만들었다. 여전히 마물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그녀는 활을 능숙하게 바로 쥐었다.
“시선은 내가 끌게. 최대한 빨리 끝내자.”
“알았어요.”
대답과 동시에, 이반이 가까운 나무를 짓밟고 저 위로 뛰어올랐다. 아니, 역시 쟤 평범한 사람은 아닌 것 같다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키가 나무보다 큰 마물과 눈을 맞출 수 있을 정도로 높이 뛸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내가 속으로 경악하고 있는 사이, 이반의 검이 일리난의 머리를 갈랐다.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마물의 머리가 위와 아래로 분리되나 싶었지만.
연기처럼 흩어지며 형체를 잃어가던 마물의 머리는 곧장 원상태로 되돌아왔다.
“누나! 얘 재생하는데요?”
그렇게 외친 이반이 공중에서 한 바퀴를 돌아 땅으로 착지했다. 릴리는 시선을 마물에게 고정한 채, 이반의 반대편으로 활시위를 당겼다.
처음에는 자신의 머리를 가른 이반을 주시하고 있던 일리난이, 자신의 옆으로 날아온 화살을 향해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는 잠시, 연둣빛으로 반짝이는 화살을 가만히 보는가 싶더니.
“……!”
팔로 추정되는 무언가를 뻗어서, 그 화살이 꽂힌 나무를 부쉈다.
화풀이라도 하는 것 마냥, 나무껍질이 공중에서 흩어지다가 곧이어 나무가 쿵 하는 소리를 내며 뒤로 넘어갔다.
만약에 저기, 누구라도 서 있었으면…….
“…릴리. 일리난이 일반인보다도 더 약하다고 하시지 않았나요?”
혹시 잘못 들었나 싶어서 물어봤지만, 릴리도 나만큼이나 당황한 듯한 안색이었다.
그래, 알았어. 저 마물이 이상한 거구나.
아까보다 더 다급해진 손짓으로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하는 릴리를 지켜보다가, 침착하게 마물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아까 이반이 저 마물이 재생한다고 그랬지. 실제로 반으로 갈린 머리가 원상태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기도 했고.
설마 끝없이 재생되지는 않을 테지만, 그렇다고 재생이 멈출 때까지 공격한다는 건 그다지 좋은 선택이 아닌 것 같다.
어디, 약점이라도 찾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정강이 걷어차는 거로 그치지 말고 더 후려갈길 걸 그랬다. 운이 좋았다면 저 마물의 약점이 어디인지 알아낼 수 있었을지도 모르니.
상황의 심각성과는 별개로, 공중을 가르며 일리난을 공격하는 이반이 신나 보여서 다행이었다. 아까는 힘들어 보이더니 검을 쥐자마자 기가 살아난 모습이 제법 신기했다.
일리난은 요리조리 잘도 피해 다니는 이반의 움직임에 열이라도 받은 건지, 그 거대한 손으로 땅을 내리쳤다. 땅이 울리는 것을 느끼며 마물을 뚫어지게 살피는데, 계속해서 마법진을 그리고 있던 릴리가 다급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에이 님. 지금 보호 마법진을 만들고 있어요. 이게 완성되면, 에이 님은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저도 가까이 가서 이반을 도울 테니.”
“네.”
릴리가 공격 계열 마법을 쓰는 모습은 보지 못했는데, 정말 괜찮은 걸까. 알았다고 대답은 했지만, 결국 걱정을 숨기지 못하고 한마디를 덧붙였다.
“다치지 마세요, 릴리.”
그 말에 릴리가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언제나처럼 상냥함이 담긴 미소였다.
땅에 새긴 마법진이 빛나며 내가 서 있는 곳 주변으로 투명하고 빛나는 막이 솟아올랐다. 당부라도 남기듯 나를 한번 바라본 릴리가 한 손에 활을 든 채 마물을 향해 뛰어가는 것과 동시에, 공중으로 뛰어오른 이반이 마물의 거대한 다리를 한순간에 베어버렸다.
마치 고통에 몸부림치듯, 일리난이 고개를 좌우로 돌리던 그때.
보호 마법진 안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내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마물의 목에 교묘하게 박혀 있는, 금빛의 작은 보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