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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마탑주였다 (45)화 (45/181)

45.

“마탑주가 한 일이 맞습니다.”

구멍을 보자마자 정령을 소환했던 케이드가 처음으로 한 말이었다.

“특별히 무언가를 노린 게 아니라면……. 단순한 화풀이인 것 같군요.”

“화풀이로 저 정도의 구멍을 만들었다고?”

“그는 그럴 수 있습니다.”

무슨 뜻일까. 이반과 케이드의 대화를 유심히 들어봐도, 도무지 무슨 의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마탑주의 마법이라면 저렇게 뻥 뚫린 거대한 구멍을 만들 수 있다는 걸까, 아니면 마탑주의 성격이라면 화풀이를 한답시고 저런 짓을 할 수 있다는 걸까?

케이드의 손끝에서 소환된 반투명한 형태의 정령들이 하늘거리는 몸짓으로 떠다녔다. 자신의 정령을 어디론가 띄워 보내는 케이드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성격이 나쁜 거랑 별개로 유능하긴 하구나, 하는 가벼운 감상도 잠시 내 눈에는 새까만 구멍이 담겼다.

탄내가 나는 것 같은데.

“왔다 간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죠?”

“네, 그렇습니다. …당신이 그걸 알아서 뭐 어쩌겠다는 겁니까?”

대답할 가치가 없는 질문이다. 케이드의 시선을 무시하며, 몸을 숙여 까맣게 변한 땅을 손으로 훑었다. 살짝 스쳤을 뿐인데도 온갖 잿더미와 먼지가 손가락에 엉켜 드는 듯했다.

그 새까만 구멍에서 익숙한 보랏빛의 반짝거림이 잠깐 보인 것 같다면 기분 탓이겠지.

착각이 아니더라도 의미는 없었다. 어차피 단테는 이미 가고 없으니까.

조금 더 빨리 왔으면 단테를 만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은연중에 들었다. 생각의 끝에 꼬리를 물 듯 엉겨 붙은 감정은 아쉬움인 것 같기도 했고, 답답함인 것 같기도 했다.

단테는 내가 이렇게 자기를 보고 싶어 하는지도 모르겠지. 그런 생각을 하는 나 자신이 우스워져서, 나도 모르게 잿더미를 꽉 움켜쥐었다.

“함부로 만지지 않는 편이 좋을 텐데요.”

“안 만졌어요.”

“그런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나는 보란 듯이 손을 탁탁 털었다. 케이드가 황당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별 감흥은 없었다. 이제는 성의 있게 대답할 생각도 안 드네.

“음, 아마 여기 일리난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때 갑자기, 이반이 고개를 들며 말했다.

“그걸 어떻게 알아?”

“일리난 냄새가 나서요.”

“냄새를……. 아니, 일단 넘어가고.”

아까 마차 위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느낀 건데, 신체 능력이 정상인의 범주를 훌쩍 뛰어넘은 듯싶었다. 하지만 이반의 범상치 않은 후각보다 더 궁금한 게 있었다.

“일리난이 뭔데?”

“누나, 일리난이 뭔지도 몰라요? 이것도 마탑주 때문에 엄청 유명해진 건데.”

“……난 마탑주에 관한 거면 다 몰라.”

“누나는 모르는 게 참 많네요!”

저거 순수하게 하는 소리 맞지? 안 그래도 10년의 공백이 점점 크게만 느껴지는 터라 마냥 곱게만 들리지 않았다.

내가 잠깐 그 말의 의중을 의심하는 사이, 이반이 신나게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내가 잘 아니까! 이래 보여도 마탑주 바로 옆에서…….”

“이반.”

막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과 동시에 릴리가 엄격한 목소리로 이반을 불렀다. 나로서는 처음 들어보는, 딱딱하게 굳은 단호한 목소리였다.

“그가 왔다가 간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큰 목소리로 마탑주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건 부주의한 짓이야.”

“네…….”

릴리의 엄한 훈계에 이반의 표정이 금세 시무룩해졌다. 내심 그 모습이 안쓰러워 동정의 눈빛으로 한번 바라봐 주었다.

차분하게, 하지만 꼼꼼히 주변을 살피던 릴리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이반 말대로 그 마물이 이곳에 있었던 걸까요?”

아까 이반을 엄격하게 중재할 때부터 느꼈지만, 마탑주 이야기가 나온 순간부터 릴리는 지나치게 긴장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긴, 긴장하는 게 당연한가. 그들이 찾으러 가는 사람의 흔적이 바로 이곳에서 발견된 것이니 말이다.

단테가 일리난이라는 마물을 상대하다가 이런 구멍을 냈든, 그냥 화풀이를 한 것뿐인데 마물이 휩쓸렸든, 정황상 단테가 일리난을 처리한 건 확실해 보였다. 그러나 파견단 사람들은 어쩐지 그 사실을 부정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일리난은…….”

“저도 그 부분이 이상하다고 생각하고는 있습니다.”

분위기가 급작스럽게 심각해졌다. 분명 단테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데,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나 혼자만 어리둥절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끼어들어서 설명을 요구하면 케이드가 또 뭐라고 하겠지? 그렇지만 그런 걸 신경 쓸 내가 아니다.

“일리난이 다른 마물과 다른 점이 있나요?”

“그런 것도 모르면서 이 길을 어떻게 지나려고 했습니까.”

저 봐봐, 기다렸다는 듯이 빈정거리는 거. 케이드의 영양가 없는 빈정거림은 무시하고 릴리를 바라보았다.

심란해 보이던 릴리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창백한 얼굴에 옅게나마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일리난은……. 간단히 설명해 드리자면 정신계 마물이에요. 일반인이 처리할 수 있을 정도로 공격력은 약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하기 까다로운 이유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을 해치지 못하게 환영을 보여주기 때문이죠.”

환영.

그다지 실감이 나지 않는 단어가 귓가에 꽂혔다. 환영이라는 건, 적어도 내게 있어서는 꿈속에서나 볼 법한 비현실적인 현상이었으니까. 살면서 단 한 번도 온전한 정신으로 환영을 본 적은 없었다.

“그 마물이 무슨 환영을 보여주기에 자신을 해칠 수 없게 만드나요?”

머릿속에 어렴풋한 추측들이 떠올랐다.

자신의 진짜 모습을 감추고, 사람들을 현혹할 말한 무언가를 흉내 내어 길을 잃게 만드는 걸까? 아니면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을 눈앞에 나열해서 발걸음을 붙잡기라도 하나?

어느 쪽이든, 환영을 보여준다는 특징 자체가 생존을 위해서라면 탁월한 능력인 것 같기는 했다. 힘으로는 상대할 수 없으니까 환영으로 사람을 꾀어내서 전투 불능 상태로 만들다니.

그런 걸 떠나서, 단테가 일리난을 해칠 수 없는 어떤 이유라도 있는 건가? 왜 이들은 단테가 일리난을 해치웠다는 걸 부정하고 싶어 하는 거지?

내가 아는 단테는 환영에 매번 속아 넘어갈 정도로 정신력이 약한 애는 아닌데.

이런저런 생각이 들던 찰나, 내 질문에 머뭇거리던 릴리가 이내 입을 열었다.

“그 마물은…….”

“릴리 님.”

대답을 마저 듣기 전, 케이드가 갑자기 릴리를 불렀다. 고개를 돌리자, 케이드는 방금 띄워 보냈던 정령을 다시 손 위로 불러온 듯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정령을 보내 숲속을 살펴보게 했는데, 가까운 곳에 또 다른 일리난이 있는 곳을 찾았습니다. 짐작건대… 서식지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수의 일리난이 있는 것 같군요.”

“…….”

오면서도 느꼈지만 마탑으로 가는 길엔 이상하게 마물이 많았다. 상단 사람들이나 파견단의 반응을 살폈을 때, 이건 절대로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었다.

밤이 아니라 낮에도 돌아다니는 마물과, 마물이 나왔을 때 단테의 탓을 하던 상인.

“또한 그곳에, 이 구멍에서 느껴지는 것과 똑같은 마력의 흔적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물이 있는 곳에서 발견되었다는 단테의 자취까지.

나는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어렵사리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난 이후 잠적한 단테가 마탑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진 모르겠지만, 적어도 마물의 변화와 단테 사이에는 어떤 연관이 있는 게 맞는 것 같다고.

단테가 마탑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기만을 바랐던 나로서는 꽤 좋지 않은 소식임이 틀림없었다.

릴리는 케이드의 말에 짧게 고민하더니, 마치 자기 생각을 확인하듯 대답했다.

“그렇다면 마탑주가 그곳을 지나쳤거나, 혹은… 아직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예, 그렇습니다.”

사실상 그 말에 행선지가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은 마탑주를 찾으러 가는 사람들이었고, 남들에게 드러내지 않았을 뿐 나 또한 목적은 같았으니까.

곧 릴리가 무언가 단단히 결심한 기색으로 말했다.

“한번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길을 안내해주세요.”

“그리하겠습니다.”

케이드는 그렇게 대답한 후, 뜬금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잠시 서 있자니, 그가 모노클을 한번 고쳐 쓰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 안에서 실종되고 싶은 게 아니라면, 생각 없이 혼자 돌아다니지 마십시오.”

뭐 이런 것까지 일일이 말씀해주시나. 나는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내 손을 잡는-아마 케이드의 날카로운 말투를 대신 사과하는 것 같았다-릴리를 보며 웃었다.

마음 같아서는 홀로 숲을 뒤져서라도 단테를 찾으러 가고 싶긴 한데,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혼자 돌아다니고 싶어도 못해요. 길을 잘 찾는 편이 아니라서.”

“…그것 참 자랑이군요.”

케이드는 그렇게 툭 쏘아붙인 후 돌아섰다.

다시 한번, 반투명한 생명체가 하늘 위로 날아갔다.

* * *

케이드는 숲에 도착하기 전에도, 숲 앞에 도착하고 나서도, 심지어 들어가기 전까지도 내게 잔소리하는 걸 멈추지 않았다.

처음에는 이 걱정 아닌 걱정은 뭔가 싶어서 황당했지만, 뒤로 갈수록 ‘말만 예쁘게 하면 반은 갈 텐데’하는 생각이 들어서 시큰둥하게 넘겼었다.

내가 자기들처럼 내세울 만한 능력이 있는 게 아니라는 건 잘 아는데, 왜 자꾸 사람을 앞뒤 분간도 못 하는 사람처럼 만드냐고.

…하지만 지금, 나는 내가 정말로 앞뒤 분간도 못 하는 사람인가 싶어졌다.

“…….”

마물이 나온다는 말답게 음산한 숲속.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까 어렴풋이 맡았던 탄내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이곳에서, 나는 길을 잃은 채 홀로 서 있었다.

이리저리 둘러보아도 빽빽한 나무들만이 시야를 가득 채울 뿐, 일행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이 숲에 있는 나무들은 왜인지 기둥부터 이파리까지 온통 새까매서, 어둠 속에 있는 것처럼 시야가 막막했다. 한 치 앞도 안 보이는데 주변을 파악할 수 있을 리가.

나 진짜 방심하기만 하면 큰일 나는 징크스라도 가지고 있는 건가.

“……어떻게 이렇게 보란 듯이 혼자 남겨져?”

허망하게 혼잣말했지만,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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