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D9.
단테는 자신이 재앙이라고 불리던 날을 기억했다.
“…….”
“당신, 당신은…….”
피에 젖은 땅, 부러진 날붙이와 고통을 호소하는 신음소리. 익숙해지지 않기를 바랐으나 결국 익숙해진 풍경.
폐허라는 명칭과 비로소 어울리는 곳에서, 공포에 질려 넘어진 적군을 내려다보던 단테는 만성적인 피곤함을 느꼈다.
전쟁에 참전하게 된 후로 무감해진 것은 많았다. 누군가의 살아남고자 하는 발악이 그러했고, 복수 하나로 시작한 일치고는 너무 멀리 왔다는 자각이 그러했다.
이는 곧 전쟁 그 자체를 무감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그의 기억 속에 전쟁과 관련된 것들은 전부 흐릿하기 짝이 없었다.
다만 그가 그날의 전투만 유독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던 건…….
“당신은 재앙이나 다름없어!”
마지막을 예견한 상대가 악을 쓰며 뱉은 문장에 낯익은 단어가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일련의 시간 후에 전장에서 승전고가 울려 퍼졌다. 황폐한 경관을 앞에 둔 채, 단테는 재앙이라는 단어가 자신에게 얼마나 친숙한 것인지에 대해 생각했다.
스승의 조언을 무시한 대가로 재앙을 받아들였던 과거와, 다른 이들에게 재앙이라고 불리고 있는 현재를.
그리고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 중심에 서 있는 누군가를 생각했다.
“…….”
그 순간 느껴졌던 그리움은 왜 지금껏 한 점의 빛바램조차 없는지.
그의 재앙은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었고 한 사람의 부재로 세상에 드러났다.
빈자리가 영원한 한 재앙이 사라지는 일은 없을 터였다.
* * *
“여기서 잠깐 쉬어갈게요, 에이 님.”
“네.”
아까부터 가라앉아 있었던 기분은 영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마물을 처리하러 갔던 두 사람이 돌아오고, 또 한참을 이동한 뒤에 다시 마차를 세우고 충분한 휴식을 취했음에도 그랬다.
그리고 내 생각에는, 아마 온종일 이런 기분일 것 같았다. 처음 출발할 때보다 훨씬 더 심하게 단테 생각밖에 나지 않았으니까. 이반에게 그런 이야기를 전해 들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도 봐, 호수에 비치는 내 얼굴을 보면서 단테나 떠올리고 있잖아. 생각 정리도 할 겸 호수 근처에 앉은 거였는데 또 단테 생각을 한다면 여기까지 온 의미가 없다.
단테를 떠올리면 생각 정리는커녕 쓸모없는 부정적인 감정까지 뒤죽박죽 섞이는 기분이니.
“…….”
점점 차가워지는 공기가 뜨끈해진 얼굴을 식혀주는 듯했다. 나는 바람결에 흔들리는 머리칼을 느끼며 멍하니, 물속의 나와 눈을 맞추었다. 수면 아래에 가라앉아 있는 듯한 얼굴은 내 얼굴임에도 불구하고 의중을 알아보기 어려웠다.
참 이상하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나 자신의 생각을 알아볼 수가 없다니. 보면 볼수록 기분이 이상해지는 것만 같아, 물에 손을 담그고 호수에 비치던 얼굴을 마구 흐트러트렸다.
물살을 가로지르는 손짓만으로도 물에 비치던 형체는 금세 사라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일렁임이 잦아드는 호수를 가만히 지켜보면서, 모든 것이 이렇게 내 뜻대로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단테를 만나러 가는 일도 내 뜻대로 되었다면 정말 좋았을 거라고, 그러면 훨씬 빨리 볼 수 있었을 거라고.
문득 마샤의 말이 떠올랐다.
‘네가 갖은 고생을 해서 결국 단테를 만났다고 쳐. 근데 만나고 나서는 뭘 어떡할 거야? 단테 입장에서 너는 그때 죽은 사람이잖아.’
‘…….’
‘네 이야기를 단테가 믿어주지 않으면 어떡해?’
그 말대로 분명 단테는 나를 알아보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 당연히 알아보지 못하겠지. 철석같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 나인 걸 못 믿겠다고 말할 수도 있을 거고, 그리고, 그리고 또…….
그다음은 모르겠다. 역시, 직접 만나봐야 반응을 보든가 말든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진짜로 예상이 안 가는 건지, 그냥 단테가 보고 싶은 건지 구분이 잘 안 되지만 어차피 결론은 똑같았다. 어떻게든 단테를 봐야겠다는 것.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손으로 머리를 짚을 수밖에 없었다. 같이 가는 사람들에게 빨리 가자고 재촉할 수도 없는데 마음만 자꾸 급해지는 것 같아서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렇게 생각이 앞서가다 보면 언젠가 실수할지도 모르는데.
마음에 발이 달렸다면 벌써 마탑에 도착하고도 남았다, 진짜. 속으로 투덜거리던 그 순간, 하늘이 비치던 호수에 연한 푸른빛이 언뜻 비쳤다.
하늘색보다도 옅어서 차라리 하얀색에 더 가까운, 보자마자 차가운 얼음이 생각나는 색. 그 색깔의 주인을 알아보고 무심결에 인상을 찌푸렸다가, 호수에 비친 얼굴도 같이 인상을 찌푸리는 것을 보고 표정을 풀었다.
“용건이라도 있으세요, 케이드 씨?”
슬슬 그냥 저 사람 기본값이 인상 찌푸린 얼굴이 아닐까 싶다. 모노클에 가려졌음에도 예리하게 빛나는 은색 눈동자를 보고, 나는 턱을 괴면서 생각했다.
볼 때마다 생각하는 거지만 진짜 성격 나빠 보이네.
인상을 찌푸린 채 물끄러미 서 있는 케이드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불쑥 말을 꺼냈다.
“처음부터 궁금했던 건데요. 왜 그렇게 저를 싫어하세요?”
“…….”
차라리 내가 미움받을 만한 행동을 했다면 모르겠다. 하지만 저 사람은 나와 처음 눈이 마주쳤던 순간부터 나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최소한의 소통도 없이 그저 인상을 찌푸린 채 바라보기만 했다.
저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이 상황에서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더라도, 계속 투명인간 취급을 당하고 있으면 이유가 궁금해지는 건 당연한 일이거든. 빨리 대답하라는 의미로 고개를 올려 케이드를 바라보았다.
대답을 하지 않고 단지 서 있기만 하던 그는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저희가 무슨 용무로 이 길을 가고 있는지 아십니까?”
마탑 가는 거 아니야? 하지만 나는 떠오른 대로 대답하지 않았다.
“모르는데요. 말 안 해주셨지 않나요?”
“목적지는 모르시더라도, 최소한의 눈치가 있다면 저희가 놀러 가는 게 아니라는 건 알아차리셨겠지요.”
대화를 나누어 본 적 없어서 몰랐는데 어째 빈정거리는 말투다. 그게 기분이 나쁘다기보다는 왠지 흥미로울 정도였다.
나도 빈정거리는 거 잘하는데.
하지만 예의범절을 지킬 줄 아는 사람으로서 바로 맞받아치지는 않기로 했다. 그리고 지금 당장은 저 사람이 뭐라 말할지가 더 궁금하니까.
케이드는 곧이어 고요하지만 날카로운 목소리로 단언했다.
“저희는 불완전하고, 시한폭탄이나 다름없는 것을 상대하러 갑니다.”
“…….”
“안전을 보장하기 힘든 만큼 변수는 최대한 없어야 해요. 하지만 갑자기 끼어들어 제 몸 하나 건사하지 못하는 당신은, 저희 입장에서 짐 덩어리일 뿐입니다.”
그 말을 듣자 하니 떠오르는 게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상황에서 쓸모도 없는 일반인을 태워서 어쩔 거냐고’ 하셨었죠.”
“예.”
“힘이 없다는 이유로 미움받는다니, 이거 서러워서 살겠나.”
그렇게 뱉는 내 목소리는 내가 듣기에도 시큰둥했다. 내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케이드가 아니래도 사나운 눈매를 더욱 차갑게 굳혔다.
“알아들으셨으면 앞으로 행동을 잘 처신하시길 바라겠습니다.”
“그건 제가 결정할 일이지, 당신이 저한테 하실 말씀은 아니고요.”
고개를 돌려 근처에 있던 작은 돌을 주웠다. 마치 장난을 치듯 돌을 호수로 던지자 퐁당, 하는 맑은 소리를 내며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물의 표면에 생기는, 동그랗게 밀려오는 파문에 따라 호수를 통해 나를 노려보던 눈빛도 흩어져갔다.
와, 이렇게 보니까 일부러 저 사람이 비치는 쪽으로 던진 것 같네.
그럴 생각이 아예 없었다고는 말 못 하겠다. 얼굴에다가 직접 던진 것도 아닌데, 이 정도는 괜찮잖아.
“당신이 대놓고 못마땅하다는 티를 내는 걸 그만두신다면 저도 생각해볼게요.”
“…….”
“아, 그만 좀 노려보세요. 그렇게 눈에 힘주면 그쪽 눈만 아플 텐데 왜 자꾸 그래요? 지겹지도 않나.”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케이드가 놀란 듯, 정확히는 불쾌하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그런 반응을 바로 눈앞에서 마주쳤음에도, 그리고 짐 덩어리 취급을 받았음에도 나는 이 상황이 마냥 심드렁했다.
내가 적당히 눈치를 보며 어디 한 구석에 찌그러져 있기를 바라는 모양인데, 오롯이 나 자신만의 판단으로 방해되지 않게 물러나 있는 것과 방해되지 말고 비키라는 소리를 듣는 것은 달랐다.
행동을 잘 처신하라는 충고 아닌 충고를 들으니 반항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고.
하지만 다른 무엇보다, 저 사람만이 나를 싫어하는 게 아니었다.
“나도 당신이 마음에 안 들어요.”
케이드는 내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예상치 못한 말을 들어서 놀란 건지, 여전히 무시하는 게 기본 태도라서 대답하지 않은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든 말든,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케이드 쪽으로 완전히 몸을 돌렸다.
“마탑주를 사람이 아니라 괴물 취급하잖아요.”
“…아까는 모르겠다고 대답하더니.”
그 말에 작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마탑으로 가는 파견단에 대한 소문이 다 퍼져서 어쩔 수 없었네요. 아무튼, 좀 방해된다 싶으니까 무시하는 것도 그렇고 마탑주를 폭탄처럼 취급하는 것도 그렇고, 당신도 내 입장에서 그다지 곱게 보이진 않아요.”
뱉고 나니 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래, 케이드가 나를 싫어하는 만큼 나도 케이드가 싫었다.
가끔 내가 잠든 것처럼 눈을 감고 있을 때마다 저들이 낮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었는데, 케이드 저 사람은 꼭 한 번씩 ‘제정신이 아닌 자와 대화할 수 있는가’하고 의문을 제기하더라고. 단테가 아무리 미쳤기로서니, 대화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미쳤겠냐고. 도대체 단테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물론 단테가 위험인물로 취급받고 있으니 저러는 거겠지만, 그래도 마음에 안 드는 건 마음에 안 드는 거다.
그 위험인물이 어찌 됐든 내 남편인데, 나는 좀 편애해도 되는 거잖아.
“마탑주의 취급과 당신의 기분이 무슨 상관입니까?”
그냥 비꼬는 것도 같고,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그 말에 잠시 고민하는 척하다가 웃었다.
“당신이 알아서 뭐하게요?”
그 대답에 한껏 찡그려지는 얼굴이 내심 통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