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환자분이라고 하면 날 말하는 거 맞지? 나는 눈을 굴려서 세 명의 얼굴을 차례대로 살폈다.
“에이라고 불러주세요.”
“네, 에이 님. 에이 님은 저희와 동행하셔도 괜찮으신 건가요?”
이건 또 무슨 말이야.
믿고 있던 사람의 배신-표현이 거창하지만, 심정만은 그랬다-에 순간 얼떨떨해졌으나, 치료사의 얼굴은 진지했다.
치료사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물어뜯을 기세로 서로를 노려보던 나머지 두 사람이 휙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두 사람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치료사는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생각해보니 역시, 에이 님이 너무 빨리 일어나셨던 게 신경이 쓰여서요.”
“아.”
맞다, 나 반나절 만에 나았지?
“혹시 수도로 가시다가 뒤늦게 중독 증세가 나타나면……. 더 위험할지도 몰라요. 그렇다고 제가 함께 수도로 갈 수도 없고.”
아까 찾아보니 그라노트의 독에는 내성이 생기지 않는다고 하더라고요. 덧붙이는 말에 거짓말이 들통났나 싶어서 등 뒤가 서늘해지기도 잠시,
“계속 걱정스러웠는데 마침 로넨 마을까지 가시는 길이었다니 잘됐네요. 에이 님, 함께 가면서 제가 몸 상태를 살펴볼 수 있도록 허락해주시겠어요?”
다정한 말에 긴장이 풀렸다.
“아까는 수도의 의사를 찾아가 보는 게 좋겠다고 말씀드렸지만, 사실 제가 수도의 웬만한 의사들보다는 훨씬 낫답니다.”
장난스럽게 덧붙인 말 같았으나, 치료 마법을 쓰는 마법사는 마법사 중에서도 희귀하다고 들었으니 근거 있는 자신감으로 느껴졌다.
이야기를 계속 듣고 있자니 무슨 이유로 나를 걱정하는 건지 알 것 같았다. 내가 예상했던 시일보다 빠르게 깨어난 게, 회복이 빨라서가 아니라 단순히 증상이 아직 발현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거겠지.
걱정해준 사람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였지만, 이건 발현이 늦어진 게 아니라 정말 다 나은 거였다. 깨어난 것부터가 몸이 멀쩡해졌다는 신호였을 걸?
하지만 그렇다고 ‘저는 다 나은 게 맞아요, 제가 보장해요’하고 말하는 것도 이상하잖아.
긍정과 부정 중 그 어느 것도 고르지 못하고 있는 사이, 친절한 목소리는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이반이 저렇게 말할 정도면 급한 사정이신 것 같은 데다, 동행하는 사람이 한 명 더 늘었다고 크게 변하는 것은 없으니 함께 마을까지 가드릴 수 있어요.”
“…….”
연고도 없는 이를 지나가다가 구해준 사람이 할 법한 말들이 내 귓가에 쏟아졌다. 하지만 뚜렷하게 느껴지는 호의에도 나는, 차마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거렸다.
여전히, 한줄기 의심을 떨쳐낼 수가 없어서…….
“그, 치료사님?”
“저는 릴리라고 해요. 편하게 불러주세요.”
복잡하게 머리 굴릴 바에야, 그냥 상황이 어색해지더라도 물어보는 것이 나았다. 나는 주저하던 것을 그만두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릴리. 배려는 정말 감사하지만……. 솔직히, 오늘 처음 만난 분들을 무작정 따라가는 게 불안해서요.”
“어머.”
릴리가 잠깐 놀랐다가, 금세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죄송해요. 저희 입장만 따지느라 에이 님이 어떻게 느끼실지 생각하지 못했네요.”
“죄송하실 필요는 없고요.”
오히려 배려가 흘러넘칠 정도다. 내가 가볍게 고개를 저었지만, 미안하다는 표정이 사라지는 일은 없었다.
예상대로 겸연쩍은 기분이 들긴 했지만, 상황은 대충 일단락된 건가 싶던 그때.
“상단 사람들이랑도 모르는 사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불쑥, 이반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일단 질문부터 뱉고 보더니, 곧 무언가 깨달은 듯 말을 덧붙였다.
“아. 저희가 정확히 뭐 하는 사람들인지 몰라서요? 그러니까 신원이 불분명해서?”
“……그렇게 말씀드릴 수도 있겠죠.”
아니, 사실 그게 맞다. 솔직히 내 입으로 꺼내기는 힘든 말을 속 시원하게 말해줘서 고마울 정도였다.
내가 그렇게 대답하면서 힐끗 릴리의 눈치를 살피자, 짧게 무언가 생각하는 것 같던 릴리가 나를 바라보았다.
“그럼…. 안전이 보장된다면 괜찮으신 걸까요?”
“어, 괜찮기야 하겠지만.”
정말 괜찮기만 하다. 근데 나 어쩌다가 이 사람들과 같이 가려는 사람처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거지? 분명 이럴 생각이 없었는데?
짐 정리가 거의 끝나가는 상단의 마차가 뒤늦게 눈에 들어왔다. 분명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저 마차를 타고 수도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에 착잡해하고 있었건만.
사정 아닌 사정을 잠깐 털어놓았다고 이런 상황이…….
빠르다면 빠르고 늦다면 늦은 자각이 찾아왔으나, 이미 릴리가 다시 말을 시작한 후였다.
“솔직하게 말씀해주셨는데도 재차 설득하려고 해서 죄송해요. 하지만 역시 한 번만 더 다시 생각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왜 자꾸 싫다는 사람을 굳이 데려가려고 하는 겁니까…….”
릴리가 이야기를 꺼냈을 시점부터 입을 다물고 있던 남자가 작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내 설득에 정신이 팔린 릴리도, 여전히 남자에게 꽁해있는 이반도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상단 분들과 함께 여기까지 오는 데 일주일 걸리셨다고 하셨죠. 중간에 마을에 들르는 시간이 있다고 하더라도 처치가 빠르게 이루어지지 못할 거예요. 그리고 치료가 늦어질수록, 가볍게 마비 증상만으로 끝날 정도의 독이 호흡 곤란을 유발했다가 결국 목숨을 위협할 수도 있어요.”
상냥하게, 하지만 빠르게 말을 잇던 릴리는 어느 순간부터 침착해졌다.
“하지만 에이 님의 불안함은 충분히 이해한답니다. 혹시 신원 확인은, 음…….”
잠시 뜸을 들이던 릴리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이것만으로는 부족하실까요?”
곧이어 내 앞에 판처럼 납작한 무언가가 들이밀어 졌다. 굳이 꼼꼼히 살펴보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그 물건의 모양이 아주 자세히 눈에 들어왔다.
날개가 달려있고, 정중앙에는 국기가 박혀있으며, 황금색인지 정말 황금인지 모를 것으로 만들어진…….
제국의 표식.
“…….”
내가 태어날 때부터 이 나라의 국민이었던 건 아니었지만, 이곳에서 오래 살았다는 것 자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
이건 높으신 분들이 공적인 일을 처리할 때 들고 다니는 신분패 같은 거였다. 이 사람들이 하는 행위는 전부 제국에서 공인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의미인.
이걸 보여주는 것 이상으로 확실한 신원 증명 방법은 또 없을 것이다. 제국이, 그리고 황실이 직접 증명을 해주는 것이나 다름없었고, 이 표식을 허투루 사용할 사람에게는 처음부터 주어지지 않을 물건이니까.
예기치 못한 것을 마주친 탓에 사고가 멈췄다. 릴리가 차분하게 말을 이었지만, 도저히 대화에 집중할 수 없을 정도였다.
“저희는 모종의 사유로 황실에서 파견된 파견단이에요. 저희가 하는 일이 곧 제국의 뜻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한, 에이 님에게 위험한 일은 전혀 없을 겁니다.”
파견단? 머리가 복잡한 와중에도 그 단어가 낯설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히 수도에서 출발하던 날에 상인들이 이야기했던 것 같은데. 마탑으로 가는 파견단이 생겼다고.
……하필 마탑으로 가는 길에 제국의 표식을 가진 사람들을 만났는데, 파견단이 아니라면 더 이상하지 않을까?
“릴리 님, 그런 사실을 이렇게 막 밝히셔도…….”
“하지만 기를 쓰고 감출 만한 사실도 더더욱 아니죠. 누군가를 안심시킬 수만 있다면, 그걸로 충분해요.”
릴리와 그 옆의 남자가 소곤거리며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사실 안심은 잘 모르겠고, 차라리 놀란 거에 가까운 것 같긴 한데.
“휴.”
여기까지 왔다면 더 의심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거절할 수도 없었고.
마주치지 않기를 바랐던 사람들과 함께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마음속에서부터 은은한 곤란함이 올라왔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일이 더 수월하게 풀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일단 수도로 다시 돌아가지는 않아도 되는 것만으로도 시간을 단축하는 셈이니까. 그래, 그렇게 생각하는 게 좋겠지.
“같이 가주시는 데다가 진료까지 해주신다니 너무…… 폐를 끼치는 것 같은데요.”
그 말로 내가 더 이상 거절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듯, 릴리가 활짝 웃었다.
“전혀요. 진료는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걸요.”
이 사람 왜 이렇게 착해? 나는 당황하여 눈을 굴렸고, 릴리 뒤에서는 이반이 잘했냐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가 답을 하는 것만 기다리는 듯한 분위기에, 나는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태워 주신다면 저야말로……. 감사하죠.”
감사하다 못해 정말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다.
“다행이네요.”
상냥한 대답이 한 번 더 들리고, 이내 이반이 환호성을 지르며 뛰어왔다. 와, 누나! 이제 친구 만나러 갈 수 있겠네요! 그 외침에도 제대로 된 대답 하나 못하고 얼떨떨한 표정만 지었다.
“그러게요, 만나러 갈 수 있겠네요…….”
이렇게 일이 풀릴 수도 있구나. 정말이지, 다행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더불어 운이 좋았다는 생각도.
다른 일행들과 달리 이 상황을 탐탁지 않아 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았지만, 그때만큼은 신경조차 쓰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누구 하나는 달갑지 않아 하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달갑지 않아 하는 사람이 있든 말든 지금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미 동행이 결정된 후인데.
그렇게 나는 수도로 돌아가는 일 없이, 새로운 동행인을 찾아 로넨 마을까지 가게 되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라 단테를 만나러 가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아서.
…정말 기대도 하지 않았던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