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잠시 뜸을 들이다가 대답하겠거니 했건만,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이반은 그저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없었다.
“……?”
혹시 나 뭐 잘못 말했나. 어쩌다 여길 지나가고 있었냐는 게 해서는 안 될 질문이었던 거야? 여러모로 의아해져서 고개를 기울이는 찰나, 문득 이반의 눈동자가 시선에 들어왔다.
아까 막사의 침대 위에서 보았을 때도 그렇고,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봐도 그렇고. 언뜻 보기에는 별다른 게 없는 평범한 눈동자인 줄 알았는데.
가까이서 보니 이반의 눈은 다른 사람의 것과 달리 동공이 위로 길게 찢어져 있었다. 그래, 마치 따지자면 동물의 것 같은…….
그런 눈동자를 가질 법한 동물이 머릿속에서 떠오르던 순간, 이반이 침묵을 깨트렸다.
“누나.”
“네.”
“혹시 모르는 사람들과 같이 여행을 하는 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요?”
왜…… 이런 걸 물어보는 거지? 하지만 따라오는 의문보다는 질문에 대한 답이 입 밖으로 먼저 나왔다.
“따지고 보면 지금까지 같이 다닌 상단 사람들도 모르는 사람들인데요.”
“흠.”
이반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가 뜬금없는 질문에 불안함을 느끼든 말든, 표정이 휙휙 바뀌던 이반은 곧 고민을 끝냈다는 듯 개운한 얼굴이 되었다.
왜 혼자만 개운해하는 거지? 나도 좀 알려줬으면 좋겠는데.
“저기, 근데 그런 건 왜 물어보세요?”
“아.”
처음에 보았던 것처럼, 쾌활한 인상으로 돌아온 이반이 활짝 웃었다.
“저희 일행이 마침 누나가 가는 마을을 지나가거든요.”
“…? 네.”
“그래서 가는 길에 누나를 태워주면 어떨까 해서요!”
“네?”
뜻밖의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그대로 내보이며 되물었지만, 막상 말을 꺼낸 이반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이반의 제안을 제대로 이해하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내가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당혹스러움을 느끼는 사이, 이반은 자기 혼자서 뭐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어차피 바로 …로 가는 것도 아니고, 아마 그 마을에서 쉬었다가 구체적인 작전을 짜고 갈…까 괜찮겠지?”
너무 작은 목소리라 내용이 드문드문 끊겨서 들렸다. 하지만 작전이라는 단어만큼은 또렷하게 들렸기 때문에, 나는 이 사람들이 도대체 뭐 하는 사람들인지 심히 궁금해졌다.
그렇지만 지금 상황에서 내 단순한 호기심은 중요한 게 아니지. 나는 당황을 겨우겨우 추스르고 고개를 저어 보였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괜찮아요.”
“네? 그렇지만 빨리 가셔야 한다면서요.”
단지 도울 수 있으니까 돕는 것뿐이라는 듯, 이반의 무구한 표정이 나를 더 곤란하게 만들었다. 왜 제안을 거절할 수밖에 없는지 몰라서 묻는 건가 했는데, 이렇게 보니 정말 모르고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거절하는 게 당연한 상황에서 왜 거절하냐는 질문을 받으면 도대체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 거지? 나는 잠깐 뜸을 들이면서 말을 골랐다.
“일단……. 몇 시간을 이동하는 것도 아니고 최소 며칠을 함께 이동해야 할 텐데, 그렇게 긴 시간 동안 민폐를 끼치기에는 너무 죄송하고요.”
“뭐가 민폐예요? 괜찮아요! 저희가 타고 가는 마차에 공간은 충분해요. 한 명쯤 더 타봐야 티도 안 날걸요?”
아니, 마차의 공간이 문제가 아니잖아. 왜 비상식적인 말은 저 애가 하는 건데 말리는 내가 이상해지는 것 같지?
나는 최대한 차분하게 말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갑자기 얼굴을 찌푸리거나 퉁명스럽게 말해서 이 순진한 아이가 놀라지 않도록. 다른 의도가 있는 게 아니라면, 어쨌든 나를 생각해서 해주는 말인 건 명백하니까 말이다.
“그게 아니고, 동료분들이 불편해하실까 봐 그래요. 가던 길에 그 마을을 지나친다고 하는 거 보니까 따로 목적지가 있으신 것 같은데 굳이 그렇게까지는…….”
“불편해할까요? 안 불편해할 것 같은데?”
왜 듣고 싶은 부분만 들어? 나도 모르게 그렇게 뱉을 뻔했지만, 그것보다 이반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 더 빨랐다.
“정말 불편한지 물어보고 올게요!”
“네? 아니, 잠깐만!”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이미 이반은 저 멀리 뛰어간 후였다. 어디로 뛰어갔냐면, 계속 나를 보고 있던 치료사와 치료사 옆에 있던 남자에게.
갑자기 몰아치며 지나간 상황에 허, 하고 헛웃음을 내뱉었다. 요새 어린 애들은 다 저런가? 대화 내내 휩쓸리기만 한 것 같네.
물론 마음은 참 고맙다만, 이반의 말대로 저 일행과 합류할 수는 없었다. 이반한테 쭉 늘어놓은 대로 내가 일방적으로 폐를 끼친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다른 무엇보다.
저 사람들이 어디서 온 지도 모를 완전히 낯선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상단 사람들도 알고 지내던 사이가 아니라는 점에선 매한가지였지만, 그때와는 경우가 달랐다. 그 사람들은 상단 소속이라는 것만으로도 신원이 증명된 것이나 다름없었고, 내가 그 상단과 함께한다는 것을 기억해두는 친구가 수도에 있었다.
한 마디로 같은 동행이지만 상단을 따라가는 쪽이 위험도가 훨씬 낮았다는 말이다. 정체불명의 사람들을 따라가는 행동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말할 것도 없고.
이건 내 안전을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는 판단이었다. 태워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따라갔다가 내 신변에 문제라도 생기면 어떡해.
물론 저들이 마물로부터 나와 상단 사람들을 구해줬다는 걸 생각하면 대놓고 나쁜 사람들은 아닌 듯했지만, 고마움과 경계심은 별개의 이야기였다.
어쩌다 여기를 지나고 있었냐는 질문에도 결국 대답 안 했지? 마물이 돌아다니는 곳에서 다른 호위도 없이 세 명만 움직이고 있는 점도 그렇고, 당최 목적을 알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내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이반은 곧 자신의 일행을 이쪽으로 데리고 왔다. 치료사와 그 옆에 있던 남자 모두 상황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은 얼굴인 걸 보아하니 데리고 왔다기보다는 끌고 온 것에 가까워 보였다.
“그냥 같이 있는 자리에서 물어보는 것 같아서 일단 불러왔어요!”
역시.
내가 한숨을 삼키는 사이, 나와 눈이 마주친 치료사가 곧 눈빛으로 내게 물었다. 얘 왜 이러냐고.
나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답해주는데, 이반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릴리 누나. 이분은 상단 소속이 아니고 그냥 로넨 마을까지 가는 길이셨는데요, 자그마치 여기까지 오는 데만 일주일이 걸리셨대요.”
“응, 그런데?”
릴리라고 불린 치료사는 침착하게 이반의 말에 대답했다. 치료사와 달리 그녀의 옆에 있는 남자는 간단한 고갯짓조차 없었지만, 이반은 그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 걸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그리고 이대로 수도로 돌아가면 이 거리를 또다시 와야 하는 상황이고요. 그래서 말인데요…….”
이반이 우물쭈물하다가 말을 이었다.
“이 누나 그 마을까지 태워주면 안 돼요?”
“응?”
치료사가 당황한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나는 그 눈길에도 뭐라고 대답해줄 말이 없어서, 단지 한숨을 한번 쉬었다.
여기서 근본적인 문제를 하나 제기하자면, 저 말에 내 의사는 하나도 들어가 있지 않았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전 정말 괜찮아요.”
일부러 고저 없이 이야기하자, 치료사가 상황을 대충 짐작한 듯 곤혹스러운 얼굴을 했다.
“이반…. 물론 도와드릴 수 있으면 정말 좋겠지만, 그 도움을 받는 분이 원치 않으시면 안 하는 게 맞는 거야.”
정말 정석에 가까운 말이군. 하지만 정석에 가까운 만큼,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에게는 통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그 거절하는 이유도 해결해드릴 수 있다면 도와드려야 하는 거 아닌가요?”
“음……. 그것도 사정에 따라 다르지.”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죠. 단호하게 그래도 안 된다고 하셔야지.
내가 재차 거절의 의사를 표현하기도 전, 먼저 입을 여는 사람이 있었다.
“쓸데없는 말 하지 마십시오, 이반.”
아까부터 기가 찬다는 눈빛으로 소년을 바라보던 남자가 툭 쏘아붙였다. 안 그래도 날카롭던 눈매에 인상까지 찌푸리니 약간……. 성격이 나쁜 사람처럼 보였다.
아, 초면인데 이런 생각을 하는 건 실례인가?
“이 상황에서 쓸모도 없는 일반인을 태워서 어쩌겠다는 겁니까?”
성격 나쁜 사람 맞네. 게다가 나는 생각에서 멈췄는데, 저 사람은 더 실례인 말을 육성으로 내뱉고 있다.
차게 식은 내 눈빛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남자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저희가 무슨 일로 여기까지 왔는지 잊지 마십시오.”
“마…, 아니, 거기까지 같이 간다는 것도 아니고, 지나치는 곳까지 태워준다는 것뿐이잖아. 그게 왜 안 되는데?”
남자의 쌀쌀맞은 말에도 이반은 꿋꿋했다. 다시 한번 말하자면, 내 의사는 전혀 들어가지 않은 주장이었다.
남자가 하, 하고 기가 찬다는 듯이 비웃음을 뱉어냈다.
“조금만 불쌍하다 싶으면 무턱대고 도와주자고 하는 버릇이 또 도졌군요. 전쟁 중에 조금이라도 고쳐진 줄 알았더니 아니었습니까? 그렇게 쉽게 쉽게 구니 이용하려는 인간들이 자꾸 생기는 겁니다. 지금도 보십시오.”
“이 누나가 나한테 도와달라고 한 거 아니야! 내가 돕겠다고 한 거라고.”
“그럼 더더욱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왜 갑자기 둘이 싸워? 이 사람들이 말싸움을 하게 된 이유이자, 아무것도 한 게 없는 나는 괜스레 억울해졌다.
한겨울의 밤보다 더 차갑게 얼어붙은 분위기 속, 아무도 쉬이 입을 열지 않았다. 고집스럽게 입을 다문 사람 하나와 그 사람을 노려보고 있는 사람 하나. 그 사이에서 서 있자니, 슬슬 내가 뭘 하고 있나 싶다.
일단 당신들을 못 믿겠다고 이야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확실하게 거절해야 할 것 같았다. 내 입장도 저쪽 입장도 난처해졌으니 어떻게든 이 대치 상황을 빨리 끝내는 게 낫겠지.
저 사람들 중 이반의 말에 동의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내 생각이 틀렸다고 말하는 것처럼, 가만히 침묵하고 있던 사람이 입을 열었다.
“저기, 음. 환자분?”
둘이 싸우는 동안 끼어들지 않고 있던 치료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