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곧 출발한다!”
산 전체를 울릴 것만 같은 쩌렁쩌렁한 소리가 울리고, 흩어져서 밥을 먹고 있던 상단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일어섰다.
몇 분 쉰 것 같지도 않은데 시간이 너무 빨리 간다는 농담 섞인 웅성거림을 듣다가, 마차로 향하는 상인들을 따라 움직였다. 뒤처지지 않으려면 빨리 따라가야 했다.
마차로 이동한 것도 일주일째, 이제 마부의 우렁찬 목소리에도 점차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아니, 사실 내가 원래 무슨 환경이든 적응을 좀 잘한다. 내 몇 없는 장점 중에 하나지. 이거 없으면 그 오랜 시간을 살아가는 동안 제정신을 유지하지 못 했을 테니까.
그런데 그런 나도, 요즘 내 몸 상태에는 적응을 못 하겠다.
“아.”
마차에 타려고 문손잡이를 잡다가 따끔, 통증이 느껴졌다. 쓰라린 느낌에 반사적으로 손을 떼고 살펴보니 왼쪽 검지에 피가 나고 있었다.
아, 이제 보니까 손잡이 윗부분의 못이 어긋나게 박혀있네. 비스듬하게 세워져 박힌 부분이 꽤 날카로운 걸 보니, 위치도 그렇고 쓸데없이 날카로운 것도 그렇고 베이기 딱 좋다. 약간의 짜증을 담아 못을 노려보다가, 인상을 찌푸리면서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뚝, 뚝. 따끔거림과 동시에 얇은 상처 사이로 핏방울이 새어 나왔다. 피가 손가락 사이로 흐르고 있어 조금 찝찝했지만, 정말 긁힌 수준의 상처인 만큼 따끔거리는 통증 빼고는 별거 없었다.
이 정도는 뭐, 며칠 동안 서서히 나아가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면 흉터 하나 없이 사라질 것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회복력이 좋고, 이 정도 상처는 평범한 사람들도 금방 나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여전히 인상을 펴지 않은 채 그 자리에서 상처를 바라보았다. 요즘 느끼고 있는 변화가 기분 탓인지 아닌지 확인하고 싶어서.
여러모로 기분 탓이면 좋겠다고 바라고 있었다. 이유 없는 변화는 기분 나쁘기만 하거든.
하지만 늘 그랬듯이, 불길한 예감이 틀리는 일은 없었다. 몇 초 정도 지났을까, 손가락에서 새어 나오던 피가 뚝 멈추는 것과 동시에 피부 위로 싸한 느낌이 들면서 상처가 스르르 사라졌다.
손을 뒤집어보면서 확인해봐도 역시, 상처는 감쪽같이 사라져있었다. 흉터도 남기지 않고 몇 초 만에 나아버린 것이다.
내가 아무리 회복력이 좋다고 해도, 원래는 이만큼 나으려면 며칠 정도는 걸렸어야 했는데. 아니, 빨랐어도 하루는 걸렸어야 하는 상처인데.
역시 기분 탓이 아니었다. 나는 주먹을 꾹 쥐었다가 헛웃음을 뱉었다. 아, 기분 거지 같네.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애써 표정을 풀면서 마차에 타기는 했지만, 기분은 나아지지 않고 오히려 더 나빠져만 갔다. 뜻밖의 골칫거리를 발견했는데 그걸 무시할 수가 없다는 사실이 짜증을 자꾸 증폭시켰다.
왜냐하면, 그 골칫거리가 다른 무엇도 아닌 내 몸이었기 때문에.
그래. 내 몸은 10년을 죽어있다가 살아난 뒤부터, 나날이 회복 속도가 빨라지고 있었다.
다시 생각해도 영문을 모르겠네. 나는 결국 다른 사람들 모르게 옷가지를 몇 번 때릴 수밖에 없었다.
* * *
내 몸이 어딘가 변했다는 것을 깨달은 건 상단 사람들과 함께 어느 여관에서 하루 묵게 되었을 때부터였다.
단체 손님으로 가득 찬 여관은 시장통마냥 번잡스러웠고, 식당 직원들은 손님들을 응대하느라 정신없이 바빠 보였다. 가끔 술에 취한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기도 했고, 또 누군가는 여관이 울릴 정도로 쩌렁쩌렁 말을 하기도 했고, 하여튼 난리도 아니었다.
식사를 꼬박꼬박 챙겨 먹어야 여행길도 버틸 수 있다는, 상단 사람들의 다정한 오지랖에 못 이겨 식당으로 끌려간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고조되어가는 분위기 속에서 홀로 얌전히 앉아있었다.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상단 사람들이 말을 걸 때마다 적당히 응수하고, 뭔가 깨지거나 굴러떨어지지 않도록 확인하는 것뿐이었다.
이렇게 정신이 혼미한 사람들이 모여 있으면 꼭 무슨 일이든 생기던데. 그런 생각이 들 무렵, 결국 사단이 일어났다.
‘어.’
‘어떡해! 죄송합니다!’
복도를 지나가다가 누군가와 부딪친 건지, 종업원이 들고 있던 뜨거운 스튜 그릇이 내 팔 위에 쏟아졌다. 종업원은 기겁하며 그 자리에 멈춰섰고, 나와 한 테이블에 앉아있던 사람들 또한 놀라서 일어났다.
주위에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응급 처치는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얼음물까지는 아니어도 충분히 차가운 물을 팔에 끼얹고, 화상 흉터를 없애는 약 또한 꼼꼼히 발랐다. 하지만 사람들의 걱정과 간호 속에서, 나는 홀로 무언가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뜨거운 액체가 쏟아졌으면 팔이 계속 욱신거려야 하는데, 전혀 그런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스튜가 쏟아지던 그 잠깐만 아팠을 뿐, 치료를 받는 동안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놀랐을 테니 일찍 자라는 말과 함께 혼자 남겨진 방에서, 아무도 모르게 상처를 확인했다.
붉게 달아오른 피부나 물집 따위가 보이리라 생각하고 붕대를 푼 끝에 내 눈에 들어온 건 어떤 상처도 없이 멀쩡한 팔이었다.
그건 차라리 어떤 수모도 겪지 않은 사람의 팔처럼 보였다. 김이 모락모락 나던 뜨거운 스튜를 팔에 끼얹어진 사람의 것이 아니라.
“…….”
그리고 상처가 난 김에 온몸 구석구석 확인 검증까지 거친 현재.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내 몸의 변화가 달갑지 않았다.
나로서는 당연한 거였다. 일단 왜 이런 변화가 생겼는지 영문을 알 수 없어서 불안했고, 이 변화가 득이 되면 득이 됐지 전혀 나쁠 게 없어 보여서 더 불안했다. 마냥 좋기만 한 게 어딨어, 세상은 썩었는데.
하지만 달갑지 않다는 이유로 내 몸에 일어난 변화를 무시하면서 지내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에, 나는 최대한 이 현상을 긍정적으로 생각해보려고 머리를 싸맸다. 여행길에 할 것도 없겠다, 이런 회피적인 생각은 시간 때우기에 매우 좋았다.
같은 마차에 탄 상인들은 내가 가만히 무언가를 고민하기 시작하자, 최대한 나를 방해하려 하지 않으려는 듯 자기들끼리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늘 생각하지만 정말 드물게 착한 사람들이다. 고마움을 표현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러기에는 내 머리가 너무 복잡하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자, 생각해보자. 일단 지금까지 오랜 세월을 살아오면서, 죽다 살아난 후 몸의 회복력이 좋아지는 경우가 종종 있기는 했다. 하지만 이렇게 상처가 생기자마자 나을 정도로 비약적으로 좋아진 건 처음이었다.
게다가 이전에는 회복력이 좋아진다고 해도 남들보다 아주 조금 더 빨리 낫는 수준에서 그쳤기 때문에, 그다지 신경을 써 본 적이 없었다.
간단히 말해, 지금 다른 사람에게 내 상처가 사라지는 걸 보여준다면 나를 괴물이라고 할 테지만 그때는 좀 빨리 나을 뿐 평범한 사람으로 취급받을 수 있을 정도였다.
이렇게 된 원인이 뭐지? 갑자기 문득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거고, 뭔가 이유가 있을 거 아닌가.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가설을 좀 떠올려보다가, 회복력이 약간씩만 좋아졌을 때의 상황과 지금 상황에 차이점이 있는지까지 생각이 미쳤다.
다를 게 뭐 있어? 그때도 지금도 결국 죽었다 살아났다는 건 똑같다. 사인(死因)이 다르기는 했지만, 이번에 죽은 게 뭔가 더 특별하지는 않을 거잖아.
…아니, 특별하기는 했지. 무려 살아나는 데 10년이나 걸렸으니까.
분명 10년이라는 세월과 이 말도 안 되는 회복력 사이에 무슨 연관이 있을 것 같았지만, 단순히 살아나기까지 걸리는 세월과 비례해서 회복력이 늘어났다고 생각하기에는 문제가 있었다.
그 수많은 죽음과 부활 사이에 얼마간의 시간이 걸렸는지 정확히 기억하고 있지를 않아서 검증해볼 수가 없거든.
솔직히 그걸 어떻게 다 일일이 기억해. 처음에야 조금 놀라웠지 나중에는 익숙해져서 또 시간이 이렇게 흘렀네, 그렇구나, 하고 넘겼었다. 물론 그런 나도 10년은 좀 놀라웠다만…….
잠깐. 익숙해진다고?
마차가 덜컹, 하고 잠시 크게 흔들렸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눈을 깜빡거렸다. 순간 머릿속을 스친 생각에 나도 모르게 한 손으로 다른 손을 꾹 눌러 잡았다가, 눈을 굴려 마주 잡은 두 손으로 시선을 옮겼다.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은 건 착각이겠지.
내가 죽었다가 살아날 때마다 시간이 지나있는 상황에 익숙해진 것처럼, ‘내 몸’도 나를 낫게 하는 것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해보면 어떨까?
그래, 마치… 똑같은 일을 반복적으로 하면 능숙해지는 것처럼.
긴 세월 동안 나는 많이 죽었고, 그만큼 다치기도 했다. 아까처럼 긁히면서 생기는 상처부터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치명상까지 온갖 일을 겪었다.
그만큼 상처를 치료하는 것에 익숙해진 몸이 점점 더 빠르게 회복을 할 수 있게 되었다면?
그리고, 나를 계속해서 죽지 않게 하는 모종의 ‘능력’이, 10년 동안 죽어있을 만큼 큰 상처-상처 수준이 아니었지만, 어쨌든 폭발로 입은 신체적 피해를 말하는 거다-를 수습하고 나를 또다시 살리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했다면.
그렇다면 지금의 이 기이한 현상이 이해되기는 한다. 너무 많은 것을 가정하고 있지만, 어쨌든…….
나는 생각을 이어나가다가 인상을 찌푸리면서 고개를 기울였다. 마냥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회복이 빨라진다면 나는 말 그대로 완벽한 불로불사가 될 것이고, 더 이상 좋은 말로도 평범한 사람이라고 할 수 없겠지. 나중에는 목이 잘리더라도 그 자리에서 바로 살아나게 될지도 모른다.
내가 한 생각이지만 엄청 찝찝하네. 이런 장거리 여행 도중에 기분이 안 좋아지면 안 되는데, 정말 어쩔 수 없이 짜증이 났다.
차라리 이럴 때는 자는 게 낫다며 나 자신을 다독이면서, 그리고 내 몸뚱어리를 욕하면서 담요를 뒤집어썼다.
아, 정말. 오늘따라 단테가 더욱 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