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단테가 떠난 후 셋째 날 아침. 이상하게 일어났을 때부터 기분이 더러웠다.
“아, 뭐야…….”
몸을 일으키니 이불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몰려오는 짜증에 인상을 한껏 찌푸리다가, 가까스로 침대에서 벗어났다.
나는 꿈을 잘 꾸는 편이 아니었다. 꿈을 꾸더라도 일어나면 전부 잊어버리기 일쑤였고, 꿈에서 느꼈던 감정은 금세 휘발되어 사라지고는 했다. 그런데 어젯밤의 악몽은 아직까지도 생생했다. 잠에서 깨어났음에도 그 안에 갇혀 있는 것만 같았다.
붉은빛이 눈앞에서 하염없이 일렁거리고, 사람들의 비명이 흐리게 들려오는 꿈이었다. 온통 아득하고 이상하게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불안해지는 꿈.
옛날 일을 새삼스럽게 꿈에서 보기라도 한 건가. 언제 한번 불에 타죽은 적이 있었으니 말이다.
“…….”
뭐, 어쩌다 꾸게 된 꿈이든 기분이 더럽다는 사실은 변함없었다.
안 그래도 어제 팔찌가 망가진 것 때문에 저녁 내내 심란했는데, 악몽까지 꾸다니 영 예감이 좋지 않았다. 어제부터 자꾸 무슨 일이지? 나는 손목을 착잡하게 바라보다가 한숨을 한번 쉬었다.
공기라도 환기하려고 창문을 열어젖히니,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굳이 밖에 나가보지 않아도 느껴질 만큼 맑은 날씨였다.
나는 창문틀에 기대어 서서 잠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조용하고, 또 평화롭기만 한 마을 풍경에 햇살이 내려앉았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아이들이 웃는 소리가 들리고, 바깥이 사람들의 웅성거림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한참을 서서 바람을 쐬니 기분이 한결 나아지는 것 같았다. 어제 은연중에 치솟아 올랐던 불쾌감과, 팔찌가 망가졌을 때의 당황스러움과, 오늘 아침의 짜증이 서서히 옅어졌다.
그래, 다 이유 없는 불안함이었다. 요즘 단테와 함께 지내면서 사라진 줄 알았는데, 별거 아닌 일에 날을 세우는 옛날 버릇이 남아있었던 모양이다. 또 찝찝한 일이 연달아 일어나니까 괜히 관련지으면서 초조해한 거고.
이곳에서 느끼는 안온함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웃음소리가 가득한 이 작은 마을에는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단테가 없음에 잠시 불안해하고 있을 뿐이니 내일이면 다 괜찮아질 터였다.
가만히 생각을 정리하다 보니 마음이 점점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내일 단테의 얼굴을 볼 생각을 하니 차분해지다 못해 조금 들뜨기도 했다. 특정 사람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찝찝한 감정이 거의 날아가다니 생소한 일이었다.
다시 한번 내일을 생각하며 나는, 마음속에 남아있던 위화감을 완전히 지워버렸다.
* * *
저녁때였다.
내일이면 단테가 돌아올 것이고, 오늘은 내가 혼자 보내는 마지막 밤이었다.
주변을 감싼 침묵이 다소 어색하게 느껴져서, 아직 손목에 걸려 있는 팔찌를 쳐다보았다. 금이 간 마석에는 어떤 반짝임도 없었다.
밤에 연락하자고 했던 것 같은데, 이렇게 팔찌가 망가졌으니 단테에게는 미안한 일이었다. 아마 지금쯤 한창 의아해하고 있겠지. 왜 연락을 안 받나, 하고.
멀쩡하던 마석이 어쩌다 망가진 건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한 번도 손목에서 뺀 적이 없으니 큰 충격을 받았을 리 없고, 그럼 의심할 수 있는 부분은 한 가지뿐인데.
이 마을에서 다른 마석과 부딪칠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혹시 어제 그 사람이 마석을 들고 있었나? 나는 어제의 매캐한 냄새와, 어깨를 부딪치고도 아무 말 없이 지나가던 한 사람을 떠올렸다.
하지만 단서가 없으니 확신이 아닌 추측만 이어질 뿐이었다. 어찌 됐든 마석이 부서졌다는 건 변하지 않고, 오늘 단테와의 연락은 물 건너간 거나 다름없었다.
내가 연락을 받지 않는다는 이유로 하던 일까지 내팽개치지만 않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생각하면서 책을 잡는 순간.
- 쾅!
마을 밖에서 갑자기, 엄청나게 큰 소리가 났다.
벽이 울리는 것만 같은 진동이 느껴졌다. 반사적으로 창밖을 쳐다보니, 불길한 연기가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기묘한 붉은 빛이 일렁거렸다.
불이 난 건가?
가슴이 서늘해지고, 손에서 책이 툭 떨어졌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큰 소리는 지속적으로 들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비명 소리, 고함 소리.
타는 냄새가 났다.
“언니! 언니!”
그와 동시에, 시끄럽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황급히 문을 열어보니 문 앞에는 바로 길 건너에 사는 마을 소녀가 서 있었다.
소녀는 숨을 헐떡이면서 나를 붙잡았다. 옅은 연기 냄새가 코끝을 스치고, 소녀의 손에 묻은 재가 눈에 띄었다. 한 눈으로 봐도 엉망인 소녀의 울먹거림과 저 멀리 들리는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이상하게 아득했다.
아. 그 순간 나는, 어젯밤의 꿈을 떠올렸다.
“언니, 언니, 지금 가야 해요. 우리 빨리 여기서 나가야 해요.”
“무슨 일이야?”
“마을 곳곳에 폭탄이 터지고 있어요.”
뭐?
“무슨 일인지, 저도, 저도 모르겠어요. 갑자기 벤자민 오빠네 마당에서, 쾅 소리가 들리더니, 집은 날아가고 불은 타오르고, 연기가 막 나는데. 안에 있던 사람들은 어떻게 됐을지 모르겠어요, 언니…….”
“잠깐, 잠깐. 진정해.”
나는 숨을 크게 헐떡이는 그 아이의 어깨를 붙잡았다. 얼마나 놀란 건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새하얀 얼굴이었다. 눈동자가 애처롭게 떨리다 못해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았다.
소녀는 아주 잠시간 아무 말도 못 하다가, 침을 한번 삼키고 아까보다 조금 더 명료해진 발음으로 말했다.
“빨리 가요. 안전한 곳이 어딘지도 모르겠고, 그냥 빨리. 빨리 마을에서 벗어나야 해요.”
“알았어.”
소녀는 금세 다른 집으로 뛰어갔다. 이 와중에도 마을 사람들을 챙기다니, 착하기도 하지.
나는 집안을 한번 둘러보았다가 바로 뛰쳐나갔다. 한 걸음, 딱 그 정도만 밖으로 내디뎠을 뿐인데 훅 뜨거운 공기가 느껴졌다. 코끝을 찌르는 연기 내음이 거북했다.
집 밖은 내 생각보다 더, 엉망진창이었다. 마을 곳곳에 불이 나 있었고, 사방이 연기로 가득했다. 집 대부분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아연해지는 풍경에 주춤거리는 사이, 가까운 곳에서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나도 모르게 그쪽을 쳐다보았다. 새까맣게 흩날리는 먼지의 틈, 바닥에 넘어져 있는 아이가 보였다. 하지만 내가 그 아이에게 다가가기도 전 시야가 흔들렸다. 바로 옆에서 폭발이 한 번 더 일어난 것이다.
불길과 파편이 내 어깨 바로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간발의 차이로 폭발에 휩쓸리지는 않았지만, 땅이 흔들리는 듯한 충격에 그 자리에서 넘어졌다.
무언가가 와르르 쏟아지는 소리가 사방을 울린 직후, 무너진 잔해가 아이와 내 사이를 가로막았다. 더 이상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아이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거라고는 조각조각 부서져 내 앞을 막은 잔해더미뿐.
하지만 멍하니 그 상황을 곱씹을 시간도 없었다.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바닥을 짚은 팔이 사정없이 떨리고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 사실을 인지하자마자 나를 덮친 감정은, 끝없는 무력감이었다.
나는 이 감정을 안다. 알다 못해 익숙하다. 죽음이 코앞까지 쫓아올 때마다 내 안을 채우고, 이성을 마비시키는 감정이었다.
그래, 몇 번이고 겪어봤어도 나는 죽음이 코앞으로 다가올 때마다 어쩔 수 없이 두려워했다. 아무리 오래 살고 감정이 무뎌져도 결국 본성은 변하지 않는 탓이었다.
내 생명은 지금 위험하고, 그 위험에서 벗어날 길은 없을 거라는 예감. 머리가 혼란에 젖어 들어가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 와중에 네가 보고 싶었다. 모든 것이 뒤집힌 순간에도 네 생각이 났다.
한참 동안 뜻대로 따라주지 않는 몸에 욕지거리를 내뱉으면서, 나는 기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든 것이 붉은빛인 그 와중에, 누군가가 쓰러진 사람을 붙잡고 울고 있었다. 누군가는 도망치면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누군가는 불타는 집을 보고 고함을 치고 있었다.
녹슨 쇠 냄새가 났다. 뜨겁고, 불쾌하고, 잊지 못했으며, 잊을 수 없었던 냄새. 바닥이 검붉었다.
쾅, 쾅. 폭탄이 터지는 소리가 이어지고 있었다.
잔해로 막힌 곳을 지나쳐 무작정 길이 이어진 곳으로 뛰어갔다. 뛰어가는 와중에도 매캐한 연기가 자꾸 앞을 가로막았다. 보이는 거라곤 끝없이 타오르는 불길뿐이어서, 눈이 계속 따끔거렸다.
그 순간 나는, 저 멀리서 붉은 보석을 조심하라는 외침을 들었다고 생각했다.
정신없이 방황하다가, 어느 순간 그 자리에서 우뚝 섰다. 길을 잃은 것 같았다. 일단 마을 밖을 나가야…….
뒷걸음질을 치는 순간, 나는 멈칫하고 말았다. 아,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열기가 느껴졌다. 가장 강하게 느껴지던 곳은 아마 발밑.
무심코 아래를 내려다보았던가. 누군가가 뛰어다니고, 마을이 무너지고, 모든 것이 불타고, 누군가가 없어지고, 잃고, 울고, 죽고, 비명 소리가 가득하던 그때.
나는 붉은 보석을 보았다.
“…….”
마지막에는 너를 떠올린 것도 같다.
* * *
폭발음이 한 번 더.
누군가가 누군가의 이름을 울부짖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