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단테가 집을 비운 첫째 날.
눈을 떠보니 침대 위였다. 눈가가 한껏 찌푸려질 정도로 바깥이 밝은 걸 보니, 시간은 아마 점심.
“…….”
분명 어제 소파에서 잠들었던 거로 기억하는데, 중간에 깬 단테가 잠든 나를 어떻게든 침대 위로 옮겨주었나 보다. 아주 찬찬히 기억을 되짚어보니 새벽에 나가는 단테에게 인사를 했던 게 어렴풋이 떠올랐다.
‘오늘 밤에 연락할게.’
‘응.’
보고 싶을 거라는 이야기도 들은 듯한데…. 잠에 취한 채로 배웅했더니 제대로 기억나는 게 없었다. 인사조차 똑바로 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지금이 되어서야 아쉽게 느껴졌다.
아무리 졸려도 제대로 일어나서 인사할걸. 이제 3일 동안 못 보는데.
침대 옆자리가 차갑다는 걸 깨달으니 단테가 일찍이 나갔다는 사실이 확 실감 나서, 괜히 침대에서 일어나고 싶지 않아졌다. 하지만 침대 위에서 늦장을 부려봤자 시간이 느리게 가기만 하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단테도 없고, 리사도 없는 집은 적막 그 자체였다. 혼자 산 세월이 세월이라 그 사실이 새삼스럽지도 않을 텐데, 자꾸만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날 저녁까지는 조용한 집에서 평소와 별다를 것 없는 일상을 보냈다. 밥을 먹고, 책을 읽고, 집을 청소하는 그런 일상. 하지만 그 모든 것들도 딱 저녁이 지나자 금세 지겨워졌다.
더 확실히 말하자면, 체력이 다 떨어져서 아무 일도 하고 싶지 않아졌다는 것에 가까웠다. 시간을 보내기 위해 일부러 분주하게 움직였는데, 뒤늦게 그러지 말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테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할 일을 만들어서 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기 때문에.
사서 고생이라는 말이 딱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나는 너무 열심히 청소해서 거의 새것처럼 변한 책장을 멀거니 쳐다보다가, 저녁때를 놓치기 전에 밥을 챙겨 먹었다.
오늘 하루 유난히 많이 움직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모처럼 일찍 자려고 마음먹었다. 아, 물론 그 전에 단테 연락은 받고.
별 재미도 없는 책을 눈으로 훑으면서 연락을 기다리는데, 팔찌의 마석이 깜빡거리면서 빛났다.
어떤 식으로 연락을 주고받나 했는데, 이렇게 신호를 주는 거구나. 단테가 가르쳐준 대로 마석을 손으로 덮으니 단테의 목소리가 들렸다.
[ 에이. ]
“안녕, 단테.”
고작 하루 동안 듣지 않은 목소리인데, 어쩐지 아주 오랜만에 듣는 것만 같았다.
“이거 진짜 신기하다. 연락은 짧은 시간만 가능하다고 그랬지?”
[ 응. ]
정말 ‘하고 싶은 말’만 할 수 있겠네. 나는 숨을 한번 길게 내뱉고 손으로 턱을 괴었다. 제한된 시간 안에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는 건 내 생각보다도 훨씬 이상하게 느껴지는 일이었다.
이 시간쯤 되면 늘 옆에 앉아있던 사람과 하는 대화이니 더욱 그랬다.
“단테. 너 없으니까 되게 심심해.”
그래서 나는 과할 정도로 솔직하게 내뱉었다.
오래 대화하지도 못하는데 진심을 숨긴 채 빙빙 돌려 말할 필요성을 못 느낀 탓이다. 내 말이 마치 투정처럼 들릴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동시에 뭐 어떠냐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내 감정에 충실해질수록 단테는 기뻐할 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에.
[ …심심해? 그럼 나 빨리 갈까? ]
역시나, 그렇게 대답하는 단테의 목소리는 희미하게 밝았다.
당장이라도 이곳에서 뛰쳐나가겠다는 듯, 다시 한번 되묻기까지 했다. 내가 오라고 하면 정말 오는 건가.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니야?
“너 지금 집에 오면 나중에 그 일 수습할 수 있어?”
[ ……. ]
대답이 없다. 예나 지금이나, 단테는 내 앞에서 거짓말을 잘하지 못했다.
“일 다 끝마치고 3일 뒤에 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 그 말 들으니까 더 가고 싶은데……. ]
“안 돼. 그 전에 오면 문 안 열어줄 거야.”
[ 알았어. ]
시무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옆에 있으면 달래 주기라도 하는 건데 그럴 수 없으니 아쉬운 일이었다.
서로 오늘 있었던 일을 주고받으며 안부를 묻는 것도 잠시, 시간을 확인하니 연락 시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나는 작별 인사를 하기 전, 단테에게 마지막으로 물었다.
“단테. 혹시 이 마석 깨지기도 해?”
[ 응? 갑자기 왜? ]
왜냐면 내가 오늘 청소하다가 손목을 세게 부딪쳤거든. 아픈 것보다는 팔찌에 흠집이라도 났을까 봐 기겁했어.
하지만 단테의 걱정과 잔소리를 듣고 싶은 게 아닌 이상, 곧이곧대로 말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그냥. 갑자기 궁금해서.”
[ 절대 깨지지 않는다고는 말 못 하지만, 아마 일상에서는 깨질 일이 없을 거야. 아, 근데 다른 마석이랑 부딪히면 약한 충격에도 깨질 수도 있으니까 조심해야 해. ]
“다른 마석이랑?”
[ 응. 마석끼리 충돌하면 그 안에 있는 서로 다른 형질의 마법이… 더 설명해 줘? ]
“아니.”
내가 즉답하자 단테가 작게 웃었다.
나는 턱을 괴고 있던 것을 그만두고, 손목을 이마 높이까지 들어서 팔찌를 살펴보았다. 일상에서는 깨질 일이 없을 거라는 이야기를 들으니 나름대로 튼튼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다른 마석이랑 부딪히면 안 된다는 이야기는, 음, 어차피 그럴 일 없을 테니까 괜찮을 거 같고.
빛 아래에서 반짝이는 마석을 잠시 만지작거리다가 얌전하게 내려놓았다.
“내일도 이 시간에 연락할 거야?”
[ 내일은… 오전에 연락할게. 그때가 더 여유로울 것 같아. ]
“그래, 그럼.”
그리고는 장난처럼 덧붙였다.
“잘 자고 내 꿈 꿔.”
단테는 내 말에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짧지만 분명한 웃음소리와 함께.
[ 응, 분명 그럴 거야. ]
그 말을 끝으로, 길었던 하루가 마무리되었다.
* * *
다음 날. 전날과는 다르게 아침 일찍 일어나서 단테와 연락을 했다.
어젯밤과 아침 사이에는 별다른 일이 없었기 때문에, 하루 종일 뭘 했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던 어제와 달리 오늘은 무엇을 할지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단테가 오늘 일정으로 이야기한 ‘높으신 분 만나러 가기’가 다소 수상하게 들리긴 했으나, 그걸 제외하고는 별다를 게 없었다. 무리하지 말라고 적당한 당부를 전하고, 또 내일 밤에 다시 연락하자고 한 뒤 대화를 끝마쳤다.
집 안에만 있었던 어제와 달리 오늘은 밖으로 좀 나가볼 예정이었다. 일단 마샤에게 보낼 편지부터 잊지 않고 챙긴 후에 밖으로 나왔다.
장도 보고 마샤에게 편지도 보내며 바쁘게 돌아다니다 보니 확실히 어제보다는 시간이 더 빠르게 흘러갔다. 하지만 나중에 장을 본 걸 확인하니 죄다 단테가 좋아하는 것, 단테가 잘 먹는 것, 그냥 단테가 생각나는 것 투성이었다.
얘 혹시 가면서 내 머릿속에 무슨 마법이라도 걸어놓고 간 거 아니야? 계속 누군가가 생각나는 마법, 뭐 그런 거.
차라리 그런 거였으면 좋겠다. 어제부터 끊임없이 단테를 떠올리는 내 모습이 낯설기 짝이 없으니까.
집에 갈 때쯤에 만난 마을 소녀들이 언니! 마샤한테 편지 보냈어요? 하고 물어보아서,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일주일 뒤에 배송될 거라는 이야기까지 듣고 온 참이었다.
그 아이들의 수다를 들으며 집으로 돌아가던 와중에, 건너편에서 걸어오는 누군가를 발견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선 사람이었다.
“…….”
그 순간, 이상하게 매캐한 냄새가 코를 스쳤다. 확 치밀어오르는 불쾌함에 나도 모르게 그 자리에서 우뚝 멈췄고, 당연한 수순처럼 그 사람과 어깨가 부딪쳤다.
세게 부딪치지는 않았으나, 잠시 비틀거릴 정도는 됐다. 하지만 뒤늦게 고개를 돌리자 그 사람은 어떤 일도 없었다는 듯 저 멀리 걸어가고 있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아주 미세한 불안감이 가슴 속에서 피어올랐다.
“언니, 괜찮아요?”
“아. 응, 괜찮아. 근데 아까 지나간 사람, 원래 우리 마을에 있던 사람이야?”
“네? 아뇨. 저도 오늘 처음 봐요.”
“저도요.”
나를 향한 걱정만이 담긴, 다시 말해서 방금 지나간 사람에 대한 의문이라고는 없는 얼굴들이 보였다.
이 마을은 국경선에 맞닿아있기에 이방인을 맞닥뜨리는 일이 흔했다. 아주 작은 마을인 만큼 오래 머문다기보다는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 많았고, 그랬기에 이 마을 사람들은 누가 됐든 낯선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경계하지는 않았다.
단테와 내가 큰 어려움 없이 이 마을에 녹아든 게 그 증거였다. 그러니 나도 평소라면 그냥 처음 보는 사람이네, 하고 넘어갔을 텐데.
방금 그 사람은, 어쩐지 이상했다. 그저 지나갔을 뿐인데 왜 나는 불안감을 느낀 것이며, 잠깐 맡은 매캐한 냄새에 불쾌해졌을까.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언니?”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가자.”
하지만 나는 이내 억지로 생각을 멈췄다. 집에 혼자 있다 보니 쓸데없이 예민해진 게 틀림없었다고 믿으면서. 이 마을에 오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아주 잠깐 부딪친 거 가지고 애꿎은 사람을 경계하다니.
옅게 남아있는 불안감이 머릿속을 흐트러트리지 않도록, 나는 그것을 잊어버렸다.
* * *
그리고 팔찌의 마석이 깨졌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그날 저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