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M3.
“저기.”
누군가가 툭, 마샤의 어깨를 건드렸다. 마샤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반사적으로 거리를 벌려 도망을 칠 뻔했으나, 상대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걸음이 저절로 멈췄다. 노랗고 밝은 빛이 상대의 뺨을 비추며 아른거렸다.
여기서 보리라고는 조금도 기대하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방금까지 떠올리던 바로 그 조언을 해주었던 사람.
바람결에 갈색 단발머리가 흔들거렸다.
환하게 빛나는 등불을 든 채, 에이가 마샤의 앞에 서 있었다.
“여기서 뭐 해?”
상황에 맞지 않게 차분한 목소리는 오히려 마샤의 혼란을 가중시켰다.
여기서 뭐하냐고? 그러게, 내가 뭘 하고 있었지? 긴장감에 굳어있던 머리는 여전히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마샤는 그 자리에서 바짝 얼어 있다가, 훅 들어오는 기억에 숨을 삼켰다.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무언가라도 붙잡았는데, 고개를 내려 확인해보니 그건 에이의 팔이었다. 절박함이 앞선 나머지, 그 순간에는 팔을 놓아야 한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오히려, 붙잡을 수 있다면 언제까지고 붙잡은 채로 있고만 싶었다.
저, 저기. 가까스로 내뱉은 목소리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지금, 지금.”
“응. 말해봐.”
“어, 어떤. 어떤 남자가, 우리를 쫓아왔어. 오늘 아침에 마을 게시판에 붙어있던 그 사람이. 친구들을 계속 쫓고 있는데, 잡히면 안 되는데…….”
횡설수설, 문장도 단어도 되지 않을 말들이 토막토막 내뱉어졌다. 하지만 상황 전달을 하기에는 충분했던 모양인지, 상대방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 순간에도 에이의 표정은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그렇구나. 그럼,”
“……어떻게 해야.”
“혹시 저 사람이니?”
그 말에, 마샤는 휙 하고 고개를 들었다.
새된 비명과 엉엉 우는 소리가 들리고, 킬킬거리는 웃음소리가 그 뒤를 따랐다. 마샤와 에이의 앞을 지나가는 형체들은 분명 그녀의 친구들과 그 남자였다.
친구 두 명은 거의 잡히기 직전처럼 보였고, 남자는 그 상황이 즐거운지 계속해서 웃는 소리를 키워나갔다.
“저 사람 맞지?”
반쯤 확신하고 있지만, 그래도 다시 한번 물어본다는 어투였다. 마샤는 경황없는 와중에도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마샤의 고갯짓을 확인한 에이가 자연스럽게 허리를 숙였다. 땅에서 무언가 골라내기라도 하는 듯, 자갈돌을 집어 들었다가 멀리로 휙휙 던지는 모습이 분주해 보였다.
지금 대체 뭘 하는 거지, 하고 마샤가 생각한 순간.
“이거 괜찮네.”
그렇게 중얼거리며 자세를 바로 한 에이의 손에는, 주먹만 한 돌이 들려 있었다.
아직 마샤의 친구들과 남자는 그리 멀어지지 않았다. 에이는 어깨를 풀고 거리를 가늠하더니, 돌을 한 번 공중에 던졌다가 받았다.
그리곤 그대로 남자의 머리를 향해 던졌다.
쐐액,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나고, 에이가 던진 돌이 저 멀리 날아갔다.
날아간 돌은 딱, 내지는 퍽으로 표현될 것 같은 둔탁한 마찰음을 내면서 땅으로 떨어졌다. 힘없이 쓰러지는 남자와 함께.
마샤는 그 모든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뭐, 뭘 한…….”
“그냥 돌 던진 거야.”
그때만큼은 자신이 말을 더듬고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방금 일어난 일 때문에 얼이 빠져나가서.
마샤가 그러든 말든, 에이는 태연자약한 모습으로 손에 묻은 흙먼지를 탁탁 털었다.
“뒤통수 깨지라고 던진 건데 잘 된 건지 모르겠네.”
“…….”
마샤는 그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 그 자리에서 눈만 깜빡였다. 에이가 한 말만 머릿속에서 반복되었다. 뒤통수 깨지라고 던진 건데… 잘 된 건지는…….
방금까지 쫓기던 친구들이 자지러지게 울기 시작하고 나서야, 마샤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기만 하는 친구에게 괜찮냐고 손을 내미는 에이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몸의 떨림은 점점 잦아들었고, 마냥 깜깜하기만 했던 밤하늘에는 어느새 달이 떠 있었다. 무섭고 섬뜩하기만 했던 풍경도 달빛이 비치자 한결 나아졌다.
에이가 등을 토닥거리며 친구를 진정시키자, 울음소리도 점차 잦아들었다. 일련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흥분과 두려움이 전부 가라앉았다.
긴장이 풀려 친구들을 따라 아무 데나 주저앉으니, 땅바닥의 냉기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 차가운 감각은 기진맥진한 머리를 조금이나마 일깨우고 직전의 상황을 되돌아보게끔 했다.
다른 건 몰라도 정말 위험한 상황이었다는 것 하나는 알 수 있었다. 누군가 한 명이라도 그 남자의 손에 잡혔다면, 그래서 깨진 술병이 친구의 얼굴이라도 스쳤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마샤는 스스로 한 상상에 흠칫 놀라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한번 아까의 두려움이 몰려오는 듯싶었다.
그러나 남자에게 쫓길 때 손쉽게도 그녀를 지배했던 공포심은, 마샤가 감았던 눈을 떠 에이를 바라보자 금세 사라졌다. 에이는 남자가 제대로 기절한 게 맞는지 확인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
저 사람이 오지 않았으면 우리는 어떻게 됐을까? 그런 의문이 들자마자, 가슴 속에서 불덩어리가 울컥하고 치밀어 오르는 듯했다.
마샤는 땅바닥에 쓰러져 있는 남자를 보았다가, 다시 에이를 바라보았다. 기분이 계속해서 울렁거렸다. 불안감이 사라진 자리에 안도감과 정체를 모를 이상한 감정이 찾아와 마샤의 속을 어지럽게 했다.
가슴이 터질 것 같고 눈가가 뜨거워지는 게, 무언가를 억지로 참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게 뭔지 알아차리기도 전, 에이가 고개를 들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평온한 갈색 눈동자가 마샤를 향했다.
따뜻한 색깔이었다. 몹시도.
“너는 괜찮아?”
그리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샤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 * *
그로부터 얼마 뒤, 마샤는 자신과 친구들이 밤늦게까지 돌아오지 않아서 마을 사람들이 모두 나섰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마샤가 무사한 걸 확인한 부모님은 등짝을 때리고 그녀를 엄하게 혼냈지만, 화난 표정에도 숨길 수 없는 안도감이 깔려있었다.
차마 자식에게 표현할 수 없는 안도감은 감사 인사를 받아야 할 이에게 돌아갔다.
“이 늦은 밤에 나서줘서 고마워요, 아가씨.”
숲속에서 쫓기던 소녀들을 찾을 수 있었던 건 에이가 있었기 때문인데도, 그녀는 아주 약간의 뿌듯함도 표현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저어 보이고, 무사히 찾을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는 말을 할 뿐이었다.
마샤는 그 덤덤함을 눈에 담으며 입을 삐죽거렸다. 조금이라도 자랑스러워하면 좋을 텐데, 왜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인 건지.
이러면 고마움을 표현하기도 민망해지지 않는가.
부끄러움을 이유로 말 걸기를 망설이는 사이, 연신 감사 인사를 받던 에이가 몸을 돌렸다.
지금 돌아가려고 하는 거야? 다른 생각을 하기도 전 마샤가 에이의 손을 덥석 붙잡았고, 당연한 수순처럼 의아하다는 눈빛이 닿았다.
“왜?”
“그, 아까.”
막상 붙잡고 나니 뭐라고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마샤가 뜸을 들이며 눈만 굴리는데, 에이가 무언가 알아차렸다는 듯 아, 하고 소리를 냈다.
“혹시 단테 찾아?”
“뭐?”
“아까 네 남은 친구들 찾는 거 도와주고 갔는데. 내일 아침 일찍 나가야 한다길래 내가 빨리 돌려보냈어.”
갑자기 무슨 뜬금없는 소리야? 마샤는 머리 위로 물음표를 백 개쯤 띄웠다가, 뒤늦게 에이가 왜 이러는지를 깨달았다.
내가 마주칠 때마다 계속 단테 오빠를 찾아서 그런 거구나……. 수치스러움에 고개가 저절로 떨궈졌다.
“…단테 오빠 찾으려고 한 거 아니야. 그 오빠가 왔다 간 것도 몰랐는걸.”
“음, 그래?”
에이는 그다지 믿는 기색이 아니었지만, 그 순간 마샤는 더할 나위 없이 진심이었다.
물론 그동안 자신이 과도하게 단테 오빠를-정확히 말하면 그 오빠의 얼굴을-좋아하기는 했지만, 네가 말을 꺼내기 전까지 그 사람 생각은 한 톨도 하지 않았단 말이야.
오히려 나는 너한테 어떻게 고맙다는 말을 전해야 할지만 생각하고 있었다고!
“그럼 왜 불렀어?”
…하지만 또 그런 질문을 들으니 말문이 턱 막힌다.
마샤는 한참 동안 안절부절못하다가, 에라 모르겠다 싶어서 아무 말이나 내질렀다.
“아까 돌 잘 던지더라.”
“…….”
그 순간 흐르는 침묵을 마샤는 견딜 수 없었다. 쪽팔려서 죽을 것 같았지만, 역시 고맙다는 이야기를 하기 전까지는 에이를 보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야 오늘이 지나면 다시는 말하지 못할 것 같은걸.
“살면서 그렇게 돌을 잘 던지는 사람은 처음 봤어. 아까 그 남자 제대로 나가떨어졌잖아. 그 장면이 계속 아른거렸다고 해야 하나? 응.”
“어… 그래?”
에이는 흔치 않게 당황한 모습이었다. 잠깐, 당황했다고? 표정 변화가 있다는 것도 놀라운데 그게 내 눈에 보일 정도란 말이야?
마샤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에이를 살펴보았지만, 그 미미한 당황이 사라지는 일은 없었다.
“칭찬 고마워. 돌을 잘 던진다는 칭찬은 처음 들어보네……. 음.”
뭔가 더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에이가 잠깐 뜸을 들였다.
“급한 대로 주의만 끌려고 한 건데, 그대로 맞고 기절해서 다행이었어.”
“…응.”
“그리고 다른 것보다 너희가 다치기 전에 잡을 수 있어서 다행이야.”
그렇게 말하는 에이의 얼굴에는 어느새 희미한 안도감이 서려 있었다. 자신도 마냥 이 상황을 담담하게만 받아들인 것은 아니라는 듯이.
그 감정들을 차례대로 눈에 담고 나니, 차마 부끄러워서 하지 못했던 이야기가 입에서 빠져나왔다.
“……아까 구해줘서 고마워.”
그 말을 들은 에이가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희미하게 웃었다. 눈꼬리가 살짝 접히고, 인상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그 말 하려고 붙잡은 거였구나.”
“…….”
“고맙다는 인사는 잘 받을게. 오늘 힘들었을 텐데, 얼른 들어가서 쉬어.”
의심할 필요도 없이 다정한 음색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마샤는 그 순간, 에이를 미워하던 마음이 눈 녹듯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럼, 내일 보자.”
마치 아침의 상황이 반복되는 것처럼, 에이는 인사를 남기고 사라졌다.
에이의 뒷모습이 저 멀리로 사라져 보이지 않을 때까지 마샤는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부모님이 마샤를 몇 번이고 부를 만큼, 꽤 오랜 시간 동안.
오늘 하루는 분명 마샤의 머릿속에서 오랜 시간 선명하게 남아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건 분명 좋은 이유에서만은 아니었지만, 오늘을 기억하리라는 사실이 마냥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최악으로 남을 뻔한 하루가 누군가의 도움으로 무사히 끝났기 때문에.
집으로 돌아가는 마샤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에이와 친해지고 싶어하는 친구들의 마음을, 어쩐지 알 것 같았다.
* * *
“이 빵 너무 맛있게 구워졌는데? 에이한테 좀 가져다줘야겠다.”
“뭐야. 너 에이 언니 별로 안 좋아하지 않았어?”
“내가 언제.”
“아니, 얘 좀 봐. 저번에 분명 그랬잖아. 뭐가 저렇게 한도 끝도 없이 무심한 건지 모르겠다고.”
“그게 매력인데 내가 몰라봤던 거지. 내가 언제 그 매력을 알아봤는지 이야기해줄까? 그날은 아침부터 운이 없는 날이었는데…….”
“또 시작이다. 누가 얘 입 좀 막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