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D4.
“솔직히 말할게. 사실 네 마음을 무시하고 있었어.”
고요한 목소리였다. 얼핏 들으면 아무 감정도 담겨있지 않다고 느낄 만큼, 덤덤하고 어딘가 멍한 목소리.
단테를 바라보던 에이가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저 멀리 지평선을 향하다가, 그녀가 완전히 몸을 트는 순간 그녀의 얼굴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에이는 단테를 등진 것도 모자라 앞으로 몇 걸음 나아가기까지 했다.
이제 그의 시야에 비치는 거라고는 붉은빛에 스며들며 흩날리는 갈색 머리카락뿐.
팔을 뻗어도 닿을 수 없는 거리가 되어서야 그녀는 걸음을 멈췄다.
“지금은 날 좋아한다고 말해도 그게 오래가지는 않을 거라고. 그만큼 가벼운 감정이라면, 너를 위해서라도 거절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어.”
“…….”
“근데 내가 잘못 생각한 것 같네.”
웃음소리가 났다. 그건 상대의 진심을 알게 되어서 기쁜 사람의 것이라기보다는, 모든 것을 단념한 사람의 것처럼 들렸다.
그런 와중에도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담담하기만 했다.
“넌 후회하게 될 거야.”
그녀는 그의 미래를 한마디로 단정 지었다.
“그 감정이 지금의 너한테는 기쁨과 행복이 될지도 모르지만, 나중에는 네가 저지른 가장 큰 실수라고 느껴질 거야. 장담할게.”
“에이.”
“나한테 이렇게 커다란 애정을 보인 것을, 모든 것을 줄 것처럼 굴었던 것을 후회하게 될 거야. 분명, 그래. 네가 나를 떠날 때쯤에…….”
그 모습을 보며 단테는 생각했다. 너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고.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관찰하다가 알게 된 모습 중 하나였다. 아마 운이 좋지 않았다면, 그 역시도 눈치챌 수 없었을 모습.
그녀는 늘 단테를 언제든지 사라질 사람인 것처럼 대했지만, 단테가 보기에 정작 사라질 것 같은 사람은 그녀 자신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분명 그녀는 계속 그 자리에서 멈춰 서 있는데, 마치 노을빛에 묻혀 금방이라도 스러질 사람처럼 보였다. 자신이 모르는 그 어딘가로 떠나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어쩐지 조금 초조해져서, 단테는 저도 모르게 손을 쥐었다가 폈다.
“내가 혼자 남겨질 때쯤에는 너도나도 후회하고 있겠지.”
단테는 어렵지 않게, 에이가 그다지 좋은 생각을 하고 있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시종일관 차분해서 감정을 알 수 없었다.
그래, 후회할 거라면 차라리. 그렇게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고, 단테는 다시 그녀를 불렀다.
“에이.”
“……응.”
“뭐가 그렇게 불안한 거야?”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두 사람이 입을 다물자 바다 위는 다시 조용해졌다. 한참의 망설임과 침묵 후에야 되묻는 말이 돌아왔다.
“내가 왜 불안해한다고 생각해?”
“불안하지 않다면 계속 훗날을 걱정할 리 없으니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네가 날 너무 잘 알게 되었구나.”
또다시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서글픔이 담긴 메마른 웃음소리였다.
“그래, 맞아. 나는 불안해.”
그녀가 고개를 숙이고, 조금 억눌린 듯한 말이 튀어나왔다.
“어떤 식으로든 네가 나한테 중요한 사람이 되는 게 무서워.”
시종일관 차분하던 목소리가 조금 흔들리는 듯했다. 여전히 그녀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단테는 괜찮았다. 그녀의 불안감을 알아챈 이상 그녀가 갑자기 사라질 것 같지는 않아서.
에이는 누군가를 곁에 두려 하지 않았다. 그것은 단순히 그녀의 옆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그녀에게 소중한 사람으로 자리매김한다는 의미에 가까웠다.
처음에는 그녀의 냉담한 태도가 단순히 타인을 신뢰하지 않는 성격에서 비롯된 줄 알았으나,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에이는 소중한 사람을 만들지 않는 것을 넘어 소중한 사람이 생기는 것을 두려워하기까지 하고 있었다.
매정한 말을 하며 그를 밀어내려고 했던 것도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그녀가 느끼는 두려움은 어디로부터 시작된 걸까.
하지만 그 모든 의문을 떠나서, 단테는 에이가 두려움을 느낀다는 사실 자체가 마음 아팠다. 사랑하는 이의 약한 부분을 알게 된다는 것은 그의 생각보다 더 슬픈 일이었다.
될 수 있다면 그녀의 불안감을 대신 느껴주고 싶었다. 진심으로.
하지만 단테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대신에 다른 말을 꺼냈다.
“네가 왜 무서워하는 건지 알 수 없지만, 일단 먼저 말해주고 싶은 게 있어.”
“…그게 뭔데?”
“나는 널 떠나지 않을 거야.”
그녀가 멈칫했지만, 그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네가 원하기만 한다면 나는 계속 네 곁에 있을게.”
“…네 마음이 변한다면?”
“그럴 일 없어. 너도 아까 봤잖아.”
내 마법. 그렇게 대답하자 그녀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녀도 그 마법의 의미를 알아챈 듯했다.
그녀가 그의 마음을 오롯이 인정하는 건 이 순간이 처음이었다. 단테는 자신이 발현했던 마법을 떠올리며 미소지었다.
네가 원한다면 세상을 가져다주리라 말한 보람이 있었다.
단테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가 에이의 옆에 서자,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얼굴 보여줘, 응? 다정한 말에도 고개를 저을 뿐이었고.
“그리고 넌 지금 내 마음이 변할까 봐 무서운 게 아니잖아.”
그래, 그녀의 태도는 분명 마음의 변질을 걱정하는 사람과 달랐다. 그녀는 누구에게도 이해받을 수 없는 아득한 외로움 속에 홀로 서 있는 듯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면, 무슨 이유에서인지 단테는 자신의 오랜 스승이 생각났다.
그리고 남겨지는 것만으로도 영원히 고통스러울 거라는 그녀의 충고 또한.
에이는 분명 스승과 같은 불멸자는 아닐 터였으나, 남겨진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살아오는 동안 여실히 느껴본 것이 틀림없었다.
“내가 널 떠나지 않으리라 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해?”
단테는 문득, 자신이 숫제 애원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평생 해본 적 없는 일이었으나, 간절해 보일수록 그녀가 더 흔들릴 거라 생각하니 괜찮았다.
그리고 그의 예상대로, 계속 머뭇거리던 에이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네 마음과 의지는 잘 알겠어.”
“응.”
“…하지만 언제나 만약의 상황을 배제할 수는 없는 거잖아.”
세상일은 뜻대로 되는 게 아니야.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네가 나를 떠나는 일이 생기면 어떡해?”
“어쩔 수 없다면, 어떤?”
“…그래. 솔직히 말할게.”
그녀는 결국 한숨처럼 내뱉었다.
“나는 네가 죽는 게 무서워.”
“…….”
“나를 떠났던 사람들은 대부분 마음이 바뀌어서 떠난 게 아니었어. 그 사람들은 너무 착했고, 또 너무 다정해서 끝까지 내 옆에 있어주었어. 하지만 그건, 그냥 그 사람들의 끝이었을 뿐이야.”
바다도, 하늘도 모두 붉게 물들어가는 그 찰나에, 간신히 숨겨놓았던 생각들이 비로소 모두 꺼내졌다. 그녀의 눈가가 붉어진 건지, 노을빛이 물들이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어진 그 순간에.
“난 결국 이렇게 남겨졌어.”
그녀가 고개를 돌리고, 이내 조금 울듯이 일그러진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보였다. 그녀와 함께 살게 되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이었다.
그랬기에 더욱 사랑스러웠고.
단테는 자신이 느끼는 사랑스러움에, 오늘 말하게 되리라 생각하지 못했던 비밀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 단지 조용히 웃으면서.
“에이.”
“…응.”
“난 죽지 않아.”
“…….”
침묵이 흘렀다.
“나는, 그래.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 영생을 얻었어. 정말 영원히 사는 건지, 그냥 아주아주 오래 살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삶이라고 해야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오래 살게 되었어.”
“…….”
“그러니 나는 그런 이유로 너를 떠나지 않아.”
멍한 표정이었다. 그 멍한 표정을 보고서야 단테는 비로소 마음 편하게 웃을 수 있었다.
자신의 불멸이 그녀를 안심시킨다는 사실이 더없이 기뻤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네 옆에 있을게.”
“…….”
“네가 불안해하지 않을 때까지, 나만은 너를 떠나지 않을 거라고 믿게 될 때까지 계속.”
여전히 돌아오는 답은 없었지만 더 이상 초조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그는 모든 것이 괜찮아졌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에이. 자랑스러워해도 좋아.”
그는 그녀의 얼굴을 보면서 행복하게 웃었다. 밤이 찾아오기 직전, 지평선 너머의 노을이 최후의 빛을 내며 반짝였다. 그에 따라 붉은빛이 스며드는 그녀의 볼을, 단테는 손을 뻗어 감싸 쥐었다.
“너는 영원한 사랑을 얻은 거야. 그것도 세상에서 가장 대단한 마법사에게.”
계속해서 이어질 것 같은 침묵이 깨지고,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까와는 사뭇 다른, 비로소 마음이 편안해지는 웃음소리였다.
잘나셨어, 정말. 타박하듯 들려오는 목소리가 기분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