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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마탑주였다 (12)화 (12/181)

12.

변화는 정말 갑작스러웠다.

단테가 애써 감춰왔던 마음이 행동에서 드러나던 때도 충분히 당황스러웠는데, 심지어 이제는 그걸 숨기려고도 하지 않는다. 아예 무시해보려고 해도 내 신경이 저쪽에 쏠려있다는 걸 깨달을 뿐이었다.

나는 끝끝내, 거절 방법을 잘못 선택했다는 걸 인정했다. 하지만 내가 잘못해서 그런 선택을 한 건 아니잖아, 전부 단테가 특이한 탓이지.

아무리 자기가 잘났어도, 상대의 조건을 신경 쓸 필요도 없을 만큼 모든 걸 가졌으니 괜찮다고 말할 줄 누가 알았겠냐고.

내가 옆에 있기만 해도 눈에 띄게 부끄러워하던 태도는 온데간데없었다. 오히려 더 다가오면 다가왔지, 쑥스럽다는 이유로 멀어지지는 않았다.

지금도 봐라. 이제는 거실에서 내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먼저 나를 부르기까지 하지 않는가.

문밖에서 선명하게 울리는 노크 소리에, 나는 침대에 누워있다가 비척거리면서 일어났다.

“왜?”

문을 여니 암묵적 합의 아래에 눌러살고 있는 하숙인이 보였다. 내가 문을 열자마자 미소를 짓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걸어온다.

“오늘 좀 늦게 나오는 것 같아서.”

“피곤해서 일찍 잘까 하고…….”

거기까지 말했는데 표정이 순식간에 시무룩해졌다. 일부러 과장하는 얼굴이라기보다는, 자신이 느끼는 것을 아낌없이 표현하는 얼굴이었다.

물론 시무룩해하든 말든 무시하면 그만이지만, 어제도 똑같은 변명을 대며 나가지 않았거든. 사실 그제도. 아니, 어쩌면 사흘 전에도.

함께 있는 시간을 아예 없앨 수는 없으니 줄여보기라도 하려고 한 건데, 며칠 지났다고 양심이 콕콕 찔린다. 단테가 보이는 솔직한 태도 때문에.

이렇게 나이를 많이 먹었는데 왜 아직도 내 양심은 건재한지 모르겠다.

“지금 나가려고 했어. 잠깐 누워있었던 거야, 잠깐.”

마지못해 원하던 대답을 해주니 단테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어쩔 수 없이 책을 들고, 거실로 나와 소파에 앉았다.

“너 이제 불 밝히는 마법 쓸 수 있잖아?”

“응?”

나는 옆자리에 가까이 앉은 단테를 쳐다보았다. 거의 노려보다시피 하는 시선에 주춤할 법도 한데, 단테는 그저 화사하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분명 지금도 자기 얼굴을 써먹으려는 게 틀림없다. 은근슬쩍 미인계로 넘어가려고 하다니, 네가 아무리 잘났다지만 그게 먹힐 줄 알고?

아주 잘 먹혔다. 오늘도 시각적 자극에 패배한 나는 한숨을 쉬며 소파에 몸을 푹 묻었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단테는 웃으면서 책을 폈다. 무슨 책을 읽나 하고 잠깐 살펴보니, 표지의 색깔이나 모양새가 익숙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건 단테가 마법을 쓸 때마다 알아서 펼쳐지며 페이지가 넘어가던 책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 문자로 쓰여있어서, 옆에서 들여다봐도 도저히 내용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이쪽 사람들이 쓰는 언어들은 다 익혔다고 생각했는데 처음 보는 것도 있다니. 잠시 문자들을 눈으로 훑다가 고개를 돌렸다.

나는 이곳으로 넘어오면서 글을 새로 배워야 했다. 아는 글자도 있었지만 모르는 글자가 훨씬 많았고, 안다고 생각했던 언어조차 쓰는 방식이나 문법이 완전히 다른 게 대다수였던 탓이다.

그게 언제였지, 이 차원에 떨어진 지 얼마 안 되어서였나. 내가 글을 모른다는 것을 알아챈 어떤 사람이 내게 친절히도 글을 가르쳐주었다.

그 사람에게 글자를 배우면서, 말은 통해서 다행이라는 말을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가능하면 많은 언어를 알려줄 테니 자신만 믿으라고 했지.

자기가 무슨 선생님이라고 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리고, 그리고 또……. 더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사람의 얼굴조차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너무 오래된 기억이다. 떠올릴 필요가 없었던 기억이기도 하고. 잠깐 기분이 저조해지는 것 같아 눈을 깜빡였다.

그때, 단테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건 ‘잠시 침묵할지어다’라는 뜻이야.”

“뭐?”

뜬금없는 말이었다. 내가 반문하며 단테 쪽을 쳐다보자 단테는 태연하게 책장을 넘겼다.

“아까 여기를 보는 것 같아서.”

“음. 보기만 봤어. 난 내가 어느 부분을 본 건지 모르는걸. 뭐가 무슨 글자인지 아예 못 알아보고 있어서.”

“모르는 게 당연해. 이건 해석이 거의 되지 않은 고대 언어거든.”

그런 것도 있어? 나는 잠시 눈을 깜빡거렸다.

“해석이 되어있지 않으면 어떻게 읽는 거야?”

“읽고 있다고 하기에는, 음……. 분석하고 있는 거지. 비슷한 글자가 어디에서 겹치는지 찾아보고, 그걸 비교해 보는 거야.”

조곤조곤 설명을 이어가는 목소리가 나쁘지 않았다. 책을 가로지르는 하얀 손가락을 바라보면서, 가만히 단테의 말을 경청했다.

“사실 되게 어려운 작업이야. 글자 하나하나에 해석 불가 마법에 망각 마법까지 걸려있는 데다가, 한 번 파훼한다고 해서 작업이 끝나는 게 아니야. 파훼된 마법은 복구가 되거든. 한 글자 읽을 때마다 계속 마법을 파훼하면서 읽어야 해.”

“그냥 매일 똑같은 책만 읽는 줄 알았는데……. 대단한 일을 하고 있었네.”

“뭐, 해야 하는 일이니까 하는 거지. 그렇게 힘들지도 않아.”

단테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별거 아닌 일인 것마냥 말하지만, 단테를 제외한 다른 사람에게는 힘든 작업일 가능성이 높았다.

이 분야에 문외한인 내가 봐도 단테의 재능이 눈부실 정도인데, 정작 단테는 자신이 얼마나 뛰어난지 모르는 것 같더라고. 자기가 잘한다고 여기기보다는 그냥 남들이 부족하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음, 막상 이렇게 생각하니 이건 이것대로 재수 없네. 갑자기 단테와 동시대를 살아갈 마법사들에게 애도를 표하고 싶어졌다.

나는 자꾸 다른 곳으로 빠지려는 생각을 떨쳐내며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까지 해서 네가 얻는 게 뭐야?”

“이 글자들을 익힐 수 있지. 그리고 글자를 익힌다면 고대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될 거고.”

“그건 또 뭐야……. 아니, 됐다. 이거 하나는 확실해. 내가 이런 식으로 글자를 배워야 했다면 진작에 때려치웠을 거야.”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가볍게 한 말인데, 의외로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의아해져서 고개를 돌리니, 어딘가 깊게 생각에 잠긴 듯한 옆모습이 보였다.

“혹시 네 이름도 글자를 배우다가 지은 거야?”

“내 이름?”

“그래.”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까보다 낮아진 목소리다.

“에이(A)는 보통 언어를 배울 때 가장 먼저 배우는 첫 글자잖아.”

그 말을 듣고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내가 저 글자를 이름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때가 언제였더라.

정확한 시기는 결국 떠올리지 못했지만, 에이라고 불리는 것이 익숙해질 만큼 긴 시간이 지났다는 건 알았다. 단테가 말한 대로 정말 글자를 배우다가 지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단순히 이곳에서 처음 배운 글자였기 때문에 이름으로 삼은 건 아니었다. 애초에 알파벳은 내가 사는 곳에도 있었는걸.

에이를 이름으로 삼았던 건, 정말 단순하고도 직관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원래 쓰던 이름이 있었는데, 발음이 좀 독특한 이름이었어. 그래서 바꾸는 김에 원래 이름에서 제일 많이 들어가던 글자로 바꾼 것뿐이야.”

너무 대충 지은 탓에 이름을 말할 때마다 그게 진짜 이름이냐고 묻는 이들이 많지만, 어쨌든 처음 의도는 그랬다.

“원래 이름이 뭐였는데?”

“음, 글쎄.”

그건 그다지 말하고 싶지 않다. 이름과 함께 내다 버린 것을 다시 꺼내고 싶지 않았으니까.

내가 대답을 피하는 걸 알았는지, 더 이상의 질문은 없었다. 단테가 말을 잇지 못하고 잠깐 머뭇거리는 틈을 타 나는 자연스럽게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해석을 못 하게 하는 마법이라니, 별 특이한 마법이 다 있네.”

“특이하긴 하지. 뭐, 그런데 이것 말고 더 특이한 마법도 많아.”

네가 궁금하다면 보여줄 수도 있어. 정말 지나가는 말에 불과하다는 듯 가벼운 어조였지만, 글쎄.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기울였다.

“내가 보여달라고 하면 또 뭘 요구하려고?”

“무슨 소리야?”

모른척해봤자 소용없다. 고백한 뒤로 뻔뻔함이 늘어난 것 같은데, 그래봤자 나는 못 이기지. 너에게 한 번도 져본 적이 없었던 나였다.

“저번에는 시장에 같이 가달라고 하니까 그러면 손잡는 거 허락해달라고 했고, 또 저번에는 책 정리 좀 도와달라니까 머리카락 만지는 거 허락해달라고 했고, 또…….”

“음, 내가 그랬었나.”

자기 나름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린다고 노력한 거겠지만, 어떻게든 얼굴을 숨기려는 손짓은 아주 어색해 보였다. 붉어진 얼굴을 가리려 애를 쓰는 모습을 보니까 약간 안쓰럽기도 하고.

뭐, 귀엽기도 하고.

“그래서, 이번에는 뭘 원하는데?”

역시 원하는 게 있는 모양인지, 단테가 잠깐 헛기침을 했다. 아까보다는 진정이 된 듯 눈가만 조금 붉은 것이 눈에 띄었다.

“……손 만져봐도 돼?”

“손잡는 거랑 비슷한 것 같은데.”

“그거랑 이거는 달라, 그러니까… 아니, 아무튼. 달라.”

네가 다르다면야, 뭐. 세상에서 제일 특이한 마법을 보여줄 거라면 수락할게, 하고 농담조로 말하자 단테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단테 손 위에 내 손을 올리자, 단테가 잠시 몸을 움찔 떠는 것 같았다.

그는 이내 내 손을 조심히 잡고, 손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려는 듯 하염없이 눈에 담다가, 손톱의 모양을 자신의 손가락에 새기려는 것처럼 내 손톱을 하나하나 쓸었다.

나는 내 손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이 그렇게 많을 줄은 몰랐다. 단테는 손가락 하나하나를 손에 쥐어보기도 하고, 마디에 툭 튀어나온 뼈를 만져보기도 하고, 자신의 손가락을 내 손에 얽어보기도 했다.

어찌 보면 장난감을 대하는 것 같았고, 또 어찌 보면 아주 귀한 보물을 만지는 것도 같았다. 볼 것도 없는 손을 꼼꼼히 살핀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내 손등을 가만 쓸던 단테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작아.”

“뭐가?”

“전부. 손톱도, 손가락도, 손등도, 전부 다.”

그런 말을 왜 그렇게 가라앉은 어조로 말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단테의 손가락이 내 손마디 사이를 스치자, 순간 등이 서늘해지며 형용할 수 없는 감각이 흘렀다. 위기감과 비슷한 것 같지만 그것보다는 더 짜릿함에 가까운 감각.

그걸 느끼자마자 갑작스레 목 부근이 뜨거워져서, 기분이 이상해진 나는 단테의 손을 덥석 잡았다.

“내 손이 작은 게 아니고 네 손이 큰 거야.”

“그래?”

“응, 그래.”

나는 한참 내가 잡은 단테의 손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너는 참 이상해.”

“……뭐가.”

“아까까지는 멀쩡했으면서, 어느 순간에 갑자기 부끄러워하잖아.”

고개를 올려 단테의 얼굴을 쳐다보니, 역시나 단테의 얼굴은 새빨갛게 바뀌어있었다.

자기가 잡는 것은 부끄럽지 않고 내가 잡는 것은 부끄럽다 이 말인가. 어차피 똑같이 손잡는 건데도 말이다.

뭘 어떻게 하면 사람의 얼굴색이 저렇게 순식간에 바뀔 수 있는 건지. 원래 피부가 하얀 편이라 붉은 기가 더 눈에 띄는 것일지도 모른다.

내 시선을 이리저리 피하던 단테는 손을 거두어 가려는 듯 팔을 당겼다.

“나도 몰라.”

“그래?”

그렇구나. 짧게 대답하면서 나는 단테가 손을 빼지 못하도록 힘주어 잡았다. 손안에 온기가 빠져나가려고 하니 반사적으로 한 행동에 가까웠는데, 내가 힘을 주는 것을 느꼈는지 단테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단테는 그런 내 손을 뿌리치지 않고, 오히려 마음대로 잡고 있으라는 듯 가만히 있었다. 나는 단테가 뿌리치지 않으니 계속 잡고 있었고, 단테는 내가 잡고 있으니 뿌리치지 않는 형국이었다.

누가 보면 웃긴 꼴이었겠지만, 우리에게는 그 상황이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 이후로도 한참, 나는 단테의 손을 잡고 가만히 앉아있었다.

평화로운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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