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편이 마탑주였다 (4)화 (4/181)

4.

단테는 훌륭한 지갑일 뿐만 아니라 훌륭한 짐꾼이었다.

우리 집에 같이 지내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익숙해지던 어느 날, 살 게 많아서 마을에 좀 같이 따라가달라는 말에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순순히 따라와 주었다. 착한 어린이 같으니라고.

뒤늦게 단테가 사람이 많은 곳은 싫다고 한 게 떠올랐지만, 싫다면 거절을 했을 테니 괜찮을 거라고 넘겼다.

내가 장을 보는 마을은 숲 옆에 붙어있어서 조금만 걸어도 갈 수 있었다. 가깝기도 가깝지만, 옆 마을보다 규모가 작고 조용한 곳이라 마음에 들었다.

내심 누가 다쳐서 숲에 들어가더라, 외부인이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사람을 찾더라 하는 흉흉한 소문이 돌지 않을까 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단테를 신기해하면 신기해했지, 의심하거나 경계하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나와 단테에게는 다행인 일이었다. 안 그래도 마을에서 떨어져 사는데 수상한 사람 취급을 받아서 좋을 게 없으니까.

누군가와 함께 장을 보는 것은 오랜만이라, 평소에는 사지 않았던 것도 이것저것 많이 샀다. 당연한 수순으로 짐을 들어주는 단테의 손도 점점 무거워졌다. 저런, 표정이 점점 안 좋아지네. 나는 안타까워하면서 짐을 하나 더 얹어주었다.

“뭘 이렇게 많이 사는 거야?”

“사는 사람이 늘었으니까 많이 사는 거야. 나 혼자 살면 이렇게 많이 안 필요해.”

그렇게 말하니 또 입을 다문다. 말싸움에 약한지, 어째 말로 이기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곧 있으면 집에 갈 테니까 조금만 더 고생하라고 말하는 그때, 누군가가 큰소리로 외쳤다.

“언니!”

내가 마을에 자주 오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마을에 들를 때마다 안면을 익혔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 사람들은 나를 발견하면 아는 척을 하며 반가워하고는 했는데, 그럴 때마다 나도 적당히 인사를 받아주고는 했다. 오랜만에 보니까 반갑다는 인사말을 건네면서.

대개는 붙임성 좋은 어른들이나 내 또래-물론, 또래라는 말은 외견만 봤을 때 쓰는 말이다-소녀들이었다.

오늘은 후자였고.

“언니 오랜만에 왔네요!”

말을 걸며 몰려든 아이들에게 둘러싸이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 아이들은 나를 반가워하다가, 금세 내 옆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워낙 눈에 띄는 얼굴이라 시선이 저절로 가는 모양이지.

단테를 본 그 아이들의 반응은, 딱 예상한 그대로였다.

“와, 언니, 와.”

“언니 이 사람 누구예요?”

“우와. 나 이렇게 잘생긴 사람 처음 봐요.”

“나도.”

“언니 친구예요?”

“언니랑 같이 살아요?”

처음 보는 사람에 들뜬 건지, 아니면 그냥 저 얼굴에 들뜬 건지. 나는 잔뜩 날아오는 질문들에 사정을 설명하려 입을 열었다가, 문득 귀찮음을 느끼고 입을 닫았다.

단테가 곤란해하면서 자신에게 날아오는 질문들-오빠 몇 살이에요, 어디서 왔어요, 뭘 먹고 이렇게 잘생겼어요-을 적당히 넘기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점점 대답하기 어려워하는 것도 보였고.

“같이 사는 사람 맞아. 이…….”

“같이요? 같이 산다고요? 단둘이요?”

“어쩌다 같이 살아요?”

“난 언니가 이렇게 능력 있는 줄은 몰랐는데!”

“넌 조용히 해!”

“…….”

정신없어. 원래 이렇게 시끄러운 애들이 아니었는데 오늘은 너무 정신없다.

나보다 한참 어린 애들의 활달함이 버거워지던 찰나, 나는 그 아이들이 대부분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단테에 관해 묻고 있지만, 눈만은 나를 향해있다니. 그럼 답은 보나 마나지.

일단 동거인이니까 나에게 허락을 구하고 있는 거다. 이 사람한테 질문 공세를 해도 되겠냐는, 그런 부류의 허락.

“…….”

저 나이대 애들치고는 착하긴 해, 그렇지?

나는 단테를 한번 보고, 간절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는 아이들을 한번 보고, 순식간에 결정을 내렸다. 어차피 나라도 여기서 빠져나가야 장을 보든지 말든지 하는걸.

“궁금한 게 있으면 직접 물어보는 게 어떨까?”

이렇게 말하면서 단테 쪽을 가리키니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든다.

마음속으로 단테에게 심심한 응원의 말을 건네며, 무리에서 빠져나와 바로 뒤의 가게로 향했다. 단테를 제물로 바치고 나오니까 마음이 찝찝…… 하지 않고 오히려 상쾌한데?

내 성격 이대로 괜찮은 건가? 곰곰이 생각하면서 과일이 늘어져 있는 가판대를 둘러보았다. 사과는 아닌데 사과처럼 생긴 과일이랑…… 내가 못 먹어 본 과일도 있고. 영 관심이 없어서 몰랐는데 종류가 꽤 다양했다.

단테가 아무거나 잘 먹는 것 같던데, 이것도 한번 먹여볼까? 갑자기 궁금해져서 처음 보는 것들도 조금 담았다.

내가 장을 마저 보건 말건, 단테를 둘러싼 아이들은 한참을 꺅꺅거리면서 서 있었다. 계산을 마치고 나오자 한껏 웃는 얼굴들이 나를 돌아보았다.

“그래서 언니랑 오빠는 무슨 사이예요?”

무슨 사이냐고? 그야 당연히 하숙인과 집주인 사이지. 하지만 질문 폭탄을 맞고 싶은 게 아니고서야 이렇게 대답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안다.

그래서 나는 가장 빠르고 간단한 답을 했다. 구구절절 이야기를 풀어놓을 필요도 없이 저 아이들의 모든 의문을 해소해줄 단 하나의 답을.

“어, 쟤가 내 애인이야.”

“우와!”

“진짜요? 어쩐지 언니가 모르는 사람을 데려왔나 했더니!”

“언니 멋있어요! 나도 저 오빠처럼 잘생긴 사람이랑 사귀고 싶어요!”

“얼굴만 봐도 배가 부를 것 같은데 애인이래!”

뭐라 떠들든 말든, 나는 또 다른 가판대에서 눈에 보이는 것들을 담았다. 그리고 단테가 이걸 들 만한 손이 남았나 보려고 뒤를 도는데, 갑자기 와하하 웃음이 터졌다.

“언니 이 오빠랑 사귄 지 얼마 안 됐죠!”

“음, 그렇지. 왜?”

사귄 적 없지만 대충 그렇다고 치자. 말끝을 흐리면서 대답하니 또 웃는 소리가 났다. 왜 그러는 거지? 의아해하기도 잠시, 누군가가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오빠 얼굴 좀 봐요!”

아이들이 비켜준 사이로 보이는 단테의 얼굴은, 음, 아까 내가 고른 과일 같았다. 한마디로 빨갛게 익어있었다는 소리다. 사람이 얼굴부터 목까지 전체가 저런 식으로 빨개질 수도 있구나 싶을 정도로.

덤으로 부끄러워 죽을 것 같다는 표정까지.

내가 애인이라고 말하면 대충 장단을 맞춰줘야지, 그렇게 당황하면 어떡해. 나는 남몰래 혀를 찼지만 다른 아이들은 신경 쓰지 않았다.

“언니가 애인이라고 하니까 놀라는 것 같더니 이렇게 빨개졌어요! 엄청 부끄러운가 봐!”

“잘생겼는데 귀엽기까지 해! 오빠, 이름이 뭐라고 했죠?”

내가 바라보자 더 새빨개지는 것 같던 얼굴은 곧 터질 것처럼 변했다. 나는 아이들을 둘러보다가, 새빨개진 단테를 구제해주기 위해 손을 뻗었다.

“내 사랑, 뭘 부끄러워해. 이제 집에 가자.”

“아니, 너……. 아니…….”

내 사랑이래! 거의 발작적인 웃음을 터뜨리는 아이들을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일단 애인이라고 했으니 손을 잡고.

뿌리치면 어쩌나 했는데 단테는 순순히 내 손을 마주 잡았다.

단테의 얼굴색은 집에 도착해서 손을 놓기 전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어디 아프냐고 물어봤지만,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을 해야 알 텐데.

* * *

“넌 연기력을 좀 길러야겠더라.”

“……무슨 연기력?”

장을 봐온 김에 함께 저녁까지 차렸을 때, 문득 마을에서의 일이 생각났다. 나도 내 말이 뜬금없는 거 알지만, 지금 떠오른 걸 어떡하겠어.

“아까 말이야. 그 애들이 다른 데에 신경이 쏠려 있어서 넘어간 거지, 네가 그렇게 당황한 티를 내면 수상해 보인다고.”

“아까라면 그…….”

“그?”

“…….”

왜 말을 못 하니? 빵을 대충 씹으면서 바라봤지만 묵묵부답이다.

“알아들은 거 맞지? 저번에도 말했지만, 너 안 그렇게 생겨서는 부끄러움 많이 탄다.”

“네가 무덤덤한 거라니까.”

“그래, 내가 무덤덤한 것도 맞는데, 너는 좀 심해. 뭐, 그래도 기분 나빠하는 티는 안 내서 다행이다. 그건 누구라도 이상하게 생각했을 텐데.”

그러자 단테가 뭔가 대답할 것처럼 입을 열었다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닫았다. 그냥 대답을 그만두나 싶었지만 금세 다시 입을 열었고.

“너야말로 기분 안 나빠? 나랑 애인 사이로 엮여도.”

“이상한 소리를 하네.”

내가 가볍게 소리 내어 웃자 단테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먼저 말 꺼낸 건 나잖아. 기분이 나빴으면 그렇게 말 안 했지.”

“…….”

내 말을 들은 단테의 표정이 미묘해지다 못해 약간 일그러졌지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평소에 부끄러워할 때 저런 표정을 짓곤 하거든.

애인 소리에 유달리 당황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단테는 원래 쑥스러움을 많이 타니까 그럴 만도 했다.

“어쨌든, 앞으로도 그런 질문을 받으면 애인 사이라고 대답할 테니까 좀 자연스럽게 행동해 봐.”

너도 네가 어쩌다 머무르게 됐는지 설명하기 싫잖아? 그렇게 말하니, 단테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자연스럽게 행동하라고 지적받은 건 난생처음이야.”

“잘됐네. 살아가면서 한 번쯤은 이런 잔소리도 들어야지.”

내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덧붙이자 단테도 표정을 풀었다.

“자연스럽게 행동하라는 게 애인 소리를 들어도 당황하지 말라는 뜻이지?”

“응.”

내 말에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는 것 같던 단테는 이내 고개를 주억거렸다.

“알겠어. 그런 거라면 어렵지 않지.”

“어렵지 않다고? 오늘은 별로 안 그래 보이던데.”

내가 놀리는 어조로 말해도 단테는 꿋꿋했다.

“오늘은 갑자기 들은 이야기라 당황한 거고, 다음부터는 절대 그럴 일 없을 거야. 네가 말했듯이 연기력을 기르면 되잖아?”

그렇게 말하더니 작게 미소짓는다. 과시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당연한 사실을 말하듯이.

“기르고자 하면 못할 것도 없지. 나는 뭐든지 잘하거든.”

“아, 그래…….”

뭐든지 잘한다는 말을 당당하게 하다니 재수 없다. 인생의 쓴맛을 한번 느껴봐야 저런 소리도 못 하는 건데.

나는 식사를 마저 끝내면서, 단테가 애인 소리에 당황할 때마다 놀려줄 궁리를 했다. 저렇게 호언장담할수록 나중에 놀릴 때가 재밌는 법이라고 생각하면서.

뭐든지 잘한다고 말하는 데에는 전부 이유가 있다는 걸, 그리고 당황하는 건 오히려 내가 될 거라는 사실을 몰랐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