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따뜻한 햇볕이 창가로 들어오고 있었다. 적당히 식은 차가 앞에 놓여있고, 편안한 소파 위에 몸을 기대기 좋은 오후 3시.
이 황금 같은 시간에 나는 별 희한한 걸 다 보겠다는 시선을 친구에게서 받고 있었다.
“애인이 아니라 남편이라며?”
“그렇지.”
“그럼 결혼한 거잖아?”
“응.”
“근데 남편 직업을 몰라?”
나는 눈을 굴렸다.
“모를 수도 있지.”
“남편이 무슨 일 하는지도 안 물어본 거야? 아니, 너 도대체…. 아냐, 됐어. 잔소리는 이쯤하고.”
3시간 동안 잔소리를 들었더니 이제야 겨우 이쯤 하자는 소리가 나오는구나.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으니까 그랬지. 벽에 마법진 그리고, 시도 때도 없이 마법 써서 뭐 만들어내고, 걔가 보는 책에는 다 이상한 문자가 적혀있고 하니까 대충 마법사구나 했어. 근데 음, 마탑주일 줄은 몰랐네.”
“정말 결혼한 사이라는 게 놀라울 정도다. 너희 부부보다 내 앞마당 풀잎하고 옆집 에이미가 키우는 개구리가 더 서로를 잘 알지도 몰라.”
“나도 막상 말하니까 좀 신기하긴 해.”
친구가 환장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랑 이야기를 시작하고 나서 벌써 10번째 짓는 표정이다.
“좋아, 그럼…. 마지막으로 딱 하나만 물어볼게. 네 남편, 그러니까 그 미쳤다는 마탑주는, 네가 안 죽는다는 거 알아? 죽어도 살아난다는 거 말이야.”
그 말에 나는 한숨을 쉬었다.
“모르니까 미쳐있잖아.”
또 그런 표정 짓지 마. 나도 환장하겠어.
* * *
나는 아주 오래전에, 굳이 숫자로 세어보자면 음, 200년 전쯤에 차원을 넘어왔다.
몇 살에 넘어왔는가, 어떻게 해서 넘어왔는가 같은 사소한 건 넘어가자. 너무 오래전의 일이라 기억이 나지 않아서 이러는 건 아니다.
어쨌든 그렇게 차원을 넘어오고 나서, 가족도 친구도 없는 낯선 곳에서 홀로 살아남았다. 죽지 않으니 살고 있다는 느낌으로 계속 지내다가 어느 날, 차원을 넘어온 지 10년쯤 되던 해에 무심코 깨달았다.
나는 이곳에 온 이후로 단 한 순간도 늙지 않았다는 걸.
차원을 이동한 직후 몇 년간은 적응하는 데에만 바빠서 알아차리지 못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여기저기서 너는 나이를 먹지 않는 것 같다며 신기하다는 말이 들려왔다. 대부분 비결이 뭐냐는 우스갯소리였지만, 나는 그 말에 차마 웃을 수 없었다.
내가 아무리 날짜를 대충 센다고 해도 10년이 지나가는 건 느낄 수 있다. 근데 나는 그 10년 동안, 내가 지내는 이 마을 사람들이 전부 늙어갈 동안, 어떠한 변화도 없이 살아가고 있었다. 마치 나만 시간이 멈춘 것처럼.
그걸 깨달았을 때는 조금 충격을 받았었다. 아니, 많이 받았었나. 너무 옛날 일이라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조금 충격이었든 많이 충격이었든 충격을 받긴 받아서 그때부터 몸을 사리기 시작한 것 같다.
그야, 늙지 않는다고 하면 주변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잖아. 한시라도 빨리 몸 사려서 의심 사는 일 없게 해야지. 의심을 사면 내 안위가 위협받는다고.
뭐니 뭐니 해도 안전이 최고인데 말이야…….
그리고 나는 그날 밤 강도의 칼에 찔려 죽었다.
* * *
만약 당신에게 ‘죽음’이 영원한 마지막을 상징하는 단어라면, 내 죽음에는 조금 어폐가 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나는 칼에 찔리고 이틀 뒤에 살아났으니까.
강도가 내 집을 다 털고 나를 다락방에 던져두고 갔는지, 내가 눈을 뜬 곳은 다락방 한구석이었다. 평화로운 햇살과 부유하는 먼지 속에서, 피가 말라붙은 옷만이 내가 죽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전날 강도와 몸싸움하며 생긴 상처는 물론 칼에 찔린 상처조차 사라진 상태였다. 마치 살아나는 사이에 모든 상처가 낫기라도 한 것처럼.
그 이후로도 나는 계속 늙지 않고 죽지도 않았다. 가끔 사고를 당하거나 모종의 이유로 죽더라도 시간만 지나면 상처 없는 몸으로 돌아왔으며, 다만 어떻게 죽었냐에 따라서 살아나기까지 걸리는 시간만 조금 달랐을 뿐이다.
죽은 게 한두 번이 아니라 기억이 흐릿하기는 한데……. 물에 빠져서 익사했을 때는 반년 만에 살아난 것으로 기억한다. 더 오래 걸린 것도 있지만, 그런 이야기는 잔인할 수도 있으니 잠시 빼도록 하고.
그냥, 비교적 안온하고 얌전했던 죽음부터 고통스러워서 떠올리고 싶지 않은 죽음까지, 참 다양한 경험을 했다는 것만 말해두겠다. 몇 번 살아나다가 멈췄으면 진작 이 세상을 떴을걸. 물론, 나는 단명이라 부를 만한 삶을 셀 수 없이 거쳤음에도 지금까지 살아있다.
그렇게 2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죽지도 못한 채, 단지 계속해서 살아남았다. 오랜 세월 동안 누군가에게는 그저 동안이라고 속여넘기면서, 누군가에게는 불로불사(不老不死)라는 걸 들키면서, 또 가끔은 괴물로 몰리기도 하면서. 평범하지는 않지만, 그럭저럭 나쁘지 않게 살아남았다.
그리고 큰 이변이 없는 이상 앞으로도 이렇게 살아갈 거라 믿었다.
어느 날, 집 근처에 쓰러져있는 한 사람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 * *
그 당시에 나는 숲에서 살고 있었고, 일부러 인적이 드문 곳에 자리 잡았기에 오가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사람을 보는 날보다 사람을 보지 않는 날이 월등히 많은 나날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비슷한 나이의-물론, 외견상으로만 그렇다는 거다-남자가 쓰러져있지 않은가. 그것도 피를 흘리면서 말이다.
어떻게 온 거지, 걷는 소리는 물론이고 기척도 없었는데. 의문을 가진 것도 잠시, 남자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어디를 다쳤는지는 몰라도, 피가 무슨 수도꼭지에서 물 나오는 것처럼 줄줄 흘러나오고 있었다. 내가 발견할 때까지 살아있던 게 신기할 정도였으니 말 다 했지, 뭐. 사실 이 사람 이미 죽은 거 아닌가 잠깐 의심하기도 했다.
하지만 희미하게나마 남자는 숨을 쉬고 있었고, 나는 남자의 생사를 확인하자마자 그 자리에서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이 사람을 집에 데리고 가야 하나?
그러나 내 근력은 일반인과 비교하면 조금 약한,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바닥을 기는 수준이었고-불로불사가 되었다고 해서 없던 힘이 생기는 것은 아니더라-피를 흘리고 있는 사람을 무리해서 끌고 갔다가는 더 위험해질 거라는 상식 정도는 있었다.
결국, 집에서 붕대나 약 따위를 들고 와서 그 자리에서 대충이나마 치료해주는 게 최선이었다. 정신을 잃은 남자는 내가 약을 바를 때마다 앓는 소리만 낼 뿐 일어나지 않았다. 괜찮냐고 물었을 때도 제대로 된 대답은 들을 수 없었고.
상처는 배 쪽이 심했던 거로 기억한다. 무슨 예리한 칼날 같은 게 쉴 새 없이 지나간 듯한 모양새였지. 살이 너덜거려서 그리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었다.
사실 치료라고 해도 거창한 건 없었다. 내가 의사도 아니고, 알고 있는 거라고는 일상에서나 쓸모 있을 법한 민간요법과 간단한 처치뿐이었다. 한마디로 그냥 남자의 가방을 옆으로 치우고, 피를 멎게 하는 약초를 덕지덕지 붙이고, 붕대를 몇 번 감아주는 거로 치료를 끝냈다는 말이다.
그런 다음 어떻게 했냐고? 뭘 어떻게 해, 내버려 뒀지.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다친 사람을 무리해서 끌고 갔다가는 큰일 난다. 그렇다고 조심해서 끌고 가기에는 약간 귀찮았던 것 같기도 하고.
아마 그 사람이 상처를 치료한 후 몇 시간 만에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몇 날 며칠 그곳에 내버려 뒀을지도 모르겠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눈을 떴는지 안 떴는지만 확인하면서.
하지만 결과적으로 남자는 눈을 떴고, 나는 정신을 차린 남자에게 말을 건넸다.
“살아나셨네요?”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나도 지금은 저 말이 건방졌다는 걸 인정하고 있으니까.
남자는 내 말을 듣고 인상을 찌푸리다가, 흐린 눈을 깜빡이다가, 입술을 몇 번 달싹거렸다. 아마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목소리도 못 낼 정도로 아픈 사람이 어쩌다가 이런 숲으로 떨어진 건지. 의식을 차린 남자에게 뭐라 말을 걸어보았지만, 남자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며 숨을 몰아쉴 뿐이었다.
사실 나를 바라본다기보다는, 그냥 눈앞의 물체를 보려 애쓰는 눈빛이기는 했다. 왜, 그런 거 있잖아. 눈 나쁜 사람이 미간 팍 찌푸리고 노려보는 표정. 그때 남자의 얼굴이 딱 그랬다.
나는 그걸 멀뚱히 지켜보다가 물이라도 떠다 드릴까요, 했고. 남자는 아마 대답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내가 물을 떠 오는 사이 남자는 다시 기절해있었다.
그냥 쭉 기절해있었다면 모를까, 한 번 일어났다가 기절한 사람을 그대로 둘 수는 없겠지. 나는 약해빠진 내 몸뚱이를 저주하며 남자를 끌고 내 집으로 들어왔다.
* * *
그 사람은 꼬박 일주일을 잤다. 나는 넓은 마음으로 내 침대를 양보해주고, 의식이 없는 그 사람을 간호해주면서 일주일을 보냈다. 남자는 가끔 정신을 차리다가도 눈만 힘겹게 깜빡이다가 다시 잠들 뿐이었다.
일주일을 같이 지냈건만 내가 알 수 있는 건 그 사람이 짜증 나게 잘생겼다는 것 정도였다. 짜증 나게 잘생긴 게 뭐냐면, 재수 없게 잘생겼다는 거다. 그게 그 말 아니냐고? 그냥 알아들어, 이 정도는 알잖아.
남자를 돌본 지 일주일하고도 하루가 되었을 때, 문득 장을 봐 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굶어 죽어도 살아나는 판이니 음식이 필요 없었지만, 환자가 일어나면 밥이라도 줘야 하지 않겠나 싶었다.
그렇게 많아봤자 한두 시간 동안 자리를 비웠던가.
장을 보고 돌아온 나를 반겨준 건 뒤집어 엎어진 집 안 풍경이었다.
“…….”
나간 사이에 정신을 차릴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었다만, 개판을 기대한 건 아니었는데.
창문이 다 깨져서 바람이 들어오고, 찢어진 커튼은 마구 흔들리고, 소파는 쿠션이 다 터진 채 널브러져 있고, 하여튼 엉망이었다. 벽에 금이 커다랗게 가 있었으니 말 다 했지, 뭐.
그런 풍경 속에서, 딱 하나만 유일하게 멀쩡했다. 남자를 눕혀 놓았던 그 침대 하나만.
침대 한가운데에는 남자가 형형한 눈으로 앉아있었는데, 내가 문을 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집 꼴을 한번 보고, 남자를 한번 보았다가 어처구니가 없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