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빌스펜서] 네 곁에 가까이-11화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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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슨은 도무지 눈을 붙일 수가 없었다. 그날 있었던 워크샵 때문에 그토록 들떠 있는 게 아니라면 잠들 수도 있으련만. 그녀는 TV를 틀고 케이블 방송이나 시청하자고 마음 먹었다. 그러나 공포 영화가 방송되고 있던 탓에 더더욱 기분이 심난해 졌다. 그녀는 TV를 꺼버리고 침대 위로 벌렁 드러누웠다. 그는 지금 잡이 들었을까? 난 이렇게, 이렇게 잔뜩 긴장된 채 아무것도 못하고 있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오히려 확실치 않은 그들의 관계가 약속 시간이 가까워 오면서 더욱 효과적인 흥분제로 작용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거의 파국으로 치달았던 그날 밤의 일이 없었던 것처럼 행동해야 할까? 그를 메디슨에 초청한 것은 단지 모델로서 포즈를 취해 달라기 위해서 였다는 듯이 행동해야 할까? 아니면 그의 관심을 끌 수 있을 만한 무기를 전혀 갖고 있지 않다는 불안감이 시간이 지날수록 눈덩이처럼 불어나서 질식하기일보 직전인 상태인데도 전혀 그렇지 않은 듯 천연덕스럽게 위장할 수 있을까? 다섯 시가 가까워지면서 그녀의 신경은 극한까지 곤두서 가고 있었다. 앨리슨은 더는 참지 못하고 욕조 안으로 풍덩 뛰어들었다. 집에서라면 생각도 못했을 행동이었다. 목까지 차오르는 비누 거품 속에 파묻혀 그녀는 긴장을 풀고, 예전의 자연스럽고 당당한 자신을 되찾자고 다짐했다. 릭이 좋아했던 모습도 바로 그 모습이 아니었던가. 농담도 잘 던지고, 웃을 줄도 알고, 당당하고 빈정대기도 잘했던. 하지만 지금으로선 아무것도 못할 것 같다는 느낌만 들었다. 앨리슨은 릭에게 이 세상 어느 남자보다도 당신을 사랑한다고 고백했지만, 그로부터 아무런 대답을 듣지 못한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량한 신세가 될지도 모르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그녀는 깜빡 잠이 들었다. 한참 후 잠에서 깬 그녀는 말린 오얏처럼 불그스레하게 달아오른 상태로 욕조에서 나오면서 시계를 보았다. 벌써 여섯 시 이십분 전이었다! 그녀는 허둥지둥 머리를 감고, 대충 머리를 말아 올린 뒤 화장을 했다. 저녁 분위기에 맞추어 마스카라를 좀더 두텁게 바르고, 거의 밤색에 가까운 어두운 립스틱을 발랐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힐금 보니 입술이 거의 수은처럼 반짝였다. 참 향수를 잊었구나! 그녀는 시계를 쳐다보았다. 사분밖에 남지 않았다. 그녀는 가방을 마구 뒤적거려서 가장 좋아하는 향수를 찾아낸 뒤 재빨리 몸 이곳 저곳에 뿌렸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맙소사! 아직 옷도 입지 않았는데. 그는 이 분이나 일찍 온 것이었다! 앨리슨은 옷장으로 뛰어가서 노란색 투피스를 끄집어냈다. 허둥지둥 스커트부터 끼어 입고 작은 구멍들이 뚫린 흰색 블라우스를 대충 팔에 끼운 뒤 단추를 서둘러 잠그기 시작했다. 그가 다시 한번 문을 두드렸다.

[앨리슨, 당신 일어났소?]

진주 알 모양의 단추를 잠그는 그녀의 손이 심하게 경련하는 바람에 둥근 단추들이 구멍에 제대로 끼이지 않고 자꾸 빠져 나왔다. 마음만 급했지 되는 일이 없었다.

[앨리슨?]

앨리슨은 문을 획 열어 제쳤다. 릭이 다시 문을 두드리려던 손길을 멈춘 채 멍하니 그녀를 바라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그날 하루 동안 두 번째로 그의 차림에 넋을 잃었다. 지금 그는 조끼까지 갖춰 입은 코코아 빛의 완벽한 정장 차림이었다. 게다가 눈처럼 새하얀 셔츠 위에 줄이 들어간 윈저 스타일의 넓은 타이까지 매고 있었다. 앨리슨의 양 볼은 야생 능금처럼 발그레했으며, 긴 머리는 부드럽게 물결 치며 양 어깨 위에 다소곳이 내려앉아 있었다. 그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그녀는 등뒤에서 스커트의 단추를 잠그느라 쩔쩔매고 있는 중이었다. 그 바람에 단추가 제대로 채워지지 않은 블라우스 앞설이 다시 들떠 올랐다. 그는 다시 앨리슨의 발을 쳐다보았다. 스타킹만 신었지 구두도 신지 않은 상태였다. 릭은 알았다는 듯 눈썹을 힐금 치켜 올렸다.

[지금 엉망이죠? 미안해요.]

미소를 머금은 짙은 시선이 그녀에게 되돌아왔다.

[내가 보기에 엉망인 건 하나도 없는데.]

[눈을 좀 붙이려고 했었는데, 잘 안 되기에 목욕을 하기로 했었어요. 그런데 욕조에서 깜빡 잠이 들었었나 봐요. 눈을 떠보니까 여섯 시 이십 분 전이지 뭐예요.]

앨리슨은 재빨리 트렁크로 가서 높다란 검정 색 통 굽 구두를 꺼냈다. 릭은 다리 한쪽을 침대에 올리고 그에게 등을 향한 채 구두를 신는 그녀의 모습을 흘린 듯 바라보았다. 그녀가 치마를 입은 모습을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녀의 다리에는 살집은 없었지만, 적당한 각선미가 돋보였다. 쭉 뻗은 다리와 이어지는 엉덩이의 완만한 곡선은 릭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릭은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서 그녀가 옷 매무새를 다듬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블라우스의 맨 위 단추를 채울 때까지 그에게 등을 보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작고 횐 상자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양팔을 들고 목에다 그 물건을 둘렀다. 그녀가 양팔을 쳐드는 순간, 매혹적인 그녀의 향기가 그의 코끝에 실려 왔다. 그는 아찔함을 느꼈다. 마침내 그녀가 몸을 돌렸다. 깜찍한 하트 장식의 금 목걸이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거울은 릭이 서있는 문 곁에 있었다. 그녀가 그 쪽으로 다가서는 동안에도 릭의 시선은 그녀로부터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녀가 거울로 다가옴에 따라 예의 향기는 더욱 진하게 풍겨 왔다. 그녀는 목걸이와 세트를 이루는 깜찍한 금 귀걸이를 귀에 달았다. 다시 한번 그녀의 블라우스 앞 단추가 벌어졌다. 그의 시선은 재빨리 단추를 잠그는 그녀의 손길에 다시 꽂혔다. 앨리슨은 옷걸이에서 스커트와 한 벌인 노란색 긴 팔 재킷을 꺼냈다. 릭이 그녀 곁으로 바짝 다가섰다.

[아침에 받은 선물의 보답이오.]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등뒤에 숨기고 있던 장미꽃 한 송이를 앨리슨 앞에 내밀었다. 내가 잠을 이루려고 뒤척이고 있는 동안 그는 밖에 나가 이 꽃을 사왔겠구나. 순간적으로 앨리슨에게 이 생각이 떠올랐다. 그녀는 아무 말 못하고 꽃을 받았다. 그리고 재킷을 들고 서있는 그의 존재도 잊은 채 두 눈을 슬며시 감고 꽃 향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이윽고 몸을 돌린 앨리슨은 장미꽃을 소중하게 받쳐 들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릭, 난 이걸 받을 자격이 없어요.]

순식간에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릭, 정말 미안해요.]

릭은 엄숙한 표정을 지은 채 그녀에게는 손가락 하나 대지 않았다.

[나도 미안했소.]

[당신은 나에게 사과할 이유가 없어요. 내, 내가 너무 못되게 굴었어요. 정말 정직하지 못한 행동이었어요. 이젠 알 것 같아요.]

[앨리슨, 그때 당신은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었소. 그래도 당신은 얘길 해보려고 했지, 정작 들으려 하지 않았던 사람은 나였소.]

[아니에요, 릭. 난 정말 한심한 바보였어요. 하지만 이젠 분별력이 생겼어요. 그땐 정말이지 어찌할 바를 몰랐어요. 다만 분노와 불안으로 뒤범벅이 된 상태 였죠.]

[지금은 어떻소?]

그녀는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아직도 그에 대한 마음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그들의 관계를 재개하고 싶다는 생각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겁내고 있는 걸까? 그가 만약 조금이라도 안아 준다면 감정의 실마리를 붙잡을 수 있을 텐데.

[나, 난 이제 평정을 되찾았어요. 더 이상 화만 내고 있지도 않을 거예요. 확신이 서요.]

날 만져 줘요. 날 안아 줘요. 모든 것을 다 잊었노라고 말해 주세요. 그녀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울부짖고 있었다. 그러나 릭은 그녀의 팔꿈치를 살짝 건드리며 이렇게 말했을 뿐이었다.

[식사 후에 차분히 얘기합시다.]

릭은 앨리슨의 어깨를 붙잡고 오월 저녁의 향긋한 대기 속으로 이끌고 나갔다. 그가 운전하여 도착한 곳은 스피크 이지 라는 레스토랑이었다. 웨이터들은 하나같이 줄무늬 셔츠를 입고 깔끔하게 가르마를 타고 머리를 넘긴 모습들이었다. 그리고 메뉴 판은 그야말로 광고게시판만큼이나 컸다. 그래도 릭은 여전히 그 너머로 앨리슨을 쳐다보느라 바빴다. 그녀는 눈을 들어 릭을 마주보았다. 그의 눈동자 속에서 촛불이 너울거리고 있었다. 촛불은 그의 볼을 물들이고, 굳게 다문 입술에 그늘을 드리웠다. 엄숙한 그의 표정을 바라보며 앨리슨은 다시 상념에 젖어 들었다. 진실을 털어놓는 일 자체가 그녀에게는 고통스러웠었노라고 얘기한다면 그의 반응이 어떨 지가 다시금 궁금해졌다. 하지만 당신을 사랑해요, 릭 랭. 당신이 나의 삶으로 들어오길 원한다고요. 웨이터가 와서 섰다. 그리고 릭과 앨리슨이 주문하기를 기다렸기 때문에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상념에서 깨어났다. 그들이 주문한 황새치와 완전히 익힌 소 허리 살을 기다리는 동안, 와인 스튜어트가 포도주를 가지고 다가왔다. 그리고는 능숙한 솜씨를 뽐내듯이 코르크 마개를 딴 뒤 향을 점검하고 약간의 샘플을 따라 릭의 의향을 물었다. 릭은 약간 맛을 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스튜어트는 술잔 두 개에 포도주를 따라 주고 자리를 떴다.

[그럴듯해 보였소?]

[아주요.]

앨리슨은 짐짓 밝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정말 당신이 대단한 감식가나 된 줄로 알았을걸요. 뭐라 그러더라...]

그녀는 병에 붙은 라벨을 어떻게 발음할지 몰라 주춤했다.

[문샤인 82.]

릭이 영어식으로 라벨을 읽자 두 사람은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유쾌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그들 사이엔 아직도 풀어지지 않은 앙금이 남아 있었다.

[그건 그렇고, 난 소 허리 살을 완전히 익혀서 먹는 사람은 본적이 없는데, 혹시 웨이터가 당신을 째려보는 것을 봤소?]

앨리슨은 어깨를 으쓱했다.

[오늘같이 특별한 기분을 느끼는 날에는 특별한 고기를 먹는 게 당연하죠, 뭐.]

릭이 몸을 바짝 당기더니 그녀의 눈을 뚫어지게 들여다보았다.

[정말? 당신도 정말 그렇소?]

[네, 그럼 요. 정말이고말고요.]

그러자 그는 잔을 높이 쳐들었다.

[자, 특별한 밤을 위해 건배.]

그들은 와인을 한 모금씩 음미하듯 마셨다. 릭은 술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촛불의 흔들림에 따라 시시각각 변해 가는 앨리슨의 얼굴 윤곽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는 아무 말없이 식탁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앨리슨, 만약 지금 당신을 만지지 못한다면 난 미쳐 버릴 것 같소.]

그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한쪽으로 비스듬히 몸을 기울이고 다리를 꼬았다. 그의 손이 식탁 위에서 덩그러니 그녀의 손을 기다리고 있었다.

[앨리슨, 지금 바깥 기온이 몇 돈지 알고 있소?]

그녀의 온몸이 긴장으로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알아요.]

앨리슨은 그의 손바닥 위에 자신의 손을 천천히 갖다 놓았다. 그러자 그가 천천히 손가락을 오므려 그녀의 손을 감싸 쥐었다. 그 힘이 너무도 센 탓에 그녀는 손마디가 부러져 나가는 것 같았다. 그는 밀려오는 전율의 파도에 압도당한 채 할말을 잊고 꼿꼿이 앉아 있는 앨리슨의 손가락 마디마디를 가볍게 문지르기 시작했다. 앨리슨은 포개진 손을 꼼짝 않고 바라보았다. 심하게 울렁거리는 심장의 고동이 자신의 손가락 끝으로 전해지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춤출 줄 알아요?]

그가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잘 은 못 춰요.]

[나도 그렇지만, 당신이 해보겠다면 나도 해보지.]

두 사람이 몸을 일으키는 순간, 웨이터가 샐러드를 가지고 왔다. 앨리슨은 릭과 함께 사람 좋은 웃음을 짓고 있는 피아니스트가 미스티를 연주하고 있는 사각형의 플로어로 나섰다. 앨리슨은 릭의 품안에 안겼다 플로어에는 두 사람뿐이었다. 릭은 자연스럽게 양팔을 그녀의 허리에 둘렀고, 앨리슨 또한 별생각 없이 그의 턱 밑으로 이마를 살짝 기대고 손을 그의 어깨에 올려놓았다. 그들의 움직임은 춤이라기보다는 부드럽고 무의식적인 흐느적거림 같은 것이었다. 그들은 춤을 추고 싶었던 게 아니라 단지 서로를 좀더 가까이에 서 느끼고 싶었을 뿐이다. 톡 쏘는 듯한 희미한 에프터쉐이브 향이 앨리슨의 코끝을 간질였다. 그의 양복 어깨는 단단하고도 서늘한 감촉이었다. 피아니스트는 이제 소울 풍의 목소리로 감미로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날 봐요. 난 나뭇가지에 걸린 가련한 새끼 고양이처럼 어찌할 바를 모른답니다. 피아니스트는 수려한 금발 머리 청년이 훤칠하고 늘씬한 여자를 안고 춤추는 모습을 보며 미소 지었다. 릭은 양손으로 앨리슨의 등 한복판을 가볍게 어루만지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에롤 가너의 노래 가사가 지금 앨리슨의 뇌리 속을 맴돌고 있었다. 지금 그녀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고, 어둡고 희미한 안개 속에서 헤매고 있었다. 그녀의 입술이 릭의 입술을 가볍게 스쳤다. 허리를 어루만지는 그의 손의 감촉이 짜릿하게 전신에 퍼졌다. 그들은 천국에라도 오르는 기분으로 무아지경에 빠져들어 천천히 스텝을 밟아나갔다. 릭이 그녀의 이마 위에 자신의 이마를 기대 왔다.

[당신을 사랑해, 앨리슨 스콧. 당신 그걸 알지?]

그가 속삭였다. 앨리슨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기 위해 약간 몸을 젖혔다. 그 순간 실내에 흘러 퍼지고 있던 음악이 승리감에 도취된 그녀의 전신을 휘감았다. 날 봐요! 날 보라고요! 릭 랭이 날 사랑한다고 했어요! 그녀의 눈빛이 촉촉해지며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네. 알고 있어요.]

앨리슨은 그의 양복 칼라 위를 조심스레 매만졌다.

[나도 당신을 사랑해요, 릭 랭. 당신도 알고 있어요?]

[난 계속 불안했었소. 하지만 오늘 당신의 행동을 통해 그 사실을 믿게 됐지.]

[나도 그랬는걸요.]

[그러길 원했으니까.]

[그게 바로 진실이니까요.]

릭은 목 뒤로 손을 뻗쳐 그녀의 오른손을 찾아 쥔 뒤 전통적인 왈츠 자세를 취했다. 그녀는 그의 귀 옆에 관자놀이를 갖다 댔다.

[날 위해 뭘 좀 해주겠소?]

[무슨 일이든지요.]

[그렇게 대뜸 무슨 일이든지요. 하고 대답해서는 안 될걸. 만만찮은 일이거든.]

[무슨 일이든지요.]

그는 몇 걸음 뒤로 물러서더니 그녀의 두 눈을 지그시 들여다보았다.

[제이슨 얘기를 해줘요.]

순간 그녀의 스텝이 엉켰다. 그리고 잠시 동안 그녀의 눈에 불안한 빛이 스쳤다. 음악이 끝난 건 그때였다. 릭은 그녀의 어깨를 잡고 플로어를 벗어 나왔다. 릭이 의자 뒤에서 그녀가 앉기를 기다리는 동안, 앨리슨은 극도의 불안감을 느꼈다. 이윽고 릭은 맞은편에 앉아서 그녀의 손을 다시 잡았다.

[앨리슨, 당신은 날 사랑한다고 했지. 그렇다면 나를 믿고 제이슨의 이야길 해봐요. 뭐든지. 그래서 그의 망령을 떨쳐 버려야 하지 않겠소? 이번엔 분노부터 앞세우지 말고. 당신이 평온한 감정으로 그 얘길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당신이 그로부터 벗어났다는 걸 나는 믿을 수 있을 것 같소. 그리고 당신과 나에 대한...그래, 준비가 됐다는 사실도.]

그녀의 커다란 갈색 눈동자가 릭의 눈동자와 촛불의 불꽃을 번갈아 살폈다.

[자, 얘기해 봐요. 뭐든지.]

앨리슨은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는 내가 가장 좋아했던, 아주 감각 있고 멋진 모델이었어요.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는 쾌락주의자였지요. 그가 떠날 때까지 난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앨리슨은 눈물을 삼키면서 릭이 쥐고 있는 손을 빼내 자신의 얼굴을 감쌌다.

[오, 맙소사.]

앨리슨은 그의 눈을 차마 바라볼 수가 없었다.

[어떻게 얘길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난 정말 바보였어요.]

[자, 손을 줘요.]

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명령했다.

[그리고 날 쳐다보고.]

앨리슨은 길고 떨리는 한숨을 내쉰 뒤 그의 손에 자신의 손을 맡기고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녀는 릭에게 모든 걸 이야기했다. 제이슨의 사진을 맨 처음 찍게 되었던 일, 그가 그녀의 집으로 들어와 사는 걸 승낙했던 것. 어떻게 그에게 모델료를 지불했으며, 그가 자신의 결점을 눈가림하기 위해 어떤 식으로 자신의 육체를 이용했던 지도. 그들이 사진 자료들을 모았던 것하며 그가 그것들을 모조리 훔쳐가 버렸던 것, 그리고 이젤에 걸어 둔 사진 아래 그가 사인을 남겨 두고 떠난 것 등 생각나는 모든 일을 이야기했다. 그녀는 스스로 생각해도 기가 막힌 듯 공허하게 웃으며 릭의 눈을 바라보았다.

[당신 알아요?]

그러나 신기하게도 그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 순간에도 그녀는 전혀 가슴이 아프지 않았다. 새삼 릭에서 고마운 마음이 일었다.

[제이슨이 사랑이라는 단어를 유일하게 썼던 때가 바로 그 사진 아래였어요.]

앨리슨은 이제 널따란 창으로 시선을 주었다.

[더 필요하세요?]

릭이 그녀의 손을 가볍게 놓아 주었다.

[아니, 그럴 필요 없소. 그 샐러드나 마저 먹어요. 공복이 가시면 기분도 좀 나아질 거요.]

앨리슨은 조소나 빈정거림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그의 시선과 다시 맞닥뜨렸다. 깡그리 털어놓은 그녀의 과거에 대해 모욕하는 기색은 어느 구석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는 길게 한숨을 내쉰 뒤 샐러드를 먹기 시작했다. 그 밤은 눅눅하고도 서늘했다. 하지만 봄을 알리듯 금빛 고광나무와 라일락 향기가 코를 찌르고 있었다. 그들은 조심스러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앨리슨은 되도록 이면 그와 닿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릭이 좀더 빨리 걸었으면 하고 바랐다. 하지만 릭은 그녀의 마음을 읽고 있기라도 한 듯 잔인하리만치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놓았다. 이윽고 모텔에 도착하자 그는 무거운 유리 문을 밀치며 거리낌없이 그녀를 붙잡고서 웃음을 지었다. 이제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계단을 오르면서 격의 없는 미소를 주고받았다. 그런데 계단을 반쯤 올라가던 그가 갑자기 멈춰 섰다.

[더 이상은 못 참겠어.]

그가 팔을 둘러 앨리슨을 난간 쪽으로 밀어붙였다. 달콤한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이쯤에서 참지 않으면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져 버리겠어요, 랭 씨. 숙녀를 계단 한복판에서 현기증 나게 해도 된다는 매너를 어디서 배웠죠?]

[죄송하군요, 스콧 양. 당연한 상식이 오늘 밤은 그만 달아나 버렸나 봅니다.]

앨리슨은 양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싸 쥐고 자신을 향해 끌어내렸다. 두 사람의 숙소 앞에 도착하자 릭이 이렇게 물었다.

[내 방, 아니면 당신 방?]

[한가지만 얘기해 주세요, 랭 씨.]

앨리슨이 그의 목에 팔을 두른 채 고개를 갸웃거리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아침에 해 뜨는 광경을 좋아하세요?]

[난 해 뜨는 광경을 무척 좋아하지.]

[그렇담 내 방이네요.]

앨리슨은 방 열쇠를 그에게 넘겨주었다. 문이 활짝 열리자 두 사람은 잠시 그대로 서서 서로의 표정을 살폈다.

[아무래도 미리 경고해 두는 게 나을 것 같군.]

릭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난 어떤 여자하고든 사랑을 나누기 전에 먼저 사랑한다고 얘기해본 적이 없소.]

[그럼 사랑을 나눈 후에는요?]

[물론, 그 후에도.]

[그러니까 당신도...오늘 이후에는...]

앨리슨은 예민하게 떨리고 있는 자신의 손가락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그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방금 한 얘기는 잊어 버려요. 난 오십 년은 시대에 뒤떨어진 여자거든요.]

[앨리슨, 그런...]

[쉬!]

앨리슨은 그의 입술에 가볍게 손가락을 갖다 댔다.

[그냥 키스해 줘요, 릭. 날 안아 줘요. 그리고 우리 새롭게 다시 시작해요.]

릭이 그녀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리고는 모든 어두운 기억을 날려 버리듯 깊게 키스했다. 그들은 입술을 떼지 않은 채 방으로 들어섰다. 그가 뒤꿈치로 문을 닫자 두 사람은 쓰러지듯 문에 기대 서로의 품에 파고들었다.

[앨리슨, 난 당신에게 절대로 고통을 주지 않겠어, 절대로.]

그가 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격한 감정을 삭이려는 듯 그녀의 머리를 가슴께로 바싹 끌어당겼다.

[제발 날 믿어. 그리고 나한테 뭐든 숨길 필요 없어요. 언제고.]

[약속할게요.]

앨리슨은 그의 목에 입술을 대고 맹세하듯 속삭였다. 릭의 가슴 역시 거세게 고동치고 있다는 것을 감지한 앨리슨은 그의 품에서 살짝 빠져 나왔다. 그리고 여전히 그의 눈을 응시한 채 천천히 재킷을 벗기 시작했다. 앨리슨이 재킷을 벗을 때까지 그는 꼼짝 않고 서 있었다. 이윽고 그녀가 스커트의 뒤 단추를 끄르는 순간, 릭도 아주 느릿느릿 넥타이를 풀기 시작했다. 그들은 서로에게서 절대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한 겹씩 한 겹씩 옷을 벗었다. 마침내 그녀는 슬립 차림으로 릭의 앞에 서있었다.

[그만, 나머진 내가.]

릭이 나직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그리고 브래지어의 고리로 손을 가져 갔다. 허리춤으로부터 삐죽이 튀어나온 셔츠 앞설 사이로 그의 맨 가슴이 들여다보였다. 릭은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 여전히 앨리슨의 눈을 응시한 채 그의 손길이 슬립 위쪽의 맨 살에 와 닿았다. 그의 얼굴이 그녀 위에서 움직이는 동안, 그녀는 사이드 램프의 빛에 눈이 부셔 두 눈을 꼭 감았다. 달콤하고도 탐색적인 그의 키스가 그녀의 긴장을 점점 허물어뜨렸다. 단단한 팔이 그녀의 엉덩이를 더욱 끌어당기면서 황홀한 여행이 시작되었다. 그의 조심스러운 손길은 다시금 앨리슨의 망설임을 해체 시키려는 듯 그녀의 젖가슴 위로 슬며시 기어 올라왔다. 그리고 살갗을 싸고 있는 부드러운 레이스 위를 쓰다듬고 압박하고 어루만지고 달래기도 하면서 그녀의 욕망을 최고조로 몰고 갔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한껏 팽창된 육체로 그녀를 세게 압박하면서 리드미컬하게 움직였다. 앨리슨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의 셔츠 속으로 손을 집어 넣어 따뜻한 맨 살을 어루만졌다.

[오, 너무너무 보고 싶었어요.]

그녀가 숨가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 역시 당신이 보고 싶어 견딜 수 없었어, 매일, 매시간, 매 분마다.]

그의 혀가 그녀의 입 속에서 갈망하듯 춤을 췄다. 앨리슨은 그의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넣어 그가 쉽게 셔츠를 벗도록 도왔다. 릭은 그녀의 젖가슴을 완전히 감싸 쥐고 그 위에 입술을 갖다 댔다. 투명한 레이스아래 숨어 있던 거무스레한 젖꼭지가 그의 손가락 사이로 드러났다. 앨리슨은 몸을 활처럼 휘고서 목구멍으로부터 달콤한 신음만을 내뱉고 있었다. 이제 앨리슨은 그를 환영하는 듯한 자세로 침대 위에 편하게 몸을 눕혔다. 그의 손이 그녀의 등뒤로 돌어와 브래지어의 고리를 풀었다. 그 순간, 그녀는 두 눈을 번쩍 뜨고 그의 빛나는 금발이 자신의 살갗 위로 파묻히는 것을 보았다. 그의 촉촉한 혀와 입술이 자신의 살갗을 달래고 유혹하는 동안 그녀는 참기 어려운 쾌락에 몸을 떨었다. 앨리슨 역시 손으로 그의 몸 구석구석을 탐색해 나갔다. 가슴으로부터, 단단한 복부와 그리고 더 아래로. 그녀는 자신의 살갗위로 토해내는 그의 거친 숨결을 느끼며 그의 몸 구석구석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이제 그녀는 자신의 손길이 그의 몸에서 불러일으키고 있는 마술을 지켜보았다. 두 눈을 꼭 감고 있는 릭의 가슴이 심하게 오르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허리띠를 조심스레 풀고 지퍼를 내렸다. 릭은 여전히 드러누운 채 두 눈을 꼭 감고 있었지만, 그녀는 자신의 등을 슬며시 어루만지고 있는 그의 손길을 느꼈다. 마침내 그의 찬란한 나신이 완전히 드러났다. 그보다 더 멋진 의식이 있을까. 금빛이 도는 구릿빛 피부에 단단하고 날렵한 복부, 조용히 기다리고 있는 남성. 그녀는 그를 만졌다. 순간, 릭은 감전이라도 된 듯 움찔했다. 그녀의 손가락은 그의 벗은 다리를 거닐다가 허벅지 안쪽을 지나 날카롭게 튀어나온 무릎으로 향했다.

[당신을 너무너무 사랑해요.]

앨리슨은 주저하지도 않고 몸을 굽혀 그의 남성 위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당신은 정말 아름다워요.]

[앨리슨, 달링, 이리 와.]

릭이 앨리슨의 팔을 끌어당기더니 다시 그녀를 침대 위로 쓰러뜨렸다.

[당신에게 아름다운 건 내 외모가 아니라 나의 내면 세계여야 돼. 당신이 지금 아름답다고 말하는 건 우연이고 순간적일 뿐이야. 하지만 난 당신에게 아름다운 영혼을 보여 주고 싶어. 당신 역시 나에게 그러듯.]

그의 두 눈 역시 진심으로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릭, 당신을 사랑해요. 사랑해요. 당신의 몸도, 마음도, 모조리. 어떻게 당신을 그 사람과 비교할 수 있었을까요?]

앨리슨은 릭의 목에 매달려 그의 턱과 뺨과 입가에 연속해서 키스를 퍼부었다. 그는 전율하며 약간 몸을 빼내고는 은근하게 물었다.

[조금 전의 그건 어디서 배운 거지?]

[얘기했었죠, 제이슨이 쾌락주의자였다고. 그는 자기의 열망을 알리는 일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어요.]

[우리가 사랑을 나눴던 그 밤에 흐르던 음악에 당신이 기겁을 했던 것도 그 이유 때문이었군?]

[네.]

릭은 그녀의 아랫입술과 턱 사이에 가볍게 입술을 댔다. 그의 말들이 그녀의 살갗 위에서 진동했다.

[난 내가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고 싶어. 그렇지만 내가 줄 수 있는 만큼 당신에게서도 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 앨리슨, 할 수 있겠어?]

그녀는 나긋나긋한 육신과 촉촉한 혀로 대답을 대신했다. 릭은 그녀가 목에 걸고 있는 깜찍한 목걸이 하나만을 남겨 두고 그녀의 몸을 덮고 있던 모든 천들을 제거해 버렸다. 이윽고 그의 입술이 아래쪽으로의 탐색을 시작했다. 그는 달콤한 향에 취해서 그녀의 배와 보드라운 계곡, 무릎의 안쪽, 발목과 허벅지 등에 차례로 입을 맞췄다.

[사랑해, 앨리슨. 당신은 정말 아름다워.]

그가 이렇게 속삭이며 그녀의 몸 위로 올라왔다. 다음 순간 그들은 하나가 되었다. 절정으로 향해 가는 길은 그녀의 자아를 찾는 과정이었으며, 구속보다는 해방의 감정을 만끽하게 해주는 것이었다. 이 지상에서 영겁의 세계로 이끌려 가듯 앨리슨은 이 사람을 믿고 모든 것을 위탁함으로써 새로운 자유를 찾은 것이다. 한차례의 거센 파도가 지나고 나른한 행복감에 취해 있던 그들은 이제는 절대로 떨어질 수 없는 사이라는 걸 느끼고 있었다. 릭이 자신의 발바닥을 그녀의 장딴지 위에 슬쩍 올려놓았다.

[자, 이젠 말해 봐. 당신을 더 흥분 시키는 게 어느 쪽인지. 나야, 아니면 내 핫셀블러드 야?]

그녀가 나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지금 이 순간엔, 내 사랑 리처드, 유감스럽게도 당신은 아니군요. 난 더 이상 흥분되지 않으면 금세 관심을 돌려 버리고 말죠.]

그러자 릭이 장난스럽게 혀를 차는 소리가 들리더니, 다음 순간 실수를 철회하라는 듯 나른한 손길로 그녀의 복부와 그 주위를 살며시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그러시다고? 그럼 다른 식으로 내가 증명해 보이길 원하겠군?]

앨리슨은 그의 손을 얼른 뿌리쳤지만 재빠르게 다시 돌아왔다. 그는 자신의 긴 몸으로 그녀를 덮으며 담요를 끌어 올렸다.

[너무 떨렸어요. 그래서 담요를 밀쳐 버렸죠.]

[오, 그래? 난 이제까지 내 핫셀블러드 때문인 줄 알았지.]

[오, 그것도 그러네요.]

[또 다른 건?]

그들은 벼룩조차 끼여들지 못할 만큼 서로를 바짝 끌어당겼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걸요?]

[아무것도?]

그녀는 담요를 끌어당기며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아무것도.]

그러자 릭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머리 위로 내리눌렀다.

[그건 말이야, 이 망나니 아가씨야. 정말 거저나 다름없는 가격이었어. 좋아, 정 그렇다면 당신이 고 자그만 혀로 영혼을 팔아 얻겠다는 물건에 대한 거래를 철회할 수도 있겠지.]

앨리슨은 어렵사리 고개를 들고 미안하다는 듯 그의 턱과 코와 입술에 닥치는 대로 입을 맞췄다 그러나 그는 빙긋거리며 그녀의 입술이 닿지 못하도록 몸을 뒤로 젖히는 것이었다.

[철회할게요.]

그녀가 약속했다.

[난 그게 일시적인 거라 생각했거든요.]

[당신, 그렇다면 내 핫셀블러드를 평생토록 쓰고 싶은 건가, 그래?]

[당신도 핫셀블러드 랑 함께 있을 거죠?]

그녀의 손목을 누르고 있던 힘이 풀어졌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거칠게 덮쳤다. 그의 시선엔 도발적인 빛이 번뜩이고있었다.

[맞았어.]

[평생토록?]

그녀가 재차 물었다.

[평생토록.]

[어떤 경우에도?]

[어떤 경우에도.]

그리고 십분 후, 그녀는 그날 밤 두 번째로 자신의 영혼을 팔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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