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빌스펜서] 네 곁에 가까이-10화 (10/11)

10

오월 십구 일, 채 동이 트지 않은 새벽길을 앨리슨은 밴을 타고 달리고 있었다. 그녀는 미네

아폴리스에서 전통적으로 고상한 지역으로 알려져 있는 켄우드로 접어들었다. 워커 아트 센

터와 거스리 극장 뒤편의 언덕배기에 위치한 그 지역은 한때 도시에서 가장 부유한 주택가였

다. 그러나 그들이 최근에 새로 지은 호반주택가로 옮겨 가자 이곳은 어린 자녀들과 핵가족

을 이룬 젊은 건축가와 변호사와 의사 등 젊은 중산층이 선호하는 지구로 탈바꿈했다.

커다란 나무들이 빽렉이 들어 찬 경사 지고 넓은 도로가 꾸불꾸불 어어진 까닭에 주소를 찾

기가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앨리슨은 새벽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오래 된 대저택들을 스쳐

지나가며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저택의 둥근 지붕들과 포치, 섬세한 계단 손잡이, 작은

탑들, 마차 창고들, 다락방의 창들, 박공 등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이 독특하고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내뿜고있었다. 게다가 릭이 일러준 대로 똑같이 생긴 집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하나같이 아름답고 독창적인 모습들이라는 점이 놀라웠다.

켄우드 파크를 빠져 나오기 직전, 앨리슨은 릭이 가르쳐 준 주소지를 찾아냈다. 영국 튜더

왕조품의 삼층짜리 건물이 흐드러지게 늘어진 커다란 느릅나무 뒤에 우뚝 서 있었다. 정문

옆으로는 군대 사열을 받듯 작달막한 관목들이 줄지어 늘어 서 있었다.

저택의 뒤편으로 이어지는 옆길을 따라가던 앨리슨은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인동덩쿨이 우

거진 높다란 담을 돌았다. 활짝 핀 덩굴손의 싱그런 향기가 새벽 공기와 뒤섞여 취할 듯한

향을 내뿜고 있었다.

그녀의 집과 너무도 비슷한 분위기의 이층 현관문에 불이 밝혀져 있었다. 앨리슨은 묘한 친

근감을 느끼며 층계를 올라갔다. 릭은 한 번도 자기가 사는 집이 그녀의 집과 비슷하다는 얘

길 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앨리슨은 잠시 현관 벨을 찾느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벨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녀는 귀여

운 부활절 바구니를 손에 들고, 그에게 주어야 할지를 망설이고 있었다. 바구니는 부활절 달

걀 하나가 들어갈 만한 크기로, 그녀의 어린 조카가 앨리슨 고모를 위해 자기가 직접 달걀을

염색했노라고 의기양양하게 자랑하며 준 것이었다.

바구니엔 키스 캔디 두 개와 앨리슨이 주인 아줌마 정원에서 몰래 따온 백합 한 송이가 분홍

빛 리본에 묶여 담겨 있었다.

앨리슨은 가능하면 시간을 벌려는 듯 길게 심호흡을 한 뒤 문을 두드렸다.

발소리를 들었다고 여겨지자 그녀의 가슴은 다시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문이 열렸다. 그녀는 바구니를 들고 있다는 사실도, 골백 번은 더 연습해 두었던 인사말도

완전히 까먹어 버렸다.

다려 입은 듯 칼이 선 청바지와 깔끔한 체크 무늬 재킷 안에 횐색 셔츠를 받쳐 입은 채 문간

에 손을 얹고 서 있는 릭을 대하는 순간 그녀의 뇌는 일시에 정지해 버린 것 같았다.

릭이 자신을 위해 그런 차림을 했다는 사실에 앨리슨은 벅찬 감동에 쉽싸였다. 그리고 그의

머리 ……. 그가 단정히 머리를 빗고 있었던 것이다! 예전엔 그의 머리에 빗을 대는 것이 어

리석은 짓이라고만 생각했었다. 앨리슨은 이제까지 그토록 멋진 머리 스타일을 본 적이 없었

다. 매끄러운 깃털처럼 차분히 벗겨 내린 그의 머리칼은 귀 끝을 살짝 덮는 듯하면서 뒤쪽으

로 자연스럽게 넘긴 스타일이었다. 앞머리 역시 함부로 흘러 내리지 않으면서 적당할 정도로

만 앞이마를 가리고 있었다.

릭은 미소를 짓지도 않고, 아무런 말도 먼저 꺼내지 않았다. 다만 앨리슨으로서는 짐작키 어

려운 표정으로 그녀만을 살피고 있었다.

마침내 정신을 수습한 앨리슨이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안녕."

"안녕."

그의 목소리는 한결 낮았다.

다시 앨리슨은 할말이 궁해졌다. 다음 순간, 그녀는 마치 전기 벽에 부딪히기라도 한 것처럼

펄쩍 뛰더니, 머쓱한 태도로 바구니를 내밀었다.

"이거, 당신에게 주려구요."

그녀는 부끄러운 듯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도망가지는 않을래요."

그가 바구니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집게손가락을 바구니 손잡이에

걸었다.

그 순간 앨리슨은 벅찬 기쁨을 느꼈다.

릭이 여전히 웃음을 띄며 고개를 들었다.

"물론 그럴 필요가 없지. 오늘이 메이 데이는 아니니까."

앨리슨은 얼굴이 화들짝 달아오르는 걸 느끼면서 얼른 반론할 구실을 찾았지만 아무것도 떠

오르지 않았다. 그녀는 양손을 뒤로 꼭 쥔 채 얼른 그의 주위로 눈을 돌렸다.

"음, 아주 멋진 집이군요. 우리 집과 분위기가 비슷해요."

그러자 그가 얼른 뒤로 물러섰다.

"여긴 베란다가 없어요. 그리고 마룻바닥에도 누군가가 흉칙한 갈색 카펫을 깔아 왔지만, 어

쨌든 이 정도면 아늑하고 도심에도 가까운 편이라. 게다가 각종 편의 시설도 웬만큼 구비되

어 있는 편이라 할 수 있지."

"그렇군요. 끝내주네요."

이 대목에서 '끝내준다'라는 말이 튀어 나오다니!

그녀의 내부에선 또 다른 목소리가 그녀를 나무랐다.

'진짜 바보로구나, 앨리슨!'

"정말로……."

앨리슨은 앞에 던진 말을 보충하려다 그만두었다. 문득 고개를 들은 앨리슨은 재미 있어하는

표정으로 자신을 유심히 관찰하고있는 릭의 시선과 마주쳤다.

"그 얘길 하려던 참이었소?"

"아뇨. 그저요."

그녀는 다시 머리끝까지 피가 솟구치려는 걸 참았다.

"열 시까지 메이슨에 도착하려면 지금 출발하는 게 좋겠는데요."

릭은 앞서 거실 반대편 문으로 걸어가다가 어깨 너머로 말했다.

"곧 돌아오겠소."

앨리슨은 실내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그 동안만이라도 그의 취향, 그가 사는 모습을 더 자

세히 알고 싶었던 것이다. 북쪽 창앞에 이젤이 놓여 있었다. 캔버스가 빛을 받도록 놓여 있

었던 까닭에 그가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지 알 수는 없었다. 그리고 깊숙한 가죽 의자와

비슷한 종류의 긴 소파, 책들과 각종 수집품으로 채워진 책장이 있었다. 그녀의 눈에도 익

숙한 예의 낡은 재킷이 의자등걸이에 걸쳐져 있었다. 그녀는 그 앞에 가서 재킷을 슬며시 쓸

어 보았다.

"준비됐소?"

앨리슨은 도둑질이라도 하려다 들킨 사람처럼 화들짝 손을 뗐다.

"네."

그는 한 손엔 옷가방을 들고, 반대쪽 어깨에 지퍼 달린 양복 케이스를 매고 있었다. 재미 있

게도, 그는 입고 있는 재킷 앞쪽에 뚫린 단추구멍에 그녀가 준 백합을 꽃고 있었다.

그녀는 꽃으로부터 간신히 눈을 돌리고 앞으로 나섰다.

"잠깐, 내가 하나 들어 줄게요."

양복 케이스에 손을 뻗치는 앨리슨을 그가 제지했다.

"아니, 그럴 필요 없소. 대신 이걸 들어요."

그가 어깨에 매고 있던 케이스를 내려놓자 줄이 엉켜 있던 다른 케이스가 딸려 나왔다.

엉켜 있던 줄을 풀고 그가 앨리슨에게 그걸 건넸다.

"핫셀블러드?"

앨리슨은 놀라서 물었다.

"뭐겠소?"

그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처음으로 피넬리 밑에서 작업을 하게 되는 순간인데, 적어도 좋아하는 기계로 해야 하지 않

겠소?"

순간, 그녀의 표정이 환해지며 소중한 보물이라도 되는 듯 조심스레 그것을 껴안았다.

"고마워요, 릭. 실유리처럼 소중하게 다룰게요."

릭은 성큼성큼 앞서 걷다가 문 앞에 다다르자 가방을 내려놓더니 앨리슨이 먼저 나가도록 문

을 열어 주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장난기가 스며 있는 말투였다.

"모든 게 시작된 건 바로 여기였지."

그의 곁을 지나치는 순간, 마취제처럼 진한 백합 향이 코 끝에 느껴졌다. 그러나 그 진한 향

도 빠르게 뛰는 그녀의 심장을 진정시켜 주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그가 곁에 있기 때문이었

다! 짐을 밴의 뒷자석에 집어 넣은 뒤 릭이 문을 닫고는 물었다.

"내가 운전해도 되겠소?"

"그러세요."

앨리슨은 그의 손에 열쇠를 넘겨주었다. 잠시 후 그들은 아직 새벽잠에서 깨어나지 않고 있

는 도시를 지나 주경계를 향했다.

"참, 커피를 가져 왔어요."

앨리슨이 좌석에서 꿈틀거리더니 보온병과 넙적한 머그잔을 두 개 꺼냈다.

"하나는 블랙, 하나는 설탕."

그는 잊지 않고 있었다. 그들이 맨처음 커피를 마셨던 것도 이 차 안에서였다. 릭은 길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그녀가 건네주는 잔을 받았다.

릭과 다시 대면하는 순간 그녀에게 엄습해 왔던 끔찍한 불안감도 차가 전진하는 동안 차츰

사라지고 있었다. 그녀는 좌석에 깊숙이 몸을 묻고 다리를 한가하게 꼬고서 머그잔을 복부에

올려놓았다.

그녀는 가끔씩 커피를 들이키면서 핸들을 쥐고 있는 그의 단단한 손에 시선을 주었다. 그리

고 그가 커피를 마시는 소리를 들으며 예기치 않았던 안락함에 젖어들고 있었다.

한편 릭도 꼭 끼는 두터운 면바지를 입은 그녀의 허벅지와 배 위에 놓인 머그잔에 자꾸 시선

이 쏠렸다. 출발 당시엔 계기판의 가느다란 불빛만이 그녀의 다리 윤곽을 희미하게 비쳐 주

었지만, 삼십 분도 채 되지 않아 그들이 향하고 있는 방향으로부터 동이 터오기 시작했다.

파랑, 분홍, 그리고 오렌지색의 광선이 어우러지는 새벽 하늘이 일대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

다. 태양이 지평선으로부터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동안, 그들은 위스콘신 주의경계를 넘어

서고 있었다.

릭은 컵을 든 앨리슨의 손이 서서히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눈치 챘다. 그는 내심 미소를 지

으면서 그녀의 잠든 얼굴로 나른한 시선을 던졌다. 자신의 곁에서 경계를 풀고 잠이 든 그녀

의 모습을 오랫동안 가까이서 쳐다볼 수 있다는 건 행운이었다.

그는 어깨 위에 걸쳐진 그녀의 턱과 좌석 한 귀퉁이에 불편하게 끼어 있는 어깨, 차의 움직

임에 따라 앞뒤로 흔들거리는 포개 올린 무릎 등에 차례로 시선을 주었다. 덜컹거리는 차의

흔들림 때문에 그녀의 블라우스 앞깃이 가끔씩 들썩거렸다. 그 사이로 살짝 드러나는 어둑한

틈새가 그의 눈길을 끌었다. 그 안에서 하얀 레이스의 끝부분이 설핏 드러나는 순간, 그는

얼른 도로로 눈을 돌렸다.

앨리슨의 머그잔이 더욱 비스듬히 기울어지자 릭은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으로부터 그걸 빼앗

아 들었다. 그러나 그 순간, 그녀는 번쩍 눈을 뜨며 화들짝 몸을 일으키더니 어리둥절한 표

정을 지었다.

"괜찮아요. 다시 자도록 해요."

"아뇨, 난 피곤하지 않아요. 어젯밤 내내 잠만 잔걸요."

그는 싱긋 웃고는 다시 도로로 시선을 가져 갔다.

'그런 뻔한 거짓말을 그가 믿을까?'

그녀는 똑바로 앉아 양손가락을 깍지 끼고 몸을 뒤척이며 굳어진 어깨와 등을 푸는 시늉을

했다.

"우리가 마치 저 거대한 일출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군."

릭이 정면을 바라보며 말했다.

"음, 정말 이 멋진 광경을 놓칠 뻔했군요."

앨리슨은 동쪽 지평선을 꿈꾸듯 바라보았다. 그녀의 예술가적인 안목으론 그와 함께 감상하

고 있다는 이유로 그 걸작이 더욱 돋보였다.

오월의 위스콘신은 형언키 어려울 만큼 아름다웠다. 부지런한 농부들이 새로 일궈 놓은 드넓

은 벌판과 흐드러지게 만개한 꽃무덤들이 군데군데 눈에 띄는, 잔뜩 물이 오른 숲들이 곳곳

에 산재해 있었다. 그런데 위스콘신의 아름다운 경치에 한껏 취해 있던 그들 앞에 갑자기 날

카로운 바위 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두사람은 한 순간 바위의 위용에 압도되었다.

"저 꼭대기마다 인디언들이 숨어 있을 것 같네요."

앨리슨은 눈을 가늘게 뜨고 바위들을 바라보았다.

"색칠한 말 등에 앉아서 깃털 꽃은 창을 들고서 말이죠."

"나도 그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소."

여전히 그들은 사적인 대화를 기피하고 있었다. 우정이 깃든 침묵 속에서 길을 가고 있었지

만, 앨리슨은 알고 있었다. 이건 결국 대면해야 할 순간을 미루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메디슨의 주간도로를 막 돌아 시내로 직통하는 워싱턴 애비뉴를 따라가자 도로 중심부에 우

뚝 솟은 주의회 의사당의 둥근 지붕이 자랑스러운 위용을 드러냈다.

메디슨은 의사당을 가운데 두고 도로들이 거미줄 모양으로 펼쳐져 있는 방사형 도시였다. 대

학촌이 한창 활기를 띠기 시작하는 시간이어서 그런지 도로마다 시원한 봄옷으로 갈아입고

자전거를 타거나 걷는 학생들로 들끓었다.

행사가 열리는 건물 앞에 도착한 앨리슨과 릭은 차를 세운 뒤 핫셀블러드와 장비가 든 가방

을 챙겼다.

영화 배우로부터 정치가들, 잡지 표지 등을 장식하는 상업 예술에서 순수 예술 사진 등을 넘

나드는 다양한 예술 세계를 펼쳐온 피넬리 교수의 유명세를 실감하듯 그의 작품 세계를 배우

기 위해 많은 사진 작가들이 곳곳에서 몰려들고 있었다.

시간이 후다닥 지나가 곧 점심 시간이 되었다. 릭과 앨리슨은 대학 구내 식당에 자리를 잡았

다.

앨리슨은 자신의 천직을 선택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위대한 작가를 실제로 만나게 된

게 믿기지 않는다는 듯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릭이 두 번이나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나서야 그녀는 정신이 들었다.

"앨리슨?"

"네?"

그녀는 행복한 꿈의 세계에서 번쩍 깨어나 릭의 웃는 얼굴로 시선을 주었다.

"이봐요, 몽상가 아가씨. 아직 피넬리와 일도 해보지 않았잖소. 우린 워크샵에도 참석해야

하고 사진도 찍어야 할 텐데 칠리 소스에만 고개를 처박고 내내 꿈만 꾸고 있을 건가?"

앨리슨은 턱을 쓱 문지른 뒤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언젠가는 말이죠. 그와 함께 일을 하고 말 거예요. 정말이에요. 두고보세요."

워크샵은 다양한 조명 아래서 사진 작가들에게 각자만의 새로운 장비나 기법들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되었다. 그들은 자유롭게 서로의 아이디어를 교환하며 모델들을 찍었고, 저명한

사진학 교수들로부터 조언과 지도를 받았다.

앨리슨은 고개를 들어 의상을 갈아입고 자기 쪽으로 걸어오는 릭을 보았다. 그는 예전에는

보지 못했던 정장 차림새로 그녀 앞에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녀는 다시 한 번 호흡을 가다듬

었다. 그는 커다란 칼라가 달린 올이 굵은 연회색 재킷에 허리 부근에 약간 주름을 잡은 부

드러운 청색 개버딘 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 안에 옅은 청색의 버튼다운 와이셔츠를 받쳐 입

은 모습이 전형적인 사교계의 바람둥이였다. 그리고 그의 별자리가 새겨진 팬던트가 달린 커

다란 체인이 열어 둔 셔츠 칼라 사이로 슬쩍 드러나 보였다.

"난 준비됐소."

그가 나직이 말했다.

"오우, 저도요 !"

그녀는 내심 이렇게 외치면서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곧 자신이 입을 다물지 못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얼른 손으로 입을 틀어 막았다. 그가 핫셀블러드를 꺼내 와서

몇 가지사항을 알려 주는 동안 그에게서 풍기는 에프터쉐이브 향에 그녀는 감각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

"한 롤 당 열두 장밖에 찍을 수 없어요. 그래서 여분을 몇 개 가져 왔으니까 당신이 미리 감

아 놓도록 해요."

릭은 알아듣기 쉽게 차분히 설명해 주고 있었지만, 그녀는 도무지 그의 말에 집중할 수가 없

었다. 앨리슨은 이중 노출 요령을 가르쳐 주느라고 카메라 뒤편 여기저기를 가리키는 그의

길다란 손가락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녀가 겨우 직업적인 전열을 가다듬은 것은 그로부터 한참이 지나서였다. 저명한 피넬리 교

수가 저녁 노을 효과를 내기 위해 컬러 필터 사용하는 법을 몸소 설명해 주고 었었다. 앨리

슨은 책표지를 찍으면서 파란색 필터를 사용하여 달무리 효과를 냈던 적이 있었으므로, 그

사진을 교수에게 직접 보여 주었다. 피넬리 교수는 그녀가 작업하는 모습을 주의 깊게 살펴

보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아가씨, 아무래도 내가 여기 있는 건 시간 낭비인 것 같소. 난 내 조언이 필요한 다른 사람

에게 가봐야겠소."

앨리슨은 자신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릭을 보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나도 좀 봐도 되겠소?"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그에게 사진을 내밀었다. 두 사람은 릭이 비비엔 주친스키 쪽으로 기대

고서 그녀의 가슴에 닿을 듯 손을 얹어 놓고 있는 장면을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

"정말 멋있군."

그가 빠른 어조로 중얼거렸다.

앨리슨은 심각하게 사진을 관찰하고 있는 그의 관자놀이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정말 멋진 건 당신이에요."

릭이 그녀에게 눈을 돌리기도 전에 앨리슨은 카메라로 돌아가버렸다.

워크샵은 오후 네 시경에 끝났다. 릭과 앨리슨은 거의 파김치가 될 정도로 지쳐 있었지만,

사기만은 하늘을 찌를 듯했다.

주차장으로 가는 길에 릭이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이런 날에 너무 흥분돼서 잠을 이를 수 없다고 했던가?"

앨리슨은 눈을 꼭 감았다가 반짝 떴다. 그리고 양팔을 한껏 벌리고 유쾌하게 소리쳤다.

"그래요! 그래요!"

릭은 긴 머리를 출렁거리며 앞질러 가면서 재주 넘기라도 할 것처럼 기운이 펄펄 샘솟고 있

는 앨리슨의 모습을 바라보며 그자신의 감정 역시 고양되는 걸 느꼈다.

"내 경우, 당신을 저녁 식사에 끌어들이지 못하면 잠을 이루지 못할 것 같은데."

"저런, 그럴 필요 없어요."

급히 몸을 돌린 그녀는 재킷을 벗어 어깨에 걸치고 있던 그의 가슴과 하마터면 부딪칠 뻔했

다.

"난 알아. 내가 원하는 게 뭔지."

그들은 잠시 말을 잊고 서로를 응시했다.

"그래요?"

그녀가 애교스럽게 물었다.

"그래 ."

"나의 이런 모습을 이해해 줘요. 난 거의 점심에 손을 대지 못했지만, 지금은 거의 정신이

나갈 지경이니까요. 미안해요, 하지만 어쩔 수가 없어요. 난 늘 그런 식인걸요. 맙소사, 지

금 거의 굶어 죽기 일보 직전이에요. 그런데도 당신 얘길 듣고서야 배가 고파지기 시작했다

니까요."

"굶어 죽기 일보 직전이라고? 당신의 수명을 연장시키려면 키스가 좋겠군?"

순간 앨리슨은 기겁을 하고 그를 쳐다보았다. 벌써 얼굴이 확확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하

지만 그는 태연한 표정으로 주머니에서 앨리슨이 바구니에 담아 주었던 키스 캔디 두 개를

꺼내는 것이었다 그는 사탕을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워 그녀에게 건넸다.

그들은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동시에 사탕을 바라보았다. 메디슨 가를 따라 줄지어 서 있는

사과나무와 오얏나무처럼 앨리슨의 가슴에서도 봄이 만개하는 느낌이었다.

"이게 전부인가요?"

앨리슨은 장난스럽게 묻고는 껍질을 까서 얼른 입 속에 집어넣었다.

마치 예정된 순서인 양 그가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어디로 모실까요?"

릭은 퇴근길로 붐비는 의사당 근처로 차를 돌렸다.

"왔던 길로 되돌아가죠. 그쪽에 괜찮은 모텔들이 많이 보이던데요."

그는 다른 얘기 없이 워싱턴 애비뉴 쪽으로 차를 몰았다.

그들은 '엑셀'이라는 이름의 모텔 로비로 들어섰다. 두 사람은 지배인의 호기심 어린 시선에

도 아랑곳 않고 따로 서명을 했다.

"흡연, 아니면 금연입니까?"

두 사람은 동시에 입을 딱 벌리고 마주보았다.

"뭐라구요?"

"우리는 담배를 피워도 되는 방과 그렇지 않은 방이 있습니다. 어느 쪽을 원하시죠?"

"금연실이요."

그들이 다시 합창하듯 대답했다. 그러자 지배인은 이번에도 앨리슨과 릭을 번갈아 바라보는

것이었다. 마치 이런 말을 하고 있는 듯한 시선이었다.

'각 방이란 말이지?'

그러나 그는 아무 말 없이 두 개의 열쇠를 데스크 위에 놓았다.

"즐겁게 지내십시오."

밴으로 가는 동안에도 앨리슨은 여전히 지배인의 시선이 자신들을 뒤쫓고 있다는 걸 느꼈다.

"저 사람이 우리를 믿는 것 같소?"

릭이 그녀를 힐끗 바라보며 먼저 물었다.

"우리가 동시에 '금연'을 외칠 때부터 믿지 않는 것 같더군요. 그건 그렇고 예전에 금연실이

란 걸 들어 본 적 있어요?"

"전혀."

"글쎄, 나도 그래요."

그들이 묵을 방은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어느 쪽?"

"동쪽이 어디죠?"

그가 240호를 가리켰다.

"난 저기로 할래요. 아침에 해 뜨는 걸 바라보고 싶거든요."

"알아 모시겠사옵니다, 마님."

그가 앨리슨을 위해 문을 열어 주면서 장난스럽게 허리를 약간 굽혀 절하는 시늉을 했다. 그

녀는 다소 머뭇거리며 방안에 들어섰다.

모텔 방에 혼자 있다는 건 왠지 오싹한 느낌이 든다. 그녀는 더블 침대와 마룻바닥, 커튼 등

을 둘러보다가 239호 앞에 선 채로 자신을 바라다보고 있는 릭의 모습을 발견했다.

"방은 마음에 들어요?"

그녀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좀 춥네요."

"손님이 없을 때에는 히터를 꺼놓는 모양이니 좀 기다리면 괜찮아질 거요."

그는 자기 짐을 대충 옷장 안에 던져 놓고는 복도를 건너 주저없이 그녀의 방으로 성큼 들어

왔다.

그의 태연한 동작을 바라보면서, 그녀는 위스콘신의 메디슨에 있는 눈이란 눈은 모두 폐쇄

회로를 통해 자기들을 지켜보는 것 같은 불안감을 느꼈다. 그는 벽에 설치된 히터 쪽으로 몸

을 구부리고 잠시 여기저기를 살피다가 잠시 후에 벌떡 몸을 일으켰다.

"대단한 건 아니고 공기가 찼던 모양이오."

릭이 다가오는 동안에도 그녀는 못이 박힌 듯 꼼짝 못하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실례."

릭은 그녀의 뒤쪽에 있는 온도 조절 장치를 조절하기 위해 그녀의 팔을 잡고 약간 옆으로 비

켜 서게 했다.

"이제 곧 따뜻해질 거요. 다른 건 괜찮아요?"

"그럼요. 고마워요."

하지만 앨리슨은 그가 다시 복도를 가로질러 자기 방으로 가버리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 불

현듯 들었다.

이 방은 지나치게 개성이 없고, 조용한 데다 음울하기까지 했다.

릭은 잠시 문간에서 멈춰 섰다.

"바로 식사를 하지 않아도 괜찮겠소? 오랫동안 운전을 한 탓에 잠시 쉬었으면 하는데. 당신

도 좀 쉬어야 하고."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그럼 언제 식당에서 만날까?"

그녀는 다시 어깨만 으쓱했다. 왠지 모를 상실감과 허전함이 엄습해 왔다.

'아, 그는 정말로 가려나 보다. 나만 여기에 놔두고 자기 방으로 숨어들어 버리겠지.'

생각해 보니, 아까의 키스 캔디들보다 더 낭만적인 일이 이틀동안에 벌어질 가망성은 거의

없어 보였다.

그러나 오월의 바구니를 준 당사자는 앨리슨 자신이니, 다음행동은 그에게 달려 있는 것이리

라.

"여섯 시 어때요?"

앨리슨은 맥이 빠진 기분으로 아무렇게나 제안했다.

"여섯 시."

그는 자신의 방 열쇠를 획 던져 올렸다가 다시 붙잡으면서 그녀에게 살짝 윙크했다.

[당신 방으로 데리러 오겠소.]

그리고 가버렸다. 그의 등뒤로 조용히 문이 닫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