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빌스펜서] 네 곁에 가까이-9화 (9/11)

9

릭 랭은 핫셀블러드를 놔두고 떠났다. 자신이 그를 어떻게 대했는지에 생각이 미치자 앨리슨

은 죄책감이 앞서 선뜻 카메라에 손을 대지 못했다. 그는 월요일에도, 화요일에도 전화하지

않았다. 그리고 수요일, 앨리슨은 겨을 축제에서 찍었던 사진들을 현상했다.

그 사진들을 보자 앨리슨은 그에게 전화를 걸어 사과하고픈 욕구가 미친 듯이 끓어올랐다.

그녀는 전화기 앞을 서성댔다.

'하지만 그에게 너무도 못되게 굴었다. 너무도.'

앨리슨은 스튜디오의 창밖을 내다보면서도 오로지 릭 랭만을 생각했다. 제이슨과는 전혀 닮

지도 않았는데 늘 그녀의 머릿속에서 그와 비교되었던 릭. 그는 자신의 외모에도 거의 신경

을 쓰지않았으며 책 표지의 슬라이드를 보자는 얘기조차 하지 않았었다! 앨리슨은 긴 한숨을

내쉬고는 티파니 다이아몬드 촬영 작업에 몰입하기로 했다. 점안기로 물 몇 방울을 톡 떨어

뜨린 핑크빛 장미꽃 봉오리 속에서 다이아몬드 반지가 환상적인 자태를 연출하고 있었다. 그

녀는 핫셀블러드를 힘없이 쳐다보다가 잠시 후 결심한 듯 카메라를 들고 필름을 감기 시작했

다.

그녀가 의도한 대로 카메라는 다이아몬드와 장미꽃잎을 기막히게 포착해 냈다. 그려는 릭에

게 전화해서 사과하리라 다시 한번 굳게 마음먹었다. 그런데 작업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화

벨이 울렸다. 매티로부터였다.

"마음 준비 단단히 하라구. 당신에게 달갑지 않은 소식이 있으니까."

"뭐죠?"

"해리스 직물 관계로 작년 가을에 제이슨과 찍었던 작품들 기억나오?"

"물론 기억하죠."

"그럼 놀라지 말아요. 그 사진들이 이번달 '젠틀맨스 리뷰'에 실렸소."

깜짝 놀란 앨리슨이 의자에서 펄쩍 튀어 올랐다.

"뭐라구요!"

"내 말이 맞다니까. 그것들이 이번달 GR에 실렸다니간."

"하, 하지만 그건 말도 안 돼요! 그가 나한테서 훔쳐 간 게 겨우 몇 주 전인데."

"그렇지 않아. 그는 이미 몇 달 전부터 그것들을 빼내 잡지사에 넘겨 왔던 거요. 그것들이

없어진 걸 언제 알았지?"

순간 심한 낭패감이 앨리슨의 가슴을 할퀴고 지나갔다.

"물론 그가 떠나고 난 뒤죠. 그 전에야 추호도 그를 의심해 본적이 없었으니. 매일 파일을

체크하지도 않았구요."

"정말 유다 뺨치는 녀석이로구만! 리스트에 보니까 촬영자의 이름이 하버트 웰스로 나와 있

더군."

"의심할 여지 없이 우체국에 알아보면 GR쪽에서 보내는 급료 지불 수표가 동부의 어떤 도시

로 되어 있을걸요."

앨리슨이 씁쓸한 어조로 말했다.

"경찰에게 알릴 건가?"

앨리슨은 별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네거티브가 없는데 어떻게 내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겠어요?"

잠시 침묵이 이어지다가 매티가 연민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안좋은 소식을 전하게 돼서 정말 미안하오."

"네, 그렇군요."

그녀의 김빠진 목소리가 황량한 스튜디오에 울려 퍼졌다.

힘없이 수화기를 내려놓은 뒤 앨리슨은 벌떡 일어나서 성난 걸음걸이로 성큼성큼 스튜디오

안을 배회했다. 그러다가 문득 장미꽃 봉오리 안에서 유혹하듯 광채를 발하고 있는 다이아몬

드를 망연자실한 채 쳐다보았다.

순간, 다이아몬드처럼 영롱한 눈물 방울이 그녀의 볼 위로 흘러 내렸다.

지옥에나 가라, 제이슨. 비열한 자식!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육체를 이용했을 뿐인데 멍청

한 사우스 다코타 계집애가 당신에게 넘어가는 꼴을 보고 내심 고소했겠지!

난 마치 섹스에 굶주린 풋내기처럼 보였을 거야. 당신보다도 내게 훨씬 더 중요한 것들을 당

신이 훔쳐 가는 동안에 말이지.

맙소사! 내가 의심조차 하지 못했던 사이에 출판해도 손색 없을 그 훌륭한 슬라이드들을 훔

치고 있었어. 하지만 당신은 알고있었을 거야. 그렇지? 날 이용하고 있었다는 걸. 내 몸과

마음을 유린했고 내 자료들을 싹쓸이해 갔지. 그리고 그것들을 GR에 팔아 넘겼어!

지금 당신은 어디에 있는 거지? 다른 여자를 품에 안고 한 어리석은 사우스 다코타의 여자에

대한 얘기를 하면서 낄낄대고 있는 거야?

모든 생각이 한꺼번에 밀어 닥치면서 앨리슨은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던가를 뼈저리게 깨달

았다. 그녀는 제이슨의 육체에 정신이 팔려 일방적인 애정만을 보내며 현실을 직시할 줄 몰

랐던 것이다. 육체만이 유일한 무기였던 그는 일상적인 찬사를 연발했으며 , 마치 선심쓰듯

거들먹거리며 그녀에게 자신의 무기를 들이댔었다.

그녀는 자신의 욕구와 사랑을 너무도 적나라하게 드러냈었던 기억을 더듬어 보면서 모멸감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다만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이유에서였었다. 그리고 그녀를 지금 가장

못 견디게 하는 것 또한 그것이었다. 사실 문자 그대로 그녀는 제이슨에 의해 자신의 작품

세계를 살찌웠다. 그러나 그녀는 그가 포즈를 취하는 것 하나하나마다 늘 보수를 지급했다.

그런데도 제이슨은 그녀가 차곡차곡 모아 둔 사진들을 계획적으로 빼내고 있었던 것이다.

앨리슨은 지금도 그가 이젤에 걸린 사진 하단에 몇 자 휘갈겨놓고 떠나 버렸던 그날 오후를

떠올리면 비참함과 수치심에 치를 떨었다.

"그런 식으로 몇 자 적어 놓고 도망치다니, 내가 무슨 연예인의 뒤꽁무니나 쫓아다니는 극성

맞은 십대 팬이라도 된단 말인가."

앨리슨은 길고도 깊은 한숨을 내뱉고는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았다. 제이슨 애덜리, 그가 그

모든 짓을 저지른 것이다. 한 남자가한 여자에게 저지를 수 있는 모든 나쁜 짓을, 그는 남자

가 여자로부터 얻어낼 수 있는 것은 모조리 얻은 뒤, 남자가 남길 수 있는 최소한의 것만 남

겨 놓고 가 버린 것이다.

어째 됐건 그녀는 뼈저린 교훈을 얻은 셈이었다. 한때 그녀는 수려한 외모와 멋진 몸매에 쉽

게 빠져들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제 어떤 남자도 그런 식으론 그녀의 관심을 끌지 못할 것이

다. 릭 랭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가 아무리 에로스 뺨치게 멋진 키스를 구사한다 할지라도,

이젠 어느 누구에게도 그녀의 심장은 물론, 그녀의 침대도, 그리고 사진들도 쉽게 넘겨주지

않을 것이다! 오후에 전화벨이 한 번 더 울렸다. 릭의 목소리임을 눈치챈 앨리슨은 그의 전

화를 받고 싶지 않아 얼른 자동 응답 서비스로 돌려 버렸다. 그는 잠시 어리둥절한 듯 아무

말도 하지 않더니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이내 전화를 끊었다.

집에 돌아와 앨리슨이 저녁을 먹고 있는 동안 전화벨이 두 번 더 울렸다. 그리고 침대에 누

운 그녀는 끈질기게 울리는 전화벨소리를 또 들어야 했다. 그녀가 집에 돌아온 후 네 번째

걸려 온 전화였다. 그러나 그녀는 결심한 듯 베개 밑으로 머리를 파묻어 버렸다.

다음날 아침, 자동 응답 서비스가 릭 랭이라는 남자가 전화했으며 스코트 양에게 자신의 메

시지를 제대로 전하지 않았다면서 담당 여직원에게 화를 펄펄 냈다고 알려 왔다.

수요일, 앨리슨은 고향인 워터 타운에서 주말을 보내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고향에 간다고

해서 지친 마음이 안정을 되찾을 수는 없는 노룻이었다.

그녀는 시골의 농장집이 왠지 갑갑하게 느껴졌다. 제이슨과 릭에 대한 얘기를 어머니에게 털

어놓고 위로 받고 싶었지만, 무엇보다 그녀의 어머니는 자신의 딸이 결혼 전에 남자와 성관

계를 맺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터였다. 더군다나 그 중 한 명과 몇 달을 같이

살았다고 한다면야. 성적인 문제는 그녀의 집에서 선뜻 입 밖에 꺼낼 수 없는 금기 사항이었

다 앨리슨은 딸이 만약 그런 문제를 일으켰다는 사실을 알면 어머니가 까무러치실거라고 생

각했다.

앨리슨의 오빠 웬델은 결혼하여 근처에서 살고 있었지만, 그런 문제로 상담할 만큼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게다가 어머니는 앨리슨을 볼 때마다 딱하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이런 말

을 입에 달고 다니다시피 했다.

"세상에, 얘야, 너 지금 뼈하고 가죽밖에 남지 않았구나."

그리고 식사 시간엔 앨리슨의 접시가 이미 가득한데도 어머니는 늘 몇 숟가락을 더 얹어 주

셨다.

일요일 오전, 아침 식사 시간에 앨리슨의 짜증이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엄마, 못 참겠어요! 난 이제 스물다섯 살이라구요! 식사 때마다 스크램블 에그를 얼마나 먹

어야 할지 일일이 간섭받아야 할 나이는 지났다구요!"

순식간에 할말을 잊어 버린 식구들을 보자 그녀는 자신이 방금 선언했던 것보다 훨씬 어른스

럽지 못한 짓을 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내 부끄러워졌다.

그녀는 여느 때보다도 불편한 심정으로 미네아 폴리스로 돌아왔다. 자신을 사랑하는 가족에

게 좀더 너그럽게 대하지 못했던 사소한 죄책감까지 안고서.

그녀가 황량한 아파트에 앉아 모래알 씹듯 맛없는 저녁을 먹고있을 때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 그녀는 전화기를 뚫어질 듯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전화벨 소리를 무시하고 천천히 일

어서서 먹다 만 음식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손을 씻으러 갔다.

그런데 그 지독한 전화벨은 그녀가 손을 씻고 수건에 닦는 동안에도 멈추지 않고 울려 댔다

릭의 전화가 분명할 터이지만 그녀는 텁썩 수화기를 집어 들고 싶진 않았다.

그러나 도무지 그칠 줄 모르는 벨소리에 그녀의 신경은 드디어 폭발해 버렸다. 그녀는 수화

기를 획 낚아챈 뒤 고함부터 질렀다.

"그래요. 그래! 대체 뭘 원하는 거죠?"

당황한 듯 잠시 조용하더니 릭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앨리슨?"

"왜요?"

"지난 사흘 동안 대체 어디에 있었던 거요?"

그 역시 분을 터뜨렸다.

"사우스 다코타에 갔었어요."

"당신에게 혹시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았나 걱정하느라 미칠지경인 나를 방치해 둔 채 말이

지."

"당신을 보고 싶지도 않았고 얘기하고 싶지도 않았으니까요."

그녀는 차갑게 대꾸했다.

"오, 그러셨다구, 거참 대단하시군! 날 보고 싶지 않았단 말이지! 바로 그 이유였다구? 당신

이 내 전화를 철저히 무시하고 있는 동안 내가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을 거란 생각도 안 해봤

군!"

그가 어찌나 격하게 분통을 터뜨리는지 수화기가 들썩거리는것 같았다. 앨리슨의 손 역시 경

련적으로 떨리는 바람에 그녀는 벽에 등을 기대면서 두 눈을 꼭 감았다. 그녀는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아뇨."

그녀는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뇨. 잠시도 그 생각을 안 한 적이 없어요. 미안해요."

"당연히 그래야겠지, 당신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그것도 아니면 그 구제 불능의 머릿속으로

무슨 일을 벌이지는 않았는지 걱정되어 미칠 지경이었소. 나를 그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당

신은 아무렇지도 않게 사라져 버리면 그만이라 생각했소? 물론 내가 그런 식으로 떠나버려서

당신이 무척 혼란스러웠겠지. 당신은 아마 내가……."

"미안하다고 했잖아요!"

그녀가 날카롭게 대꾸했다.

"제길, 걱정돼서 병이 날 뻔했어! 사흘 동안 당신 아파트를 여덟 번은 더 찾아갔지만, 아래

충 사람들도 당신의 행방을 모르더군. 그리고 내가 들을 수 있었던 것이라곤 응답 서비스의

무뚝뚝한 목소리밖에 없었소. '죄송합니다, 랭 씨. 하지만 우린 스코트양에게 당신의 메시지

를 전해 드렸습니다'라는 말만 연발하더군. 도대체 당신 지금 무슨 게임을 하고 있는지나 알

고 있소?"

"게임이 아녜요."

그녀의 목소리가 다시 차분해졌다.

"우린 가끔 함께 웃었고, 사진 몇 방을 찍고, 사랑을 한 번 나눴고, 그게 전부예요. 그 때문

에 서로가 구속받아야 할 필요는 없다구요. 그 일은 다만 실수였어요."

"다만 실수였다고 !"

나직이 그녀의 말을 되풀이하던 그가 벌컥 분노를 터뜨렸다.

"우리 사이에 있었던 일을 실수라고 부르는 거요? 당신,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앨리슨?"

"내 실수였다구요, 그건."

그녀는 말을 잇지 못하고 길게 심호흡을 했다.

"난 더 이상 당신을 볼 수 없을 것 같아요, 릭. 정말 미안해요. 생각했던 만큼 개운하지가

않아요. 난 못 잊겠어요. 그렇게 빨리……."

"뭘 못 잊겠다는 거지? 내가 한 일, 아니면 그 남자가 한 일? 난 그 남자가 아니오. 빌어먹

을, 아직도 당신은 내가 그 남자라도 되는 것처럼 날 심판하고 있어! 정 그렇게 남자를 판단

하고 싶으면 적어도 그 사람의 장점과 단점을 냉정히 직시하라구. 다른 누구와 비교하지 말

고 !"

그랬다. 그의 말이 옳았다!

그러나 제이슨의 이중적인 행동으로부터 받은 상처가 너무도 생생했기에 그녀로서는 새로운

관계로 발을 들여놓기가 쉽지 않았다.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다는 건 그녀에겐 또다시 나약해

진다는 얘기와 다름없었으니까.

"왜 굳이 나 때문에 시간을 허비하려는 거죠?"

'이런 말을 그에게 해야 하다니.'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이록 전화상이라지만 그가 얼마나 상처를 받을지 알 수 있었다.

"잘은 모르겠소. 우리가 함께 보낸 순간들을 소중하게 여기고있고, 당신 역시 그럴 거라고

생각했었소. 그런데 아무래도 내 생각이 잘못된 것 같군."

그는 잠깐 멈췄다가 나직이 투덜거렸다.

"이런, 빌어먹을."

그의 목소리가 점차 달래는 투로 변해 갔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소. 다만 당신과 내가 보낸 순간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처음

보다 더욱더 특별하게 느껴진다는거요. 우린 함께 일했고, 함께 웃었고, 무엇보다 서로 공통

점이 많다는 걸 알게 됐지. 그런데 지난번의 만남 이후 우리는 마치 자연스럽게 끝내는 것처

럼……. 마치…… 당신은 내가 무슨 얘길하려는지 알 거요. 앨리슨, 우린 함께 멋진 시간을

보낼 수 있었어, 그래서 내가 당신에게 키스하고, 당신이 나에게 답하고, 마침내 사랑을 나

눌 수 있었던 거요."

그의 목소리는 더욱 낮고 거칠어졌다.

"나에게 거짓말할 생각 하지 마, 그건 마치 꺼질 줄 모르는 불꽃 같았어."

앨리슨은 그가 숨을 고르는 소리를 잠자코 듣고 있었다.

"만약 나로부터 도망가고 싶다면 적어도 몇 가지 대답은 해줘야 해, 앨리슨. 난 이유를 알

권리가 있어."

"난 겁이 나요. 그게 이유예요. 됐어요?"

그건 진심이었다.

"제이슨이 도대체 어쨌길래……."

"도대체 왜 당신이 그 일에 그토록 신경을 쓰는지 모르겠어요. 게다가 난 자격이 없어요. 아

주 멋진……."

"연인으로?"

그가 나머지 말을 이었다.

"그게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이었나? 만약 그게 이유라면, 이 점을 알아두는 게 좋겠군. 세상

남자들이 모두 그것만을 우선으로 두지는 않는다는 점을 말이오. 남자들 중에는 외형보다는

한 사람의 내면을 진정으로 볼 줄 아는 사람들도 있지. 표면적인 모습이상의 것에 자신의 감

정을 거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말이오."

그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당신은 기막힌 연인이었소."

"그만, 그만해요! 왜 내가 당신을 믿는 걸 두려워하는지 알고싶다고 했죠. 그 이유를 얘기하

죠. 난 제이슨 애덜리를 믿었기 때문에 내가 갖고 있는 모든 걸 주었어요. 우린 함께 생활했

고 난 그의 경력을 키워 줬어요. 사랑에 눈이 먼 얼간이가 그의 이기심에 멋대로 끌려다닌

셈이었죠. 그러면서도 우리는 무언가, 무언가 영원한 어떤 것을 쌓아 가고 있다고 생각했었

어요. 그는 날 위해 포즈를 취했더랬죠. 그랬어요! 그는 자신의 매력이 뭔지 잘 알고 있었으

니까. 난 내 모든 미래를 그와의 작업에 걸었죠. 그리고 어느 날 집에 와 보니 그가 떠나 버

렸더군요. 깡그리 싸가지고, 내 네거티브 필름들까지! 내가 왜 남자를 피하는지 알고 싶다고

했죠? 그렇다면 이번 달 '젠틀맨스 리뷰'를 펴 보세요. 그럼 알게 될 테니. 그의 얼굴을 알

아볼 거예요. 내 파일 중에 그의 사진이 있었으니까, GR에 사진이 실린다는 건 수천 달러의

보수와 경력을 보장하는 거죠. 그건 사진 작가들에겐 일종의 신용장이나 다름없는 거라구요.

앨리슨의 몸이 떨려 오기 시작했다. 분에 못 이겨 그렁그렁 맺힌 눈물 때문에 맞은편 의자가

뿌옇게 보였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당신과 나 사이의 단 한 가지 사실만은 바꾸질 못해. 앨리슨, 그 일은

단순한 과거사일 뿐이오. 우리가 나눴던 일들은 어떻게 되는 거지?"

"하지만 그건 어떡하구요, 난 어떡하구요?"

그녀는 그를 고통스럽게 할 게 분명한, 무엇보다 그녀 자신을 고통스럽게 할 그 말을 삼켜

버리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는 잠시 동안 입을 열지 못하다가 조심스럽게 감정을 조절했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니란 말이지. 내가 내내 엉뚱한 계집아이에게 헛얘기만 한 것 같

군. 정말 계집아이에 불과해! 앨리슨, 왜 성숙하게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요? 한 남자

의 비열한 행동 때문에 다른 남자를 모조리 싸잡아 욕하는 유치한 짓은 이제 그만둘 수 없소

? 그렇지 않다면 당신의 그 고상한 주의력에 어울리는 다른 사람을 찾아보든지!"

작별의 말도 없이 릭은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그 후 몇 주는 앨리슨에게 그 어느 때보다도 절망적인 시간이었다. 그녀는 제이슨이 자취를

감추었을 때보다도 더 깊은 절망감을 맛보았다. 사실 제이슨이 떠났을 때는 당연한 분노 속

에서 이를 갈았다고 해야 옳겠지만.

릭이 그녀로부터 냉대를 당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녀 자신의 불안이 그에게 잔

인하게 행동하도록 만든 것뿐이다.

앨리슨은 릭에게 전화를 해서 그를 비난했던 모든 것이 그녀스스로 만들어 낸 구실이었을 뿐

이라며 진정으로 사과를 하고 싶었다. 하루에도 수백 번을 벼르고 별렀지만, 결국 자신의 행

동이 너무도 부끄러운 나머지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그녀는 자신이 그에게 어울

리는 여자가 아닐 거라는 잠정적인 결론을 내렸다.

날이 바뀔 때마다 릭의 형상이 그녀의 생각을 가득 메우곤 했다.

앨리슨은 릭에 대한 길지 않은 기억을 더듬어 굳이 그의 결점을 찾으려던 노력을 어느 틈엔

가 포기하고 말았다. 사실 그는 한번도 예의에서 벗어난 행동을 보인 적이 없었다. 그녀가

심한 상처를 주었을 때조차도.

그녀가 기억하는 한, 자신에게 그는 고통을 주지도 않았고 멋대로 군림하려 들지도 않았을

뿐더러 그 자신의 이기심만을 앞세우지도 않았다.

'그런 것들은 제이슨의 특허 상표가 아니었던가.'

릭. 그는 늘 정직한 관계를 맺고 싶어 했었다. 오히려 불신과 경계 뒤에서 자신의 두려움을

위장하고 진실을 숨겼던 건 그녀 자신이 아니었던가.

'앨리슨 스콧, 넌 얼마나 딱한 인간이니?'

이월이 다 가도록 릭 랭으로부터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러나 사실 이처럼 혹독하고 외

로운 나날들을 보내야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그녀 스스로 자초한 일이었다.

그녀가 아무렇게나 팽개쳐 두었던 겨울 축제 때 찍었던 사진들은 다시 아픈 기억들을 들추어

냈다. 어느 날 그 사진들을 한 장한 장 넘겨 보면서, 그녀는 너무도 그리운 그 순간들과 그

토록 점잖고 정직했던 릭을 떠올려 보았다. 그 순간, 자신에 대한 혐오감이 울컥 치밀어 을

라 그녀는 사진들을 아무렇게나 내던지고는 양팔에 고개를 묻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우는 일에도 이젠 지쳤던지 코를 풀고 얼굴을 씻고 나자 기분도 어느 정도 나아진 듯했다.

그녀는 턱을 괴고 앉아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는 화사한 장면의 사진들과 뒤이은

쓰라린 기억들을 음미하고 있었다.

'그래, 전화를 걸자. 그에게 전화를 거는 거야.'

마음 한 구석에서 외로운 목소리가 속삭였다.

'그가 더 이상 무슨 할말이 있겠는가. 내가 그토록 그를 괴롭혔는데. 사과하는 거야.'

그 목소리가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무례하게 그를 대해 놓고? 넌 그에게 전화를 걸 자격조차 없어.'

한참 동안의 상념에서 깨어난 그녀는 고개를 들고 사진들을 긁어 모은 뒤 주제별로 죽 늘어

놓았다. 그것들을 오랫동안 바라다보던 그녀는 그 사진들이 상당히 좋은 작품이 될 수 있으

리란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그 전체가 얼어붙은 겨울의 한가운데 서 흥겹게 축제를 벌이고

있는 활기찬 미네소타 사람들의 삶과 모습을 생생하게 드러내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갑작스런 충동에 이끌려 간단한 소개서와 사진들을 함께 동봉했다. 사진들의 목적지

는 미네아폴리스의 '세인트 폴 매거진'이었다.

그로부터 사흘 후, 앨리슨은 잡지사의 관계자로부터 사월호의 잡지에 그 사진들을 게재하고

싶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앨리슨은 그 순간을 가장 많이 나눴던 릭과 이 기쁨을 나눌 수 없다는

생각에 맥이 풀렸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뒤 앨리슨은 바지 뒷주머니에 손을 꽃고 오랫동안

전화기를 응시했다.

당장이라도 그에게 전화를 걸어 이 소식을 전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또다시 그녀는 죄책감

과 자격지심 때문에 머뭇거리고 있었다.

핫셀블러드는 아직도 그녀의 스튜디오에 있었다. 그녀는 거의 매일 그 사진기를 쓰면서도 언

젠간 반드시 돌려주리라고 다짐하곤 했다. 하지만 그에게 전화를 걸어 가져 가라고 얘기할

수는 없는 노룻이었다. 그녀가 직접 그에게 갖다 주는 수밖에 없는 듯했다.

삼월의 첫째날, 집에 돌아온 앨리슨은 우체통에서 낮선 필체의 우편물을 발견했다. 층계를

올라가면서 그녀는 모자와 스카프를 벗어 젖혔다. 순식간에 몸이 달아오른 까닭이다. 그가

보낸 편지였다! 릭, 그가!

앨리슨은 소파에 앉자마자 그의 글씨부터 살펴보기 시작했다. 핑크색 봉투였다. 그녀는 당장

찢어 보고픈 충동을 누르며 부엌에서 칼을 찾아 조심스럽게 봉투를 개봉하기 시작했다.

다시 소파에 기대 앉아 그녀는 조심스레 카드를 꺼냈다. 그가 직접 그린 투명한 수채화였다.

낡은 벽돌 담과 마디가 많은 삼나무 사이로 돋아난 야생 잔디 속에서 청초한 물망초 한 송

이가 의연하게 고개를 내밀고 있는 그림이었다.

내용을 보기도 전에 앨리슨의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그녀는 결이 거친 카드를 손가락으로 쓸어 보면서 이것이 그녀가 본 그의 첫작품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래, 그는 자연을 그리는 화가라고 했었지.'

하지만 단 한 번도 그의 작품을 보자거나 그의 일에 관심을 보였던 적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가 이기적이라면서 무작정 비난만 하지 않았던가! 정작 이기주의자는 바로 그녀였다. 자

신의 경력에만 눈이 멀어 그에 대해서는 알려고 하지도 않았으니까 말이다.

단순한 그림에서 발하는 심상치 않은 감각을 감지한 그녀는 마침내 중대한 사실을 깨달았다.

릭 랭은 그의 육체적인 장점만을 내세우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부차적인 조건

일 뿐이었다. 그에겐 가장 소중한 것이 따로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 자신만의 예술 세계가.

엽서의 뒷면을 펴 보았다. 그의 글씨. 검정색 잉크를 묻힌 펜으로 비스듬히 기울여 쓴 필체

였다.

<난 잊지 않았소. ― 릭.>

앨리슨은 목구멍으로부터 순간적으로 치밀어 오르는 감정의 격류를 이기지 못해 한 손으로

얼른 입을 막았다. 그의 모습이 다시 눈앞에 어른거렸다.

'릭, 나 역시 잊지 못해요. 하지만 난 너무 부끄러워요. 어떻게 당신의 얼굴을 대할 수 있겠

어요?'

그녀는 잔뜩 웅크리고 앉아 오랫동안 그를 생각하면서 기억의 자취를 더듬고 있었다. 그와

함께 보냈던 그 즐거웠던 시간들, 서로 주고받았던 농담들과 웃음, 그 끔찍했던 오물렛, 겨

울 하늘 아래를 마구 쏘다녔던 어떤 날, 스튜디오 촬영이 끝난 뒤 놀라운 동질감을 확인했던

그날 저녁, 그리고 그가 사랑해 주었던 그 밤.

릭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난 아직은 여자를 먼저 쫓아다니는 남자들 중의 하나지."

앨리슨은 그에게 전화하고픈 심정을 꾹 억눌렀다. 그의 이 말이 그녀를 제지했던 것이다.

그녀의 시선이 전화기에 가 멎었다.

'그래, 만약 날 만나고 싶으면 그가 전화하겠지.'

삼월 중순. 앨리슨은 릭에게 간단한 용건만을 적은 메모를 보냈다.

그의 핫셀블러드 카메라를 매티의 사무실에 갖다 놓았으니 찾아 가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마지막 몇 자를 덧붙이느라고 오랜 시간 고심했다.

<당신이 보낸 카드 참 마음에 들어요. 당신은 재능 있는 화가예요.>

그리고 서명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두고는 그보다 배는 더 고민했다. 결국 그녀는 이렇게 쓰

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당신의 A>

삼월의 나머지 두 주는 쏜살같이 흘러갔다. 니콜레트 산책로를 따라 죽 늘어선 나무의 새순

들이 하나둘씩 솟아 나면서 미네아플리스에도 푸르른 봄기운이 완연해 가고 있었다. 도심에

있는 뱅크 플라자 쇼핑에서 열린 패션쇼에서 는 다가오는 계절을 예고하는 팝은 소매의 가실

가실하고 화사한 의상들을 선보이고 있었다.

앨리슨은 부활절에 맞춰 고향에 가는 길에 입기 위해 세련된 디자인의 옅은 노란색 정장을

구입했다. 그러나 새옷을 샀다는 들뜬 기분도 잠깐. 매일매일 우편함을 들여다보는 것이 일

과인 그녀가 기다리고 기다리는 소식은 결국 오지 않았다.

사월 초, 마침내 기다리는 일에도 지친 그녀가 큰맘 먹고 연달아 사흘 동안 그의 집에 전화

를 걸었다. 하지만 자동 응답기의 목소리만 울릴 뿐 그로부터는 여전히 아무런 소식도 없었

다.

참다 못한 앨리슨은 태연을 가장하고 매티의 사무실에 들러 릭랭이 카메라를 가져 갔는지 조

심스럽게 물어 보았다.

"물론."

매티의 대답은 간단했다.

"다시 찾게 돼 아주 기쁘다고 그러면서 봄 풍경을 찍으러 고향에 갈 거라고 하더군."

릭이 이곳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앨리슨은 그의 생각을 머릿속에

서 털어 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일에만 매달리기로 했다.

혜더웨이 북스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들은 앨리슨이 찍은 표지용 사진에 아주 흡족해 하며 두 건을 더 의뢰해 왔다. 그녀는 무

척 기뻤다. 그런데 다른 때 같았으면 좋아서 펄펄 날뛰었을, 그토록 경험해 보고 싶었던 감

정이 이상하게도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것이었다.

사월도 중순에 접어들 무렵, 다시 릭의 필체가 선명한 편지가 날라왔다. 헐벗은 나뭇가지 아

래에 외로이 서 있는 새끼 사슴 한마리를 급히 스케치한 그림이었다. 카드 안에는 이런 말이

씌어있었다.

<난 새로운 기분으로 고향을 출발했소. 돌아오자마자 '세인트폴 매거진'을 봤지. 축하해요!

당신과 나의 핫셀블러드에게도.―당신의 릭.>

그녀가 새로 구입한 봄옷과 두 건의 책 표지 청탁도 릭이 보낸 이 몇 마디의 소식만큼 그녀

의 사기를 복돋아 주지는 못했다.

다시 앨리슨은 그에게 전화를 걸어 볼까 망설였다. 그러나 '새로운 기분'이라는 말을 되새겨

보고 그의 편지 내용을 떠올리며 혹시 다시 만나고 싶을 때 그가 먼저 시도를 하도록 내버

려 두는게 최선의 길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활절이 다가오고 있었다. 앨리슨은 성 금요일에 고향으로 출발하기에 앞서 카드 한 장을

산 뒤 짤막하게 적었다.

<나 역시 새로운 기분이랍니다.―당신의 앨리슨.>

이틀을 가족들과 함께 보내면서, 앨리슨은 부모의 입장에 대한 릭의 의견을 기억해 내곤 되

도록이면 그들 편에서 생각해 보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 그녀는 어느 때보다 편하고 즐거운

주말을 보낼 수 있었다.

겨울의 모진 바람 속에서 꿋꿋이 살아 남은 겨을 밀들이 파릇파릇한 새싹을 틔우고 있는 넓

다란 벌판을 앨리슨은 오랫동안 거닐면서 많은 생각들을 했다. 그녀 자신에 대해서뿐만 아니

라 릭과 그들의 관계 모두를 반추해 보았다. 그 결과 제이슨 애덜리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릭이 너무도 소중한 존재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면 무얼 두려워하는 것일까?'

그녀가 얻은 대답은 바로 아무것도 없다라는 것이었다! 이제 그녀는 두렵지 않았다! 자신이

생겼다. 앨리슨은 릭 랭을 다시 만나서 사과하고, 그와 함께 웃고, 그의 사랑을 받고 싶었다

. 그리고 그녀는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한때 자신에게 고통과 절망을 안겨 주었지만 이제

막연한 기억 속에나 머물러 있는 어떤 남자와 비교하는 짓을 그만두고 릭 자신만을 두고 판

단하리라는 것을.

그러나 사월이 다 지나도록 그로부턴 답장이 없었다.

오월의 첫날, 앨리슨은 길고 좁다란 봉투를 받았다. 오월에 피는 꽃들이 한 아름 담겨 있는

바구니와 그 손잡이에 매어진 리본이 가벼운 미풍에 날리고 있는 그림의 카드였다.

그 안에는 이런 글이 씌어져 있었다.

<메이 데이의 풍습 중에는, 소녀가 좋아하는 소년의 집 계단에 꽃바구니를 갖다 놓은 후 문

을 두드리고 달아나면서 그가 좇아와 자기에게 키스해 주길 기원하는 풍습이 있지. 소년들도

그와 같은 행동을 해도 되는 건지는 확실히 알 수 없소. 하지만……. 사랑을 담아 릭.>

릭이 그린 오월의 꽃 바구니를 바라보던 앨리슨의 볼이 발그레하게 달아올랐다. 다음 순간,

그녀의 입술에 환한 미소가 피어 올랐다. 그 꽃들이 그녀의 가슴속에서 한꺼번에 봉오리를

터뜨리는 듯했다. 갑자기 호흡이 가빠 오면서 그녀는 열려진 프렌치 도어틈으로 흠뻑 들어오

는 햇살을 받고 있는 거실을 둘러보았다.

여기저기서 포즈를 취하던 릭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녀는 의심의 여지 없이 그가 다시 이곳을

찾을 수 있으리란 걸 믿기로 했다. 그것도 빠른 시일 안에.

'아마 그를 저녁 식사에 초대할 수도 있으리라.'

그 생각이 떠오르자 지난 시간의 기억들 때문에 불편해 할 필요 없이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

서 식사 초대를 하자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실제로 그들은 변화된 모습을 받아들이기 위

해서는 다소 중립적인 장소에서 만날 필요가 있었다.

그의 메시지가 의미하는 바를 완전히 확신하고 있진 않으면서도, 앨리슨은 먼저 전화하는 것

을 주저하고 있었다.

그녀가 릭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는 사이, 예기치 않은 우편물이 도착했다. 위스콘신 대학에

서 열리는 이틀 간의 심포지움과 워크샵에 관한 안내문이었다. 그 행사의 주 발표자는 유명

한 사진 작가이며 산타 바바라의 브룩스 인스티튜트의 사진학과 과장인 로베르토 피넬리였다

.

참가 대상 : 직업 사진 작가들

준비 사항 : 35미리 카메라, 컬러 필름, 그리고 자신이 선택한 모델

기간 : 5월 19, 5월 20일 양일간.

참가비 : 160달러

식사 : 학교 부속 학생 전용 식당에서 가능

숙소 : 제공되지 않음. 캠퍼스 근처에 위치한 호텔이나 모텔 들이 가능함

릭 랭을 만나 자신이 범한 실수를 회복하려는 기회에 피넬리 교수를 만나 보고 싶던 숙원이

이루어질지도 모른다는 우연은 참으로 신기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신기한 것은 그녀의 오랫

동안의 숙원이 릭을 다시 만난다는 설레임에 비하면 사소하게 느껴진다는 점이었다. 마침내

앨리슨은 이 두 가지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멋진 묘안을 찾아냈다.

손목 시계는 그날따라 유난히 더디게 움직였다. 그녀가 작정한시간을 향해 시계침이 꾸물거

리며 움직이는 동안, 그녀는 시계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그를 만나고 싶은 자신의 열망에

문제가 있는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물론 스튜디오에서도 전화를 못할건 없었지만, 아무

래도 집이 나을 것 같았다.

앨리슨은 치밀하게 시간을 맞춰 다섯 시가 가까워질 무렵 집에 도착했다. 참치 샐러드를 먹

는 동안 괜히 맥이 빠져 세 번이나 목에 걸렸다. 그녀는 자꾸 땀에 젖어 오는 손을 허벅지에

쓱쓱 문지르고는 자신에게 침착을 호소했다.

어쩌면 릭은 집에 없을지도 몰랐다. 그녀는 거의 냉정을 잃고있었다. 아니면 그는 다른 누군

가와 함께 있어서 전화를 받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전화는 받겠지만 거절할지도, 앨

리슨, 이 겁쟁이 같으니!

제길, 그래, 난 겁쟁이야.

그렇다면 전화 걸지 마. 그리고 평생을 후회하면서 보내렴.

입닥쳐, 난 만반의 준비가 갖춰지면 할 거야!

하, 웃기시네!

하지만 네가 보고 싶다면 그가 먼저 전화할걸.

그를 밀어낸 건 바로 너였다는 걸 기억 못하니!

그래도 그는 자기가 그 문제에 있어선 구식 스타일이라고 했잖아. 그가 널 다시 보고 싶다면

의사를 분명히 밝힐 거야.

이윽고 그녀는 수화기를 들고 다이얼을 재빠르게 눌렀다. 그동안에라도 마음이 변할지 모르

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심호흡을 들으며 그녀는 차라리 릭이 집에 없기를 빌었다. 막상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여보세요?"

앨리슨은 수화기를 바짝 움켜 쥐었다. 말이 목구멍에 걸려 쉽게 나오지 않았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릭?"

'이토록 냉정하고 침착한 목소리가 자신의 목소리란 말인가? 쿵쾅거리는 심장은 터지기 일보

직전인데.'

잠시 잠잠하다가 놀란 목소리가 들려 왔다.

"앨리슨?"

"그래요. 잘 지냈어요?"

"당신도?"

그가 다음 말을 이을 때까지 침묵이 이어졌다. 그야말로 수만광년은 되는 듯했다.

"당신 목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게 되는 건 거의 포기하고 있었는데."

"나도 포기하고 있었어요."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그가 뭐라 중얼거리긴 했지만 그것조차 목구멍이 잠겨 잘 들리지 않았다. 그는 헛기침을 하

고는 다시 물었다.

"그래, 그 동안 잘 지냈소?"

"그럼요."

"그럴 것 같았어. 미네아폴리스 '세인트 폴 매거진'에 작품이 팔리기도 했으니. 사진 정말

멋있었소. 처음 보는 순간 믿을 수가 없더라니까."

"그들로부터 연락을 받을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어요. 그러니까 뭐랄까. 난 거의 일시적 충

동으로 그 사진들을 보냈었거든요."

"행운의 충동이군."

"그, 그래요. 행운이죠."

앨리슨은 마치 그가 곁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기나 한 것처럼 어깨를 으쓱하고는 다리 사이

로 마룻바닥만을 응시했다. 다음 순간, 두 사람은 대화가 고갈되어 버린 듯 다음 말을 잇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아 참, 또 있었어요!"

그녀가 얼른 기억을 더듬어서 말을 이었다.

"혜더웨이로부터 책 표지 두 건을 더 의뢰 받았어요!"

"야, 정말 축하할 일인데! 당신은 다음달 생활비 걱정을 안 해도 되겠군. 그 다음달도."

그녀가 예전에 무심코 던졌던 말들을 그가 끄집어냈다.

'도대체 그는 아무것도 잊어 버린 게 없는 걸까?'

마침내 앨리슨은 전화를 건 용건을 생각해 냈다.

"저, 아직도 모델 일을 하나요?"

"물론. 그 수입을 무시할 수 없으니까."

"혹시 일 하나 해볼래요."

"나쁠 건 없겠지."

"날 위해서?"

앨리슨은 릭이 누구의 일인지를 알게 되면 거절할 것 같은 불안감에 자신없는 목소리로 말했

다.

"내가 거절할 리 없잖소?"

"이건 정상적인 작업이라기보다는, 그러니까 책 표지 일이 아니구요, 우리 두 사람 모두가

배울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되는 일이에요. 실은 위스콘신 대학에서 직업 사진 작가들을 위

한 워크샵과 심포지움이 개최된대요. 그리고 주 발표자는 로베르트 피넬리구요. 나는, 저,

난 오래 전부터 그를 만나 보고 싶었거든요."

앨리슨은 곤두선 신경을 감추기 위해 되도록이면 말을 빨리 이었다.

"언제?"

"오월 십구 일과 이십 일이요."

"이틀 내내?"

앨리슨은 그의 질문이 무엇을 암시하는 것인지를 깨달은 순간 일순 당황했다. 함께 밤을 보

내야 하는 상황이냐고 묻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요."

그녀는 애매한 어조로 대답했다.

'승낙하지 앉으려나 봐! 그는 승낙하지 않을 거야!'

그녀의 손바닥에 다시 흥건히 땀이 고이기 시작했다.

"재미있을 것 같군."

"정말 그렇죠?"

앨리슨은 너무 기쁜 나머지 두 눈을 크게 뜨고 입을 활짝 벌렸다.

"물론이오. 내가 거절할 거라 생각했소?"

그녀는 릭의 질문에서 은근한 장난기를 읽은 것 같았다.

"그리 확신하지는 않았어요."

앨리슨은 그 말을 하면서 한 손으로 정수리를 세게 눌렀다.

'당신은 먼저 쫓는 스타일이라고 나에게 그랬잖아요!'

"무슨 옷을 입어야 할지만 얘기해요."

그가 아무렇지 않게 이 말을 하는 동안에도 앨리슨은 격앙된 감정을 진정시키느라 정신이 없

었다.

그들은 그날 오전 네 시에 그녀가 그를 데리러 가는 것으로 약속을 정했다. 일단 약속이 정

해지자 또다시 대화가 궁해졌다.

앨리슨은 애꿎은 전화선만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는 다시 베란다에 놓

아 둔 침대 겸용 소파에 눈길을 주면서 두 사람이 여름에 다시 그곳에 앉아 볼 수 있을까 하

는 막연한 상념에 젖어들었다.

"그러니까……."

그리고 그녀는 바보처럼 웅얼거렸다.

'그러니까? 그게 어쨌단 말이냐? 기껏 생각해 낸 말이 그러니까라는 말이니? 왜 좀더 발랄하

고 재치 있게 끝을 못 맺는 거니,앨리슨 스콧!'

그가 목을 가다듬더니 말했다.

"그래, 그러니까?"

침묵.

앨리슨의 손바닥이 다시 촉촉히 젖어 왔다. 그녀는 허벅지에 손바닥을 세게 비볐다.

"그럼 십구 일에 보죠."

"십구 일."

그가 반복했다.

"그럼, 잘 있어요."

"안녕."

그러나 앨리슨은 먼저 전화를 끊고 싶진 않았다. 그녀는 저녁놀이 스며드는 거실에 서서 그

들이 사랑을 나누었던 그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수화기를 꼭 움켜 쥔 채 한참

동안 그의 숨소리를 듣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있던 그녀는 수화기를 천천히 내려 벅찬 감

정으로 두근거리는 가슴 위로 가만히 갖다댔다.

"릭, 당신을 사랑해요."

앨리슨은 꼭 감은 두 눈 사이로 그의 모습을 떠올리며 가만히 속삭였다. 그가 과연 이 말을

들을 수 있을지, 혹은 미칠듯한 마음의 동요를 느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 이 순

간 그에게로 향하는 감정의 물결을 혹시 그가 눈치 챈다 해도 상관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잠시 후, 앨리슨은 다시 수화기를 귀에 가져 가서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그가 아직

도 기다리고 있을지는 확신이 서지않았다. 이윽고 그녀는 가만히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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