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빌스펜서] 네 곁에 가까이-8화 (8/11)

8

앨리슨은 그 흉칙한 모자와 스카프를 두르고 가장자리에 털이 달린 부츠와 커다란 점퍼로 무

장한 채 집을 나섰다. 릭 역시 차 트렁크에서 커다란 돕바를 꺼냈다. 그는 모자는 뒤집어쓰

지 않았지만, 여우털로 목을 꼭 조여맨 모습이 머나먼 원정길에 오른 씩씩한 탐험가 같았다.

차에 을라타기 전에 앨리슨은 눈이 부실 만큼 하얀 눈밭을 배경으로 그의 사진을 한 장 찍

었다.

참으로 청명한 겨울날이었다. 그리 멀지 않은 칼룬 호수로 가는 동안 그들 역시 날씨만큼이

나 유쾌한 기분이었다.

호수에 도착했을 무렵엔, 이미 겨울 축제가 한창 벌어지고 있었다. 커다란 과자 바구니를 연

상시키듯 형형 색색의 모자와 스키 점퍼들이 얼어붙은 호반을 수놓고 있는 가운데 갖가지 다

채로운 행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앨리슨은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되는대로 셔터를 눌러 댔다. 얼음에 구멍을 뚫고 붕어를 낚

아 올리는 데 열중하고 있는 빨간코의 여덟 살짜리 소년들, 거북이마냥 눈 위로 벌렁 나자빠

진 채 활짝 웃고 있는 남자, 얼음으로 인어 공주상을 조각하고 있는 젊은 커플, 스케이트 경

주의 골인 지점으로 뛰어드는 발갛게 상기된 십대들, 앨리슨이 카메라를 들이대는 것도 눈치

채지 못한 채 키스에 열중하고 있던 소년과 소녀, 살랑거리는 미풍에 노랑과 오렌지색 돛을

펄럭거리는 얼음 조각 보트, 눈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천사를 만들고 있는 릭의 모습, 그리고

이제는 호텔로 쓰이지 않고 있는 유서 깊은 칼룬 비치 호텔의 웅장한 전경 등.

릭은 가판대에서 뜨거운 초콜릿을 사 와 컵 하나를 그녀에게 건네준 뒤 다시 눈으로 돌아갔

다. 잠시 후 그들은 눈더미에 나란히 앉아 컵 위로 모락모락 피어 오르는 김 사이로 펼쳐지

는 광경을 바라다보고 있었다.

어린 꼬마들이 기대에 부푼 표정으로 자기들이 낚아 올린 꼬마꼬치의 길이를 재고 있는 심판

의 손끝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앨리슨은 낚시 대회 대신에 언제부턴가 자신에게 머물

러 있는 릭의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내가 이제까지 만난 사람들 중에 당신이 가장 재미있는 여자라는 걸 알고 있소?"

순간, 그녀는 황망하게 시선을 내리깔며 얼른 들고 있던 컵을 입으로 가져 갔다.

"굳이 숨길 거 없어요. 그건 부끄러운 게 아니니까. 당신은 뭐든지 즐겁게 즐기는 사람이오.

커다란 머플러로 칭칭 감싸고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며 열심히 셔터를 누르고 있는 모습을 보

면……."

"아주 즐거웠어요."

앨리슨은 진심으로 대답했다. 그리고 그를 정면으로 마주보며 덧붙였다.

"정말 멋진 하루였구요."

"나 역시."

다음 순간, 그녀는 릭이 키스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벌써 그녀의 가슴은 심하게 방망

이질해 대고 있었다. 갑자기 그녀는 자신의 이성을 신뢰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녀는 상심한

표정을 애써 감추며 부연했다.

"그런데 엉덩이가 너무 시려서 아무런 감각이 없네요."

그러자 릭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더니 은근하게 비꼬는 것이었다.

"가슴은 어떻소? 그쪽엔 별일 없어요?"

"그건 당신이 알 바 아녜요. 음흉한 늑대 같으니."

그러나 그는 입술을 쓱 핥고 나서는 그녀를 아래위로 훑어본 뒤 싱긋 미소를 지었다.

"전혀 그렇지 않을걸."

앨리슨은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난 뒤 그를 재촉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릭이 장갑 긴 손

으로 그녀의 관자놀이를 감싸 안았다. 그 순간 그녀의 가슴이 다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

러나 그는 눈을 찌를 듯 아래로 흘러 내린 그녀의 모자를 제자리에 올려 씌워주는 것이었다.

"아주 멋진 모자요, 스콧 양."

그리고 그녀의 코끝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이윽고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감싸 안은 자세로

그는 주차장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집 앞에 도착한 앨리슨이 평소보다 느린 속도로 차 문을 열려는 순간, 그의 손이 다시 그녀

를 제지했다.

"잠깐."

그리고 그는 차의 후미를 후다닥 돌아와서 그녀에게 문을 열어주었다. 앨리슨은 이런 선머슴

같은 차림새에도 깍듯이 숙녀처럼 대해 주는 그의 예의 바름에 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

릭은 거의 슬로우 모션처럼 그녀의 뒤를 따라 느릿느릿 계단을 올라왔다. 앨리슨이 문에 열

쇠를 꽃으려는 순간, 그는 익숙한 동작으로 열쇠를 빼앗아 문을 열어준 다음, 그녀에게 다시

열쇠를 건넸다. 그리고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다가 다시 한 번 모자를 위로 올려주었다.

"나도 들어가고 싶소."

앨리슨은 '안 된다'라고 말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이건 너무 무모한 짓이에요. 서로의 감정이 너무 빠른속도로 고조되고 있어, 도대체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차분히 생각해 봐야 한다구요.'

하지만 앨리슨이 채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의 입술이 천천히 내려왔다. 짜릿한 전율이 그녀

의 전신을 훑고 지나는 순간이었다. 키스가 이어지면서 릭은 그녀의 몸뚱어리를 자신의 넉넉

한 돕바로 감쌌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그의 등을 껴안으면서 그의 탐색하는 듯한 혀를 받아들이려고 입술을

벌렸다. 뜨겁고도, 촉촉하고, 마치 얼르는 듯한 감미로운 키스가 제이슨이라는 망령을 쫓아

내고 있었다. 그녀의 등뒤를 배회하던 그의 손이 차츰 아래로 내려가면서 그녀의 엉덩이를

잡아 바싹 밀어붙였다.

이제 그는 앨리슨의 보드라운 목덜미에 깊이 얼굴을 파묻었다.

"앨리슨!"

격정에 못 이겨 떨리는 목소리였다.

"날 들어가게 해줘. 당신을 따뜻하게 해주고 싶어."

'이미 날 그렇게 해주었잖아요.'

따뜻한 손바닥의 촉감을 느끼며 앨리슨은 속으로 이렇게 대답했다. 그는 자신의 돕바 자락을

펼치고 그녀의 몸을 팽팽히 긴장한 자신의 하체에 더욱 밀착시키며 파도치듯 움직이기 시작

했다. 그의 혀가 리드미컬한 하체의 율동에 맞춰 춤을 추듯이 그녀의 입 안으로 더욱 깊숙이

파고 들어왔다. 이제 그는 더욱 거친 목소리로 애원했다.

"제발 날 들어가게 해줘, 앨리슨."

그가 정작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앨리슨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의 요구를

받아들인다는 건 단지 그를 집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데서 그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

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의 가슴을 밀치며 거의 애원조로 말했다.

"릭, 제발, 이건 너무 빠르고 돌발적이에요."

"도대체 뭐가 두려운 거지?"

앨리슨은 릭의 손을 꼭 붙잡고 그의 두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나 자신이요."

다시 한 번 그가 경련하듯 길게 심호흡을 했다.

"그렇다면 한 남자를 굶겨서 쫓아 보낼 작정인가?"

"당신이 원한 게 저녁 식사였나요?"

물론 그게 아니란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녀 자신이 원하는 것과 결코 다르지 않다는 걸.

"작전을 바꿨지. 여기에 더 머무를 방도가 그것밖에 없다면."

'그건 일시적인 유예일 뿐이에요.'

그러나 앨리슨 역시 그를 그대로 보내긴 싫었다. 그리고 저녁식사는 서로가 함께 있을 그럴

듯한 구실이 되리라.

"냉동 피자밖에 없는데, 그것도 괜찮아요?"

"시장이 반찬이니까. 그거라도 주겠다면 고맙게 먹겠소."

그들은 집 안으로 들어갔다. 현관문이 찰칵 닫히는 순간, 두 사람 사이에는 여전히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그녀는 얼른 두 사람의 점퍼를 걸고 그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몸을 돌렸다. 제발 들뜬 감정

이 가라앉기를 바라면서. 그러나 한편으론 누군가의 시선에 쫓기고 있는 듯한 기분도 그리

나쁘진 않았다. 사실 제이슨 애덜리가 그녀에게 접근할 수 있었던 시발도 그게 아니었던가.

부엌 쪽으로 황급히 가려던 앨리슨이 릭에 의해 갑자기 돌려세워졌다.

"뭐가 그리 급해요?"

릭은 그녀를 자기 쪽으로 돌려 세우면서 허리를 붙잡고 끌어당겼다.

"핫셀블러드의 사용료를 받아야겠나 보죠?"

앨리슨은 팽팽한 긴장을 깨뜨리기 위해 되도록이면 명랑한 어조로 응수했다.

"전혀. 쓰고 싶은 대로 써요. 무조건으로."

"세상에, 어떻게 그 카메라를 아무렇게나 방치할 수가 있어요. 아무 여자한테나 주고."

"그걸 보기만 해도 까무라칠 지경인 여자에게?"

릭이 그녀의 말을 장난스럽게 마무리했다.

"내가 그 여자를 까무라치게 만들지 못할 바에야 차선책이라도 있어야 되지 않겠소?"

릭의 손이 그녀의 가슴께로 슬며시 올라오더니 시험이라도 하듯 손등으로 천천히 쓸어 내리

기 시작했다.

"릭, 그만, 지금 당신은 피자를 먹으러 왔잖아요."

"내가 그랬던가?"

갑자기 릭은 웃음기가 가신 표정으로 그녀의 고개를 거칠게 뒤로 젖혔다. 그리고 그녀의 입

술 위에 거세게 입술을 포갰다. 순간적으로 그녀는 쓰러질 듯 그에 품에 안기며 칼라를 덮고

있는 그의 머리칼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 넣었다. 그의 목에서 깊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

의 갈망하는 듯한 시선에 온몸을 맡기고 있는 동안 앨리슨의 꼭 감은 두 눈 사이로 날카로운

섬광이 번쩍였다.

문득 릭이 그녀로부터 입을 뗐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의 목에 얼굴을 묻고서 한참 동안 서로

의 체취에 흠뻑 취해 있었다.

"앨리슨, 오늘 오후가 나에겐 일 년보다 더 길게 느껴졌소."

릭이 나직한 소리로 속삭였다.

"맹세하건대 나도 나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겠어."

앨리슨은 한껏 달아오른 몸을 그에게 기대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너무 배가 고파서 그런 거라구요. 얼른 피자를 가져 올게요."

릭은 마지못해 그녀를 풀어 주었다. 그리고 부엌으로 걸어가는 그녀의 나긋나긋한 뒷모습에

서 잠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그녀가 부엌으로 모습을 감추자 그는 겨우 고개를 돌리고 마음

을 진정하려 애썼다. 그리고 결심한 듯 스테레오 쪽으로 걸어가 라디오를 켰다. 막연히 거실

을 오락가락하다가 결국은 오븐에 피자를 넣고있는 그녀의 뒷모습으로 시선이 끌렸다. 그녀

의 청바지 엉덩이엔 조각 천으로 덧댄 주머니가 양쪽에 달려 있었다. 그는 한참 동안그녀를

바라보다가 다시 두 눈을 꼭 감고 떨리듯 긴 한숨을 내뱉었다.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앨리슨이 부엌에서 그를 바라다보고 있었다. 붉게 달아오른 볼에

아랫입술을 꼭 깨물고 약간 당황한 표정이었다.

"숨길 필요가 있을까?"

릭이 불쑥 내뱉었다.

"왜 그렇지 않은 것처럼 꾸며야 하지? 난 오늘 오후 내내 아침에 느꼈던 당신 가슴의 감촉만

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정도론 충분하다고도 할 수 없었지만."

앨리슨은 오븐으로 뒷걸음치다가 자신의 몸을 지탱이라도 하듯 오븐 손잡이를 꽉 움켜 쥐었

다. 불안스런 표정을 뒷받침하는 듯 그녀의 가슴 역시 심하게 오르내리고 있었다.

"릭, 나는 처음이 아니에요."

그녀는 부끄러운 듯 고백했다. 그러나 더 이상 그의 시선은 피하지 않았다.

"나도 그래. 그래서 어쨌단 말이오?"

"난 여자예요. 우리는 사춘기 때부터 이런 상황을 조절하는 건 우리 자신의 의지에 달려 있

다고 배워 온 사람들이죠. 하지만 난 자제력을 잃어 가고 있어요. 그래도 당신이 날 헤픈 여

자로 보는 건 원치 않는단 말예요."

앨리슨은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에게 자신의 생각을 모조리 들켜 버

리는 게 두려웠다.

앨리슨은 릭과 정열적인 사랑을 나누고 싶었다. 이 건강하고 박력 있고 자신감 넘치는 스물

다섯 살의 남자에게 자신을 맡겨버리고 싶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부엌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서 망설이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 생각해도 안타깝고 한심한 모습이었다.

"릭, 당신 말이 맞아요. 난 두려워요."

"무엇이?"

그가 집요하게 되물으며 그녀의 뒤로 다가와 섰다.

"내가?"

그는 앨리슨의 머리칼을 가볍게 쓸어 내렸다.

"앨리슨, 날 좀 봐요, 제발. 감추려 하지 말고, 두려운 건 아무것도 없소."

앨리슨은 목덜미를 어루만지는 그의 손에 몸을 맡기고 떨리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난 이런 시대에 여자로 사는 게 싫어요. 이런 자유 분방한 시대에……."

신경질적으로 내뱉는 그녀의 목소리에선 극도의 불안감이 스며 나오고 있었다.

"난……. 함부로 아무하고나 동침하는 스타일이 아녜요."

그 말이 끝나기가 바쁘게 릭은 그녀의 턱을 들어 올리고 두 눈을 깊이 응시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다음 순간, 앨리슨은 그의 품에 달려들어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오오, 릭,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순결한 결혼식을 올리고, 첫날밤에 서로를 배우고 그

후로 칠십오 년을 내내 행복하게 살았다던 그 시절은 대체 어디로 간 거죠?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난 그게 두려워요. 이제 그런 일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게!"

"앨리슨, 당신의 과거에 누군가가 있었다 해도 나는 상관하지 않소. 그렇다고 당신에 대한

나의 감정이 달라질 순 없으니까. 당신이 이제까지 살아 왔던 모습을 부정한다면 바로 지금

의 당신도 존재할 수 없는 거라구. 무슨 얘긴지 알아듣겠소?"

"당신 곁에 있으면 아무 생각도 나질 않아요. 냉정해지려고 노력해 보지만 모든 게 엉망이

되어 버려요. 내가 사물을 제대로 직시할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은 바로 카메라와 있을 때죠.

사물이 복잡하지 않고 명확하게 보이기 시작해요. 만약 내가 사진 찍는 것처럼 내 삶에 초점

을 맞출 수 있다면 내 삶도 잘 조절할 수 있을 텐데 말예요."

"결국 나에 대한 방어벽을 헐어 버린다면 당신의 삶이 통제 불능 상태로 빠질 거란 얘긴가?"

"그래요!"

앨리슨은 고통스런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모르겠어요? 그렇게 되면 난 당신에게 온전히 의존할 수 밖에 없게 돼요. 내가 두려워하는

건 바로 그거예요."

"난 당신의 삶을 조종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 앨리슨, 다만 내가 원하는 건 당신과 사랑을

나누는 거요."

다시 그가 앨리슨을 끌어당기며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렸다.

앨리슨은 릭의 말을 믿고 싶으면서도 한편으론 두려움을 떨쳐버리지 못한 채 안타깝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게 그 얘기 아닌가요?"

"정상적인 사람에겐 그렇지 않지."

그리고 릭은 앨리슨의 양쪽 눈꺼풀에 차례로 입을 맞추었다.

"안 돼요."

앨리슨이 크게 심호흡을 하며 간신히 말했다. 그리고 더 이상아무 말도 못하고 있자 릭은 그

녀를 팔로 감싸 안으며 목덜미에 키스했다. 그녀는 여전히 눈을 꼭 감고서 괴로운 듯이 고개

를 옆으로 젖혔다.

"안 돼요."

다시 앨리슨이 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하지만 그의 입술은 막무가내로 그녀의 입술을 찾았다. 그는 한 팔로 앨리슨을 꼭 끌어안은

채 나머지 손으로 오븐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녀를 풀어 주지 않은 채 몇 걸음을 떼다가 아

래쪽으로 몸을 굽혔다.

"안 돼요."

그는 여전히 팔을 풀지 않고 반쯤 비스듬히 몸을 굽힌 상태에서 피자를 꺼내 식탁 위에 올려

놓았다.

문이 열린 오븐 안에서 끼쳐 오는 후끈한 열기는 그녀의 전신을 휘감는 열기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모기만한 목소리로 이 말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안 돼요."

그러나 그는 아예 앨리슨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녀의 몸에 감은 팔을 풀으려 하지도

않았다. 그는 오븐의 문을 닫고는 그녀를 부엌으로부터 천천히 끌고 나왔다. 그 동안에도

그녀로부터 입술을 떼지 않은 채. 식당 불을 끄려고 잠시 멈춰 선 순간에도 그는 입술을 떼

지 않았다. 앨리슨은 그의 입술에 묻혀 버릴 말들을 계속 중얼거렸다.

"안 돼요."

하지만 릭은 더욱 노골적인 키스를 퍼부으며 허벅지를 더욱 강하게 밀착시켰다. 그리고 천천

히 거실 쪽으로 움직였다. 이윽고 그는 엉거주춤하게 자신의 허리춤을 붙잡고 있는 앨리슨의

팔을 잡아 자신의 어깨 위에 걸치게 했다. 그리고 사정없이 그녀를 밀어붙였다. 그가 한 걸

음씩 앞으로 내딛을 때마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뒷걸음쳤다.

스테레오 앞에 이르자 그가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두 눈을 스르르 감고는 그녀의 입 안으로

깊숙이 혀를 밀어 넣으며 달콤한 노래가 나을 때까지 주파수 다이얼을 돌렸다. 이제 앨리슨

은 차츰 저항을 풀고 그의 목에 두른 팔에 힘을 주었다.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는 노래는 들

어 본 적이 없던 곡이었지만, 구절구절이 그녀의 혀에서 녹아내렸다.

<낭비하지 말아요. 그토록 오랜 시간을…….>

릭은 그녀의 입술을 계속 탐닉하면서 고문하듯 느릿느릿 그녀의 엉덩이로 손을 가져 갔다.

어둠 속에서 그는 더 이상 밀착될 수 없을 만큼 가까이 그녀를 끌어당겼다. 세게 압박해 오

는 그의 허벅지에 밀려 그녀는 비틀거리며 몇 발짝 물러서다가 단단한 벽에 부딪혔다. 그의

단단한 어깨와 벽 사이에 끼여서 그녀는 원을 그리듯 관능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는 그의 하

체의 율동에 서서히 반응하기 시작했다. 그는 그녀의 허리춤으로부터 블라우스를 끄집어  올

리는 동안에도 키스를 멈추지 않았다. 앨리슨 역시 그의 목에 두른 팔을 풀지 않고, 그의 머

리 뒤로 양손을 올린 상태에서 소매 단추를 끄르기 시작했다. 그녀의 움직임을 눈치챘던지

릭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날 위해 나머지 단추도 풀어 줘."

릭이 앨리슨의 입술 위로 격한 숨결을 토해내며 속삭였다. 그러자 지체하지 않고 그녀의 떨

리는 손이 윗단추로 향했다. 그는 어둠 속에서 그런 그녀의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첫째

단추가 열리자 그의 입술이 브래지어 위의 따뜻한 속살로 향했다. 그녀는 자신의 살갗에 닿

는 혀의 촉촉한 감촉에 전율하며 잠시 머뭇거렸다. 그는 이제 양손으로 벽을 짚은 채 고개를

더욱 수그렸다. 말없는 그의 지시에 다음 단추가 열렸다. 그의 입술은 브래지어 한복판의

꽃 무늬 자수로 옮겨 갔다. 그는 신중하게 그녀의 가슴 꼭대기에 욕망의 불을 지피며 얇은

레이스 밑에 숨어 있는 속살을 따스하게 덥혀 주고 있었다. 마침내 그녀의 블라우스가 완전

히 열리자 그는 격한 어조로 속삭였다.

"이제 내 것도."

앨리슨은 어둠 속에서 손을 뻗어 그의 셔츠 단추를 찾았다. 그녀의 손끝이 허리춤에 이르자

그가 거칠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녀는 양손으로 그의 복부 아래쪽을 수색하듯 어루만지기 시

작했다. 릭은 단단했고 날렵했으며 군살이라곤 없는 몸이었다. 그의 갈비뼈 사이를 배회하던

그녀의 손이 셔츠 자락을 뽑았다.

"앨리슨."

음침하면서도 다급한 목소리였다.

"내가 얼마나 원했는지 알아."

"나두요. 하지만 난 두려웠어요."

"그런데 당신 늘 이렇게 느려?"

그의 격한 숨결이 또다시 볼에 와 닿자 앨리슨은 슬며시 미소지었다.

"음, 난 느린 게 좋거든요."

"나도 그래. 하지만 지금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뒷말은 그녀의 입술에 묻혀 버렸다. 그는 거칠게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개며 나머

지 단추를 서둘러 끄르기 시작했다.

따뜻한 손이 그녀의 목 언저리를 애무하다가 걸치고 있던 블라우스를 벗겨 내렸다. 그리고

그 손가락이 가슴 언저리를 탐색하다가 브래지어를 끌어 내렸다. 그녀는 숨조차 내쉬지 못하

고 그의 다음 손길을 기다렸다.

그러나 릭 역시 주저하고 있는 듯했다.

마침내 유혹의 손길을 먼저 뻗은 건 앨리슨이었다. 그녀는 스튜디오에서 보았던 그의 당당한

자태를 떠올렸다. 단단한 근육과 가슴을 덮고 있는 샴페인 빛 털, 그리고 놀랍게도 그녀의

손길 아래서 미세하게 경련을 일으키고 있는 그의 단단한 맨 살.

"리처드."

다음 순간, 릭은 두 사람의 가슴이 세게 부딪칠 정도로 와락 그녀를 끌어당겼다. 그리고 이

번에는 그가 뒷걸음치면서 그녀를 벽으로부터 끌어당겼다. 그의 입술과 혀가 불러 일으키는

마술에 그녀는 순식간에 양다리의 힘이 빠져 나가는 듯했다.

계속 뒷걸음치던 그가 스테레오 앞에 멈춰 서더니 희미한 불빛에 비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 역시 셔츠를 벗어 턴테이블 위에 올려놓는 그의 동작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그가

다시 손을 뻗어 파르르 떨고 있는 그녀의 눈꺼풀을 시작으로 양볼과 입술을 어루만지다가 마

침내 그녀의 젖가슴을 움켜 쥐었다. 그녀는 나른하게 두 눈을 뜨면서 그의 길다란 손가락이

부드럽게 자신을 애무하고, 탐색하고, 얼로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는

끈적끈적한 목소리가 허공을 맴돌고 있었다.

<여름날의 하루를 흘려 보내는 것보다 더…….>

마치 숭배하는 여신을 만지기라도 하듯 그의 손길은 조심스럽고 치밀했다.

"앨리슨, 당신은 아름다워."

그의 이 한마디는 그녀의 온몸을 감동의 물결로 출렁이게 했다.

라디오의 음악이 바뀌었다. 신기하게도 조금 전의 은근한 신뢰의 순간을 보증이라도 하듯 느

린 손길의 남자를 원한다는 '슬로우 핸드'가 흘러 나왔다.

그랬다. 그의 손길은 느렸고 감각적이었다. 그는 앨리슨의 정열을 최고조로 끌어올리고 마치

출렁이는 물결 속에서 흐느적거리듯 그녀의 숨결을 극한까지 몰고 갔다.

릭은 똑바로 선 자세로 익히 알려진 그 노래의 리듬에 맞추는 듯한 스텝으로 앨리슨을 소파

쪽으로 이끌었다. 그는 버드나무 소파의 탄탄한 쿠션 위로 그녀를 조심스레 눕힌 뒤 자신은

마룻바닥에 꿇어 앉았다.

그리고 그는 단단한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부여 잡고 입에서 코로, 코에서 눈으로 탐색적인

입맞춤을 해나갔다. 이어 그는 오른손을 그녀의 머리카락 속에 파묻고 왼손으로 그녀의 벗은

복부 한복판을 따라 내려가다가 청바지 안쪽의 민감한 부분을 조심스레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뜻하지 않은 자극에 한 쪽 무릎을 들어 올리고 온몸을 뒤틀었다.

그는 입술을 그녀의 가슴으로 가져 가면서도 여전히 숨겨져 있는 둔덕을 자극하는 것을 멈추

지 않았다. 그녀는 목구멍으로부터 달콤한 신음을 토해내며 참기 어려운 쾌락에 몸을 휘었다

. 그는 심하게 오르내리는 그녀의 가슴과 복부를 느끼려는 듯 그녀의 허리 벨트 윗부분에 얼

굴을 묻었다.

이윽고 그가 고개를 드는 것과 동시에 그녀의 바지 고리가 벗겨졌다. 그녀는 꼿꼿하게 긴장

한 채 숨조차 내쉬지 못하고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기다리고만 있었다. 그의 거친 숨소리에

지퍼 내려지는 소리가 묻혀 버렸다.

그의 손바닥이 복부 위로 슬며시 미끌어져 오르는 순간, 앨리슨은 참았던 호흡을 한꺼번에

토해냈다. 그의 손이 아래로, 아래로 움직이면서 실크 팬티 속으로 살짝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 탐험의 손길은 보드라운 숲을 지나 따뜻하고 촉촉한 어느 지점에 도달했다. 그녀는 그의

리드미컬한 터치에 답하기라도 하듯 쿠션 위에서 활처럼 몸을 휘었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한 쪽 팔을 내리고 그의 단단하고 뜨거운 몸을 찾았다. 그 역시 격한 신음을 내뱉으며 그녀

에게 더욱 몸을 기대 왔다.

이어 손놀림만으로 서로를 열락의 세계로 몰고 가는 순간이 이어졌다. 입술이 가세할 필요도

없었다 그들은 뺨과 뺨을 맞대고 감각의 칼날이 최고조로 곤두설 때까지 육체가 연주하는

전주곡에 흠뻑 빠져들고 있었다. 그는 조급하지도 않고 그녀의 욕구 하나하나에 민감하다는

점에서 제이슨과는 너무 달랐다.

이윽고 그가 그녀의 엉덩이를 살짝들어 올린 뒤 바지와 팬티를 한꺼번에 벗겨 내렸다. 그리

고 그녀는 그의 손길에 여전히 젖어 있는 동안 바지 지퍼가 내려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앨리슨의 배를 입술로 애무하며 그녀의 손목을 붙잡아 자신의 매끈하고 단단한 몸을 만

지게 했다. 그들은 서로의 움직임 속에 전율하면서 더 이상주체하지 못하고 몸을 뒤틀 때까

지 서로의 몸을 탐닉해 나갔다.

"앨리슨, 그만."

마침내 그가 그녀를 제지하고 경련적으로 호흡을 내뿜었다.

"난 당신보다 더 빨라. 하지만 서두를 것 없어. 날이 새려면 아직 멀었으니까."

어느 정도 호흡을 고른 그가 다시 그녀의 젖가슴에 입을 갖다댔다. 앨리슨은 온몸 구석구석

까지 파고드는 격류를 주체하지 못한 채 고개를 완전히 뒤로 젖히고는 간신히 한마디를 내뱉

었다.

"제발."

가장 나약한 상태로 자신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이 열락의 세계로 향하는 길임을 알고 있

는 그녀였다. 그녀는 흐느낌과 웃음이 뒤섞인 신음을 내뱉으며 몸을 떨었다. 그러다가 그녀

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할 것 같아 젖가슴에 머물러 있던 그의 입술을 무의식적으로 밀쳐 냈다

.

그녀가 어느 정도 평정을 되찾은 듯하자 릭은 축 늘어진 그녀의 다리를 쓰다듬으며 복부에

입을 맞췄다.

"당신을 밀어 낼 생각이 아니었는데……. 미안해요."

키스가 그녀의 사과를 삼켜 버렸다.

"뭐가 미안하다는 거지?"

그가 그녀의 입술에 대고 달콤하게 속삭였다.

"앨리슨, 그건 아름다운 모습이오. 난 당신이 그처럼 나에게 모든 걸 열어 주리라고는 생각

도 못했으니까."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뇌리에서 웅웅거렸다.

"그건 아름답다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해. 차라리 중독과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이기적인 게 아닐까요?"

그녀는 욕망에 눈이 멀어 너무도 적나라하게 자신을 드러냈다는 수치심에 이렇게 우겨 댔다.

"아니, 그렇지가 않아."

"하지만 난 당신을 완전히 잊어 버리고 있었는걸요."

앨리슨은 그의 뺨을 어루만지는 손끝으로 그의 미소를 읽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다음이 내 차례일걸, 달링."

그러자 그녀는 옆으로 몸을 누이고 그의 복부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의 반응을 감

지한 그녀는 쿠션 가장자리에 앉은 자세로 그를 끌어당겼다. 그의 손이 그녀의 엉덩이를 지

나 허벅지 안쪽을 스치는가 싶더니 무릎 뒤로 향했다. 그는 그녀의 몸 구석구석을 쓰다듬으

며 사정없이 입을 맞췄다. 몇 분 전에 느꼈던 만족감에도 불구하고 그의 거침없는 키스와 애

무의 손끝에서 새로운 욕망이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그가 목적지에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는 순간 그녀는 온몸이 꼿꼿해지며 호흡이 정

지되어 버리는 듯했다. 앨리슨은 순간적으로 그를 제지하기 위해 팔을 뻗쳤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경계를 완전히 풀어놓고 있었다.

"릭, 난……."

그의 손이 입을 막아 버린 순간, 새로운 감각의 파도가 몰려왔다. 이윽고 릭이 길고 달콤한

신음을 토해내며 그녀의 몸 안에 자신을 밀어 넣었다.

릭은 그녀의 이름을 연속해서 중얼거렸다. 두 육체의 격렬한 율동에 맞춰 그녀의 이름이 파

편처럼 흩어지곤 했다. 앨리슨은 오일을 발라 주기 위해 처음으로 만져 보았던 그의 근육과

완벽한 얼굴을 떠올리며 그의 리듬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마침내 더 이상 넘지 못할 고지에 도달했다고 느껴지는 순간, 그녀의 손톱이 그의 어깨에 사

정없이 파고들었다. 그러나 그는 그녀의 손목을 움켜 쥐고 더욱 거세게 그녀를 밀어붙였다.

그의 움직임이 점점 빨라지면서 그녀는 손목이 끊어져 나갈 듯한 통증을 느꼈다. 그리고 그

가 심하게 전율하는 걸 느꼈다 싶은 순간 그녀의 손목을 쥐고 있던 힘이 풀렸다. 그는 그녀

를 짓누르고 있던 힘을 줄이려는 듯 그녀의 머리를 끌어안고 함께 마룻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들은 털이 굼실거리는 푹신한 러그 위에 누워 한바탕격정의 파도가 횝쓸고 간 뒤의 나른한

무력감에 빠져 있었다.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는 노래 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둘 다 라디오가 켜져 있다는 사실을 잊

고 있었다. 짤막한 음료 광고가 나간 뒤 스피커에서는 기타 반주에 실은 남자 가수의 소울풍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다시 한 번 당신의 살갗을 느끼며 우리는 사랑을 나눴지, 마루에 몸을 뻗고 누우면 피곤했

지만, 그래도 우리는 행복했었지.>그 구절은 앨리슨이 묻어 버렸다고 생각한 아픈 과거를 순

식간에 되살려 놓았다.

'하지만 이 사람은 릭이야, 제이슨이 아니라구!'

앨리슨은 거칠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곁에 누워 있는 릭에게 시선을 돌리는 순간, 방금

자신들이 함께 저지른 일이 새삼스레 엄청난 부피로 다가왔다.

구속. 그랬다. 그녀는 가장 은밀한 행위를 함께 나눔으로써 또다시 한 남자에게 구속되어 버

리고 만 것이다.

아주 명료한 사실을 지적하듯 노래는 그녀가 한때 저질렀던 어리석은 행동, 다시 말해 이런

식으로 한 남자에게 자신을 내맡겨버렸던 기억을 떠오르게 했다.

릭은 한가롭게 그녀의 어깨 안쪽을 쓰다듬고 있었다. 앨리슨은 그의 손을 뿌리치고 느릿느릿

몸을 일으키고는 흩어져 있던 옷가지들을 주섬주섬 챙기기 시작했다.

"앨리슨?"

릭이 몸을 일으키는 것을 감지했지만,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여전히 노래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다음 순간 그녀는 라디오로 향하는 그의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거칠게 버튼을 눌러

끄는 소리. 다시 방안은 정적에 휩싸였다.

릭은 다시 소파로 다가오더니 그녀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하지만 앨리슨은 옆으로 몸을 빼

면서 여전히 그의 눈길을 피하려했다.

"앨리슨, 왜 그래?"

"아무것도 아녜요."

"거짓말하지 마."

릭이 다시 손을 뻗치자 앨리슨은 그의 손길을 피해 소파 안쪽으로 더욱 몸을 피했다. 그가

테이블 램프를 켰다 그 순간 앨리슨은 더욱 몸을 움츠렸다.

"안 돼요. 불을 꺼요, 제발."

테이블 램프의 빛 아래서 릭은 흐트러진 모습으로 웅크리고 앉아 있는 앨리슨의 모습을 지켜

보았다.

"뭔가 얘기하고 싶은 게 없소?"

"아니, 그냥 이대로 내버려 둬요."

그녀는 청바지를 들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녀는 벗은 가슴을 가리겠다는 듯 바지를

어깨 위로 걸치는 것이었다.

릭은 앨리슨의 앞으로 더욱 바짝 다가섰다.

"아냐, 이건 굉장히 중대한 문제야."

"날 쳐다보지 말라니깐요."

앨리슨은 당황한 듯 잠시 두리번거리다가 턴테이블 위로 손을 뻗어 그의 셔츠를 끌어내린 뒤

얼른 어깨와 팔을 감쌌다.

릭은 천천히 바지를 입고 그녀 앞에 주저앉아 적당한 말을 찾기 위해 고심했다. 하지만 앨리

슨은 여전히 웅크린 채 경계를 풀지 않았다. 그는 한 쪽 무릎 위에 팔을 괴고 자신의 콧날만

주무르며 막연히 기다리고 있었다.

'도대체 뭣 때문이란 말인가.'

그로선 도무지 알 길이 없었던 것이다.

"앨리슨, 얘기해 봐요. 그 사람에 대해."

순간 앨리슨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건 당신이 상관할 일이 아니라고 했잖아요. 그 문제랑은 상관없어요. 그냥, 날 혼자 내버

려 둬요, 제이……."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순간, 그녀는 얼른 입을 다물어 버렸다.

"이름이 제이슨이었소?"

"심문하지 말라고 했죠, 제길. 난

"심문하지 말라고!"

그가 벌컥 소리를 지르며 몸을 일으키더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심문하지 말라고?"

릭은 분을 삭이듯 쿠션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지금 당신 자신이 그의 이름을 반쯤 말하려 했으면서 나한테 심문하지 말라는 거요?"

그는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대체 날 뭘로 생각하는 거지? 바보 멍청이? 난 당신이 좋아하는 '파이브 센서스'의 노래가

나오는 것도 들었고, 당신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도 똑똑히 느낄 수 있었어. 순식간에 넋이

나가 버린 사람처럼 행동하더군 당신은, 내가 도대체 어떻게 하길 바라는 거지?"

"릭, 제발, 나……. 난 아니, 우린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했어요."

앨리슨은 차마 그의 시선을 감당하지 못하고 눈을 돌려 버렸다.

"가세요."

그는 벨트 고리에 손가락 한 개를 걸치고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내 셔츠를 줘."

앨리슨은 그가 셔츠를 채 가는 순간 다시 그 앞에서 적나라한 모습을 드러낼 일을 걱정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릭은 셔츠를 매정하게 채어 가는 대신 성난 걸음으로 성큼성큼 그

녀의 침실로 들어갔다. 문소리를 들었다고 느낀 순간 그가 푸른색 실내복을 들고 다시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

"내 셔츠를 가져 가야겠어."

릭은 퉁명스럽게 내뱉고는 손을 뻗었다. 두 눈을 꼭 감아 버린 앨리슨은 갑자기 서늘하게 엄

습해 오는 한기를 느꼈다.

그는 가슴을 꼭 감싸 쥐고 있는 그녀의 벗은 어깨를 힐끗 내려다보았다.

"당신에게 이걸 던져준 뒤 지옥에나 가라고 하고 싶군."

앨리슨은 눈을 뜨고 그의 시선을 만났다. 그는 너무도 솔직했다.

'그런데 왜 나는 저처럼 내 감정에 솔직하지 못하는 걸까?'

그는 실내복을 그녀의 무릎 위로 내던진 뒤 자기 셔츠를 대충 껴입고는 생각에 잠긴 듯한 표

정으로 잠시 그녀를 더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고는 손가락으로 머리를

대충 쓸어 넘겼다. 그리고 소파 팔걸이에 살짝 걸터앉아 마룻바닥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

다.

"이런 식으로 헤어질 순 없어. 당신도 알겠지만, 우린 얘길 해야 된다구."

"지금은 안 돼요. 알았어요?"

앨리슨은 심하기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했다.

그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무겁게 몸을 일으켰다.

"내가 연락하지."

그러나 릭은 선뜻 문을 열지 못했다. 그의 시선이 흐트러진 자세로 금방이라도 터져 나오려

는 울음을 삼키고 있는 앨리슨에게 머물렀다.

"당신, 괜찮겠소?"

앨리슨은 세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가 돌아섰다. 그녀는 그가 문 앞에서 부츠를 찾아

신고 돕바를 걸치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문을 열기 전에 한참 동안 자신을

응시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그의 등뒤로 조용히 문이 닫혔다.

찰칵하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앨리슨은 소파 위로 무너질 듯 쓰러지면서 자신의 팔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외로움과 고통스러움을 주체할 수 없어 섧디섧게 울었다. 제이슨 때문에, 릭

때문에, 그리고 자기 자신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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