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빌스펜서] 네 곁에 가까이-7화 (7/11)

7

다음날, 정확히 여섯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매번 수화기를 들 때마다 릭의 목소리려니 하

던 기대감은 번번히 실망으로 이어졌다. 주말에도 그는 전화하지 않았다. 그 다음주가 시작

된 뒤에도 앨리슨은 전화선을 통해 들려 오는 그의 목소리를 무척이나 기다렸지만, 그는 역

시 전화하지 않았다.

슬라이드가 완성되어 그에게 연락을 취해 보려 했으나 그로부턴 여전히 감감 무소식이었다.

어느 날 오후, 슬라이드를 보러 들른 비비엔은 특유의 말투로."지인짜 끝내준다"를 연발했다

. 그리고 그녀는 릭 랭의 전화 번호를 물었다.

릭의 전화 번호를 비비엔에게 가르쳐 주면서 앨리슨은 과연 비비엔이 전화를 거는 남자들에

게 무조건 데이트를 신청하는지 궁금해졌다.

'아마도 그러겠지.'

그러나 비비엔이 릭에게 퍼부었던 대담 무방한 키스와 자신이 그와 나눴던 키스를 굳이 비교

해 보자면, 앨리슨으로서는 무작정 비비엔을 매도할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금요일 밤과 토요일은 지루하기 짝이 없이 지나갔다.

그 동안에도 릭으로부던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일요일 아침, 앨리슨은 일찌감치 일어나서

샤워기의 물줄기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전화벨이 울린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화들짝 놀란 그녀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몸 그대로 거실을 쏜살같이 내달려 수화기를 낚아챘

다.

"여보세요!"

"안녕."

깊게 울리는 단 한 음절에 그녀의 가슴이 굴착기처럼 세게 콩콩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깨웠소?"

"아뇨. 샤워하고 있던 중이에요."

"저런! 그럼 몇 분 있다 다시 걸어야겠군."

미안하다는 듯한 목소리였다.

"아뇨!"

앨리슨은 거의 고함치다시피 대답한 자신을 깨닫고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괜찮아요."

그녀의 발 아래엔 물이 흥건히 고이고 있었고, 머리칼이 눈과 입을 마구 찔러 댔다. 봉긋이

솟아오른 맨 가슴 위론 차가운 소름이 돋아 있었다. 그녀는 한쪽 눈을 가린 젖은 머리칼을

대충 쓸어올린 뒤 거짓말을 했다.

"샤워를 하고 있는 중이 아니라 이미 마친 상태예요."

"정말이오?"

"정말이라니까요. 당신이 날 봐야 하는 건데. 초롱초롱한 눈망울에 윤기 나는 머리칼을."

그녀는 벌거벗은 채 덜덜 떨고 있는 자신의 몸을 힐끗 내려다보며 터지려는 웃음을 겨우 참

았다.

"일 주일도 더 지났군."

앨리슨은 이미 통감하고 있는 사실을 그가 새삼스럽다는 듯이 언급했다.

"어머, 그랬던가요?"

앨리슨은 그대로 있다가는 이를 딱딱 부딪칠 것 같아 나머지 한 팔로 가슴 부위를 감쌌다.

"아주 재미있는 대답이군. 그랬던가요?

그는 덤덤하게 그녀의 대답을 따라했다.

"마치 그 끔찍한 날들이 며칠이나 지나갔는지 당신은 헤아려보지도 않았다는 듯 그렇게 능청

을 떨다니."

"그 동안 왜 전화하지 않았어요?"

"북쪽에는 아직도 눈이 녹지 않아서 에밀리로 마지막 겨울 촬영을 갔었소. 어떤 여자에게 내

핫셀블러드를 넘겨주기 전에 해야 할 마지막 작업일 것 같아서. 그래서 방금 돌아오는 길이

오."

"방금이라구요?"

그녀는 부엌에 걸려 있는 시계를 쳐다보았다. 아홉 시가 채 되지 않은 시각이었다.

'에밀리는 이곳으로부터 적어도 세 시간 이상의 거리인데."

"그렇소. 원래는 어제 돌아올 계획이었는데, 어머니가 어젯밤에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

어 주시겠다고 극구 우기셔서, 날 하루라도 더 잡아 두고 싶으실 때 쓰는 전형적인 방법이지

만, 그래서 어머니 뜻에 따랐던 거요."

"그래서요?"

"그래서 당신을 볼 수 있을까?"

벗은 몸을 감싸고 있는 팔 아래서 그녀의 젖은 가슴이 거세게 고통치기 시작했다.

"지금 슬라이드도 가지고 있으니까……."

"슬라이드야 어찌 됐건, 언제 가면 되겠소?"

"아직 해야 할 일이……."

"언제?"

그는 계속 채근했다.

"아니, 대답하려고 신경쓸 것 없소. 내가 십오 분 이내로 갈 테니까."

"십오 분! 아니 잠깐만요!"

그러나 전화는 이미 끊어진 뒤였다. 그녀는 쏜살같이 욕실로 내달려 얼른 타월을 꺼내 머리

에 뒤집어썼다. 대충 물기를 말렸지만 무엇부터 해야 할지 막막했다.

'머리 정돈 아니면 화장?'

어쨌든 두 가지 다 할 시간은 없었다.

'맙소사.'

릭은 당장이라도 집안으로 걸어 들어올 것만 같은데, 그녀는 영락없이 물을 푹 뒤집어쓴 세

례교인 꼴이었다. 그녀가 타월을 획 던져 놓자마자 전화벨이 다시 울렸다.

"네, 무슨 일이죠?"

그녀가 다급하게 물었다.

또다시 그였다.

"아침은 먹었소?"

"아뇨."

"그렇다면 그대로 있어요."

다시 전화가 끊겼다. 앨리슨은 수화기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씩 웃고는 얼른 욕실로 뛰

어갔다. 그리고 십이 분 뒤 현관벨이울렸다. 분명 릭일 터였다.

"맙소사. 안 되는데."

그녀는 거울 앞에 서서 발을 동동 굴렀다. 립스틱과 볼터치, 마스카라도 하지 않은 데다 머

리마저 제대로 마르지 않은 형편이었다. 한쪽 눈꺼풀에만 희미하게 연자주색 아이셰도우를

바르고 있던 중이었다. 이제 그녀는 화장을 하다 만 광대 꼴로 릭을 맞이해야 할 형편이었다

. 그녀가 힘없이 문을 열자 릭은 식료품 봉지를 한 아름 안고 서 있었다.

"안녕."

그의 얼굴에 천천히 미소가 피어 올랐다.

"안녕."

늦겨울의 차가운 아침 공기 속에서 묵묵히 바라보며 서 있는 동안 앨리슨의 가슴에 작은 파

문이 서서히 일기 시작했다.

"아침을 사도 되겠소?"

말끔하게 면도를 한 그의 산뜻한 얼굴을 차마 정면으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녀가 우물쭈

물하고 있는 동안 릭은 반쯤 화장을 하다 만 그녀의 얼굴을 삼킬 듯이 훑어보았다.

앨리슨은 안으로 들어오라는 말도 잊은 채 고개로만 끄덕였다.

그러자 릭이 종이 봉투를 그대로 안은 채 한 손을 뻗어 그녀의 목을 잡았다. 그녀의 놀란 입

술에 그의 따뜻하면서도 다급한 입술이 살짝 스쳤다. 이윽고 고개를 든 릭이 멋쩍게 웃었다.

"아이쿠. 미안해라, 당신 머리가 고드름이 되겠군."

릭은 그녀의 발에 눈길을 주었다. 그녀는 물빠진 청바지에 무지 셔츠만 대충 걸치고 미처 신

발까진 신을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문득 깨달은 앨리슨은 얼른 자신의 맨발을 가

리려고 애썼다.

그의 시선이 젖은 머리칼에서 왼쪽 눈으로, 다시 오른쪽 눈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전화를 받

으면서 생겼음이 분명한 물이 고인 거실 바닥에 시선이 미쳤다.

그가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눈썹을 슬쩍 치켜 올렸다.

"아주 맑은 눈망울에 풍성한 머릿단인데?"

"뭐 그렇다고 할 수 있죠."

앨리슨은 겸연쩍은 듯 손을 비비다가 자신이 아이셰도우용 솔마저 그대로 들고 나왔다는 사

실을 깨달았다.

청명한 아침 햇살을 받아 식물들이 밝은 원목 마루 위로 커다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릭의 시선이 다시 물이 피어 있는 바닥에 한참 머물렀다.

"내가 더 있다 전화를 했어야 했나?"

"아뇨. 더 기다려야 했다면 난 미치고 말았을 거예요."

그 순간 갈색 종이 봉투가 그의 발 아래로 슬며시 내려졌다. 릭이 앨리슨의 얼굴을 삼킬 듯

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는 그녀를 가슴 쪽으로 세게 끌어당기면서 마루 위로

번쩍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격렬한 키스를 퍼붓기 시작했다.

지난 팔 일이 두 사람 모두에게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음을 드러내 주듯 애타게 그녀를 갈구

하는 키스였다. 그녀 역시 기꺼이 그의 키스를 받아들이면서 그들은 거칠게 인사를 주고받았

다. 그의 이빨이 그녀의 아랫입술에 상처를 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문에 등을 기댄

채 그녀를 꽉 끌어안고 있던 릭이 그녀를 천천히 마룻바닥에 내려놓았다.

몸을 스치는 순간 그가 무척 흥분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녀는 이렇게 젖은 머리와 엉망

이 된 화장으로도 그를 흥분시킬 수 있다는 사실이 내심 놀라웠다. 그의 손이 등으로부터 떨

어져나가자 그녀는 얼른 몸을 빼냈다.

"아니, 잠깐만, 가지 말아요."

릭이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장갑을 벗어야겠어."

앨리슨은 머리 뒤에서 장갑이 마룻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이윽고 그가 다시 그녀를

끌어당기면서 자신의 부츠 위에 그녀의 맨발을 올려놓게 했다. 그녀의 한쪽 엉덩이로 슬며

시 미끌어져 내려간 그의 손바닥이 더욱 세게 그녀를 끌어당겼다. 앨리슨도 그의 목에 양팔

을 두르고 그의 입술을 받아들이며 그의 가슴과 하체에 자신을 밀착시켰다. 차가운 손바닥이

그녀의 셔츠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허리벨트 위로 차가운 감촉을 느끼는 순간, 그녀는

움찔했다.

"왜?"

그의 목소리는 깊고도 거칠었다.

"당신 손이 얼음처럼 차가워요."

"그래서 싫소?"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지는 허스키한 목소리로 그가 물었다. 이미 차가운 손은 그녀의 보드랍

고 따뜻한 살갗을 탐색하듯 애무하고 있는 중이었다.

앨리슨은 시선을 들어 그의 눈을 찾았다. 그녀의 입술이 슬며시 떨어지면서 그의 촉촉한 혀

를 받아들였다.

"아뇨."

참으로 대답하기 힘든 말이었다.

이제 그녀의 심장은 통제하기 어려울 정도로 거세게 뛰고 있었다. 그녀 역시 믿기지 않을 만

큼 그를 그리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그리워했던 것은 그의 입술과 손길 이상이었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깨

닫고 있었다. 릭의 손바닥이 그녀의 갈비뼈 위를 오르내리는 움직임에 맞추어 그녀의 가슴이

거세게 오르내렸다.

릭은 그녀의 코와 화장한 눈꺼풀과 화장 안 한 눈꺼풀, 관자놀이 등에 마구 키스를 퍼부어

댔다. 그녀의 왼쪽 가슴 아래 오목한 지점에 닿은 그의 손이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앨리슨이 브래지어를 하지 않은 것에 놀란 그가 고개를 들고서 빙긋이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앨리슨은 여전히 그의 목에 팔을 감은 채 말했다.

"십 분밖에 시간을 주지 않았잖아요."

그리고 그녀는 그의 윗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키스가 더욱 열정적으로 변하면서 그의 단단한

손이 그녀의 맨 가슴을 움켜 쥐었다.

그의 입안에서 그녀가 숨 넘어갈 듯이 속삭였다.

"릭, 지난 여드레 동안 당신이 나에게 무슨  을 했는지 알아요?"

"바로 당신이 나에게 한 짓과 똑같지. 내 바램대로라면……."

"그렇다고 내가 식료품 봉투를 안고 들어오는 아무 남자에게나 안기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알

아 두세요."

"그런 식으로 당신 집에 발을 들여놓은 게 몇 사람이나 됐는데?"

"한 명이요."

"흠, 아주 많다고는 할 수 없군. 일단 당신의 명예는 지켜진 걸로 하지."

하지만 릭은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며 씩 웃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당장은."

그러나 그녀의 지난날은 대부분 혼자 보낸 시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녀는 제이슨에

게 빠져들었던 것보다 더욱 빠른 속도로 릭에게 빠져들고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제이슨이라

는 인물의 됨됨이를 결코 좋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사랑한다고 스스로 다짐했던

것보다 더욱 확신을 갖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녀는 릭 랭과 사랑에 빠지는 일 이전에 그를

좋아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 격한 감정이 가라앉자 릭이 그녀를 내려다보며 웃었다.

"이봐요. 아가씨. 지금 한 쪽 눈에만 보라색 분을 바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소?"

"이건 보라색이 아니라 연자주색이에요. 그리고 분이 아니고 아이셰도우라고 부르는 거구요.

난 당신이 알아보지 못하길 바랐는데."

"그리고 그 머릿단은? 그게 당신이 원했던 스타일이면 몰라도, 그렇지 않다면 내가 진짜 '오

물렛'을 만드는 동안 당신은 머리를 말리는 게 나을 것 같소."

"지난번에 내가 만들었던 오물렛은 사이비라는 소리로 들리네요."

"당연하지. 난 햄과 피망, 양파, 토마토를 듬뿍 집어 넣고 그 위에 체더 치즈까지 얹을 거니

까."

"난 그 초록색 부리가 싫더라."

그녀가 뾰루퉁해서 내뱉었다.

"초록 뭐라구!"

그녀는 금세 낯을 붉혔다.

"오, 릭, 미안해요. 나, 나는……."

그녀는 우호적인 분위기를 망칠 것이 두려워서 얼른 돌아섰다. 그 말은 그녀와 제이슨이 예

전에 주고받았던 농담이었다.

"가서 머리나 말려요. 궁금한 게 있으면 당신에게 큰소리로 물어 볼 테니까."

욕실로 들어선 그녀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노려보았다.

"한심하긴!"

그녀는 재빨리 침대를 정리한 뒤 브래지어를 착용했다. 그리고 컬링 세트롤을 이용하여 어깨

위에 차분히 내려앉는 부드러운 웨이브를 만들었다.

음악 소리가 귀에 들려 왔다. 앨리슨은 슬며시 웃음을 머금고 문간을 바라보다가 콧소리로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녀는 노련하면서도 익숙한 손놀림으로 섬세한 화장을 하는 편이었다.

그건 평소 그녀가 모델들의 화장을 손수 해주면서 터득한 기술이었다. 화장을 마무리한 뒤

그녀는 평소 애용하던 향수를 양쪽 귀 뒷부분과 손목, 셔츠 안, 그리고 양 가슴 사이의 계곡

에 몇 방을 발랐다. 마지막으로 양쪽 복사뼈도 잊지 않고.

몸을 일으키는 순간 그녀는 문간에 느긋하게 기대 선 채 자신을 보며 미소 짓고 있는 릭을

발견했다. 그는 고개를 한 쪽으로 비스듬히 한 채 이렇게 히죽거렸다.

"이제까지 여자들이 향수를 뿌리는 곳이 어떤 곳인가 했더니. 일곱 군데더군."

앨리슨은 그 자리에서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문간에서 몸을 뗀 뒤 돌아서

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침 식사가 준비 됐나이다, 여왕 폐하."

그녀는 식탁에 앉아서도 그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는 것이 어색했다. 그러나 그는 특유의 여

유 있는 태도로 그녀를 편하게 해주었다. 이윽고 그가 커다랗게 부풀은 스페니쉬 오물렛 접

시 두 개를 의기양양하게 식탁에 내려놓았다.

"자, 모조리 먹어 치워요, 말라깽이 아가씨.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처럼 보이니까."

"어머, 내가 말라깽이라구요? 몇 분 전엔 내 몸매에 대해 불평하는 소릴 못 들었는데."

"아마 못 들었겠지. 하지만 내가 당신의 갈빗뼈에 손을 댔을때 보니, 당신은 거의 참새의 슬

개골만큼 살이 쪘더구만."

앨리슨은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은 우리 엄마처럼 얘기하는군요. 내가 집에 갈때마다 어머니는 '앨리슨, 자 모두 먹어

치워야지. 그렇게 말라 가지고 어디다 쓰겠니, 자, 조금만 더 먹어 봐라'라는 말씀을 입에

달고 다니신 다니까요, 거의 미치기 일보 직전이죠. 왜 엄마들과 할머니들은 여자의 체중이

이십 파운드를 초과하지 않으면 건강하지 않다고 믿는지 모르겠어요."

"아마도 그분들은 당신을 사랑하시고 그게 당신에게 최선이라고 생각하시기 때문일 거요. 만

약 그렇지 않다면 굳이 신경 쓸 일도 없겠지. 나도 집에 갈 때마다 결혼을 않고 지내는 것

때문에아버지에게 비슷한 일을 당하곤 해요. '릭, 넌 벤슨네 딸이 고향으로 돌아와서 와살

박사의 사무실에 취직한 거 알고 있냐? 고등학교 다닐 때는 그애하고 데이트도 하지 않았니?

그러면서 릭은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그 벤슨네 딸은 아마 지금쯤 백 킬로그램은 더 나갈 거요. 게다가 아버지는 내가 오물렛을

만들었다고 하면 까무라치시겠지. 그분은 생전 요리라고는 하신 적이 없으니까. 늘 어머니가

모든 걸 해주셨지. 세탁, 집안 청소, 요리 등등 전기 요금 낼 때나 아버지께 알릴까, 그게

그분들의 삶의 방식이오. 만약 그분들이 나에게 그렇게 살라고 강요한다면 그건 내가 행복해

지기를 원해서일 거라고 이해하고 싶소. 그래서 난 아버지께 웃는 낯으로 출발하기 전에 그

엘렌 마리 벤슨에게 전화하겠다고 말씀드렸더랬소."

"그리고 전화했어요?"

앨리슨은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녀는 한때 그와 데이트했을 여자들이 문득 궁금해졌

다.

"어떤 면에선. 아, 엘렌 마리에게가 아니라, 식구들이 잘 모르는 몇 명에게."

"특별한 사람이라도 있어요?"

그녀는 그의 반응을 조심스럽게 살피며 물었다.

하지만 그의 대답은 애매했다.

"아니오."

그는 짤막하게 대답한 뒤 오물렛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여자들 전화로 얘기하자면, 조만간 한 여자로부터 전화를 받을 거예요."

"누구?"

그가 커피를 마시다 말고 눈썹을 치켜 올렸다.

"비비엔! 그녀가 당신 전화 번호를 묻더군요."

그가 킥킥거렸다.

"아, 그 비비엔―."

그는 그 이름을 길게 발음하면서 능글맞은 미소를 지었다.

앨리슨은 식탁 위에 한쪽 팔을 올려놓고는 히죽히죽 웃었다.

"정말로 그렇게 하는 여자들이 있나 보죠? 그러니까 남자들에게 전화해서 대담하게……."

앨리슨은 말을 잊지 못하고 주춤했다.

"대담하게 뭘?"

"그러니까 대담하게……."

앨리슨은 막연하게 손을 휘저었다.

"거 있잖아요. 대체 여자들이 남자들에게 대담하게 전화를 걸어 무슨 얘길 할까요? 난 늘 그

게 궁금하더라."

"그 얘긴 이제까지 당신은 한 번도 그래 보지 않았다는 뜻인가?"

"그럼요. 난 그런 스타일은 아니거든요."

릭의 눈동자가 핑크빛으로 달아오른 그녀의 뺨 위에서 주춤했다.

그는 한 쪽 팔을 접시 곁에 올려놓고, 다른 손으로 천천히 커피 잔을 쥐었다.

"다행이군."

"그런가요?"

그녀의 눈이 휘둥그래지면서 순진한 빛을 발했다.

"그렇다니까. 왜냐하면 난 아직도 내가 먼저 여자를 쫓는 쪽이고, 여성의 자유라는 것도 혼

자서는 쟁취할 수 없다고 믿고 있는 남자들 중의 하나니까 말이오."

"비비엔에게 당한 키스로 판단하건대 당신도 아주 멋진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 같더군요.

그러자 그가 고개를 젖히고 크게 웃어제꼈다.

"아, 그 비비엔. 정말 못 말리겠더구만."

하지만 그는 그 사실에 대해 굳이 말을 보태거나 빼지 않았다. 그 일을 비꼬거나 자존심의

손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그의 태도가 앨리슨은 마음에 들었다. 그녀를 관찰하고 있던 그의

입 한 귀퉁이에 잔잔한 미소가 스쳤다. 이제 그의 시선은 그녀의 머리와 귀와 입, 양볼을

거쳐 그녀의 커다란 갈색 눈동자에 돌아와 멈췄다.

"당신 머리가 아주 아름다워."

그가 나직이 말했다.

순간, 양볼이 후끈 달아오르는 걸 느낀 그녀는 속눈썹을 파르르 내리깔았다. 그는 양손을 배

위에 얌전하게 내려놓은 채 붉게 달아오른 그녀의 볼을 찬찬히 바라보고 있었다.

앨리슨은 다시 시선을 어디에 둘 줄 몰라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마침내 그녀는 그의 손마

디만 바라보기로 했다.

"그리고 나머지도 전부."

그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위험 경보등이 켜졌다.

'이런 게 그의 방식일까?'

이건 제이슨과는 완전히 달랐다. 제이슨은 그처럼 담백하게 찬사를 보내는 스타일이 아니었

다.

'그의 과장된 언사에 굴복했던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생각이 제이슨에게 미치자 앨리슨은 자신의 주위를 환기시키리라 다짐했다.

'그래, 서두르면 안 돼, 정신을 바짝 차려야지. 일이 너무 빨리 진행되고 있어.'

그러나 릭이 느긋하게 의자에 기대 앉아 경탄스런 표정으로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다

는 데서 오는 기쁨은 아무래도 부인하기 어려웠다. 다시 그의 달콤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윗입술에 버터가 묻었는걸."

앨리슨은 얼른 냅킨을 집어 입으로 가져 갔다. 그러나 그의 손이 재빠르게 제지했다. 그녀가

영문을 몰라 그를 바라보자 그가 테이블 앞으로 몸을 바싹 끌어당겼다.

"내 입술로 닦아 준다면 당신은 싫어할까?"

릭은 대답을 못하고 연신 침만 꿀꺽 삼키고 있는 그녀를 여전히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그녀의 갈색 눈동자엔 공포의 빛마저 역력했다. 등지 안에 숨은 놀란 새끼 새마냥 웅크

리고 앉아 있는 그녀에게 그가 중얼거림에 가까운 부드러운 목소리로 은근히 재촉했다.

"안 될까?"

그의 달콤하고 은근한 질문에 그녀의 경계심은 차츰 허물어져갔다. 릭은 그녀를 꼼짝 못하게

하는 강렬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그녀의 손가락에서 냅킨을 빼앗고는 다치기 쉬운 꽃망

울을 만지듯 그녀의 손가락을 거머쥐었다. 그리고 그는 그녀의 손을 자신의 가슴에 갖다 댔

다. 그녀가 거세게 박동 치는 그의 심장 감촉을 느끼는 동안 그는 스르르 눈을 감고서 버터

묻은 그녀의 윗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살며시 갖다 댔다. 그의 입술이 가볍게 스치듯 그녀의

입술을 좌우로 누볐다. 그가 같은 행동을 아랫입술에도 반복하는 동안, 앨리슨은 녹아내린

버터가 자신의 뱃속에서 잔잔하게 꿈틀거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약간의 간격을 두었다가 이제 혀끝으로 그녀의 입 주위에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앨리

슨이 그의 움직임에 차츰 조심스러운 반응을 보이자 그녀의 손바닥 아래 눌려 있는 그의 심

장의 고동은 더욱 격렬해지고 있었다.

그는 서두르지 않으면서 그녀의 달콤한 혀를 한참이나 애무했다. 두 사람은 이마와 이마를

맞대고 달콤한 키스를 계속 하다가 어느 순간, 이마를 떼고 서로의 눈을 깊숙이 응시했다.

계산하듯 찬찬히 그녀를 관찰하고 있는 그의 시선은 앨리슨의 몸 깊숙한 곳에서 집요한 파문

을 일으켰다. 이제 그는 가슴에 있던 그녀의 손을 가져 가서 천천히 자신의 입술을 열고 입

안에 집어 넣었다. 차례대로 그녀의 손가락들을 얼르는 동안 그녀에게 고정된 릭의 눈에선

불길이 번뜩였다. 앨리슨은 따뜻하고 촉촉한 그의 입 안으로 자신의 손가락 하나하나가 사라

지는 장면을 매혹당한 듯 바라보고 있었다.

릭이 그녀의 몸 안에 일으키는 반응은 제이슨과는 사뭇 달랐다. 치밀하게 계산된 태도로 절

정 직전까지 몰아가서 그녀가 참지 못하고 결국은 굴복하게 될 때까지 기다리는 자제력에 놀

라울 뿐이었다. 릭의 혀가 손가락을 애무하는 동안 앨리슨의 육체는 극도의 흥분감으로 폭발

일보 직전이었다. 자신의 입에서 천천히 손가락을 빼낸 그가 이번에는 그녀의 손을 뒤집은

뒤 그 끝을 살짝 깨물기 시작했다. 이러한 전회가 그 자신의 감각에도 커다란 파문을 일으키

고 있는 듯 그의 숨결은 거칠어졌으며 슬며시 내리뜬 속눈썹의 그림자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

다.

릭은 깊은 생각에 잠긴 듯 지그시 두 눈을 감고 오래도록 그녀의 손을 입술에 대고 있었다.

마침내 눈을 뜬 그가 허스키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지난 여드레 동안 이렇게 할 수 있으리라곤 생각도 못했소. 당신에게 전화를 걸고 싶어 전

화기 앞으로 달려간 게 몇 번이었는지 당신은 알까? 하지만 그때마다 난 관계를 만들고 싶지

않다는 당신의 말을 떠올리고 당신이 다시는 날보고 싶어하지 않을게 분명하다고 생각했지.

그의 얘기는 앨리슨에게 격렬한 감동을 주었다.

"정말 그랬어요?"

그녀는 한참 만에 겨우 이렇게 물었다. 두 사람의 손 뒤에 가려있는 그의 얼굴에 눈을 맞추

면서.

"세상에, 릭, 당신 자신을 봐요. 당신의 얼굴과 그리고 당신의 몸하며, 어떤 여자가 당신을

다시 보고 싶지 않겠어요."

"당신이 날 볼 때 주목하는 게 바로 그건가? 얼굴과 그 몸매라는 것?"

"아니에요."

앨리슨은 얼른 호흡을 가다듬고 손을 빼낸 뒤 그에게서 벗어날 구실을 찾기 위해 얼른 커피

잔을 집어 들었다.

"그런데 왜 하필 나죠?"

"당신이 그 이유를 모른다면, 느낄 수가 없다면, 나 역시 설명할 수가 없소. 잠시 동안이나

마 우리가 공유했던 경험들이 충분한 설명이 되지 않을까? 우리가 유쾌하게 보냈던 시간들하

고."

"릭, 그렇지만 난……."

앨리슨은 벌떡 일어서서 두 사람의 접시를 싱크대로 가져 갔다. 그의 의자가 미끌어지는 소

리를 들었다고 생각되는 순간, 그는 벌써 그녀의 뒤에 다가와 서 있었다.

"당신은 믿지 않고 있군, 그렇지? 내가 능수능란한 바람둥이처럼 당신을 홀리려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릴지도 모르죠."

앨리슨은 이렇게 시인하고 말았다. 실제로 테이블 건너편에서 그토록 매혹적으로 유혹하거나

그런 식으로 손을 만졌던 남자를 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는 자신의 무기가 어떤 건지 알아

야 했다.

'릭은 거울을 보면서 자신이 '노트르담의 곱추'가 아니라는 사실 정도만 인식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지만 그는 어떤 여자의 시선도 유인할 수 있는 유혹적이며 당당한 능력을 갖고 있

지 않은가.'

"당신은 내가 마치 찬양이나 하는 수도승처럼 행동해야 성이 차겠소?"

앨리슨은 싱크대 자락을 꼭 움켜 쥔 채 정면을 쏘아보며 할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그녀는 거의 울먹이듯 한마디를 내뱉었다. 그에게 자신을 내맡기고 싶은 충동과 다른 사람을

쉽게 믿었던 결과로 얻은 쓰라린 상처가 엇갈리면서 그녀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다음 순간, 묵직한 손이 그녀의 목을 가볍게 쓰다듬기 시작했다.

"미안해요, 앨리슨. 약속했었는데."

그가 은연중에 행하는 손놀림 하나하나조차 앨리슨의 가슴을 뛰게 했다. 몇 초간의 침묵 끝

에 릭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현관에서 일어났던 일 때문에 나는 그만……."

"내 실수였어요. 그런 일이 생긴 건……."

앨리슨은 차마 그를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한 채 얼른 그의 말문을 막았다.

"당신을 보니까 반가웠고, 그리고 잠시 경계를 허문 것뿐인데……."

"그렇다면 당신은 날 보면 경계의 깃발을 세워야 된다고 늘상 다짐하고 있는 모양이군, 이

말을 하고 싶었던 거요?"

"그, 그래요."

"왜?"

앨리슨은 대답을 회피했다. 그녀의 등에 와 닿은 릭의 따스한 손이 등 한복판을 조심스레 쓸

어 내렸다.

"난 그가 아니오, 앨리슨."

상상할 수 있는 한 가장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 순간 앨리슨은 뒷머리가 일시에 빳

빳하게 곤두서는 것 같았다. 그녀의 어깨뼈가 굳어졌다.

"누구 말예요?"

"난 몰라. 당신이 얘기해 주어야지."

그는 앨리슨의 어깨를 잡고 돌려 세우려 했다.

"지금 무슨 얘길 하고 있는지 모르겠군요."

"나도 그래, 이름이 뭐였소?"

그녀의 입술이 긴장으로 꾹 다물어졌다. 릭은 그녀로부터 손을 떼면서도 미세한 표정의 한

자락까지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그녀를 세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그는 몇 발짝 물러서더니

팔짱을 끼고 문에 기대어 섰다.

"나한테 그 사람에 대해 얘기하고 싶지 않소?

"그 사람! 그 사람!"

다음 순간 앨리슨은 발악하다시피 악을 써댔다.

"지금 당신이 무슨 얘길 하고 있는지 알기나 해요?"

"당신이 이처럼 나를 경계하고 믿지 못하도록 만들어 놓은 남자 얘기지. 내가 얘기하는 게

바로 그 사람이오. 이름이 뭐였지?"

"그런 남자는 없었어요!"

"고집 불통!"

그가 거칠게 되받았다. 앨리슨은 단호한 눈빛으로 그를 마주보았다.

"내 생애에 그런 남자는 없었다구요."

"아니야, 있었어."

"그렇다 해도 당신이 상관할 바가 아니에요."

"빌어먹을, 왜 아니지? 늘 이런 식으로 당신에게 접근하는 걸 막고 있는데. 그래도 내가 상

관할 바가 아니라고?"

"당신을 막고 있는 건 바로 나 자신이에요! 내가 조심성이 많아서라구요. 알았어요? 그것도

죄가 되나요?"

그녀는 순간적으로 열이 올라 박박 소리를 질러 댔다.

릭은 굳은 표정으로 그녀를 잔뜩 노려보았다.

"빌어먹을, 그 친구는 당신에게 피해 의식만 잔뜩 심어 놓았군. 절대로 우리 남자들을 믿지

않겠다고 작정하도록 만들어 버렸다구. 안 그렇소?"

"사람을 믿어서 종래에는 손톱만큼의 이익을 얻은 적이 없었어요."

앨리슨이 거칠게 내뱉었다.

"그런데 나한테는 그랬단 말이지? 속이 뒤집히는데도 불구하고."

일순 앨리순의 몸이 꼿꼿하게 굳어졌다. 그녀는 허공에다 성난 손짓만 해댈 뿐이었다.

"더 이상 견디지 못하겠어요. 이 이런 삼류 드라마 같은 상황을! 여긴 내 집이에요. 내가 당

신을 들어오게 하고 아침 식사를 얻어 먹었다는 사실만으로 당신이 내 사생활을 일일이 간섭

할 권리는 없어요. 그래요. 지난주 내내 나도 당신을 생각했어요."

다음 순간, 그녀가 갑자기 몸을 획 돌려 그를 정면으로 올려보았다.

"이게 당신이 듣고 싶은 얘기인가요? 좋아요. 그랬다구요! 이틀이 지나기도 전에 당신이 보

고 싶었다구요. 하지만 명심하세요. 혹시라도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으면, 그게 하루가

될지, 한 주가 될지, 한 달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내 과거를 간섭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난 그게 제일 싫으니까!"

앨리슨은 코가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서 그를 노려 보면서 경계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그

를 좋아하고 싶고 그에게 의지하고 싶고 마침내는 그를 사랑해 버릴지도 모를 충동이 두려웠

기에.

릭 역시 성난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지만, 힘이 들어갔던 눈썹과 입 주위가 차츰 풀

어지고 있었다. 그는 곧장 튀어 나오려는 반론을 억제하고 있는 모습이 역력했다.

"당신 말이 맞아.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지."

놀랍게도 그는 순순히 시인하더니 더는 언쟁을 하고 싶지 않다는 듯 몸을 세웠다.

"휴전합시다, 됐소?"

그리고 카운터 테이블 앞으로 걸어가더니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봉투 안으로 손을 집어 넣

었다. 다음 순간, 그가 꺼낸 것은 검은 가죽 가방에 담긴 카메라였다. 그가 그녀의 시선을

유혹하듯 카메라를 높이 들어 올리는 순간 갑작스런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찾아들었다.

펄펄 뛰던 성난 기세는 단번에 사라지고, 앨리슨은 상기된 표정으로 펄쩍 뛰어올랐다.

"하, 핫셀블러드?"

"핫셀블러드."

그녀가 얼른 손을 뻗쳤다. 하지만 그는 재빨리 뒤로 뺐다.

"잠깐, 이걸 사용할 수만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겠다고 했던 여자가 당신이 아니었던가?"

'올 것이 왔구나.'

앨리슨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음흉한 사람 같으니.'

하지만 릭은 삐딱하게 웃어 보이고는 그녀에게 키스하려는 듯 엉덩이를 뒤로 빼고 얼굴을 앞

으로 내밀었다.

"당신 영혼까지야 바라지도 않고, 다만 우리의 우호적인 관계를 재건하는 의미에서 키스 한

번이면 어떨까."

그녀는 릭이 원하는 대로 얼른 값을 치렀다. 순간적인 짧은 입맞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카

메라를 넘겨주지 않고 있었다.

"친구?"

그가 앨리슨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빙긋이 웃으며 물었다.

"친구."

그리고 그녀는 얼른 카메라를 낚아챘다 햇살이 쏟아지는 거실로 종종거리며 걸어가는 그녀의

뒤통수에 대고 그가 껄껄 웃어댔다. 그녀가 거실 바닥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기가 무섭게 릭

이 뒤따라 와서 그녀와 무릎을 맞대고 앉았다. 그는 필름을 꺼내고나서, 감탄스런 표정으로

카메라의 여기저기를 살펴보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이게 필름을 돌리는 장치요."

그가 은빛 크랭크를 가리켰다.

"그리고 이것이 셔터를 푸는 장치고."

길고 좁은 창문을 통해 쏟아지는 햇살이 가득한 거실을, 갖고싶던 카메라를 통해서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에 희열이 번뜩였다.

그녀는 마음에 드는 장면이 잡히기를 기대하면서 무릎으로 마룻바닥을 기어다니다시피 하면

서 파인더를 통해 실내 곳곳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바로 저기예요!"

갑자기 앨리슨이 한 지점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어디가? 어떻다고?"

릭이 무슨 영문인지 몰라 되물었다.

그녀는 오전 햇살이 비스듬히 스며들고 있는 마루 한 구석을 가리켰다.

"바로 저기예요. 빨리요! 지금 그 자세로 앉아서 부엌 쪽을 바라봐요. 당신 얼굴이 측면광을

받도록."

릭은 그제서야, 그녀의 의도를 알아채고 빙그레 웃더니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는 구석으로 갔

다. 그리고 느슨하게 웅크린 자세로 앉아 양 무릎 위에 팔을 올려놓았다. 앨리슨은 마룻바닥

에 거의 배를 깔다시피 하면서 측면광을 받아 옆선이 선명하게 돋보이는 그의 사진을 두 장

찍었다.

이윽고 그녀는 흐드러지게 늘어진 쉐플레라 화분을 그 쪽으로 끌고 왔다.

"이제 이 나무 잎파리가 당신 얼굴에 그늘을 드리우는 걸 찍을거예요. 그런데, 웃으면 안 돼

요. 알았죠? 창문 쪽으로 몸을 약간만 비틀고 심각한 표정을 짓는 거예요. 마치 입 밖으로

심오한 철학이 쏟아져 나올 것처럼 말이죠."

그리고 두 번의 셔터가 눌러졌다. 그녀는 상기된 표정으로 핫셀블러드를 내려다보며 개구쟁

이 같은 미소를 지었다.

"당신 정말 대단해요, 릭 랭. 그걸 알아요?"

카메라를 내려놓는 순간, 또다시 자연스런 충동이 엄습해 왔다. 카메라를 목에 걸고 있는 동

안만은 자신이 느낀 바를 온전히,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카메라만

없으면 사적인 감정 때문에 위축되는 자신을 깨닫는 것이었다.

"저 바구니 의자는 어떻겠소?"

이번엔 릭이 먼저 제안했다.

"아하, 그것도 좋겠네요, 자 앉아 봐요."

그녀는 더욱 정확한 음영을 표현하기 위해 의자의 방향을 약간 비튼 뒤, 파인더상으로 바라

보면서 좀더 나은 배치를 궁리했다. 그가 의자에 가 앉는 동안, 그녀는 커다란 종려나무 화

분을 낑낑대며 옮겨 왔다. 그리고 한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잎사귀 위치까지 판

판하게 체크하면서 막상 원하는 배치가 얻어지자 목구멍 깊숙이 에서 만족스런 신음 소리를

내뱉는 것이었다.

예술가적인 안목에서 비교적 만족할 만한 세팅을 찾다가 그녀는 실내를 획 돌아보았다. 그리

고는 베란다로 통하는 프랑스식 격자문을 가리켰다. 베란다가 추워도 괜찮겠느냐는 동의를

구하면서.

"무슨 수로 보상할 셈이오?"

그가 이죽거리며 물었다.

"당신도 알다시피 한 시간이나 일했는데."

그러자 앨리슨은 발뒤꿈치를 들고 재빨리 그에게 입을 맞췄다. 자신이 무슨 행동을 하고 있

는지도 깨닫지 못한 채 그만큼 뜻밖에 손에 넣는 보물 같은 기계로 작업하는 일이 즐거웠던

것이다.

그녀는 그를 격자문의 창살 뒤 베란다에 세웠다. 그러나 창살이 그의 표정을 가리면 안 되었

기에 그녀는 카메라의 앵글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한참을 고심했다.

"뭘 해요. 서두르지 않고!"

그가 문 밖에서 투덜거렸다.

"내 젖꼭지가 오므라들기 일보 직전이란 말이오."

그녀는 터져 나올 것 같은 웃음을 참으면서 재빨리 두 장을 찍었다. 그리고 그가 허둥지둥

안으로 뛰어들어오자 그녀는 자신도 깨닫지 못하면서 이렇게 시인했다.

"나 역시 그러려구 해요. 흥미를 끄는 걸 발견하면 늘 그런걸요. 그런데 당신 카메라는 정말

나를 사로잡아 버렸다니까요."

"내 카메라만 그렇단 말이지?"

"꼭 그렇다고는 말하지 않았어요."

"흠, 그렇다면 혹시 흥분을 맛보고 싶다면 나한테 알려 주도록. 아마 카메라나 베란다의 도

움 없이도 우리 둘이 협력하면 될 듯 싶으니까."

더 이상 생각이 나지 않을 때까지 집안 구석구석을 돌며 가능한 장면을 궁리하던 그녀는 아

직도 지치지 않은 표정이었다.

"우리 밖에 나가서 작업을 해보는 게 어떨까?"

마침내 릭이 제안했다.

"칼룬 호수에서 겨울 축제가 벌어지고 있다던데. 그렇지 않아도 당신에게 함께 가서 여기저

기 쏘다녀 보자고 제안할 참이었소."

"쏘다니자구요?"

그녀가 장난스럽게 되물었다.

"물론 카메라를 동반해서. 거기에는 오만 가지 물건들이 모여있을 테니까. 우리 두둑하게 옷

을 차려 입고 거기에 뭐가 있는지 나가 보지 않겠소?"

그는 만만치 않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앨리슨 역시 그를 더욱 많이 알 수 있는 기회를 갖고

싶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카메라와 조금이라도 오래 일해 보고 싶었다. 무엇보다 그녀는

그와 함께 있는 것이 즐거웠다.

"기꺼이 그러죠."

오후 내내 그와 함께 보낼 수 있다는 생각에 미치자 그녀는 한껏 들뜬 기분이었다. 게다가

냉정하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해야하는 고역을 치르지 않아도 되는 것이 더욱 좋았다. 단둘만

의 사적인 만남은 그에게 키스하거나 손을 뻗을 여지를 제공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