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빌스펜서] 네 곁에 가까이-6화 (6/11)

6

릭이 탈의실에서 나왔을 때 비비엔은 이미 가고 없었다. 앨리슨은 그 동안 스튜디오 안을 청

소했다.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싶은 순간, 방안을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는 그의 모습이 눈에 들

어왔다. 그녀는 뒷정리를 하면서도 내내 양손을 주머니에 찌른 채 곁에 서서 뚫어져라 자신

을 바라보고 있는 그를 의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비비엔의 갈망하는 듯한 입술이 릭에게 향

하던 그 혼란스런 기억이 머릿속을 끊임없이 오락가락 하고 있었다

촬영이 계속되는 동안에는 개인적인 감정을 완전히 분리시켜놓을 수 있었지만, 막상 평상복

으로 갈아입고 그렇게 서 있는 릭과 대면하게 되자 사정이 달라졌다. 게다가 무엇이건 대담

하게 요구해 대던 비비엔의 마지막 키스가 떠오르면서 무슨 말이든 해서 이 숨막히는 분위기

를 벗어나야 될 것 같은 심정이었다.

마지막으로 쓰레받기를 비우는 그녀의 손길이 떨리고 있었다. 찰칵하고 쓰레기통 닫히는 소

리 뒤에 이어지는 정적을 견디다 못해 그녀는 마침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비비엔은 갔어요."

그녀가 공허한 목소리로 말했다. 릭의 젖은 머리칼이 이마와 귀를 어지러이 덮고 있었다. 천

장의 불빛을 받아 방금 샤워를 마친 그의 피부가 반들거렸다.

"알고 있소. 그리고 방금 있었던 일은 사과하겠소. 굳이 당신을 당황스럽게 하고 싶진 않았

는데."

순간 그녀의 볼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아니, 사과할 것까진 없어요. 내가 상관할 일은 아니잖아요."

앨리슨은 불편한 심기를 숨기기 위해 바쁜 척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녀는 양손을 허벅

지에다 쓱 문지르고는 실내를 한바퀴 둘러보았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실내는 이미 정돈이 끝

난 뒤였다.

"나머지는 내일 치워야겠어요."

그리고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어머,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빨리 계산을 마쳐 줘야 당신이 가지."

그녀는 부리나케 책상으로 가서 그가 샤워할 동안 작성해 놓았던 수표를 집어 들었다. 그리

고 한 손으로 수표를 내밀고, 선의의 악수를 제의하듯 나머지 한 손을 내밀었다.

그녀로부터 눈을 떼지 않은 채, 릭은 한 손으로 수표를 받으면서 나머지 한 손으로 그녀의

차가운 손을 쥐었다. 악수라기보다는 그저 그녀의 손을 꼭 쥐고 놓아 주지 않는 자세였다.

내심 당황한 앨리슨은 순간적으로 그에게 억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진심으로 함께 일을 하게 되어서 좋았다는 얘길 하고 싶어요.

슬라이드가 도착하는 대로 전화할게요."

"그래요."

그가 건성으로 대답했다. 슬라이드 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표정이 역력한 채 여전히 그녀의

손을 놓지 않고 있었다.

그의 손바닥으로부터 전해 오는 감촉이 그녀의 팔을 타고 전해져 올라왔다. 앨리슨은 무언가

말을 해야 할 것 같아 있는 대로 생각을 쥐어 짰다.

"음, 아마 제목이 정해지고 제본이 완성된 상태에서 표지를 보면 훨씬 마음에 들 거예요. 그

러면 최종 결과가 어떨지 알 수 있을 거구요."

"그러죠."

그는 이번에도 무심하게 대답을 흘리면서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손등을 슬며시 문질렀다.

시선은 여전히 그녀에게 고정된 채였다. 순간, 그녀는 표지가 최종적으로 어떻게 나오는지

따위는 그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어떤 말이든 생각해 내야

하는 일이 점점 고역으로 다가왔다. 마침내 그녀는 이렇게 더듬거리듯 중얼거렸다.

"원, 원판이 나오면 전화할게요."

"그게 언제죠?"

앨리슨은 그 순간 얼른 그로부터 손을 빼냈다.

"글쎄요. 한 석 달쯤 걸릴까요."

"너무 길군."

그는 그제서야 수표를 반으로 접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돌아갈 생각은 없는 듯 엄지손톱으로

수표를 구깃거리고 있었다.

"사실 그 일은 뉴욕 쪽의 진행 상태에 따라 달라지죠. 일단 슬라이드만 보내면 내 임무는 끝

나는 셈이에요."

"내 얘긴 그게 아니오."

그는 아주 태연한 자세로 지갑을 꺼낸 뒤 그 안에 수표를 집어넣었다.

"어쨌든 고맙소. 오늘 밤처럼 즐거운 경험을 하고도 오히려 돈을 받는 게 옳은 일인지는 모

르겠지만."

이 대목에서 비비엔이나 모래벼룩 따위의 농담을 해서는 안 된다는 걸 그녀의 이성이 가르쳐

주었다.

"당신이 일한 대가잖아요, 릭."

그녀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그는 어깨만 으쓱하고는 책상에 시선을 떨어뜨린 채 도무지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 자리에 우뚝 서서 책상 위에 널려 있는 사진들과 렌즈, 필터들, 그리고 청구서 나부

랭이들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오래 된 빌딩에서 나오는 특유의 소음들이 밤공기를 가르며 울

려 퍼지고 있었다. 라디에이터 파이프에서 부글거리며 물이 도는소리. 똑딱거리는 시계 소리

, 어디선가관리인이 물통을 나르는 소리 등

한참 만에 릭이 고개를 들었다.

"난 저녁 식사를 하지 않았는데, 당신은?"

"아뇨."

앨리슨은 그와 눈이 마주치기 직전에 황급히 시선을 돌려 버렸다.

"하지만 난 참치하고 계란이면 충분하니까요."

"난 당신의 그 빌어먹을 참치하고 계란은 사절이오. 내가 원하는 건 어디든 가서 얘기를 나

누면서 당신이라는 사람에 대해 좀더 알고 싶다는 것뿐이오."

그녀가 두 눈을 번쩍 들었다.

"내가 얘기했잖아요."

"아니, 잠깐."

릭이 항변하려는 그녀를 제지했다.

"샌드위치 한 쪽하고 한 잔의 커피, 그리고 약간의 대화, 그 정도면 되겠소? 어떤 식으로든

당신을 구속하지는 않을 거라고 약속하겠소. 당신 스스로도 얘기했듯이 너무 긴장되어 있는

상태에선 집에 가서도 잠을 못 이를 테니까. 내가 식사를 낼 동안 당신은 오늘 하루 동안 들

뜬 기분을 마음껏 풀면 되는 거요. 됐소?"

"고마워요. 하지만 제 대답은 '노우'예요."

그의 볼 위로 심술궂은 미소가 천천히 피어 올랐다.

"그럼 그 모래벼룩 건으로 고소를 해야겠다면 다시 재고해 볼 용의가 있겠소?"

앨리슨의 입술에 경련적인 미소가 스쳤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 한켠으로는 경계심이 다시 싹

트고 있었다. 혹시 생길지 모르는 만일의 경우가, 더 이상 누구와도 가까워지지 않겠다는 다

짐이, 또 한 번 마음의 상처를 입지 않으리라는 결심이 그와 함께 있음으로써 누릴 수 있는

기쁨을 억누르고 있었다. 그녀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당신이 날 고소하지 않게 하려면 당신과 부딪쳐 볼 도리밖에 없겠네요."

"그렇다면 날 따라와요. 내 부탁이기도 하지만, 이대로 집에 가면 나 역시 잠을 이루지 못할

것 같으니까."

그녀는 어정쩡한 자세로 일어섰다. 책상 모서리에 허벅지를 꼭 붙이고. 마치 그 단단함에 의

지해 갈피를 못 잡는 마음을 가누기라도 하겠다는 듯.

그의 시선이 그녀의 주먹 쥔 두 손으로 떨어졌다가 다시 그녀의 얼굴로 돌아왔다. 그는 결심

한 듯 책상을 돌아 앨리슨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그녀의 손목을 쥐고 문 쪽으로 돌아서

게 만들었다.

"당신, 나에게 빛 있다는 거 알고 있소? 육톤이나 나가는 벽돌들을 나르는 걸 도와 준 거부

터 시작해서, 저 불법적인 통나무에 대해서도 입을 다물고 있고, 추운 공기 때문에 거의 폐

렴 일보직전까지 간 데다 모래벼룩으로 골탕먹은 것 등, 법에 호소하려들자면 한두 가지가

아니지. 한 남자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겨우 커피 한잔 하자는 데 거절하다니."

"릭, 내 얘기를 들어 봐요."

"제길, 들을 만큼 들었소. 이제 나와 함께 나가는 거요."

그는 단호한 태도로 옷걸이에서 그녀의 재킷을 내려 어서 입으라는 듯이 넓게 펼쳐 들었다.

앨리슨은 포기했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고 마지못해 재킷에 팔을 끼웠다. 그리고 그녀가 단추

를 채우는 동안 그는 현관의 외등만을 제외하고 실내의 전등들을 모조리 껐다.

그가 자신의 뒤에 바싹 붙어 서 있다는 게 못내 불편해진 앨리슨은 뒤를 돌아보는 대신 얼른

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하지만 그는 재빠르게 그녀의 손등을 감싸 쥐는가 싶더니 그녀가 손

잡이를 돌리는 걸 제지했다. 반사적으로 그녀는 그로부터 얼른 손을 빼내 호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하지만 그의 손은 이제 그녀의 어깨로 가볍게 떨어지면서 다시 한 번 자기를 바라보

도록 그녀의 얼굴을 돌려 세웠다.

그의 양손가락이 재킷의 후드 아래서 그녀의 목을 쥐고 있었다. 현관 불빛이 그의 한쪽 얼굴

을 비스듬히 비춰 주면서 자연스럽게 음영을 연출하는 순간, 앨리슨은 단정하고 날카로우며

완벽한 그의 옆 얼굴을 찍고 싶다는 야룻한 욕망을 느꼈다.

그녀는 자신의 목을 쥐고 있는 릭의 손길에서 문득 싱그러운 비누 향을 맡은 것 같았다.

"무슨 이유에선지 당신은 날 믿지 못하고 있는 것 같소."

그가 속삭이듯 말했다.

"난 그걸 알 수 있어. 비록 당신이 나와 함께 있는 걸 좋아하고, 나 역시 그렇지만, 막무가

내로 밀어붙이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소. 약속하지. 하지만 난 아무리 제한된 가능성에서

라도 우리 관계를 포기하진 않을 거요."

"나, 나는 어떤 관계도 원하지 않아요. 이미 말했잖아요."

"이봐요."

릭은 그녀를 달래듯 가볍게 흔들었다.

"처음부터 어떤 관계를 기대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소. 그건 그냥 저절로 이루어지는

거요, 앨리슨. 마치 하늘이 내리신 선물처럼. 당신, 그걸 몰라요? 그 후에 두 사람은 그 안

에서 지내는 거지. 하지만 만남은 우연의 선물이라 할 수 있지."

"아뇨. 난 그런 거 몰라요."

사실, 늘 어떤 관계를 고대했던 것은 오히려 그녀 자신이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녀는 늘

그로 인해 상처받는 자신만을 발견하곤 했다. 결국 그녀의 의지와는 반대로 늘 전과 다름없

이 끝나 버렸던 것이다

앨리슨을 쳐다보는 그의 눈빛이 매섭고도 강렬했다.

"도대체 뭘 두려워하고 있는 거요?"

그의 목소리는 차츰 사나운 기미를 띠어 가고 있었다.

"난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아요. 다만 현실을 직시할 뿐이지. 세상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

럼 그렇게 자비롭지 못해요. 게다가 하늘은 단 이 센트짜리 선물도 내게 내려 주신 적이 없

어요. 그러니 내가 하늘 나라에 대해 그다지 낙관적인 견해를 갖고 있지 않다고 해서 뭐라고

하진 마세요."

"그렇다면 내가 당신 견해를 수정시킬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안 될걸요."

"내가 노력해 보겠다면?"

"그거야 당신한테 달렸죠."

"나한테?"

"당신이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에."

"왜 내가 당신에게 뭔가를 바라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누구나 무언가를 원하니까요."

앨리슨은 침을 꿀꺽 삼켰다.

"당신에게 그 무엇을 바랐던 가장 최근의 사람이 누구였지?"

"아무도 없었어요!"

그녀는 자기가 생각해도 지나치게 날카로운 대답이라 여겼던지 목소리를 낮추었다.

"아무도."

그의 시선이 방어벽을 치기 시작한 앨리슨의 딱딱한 표정을 조심스레 훑었다.

"거짓말."

지나치게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누군가가 당신에게 상처를 주었고, 당신은 그 때문에 이 세상 남자들을 모조리 믿지 못하게

되어 버린 거야. 그리고 세상 남자들이 모두가 비열하지 않다는 걸 증명하는 일을 내 몫으

로 남겨둔 거고."

"커피 한잔 마시면서 그 일을 해내기엔 무리일 텐데요."

"난 할 수 있는데."

그는 아주 명랑한 목소리로 단언하면서 문을 열려는 그녀 곁에 비스듬히 비켜 섰다.

"물론 오늘 하루 저녁으론 부족하겠지만, 어쨌건 앞으로 당신은 내가 얼마나 참을성 많은 인

간인지 알게 될 거요."

스튜디오를 나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그가 물었다.

"내 차를 타고 가지 않겠소?"

앨리슨은 다시 자신에게 쏟아지는 그의 시선을 느끼면서 엘리베이터의 번호판에 눈을 주었다

.

"아뇨. 각자 차를 타고 가서 어디선가 만나죠."

"어디서?"

앨리슨은 그를 가볍게 흘겨보았다.

"아무 데나 커피를 마실 만한 곳에서요."

"어디로 가고 싶소?"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혹시 치즈하고 베이컨에다 피클과 프라이가 얹혀진 엄청나게 커다란 햄버거를 좋아하세요?"

릭은 익살스럽게 햄버거 가게의 광고를 흉내 내며 물었다.

앨리슨은 어이가 없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맞아. 그런 대사를 어디선가 들은 것 같네요."

"어디였던 것 같소?"

"글쎄, 얘기해 보세요."

"디앰버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이지."

"만약 내가 '싫어요' 하면 어쩔래요? 나는 그 어쩌구 저쩌구하는 엄청나게 커다란 햄버거는

좋아하지 않아요. 대신 난 칠리하고 옥수수빵이 좋다고 하면요?"

"그렇다면 '어림없어'라고 얘길 하겠소. 햄버거 얘길 먼저 꺼낸 건 내 쪽이니까. 자,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아가씨?"

그는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그녀의 양팔을 장난스럽게 잡아올리고 춤추듯이 빙글빙글 돌리

기 시작했다.

"항복할게요 !"

그녀는 결국 졌다는 듯이 엘리베이터 벽에 기대며 양팔을 번쩍 들어 올렸다.

"난 햄버거를 좋아합니다. 맹세컨대 햄버거를 사랑합니다."

릭은 권투 선수처럼 장갑 긴 손을 휘두르며 그녀에게 다가오다가 장난스럽게 그녀의 턱을 치

켜 올렸다.

"그렇지?"

릭은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며 웃었다.

"좋아. 이제 내가 햄버거를 먹자고 할 때 내 말을 거역하면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되는지 따끔

한 맛을 봤겠군."

순간, 그녀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못 말릴 사람이야. 어떤 식으로든 자기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게 하다니.'

사실 그녀로서는 릭을 거부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은 식당에 가는 동안에도 내내 그녀를 미소 짓게 만들었다. 식당의 간판을 발

견했을 때 그녀는 자기가 먼저 도착했다는 걸 알았다.

몇 분 후에 도착한 릭은 그녀가 앉아 있는 의자 등받이를 향해 비스듬히 기대 오면서 주변을

흘금거리더니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헤이, 정말 예쁜 아가씨로군. 혹시 어디 숨어서 당신을 감시하는 사람은 없겠지?"

"말하면 큰일나게요."

앨리슨은 마치 권총 강도의 정부나 되는 듯한 목소리로 너스레를 떨었다.

릭은 빙그레 미소를 짓더니 냉큼 그녀의 맞은편에 와 앉았다.

그리고 그들은 두 시간 동안 얘기를 나뒀다. 그 동안 릭은 그녀가 사우스 다코타의 조촐한

농장에서 자랐으며 가족들은 아직도 그곳에 살고 있다는 것, 그리고 미네아폴리스에서 커뮤

니케이션아트를 전공한 뒤 더 나은 기회를 잡기 위해 고향으로 내려가지 않고 이곳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녀의 꿈은 언젠가 핫셀블러드 같은 명품을 구입해서 '젠틀맨스

리뷰'에 작품을 싣는 것이었다.

"왜 하필이면 젠틀맨스 리뷰'요?"

"하필이라뇨? GR 같은 잡지에 사진이 실린다는 건 엄청난 특혜가 보장되는 일인데, 그 정도

의 꿈은 가져야 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왜 남성 잡지냐는 거요."

그녀는 별생각 없이 이렇게 대답했다.

"왜냐하면 남자들하곤 일이 잘 되거든요."

"지금도 그렇소?"

그가 은근하게 물었다. 그리고는 눈꺼풀을 약간 내리깐 채 자신의 컵에 입을 가져 가면서 히

죽히죽 웃었다.

순간, 그녀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면서 더듬거렸다.

"내, 내 말은 카메라하구 그렇다는 거죠, 물론."

"물론."

그는 그녀의 말에 장단을 맞추면서 다시 컵 뒤로 얼굴을 숨겼다

"그렇게 빈정거리지 말고 좀 진지해 봐요."

앨리슨은 몸을 꼿꼿이 세우며 엄숙한 목소리로 나무랐다.

"지금 컵 뒤에서 어떤 표정으로 날 훔쳐 보고 있는지 알아요. 그래요 사실이에요. 난 남자들

하고 잘 맞아요. 난 남자들의 의상이나 남성미를 돋보이게 하는 배경을 연출하는 데 소질이

있어요. 야성미, 부드러운 분위기 등 무엇이건 간에. 그리고 여자들이랑 일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결과를 얻었던 것도 사실이구요."

그녀는 자신의 컵을 들어 올렸다.

"이런 말을 하면 건방지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난 내가 갖고 있는 재능이 무엇인지를

파악해서 하루빨리 그 방향으로 밀고 가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당신은 나 역시 예술가라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 같군. 그 경우엔 나도 해당되는데."

앨리슨은 이제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화제로 접어들자 의자를 바짝 당겨 앉았다.

"가끔은 당황스러울 때도 있어요. 그러니까 너무도, 너무도 확연히 드러나는 작업 결과 때문

에 말이죠!"

그녀는 손짓을 해가면서 열변을 토했다.

"우리가 창조해 낸 생산물은 즉시 세상에 의해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잖소."

그들은 서로 공유하는 관심사에 대해 한참 동안 얘기를 주고받았다. 그녀의 볼은 발그레하게

상기되었고, 눈동자 역시 싱싱하게 반짝였다.

"일에 대해 얘기할 뻔 당신 모습이 늘 그렇게 생기가 돈다는 걸 알고 있소?"

"내가요?"

"볼은 발그레하게 달아오르고, 눈동자가 생기 있게 춤추면서……. 당신은 금세 흥분하고 상

기된 표정으로 변하죠."

앨리슨은 당겨 있던 몸을 뒤로 뺐다.

"그럴지도 모르죠. 날 아주 흥분시키니까요."

"다른 어떤 것보다도."

그의 목소리에 담긴 암시는 명확했다. 그와 나누었던 짧은 키스의 기억이 또다시 생생하게

몰려왔다. 그녀는 거의 표정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 그의 얼굴로부터 시선을 돌렸다. 분위기

를 밝게 유지하기 위해선 그게 최선인 듯싶었다.

"나한테 큰 의미를 갖는 게 또 하나 있긴 있어요."

"그게 뭐죠?"

"핫셀블러드를 갖고 일해 보고 싶다는 단순한 소망이죠."

앨리슨은 그 이름을 발음하는 것만으로도 흥분된다는 듯 양 무릎 사이에 손을 끼어 넣고 꼭

눌렀다.

릭이 컵을 들고 한 모금 들이킨 후 태연히 말했다.

"핫셀블러드라면 내가 갖고 있소."

순간, 그녀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리고는 바짝 몸을 끌어당겼다.

"정말이요?"

"당신의 눈에서 지금 반짝거리는 것이 탐욕의 빛일까?"

"어느 것이든 간에요!"

앨리슨은 천장으로 두 눈을 향한 채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오, 그 거대한 몸체와 사분의 일 인치 네거티브들!"

그녀는 거의 졸도할 듯한 표정을 지었다.

"또 그 렌즈들은 어떻구요! 세상에, 카메라맨이 그 카메라를 갖고 싶어하는 것은 우주 비행

사들이 달나라를 밟고 싶어하는 거나 다름없다구요!"

그녀는 압도당한 듯한 표정으로 의자 뒤로 벌렁 주저앉더니 심장 부근을 손으로 눌렀다.

"그 기계를 손에 넣을 수만 있다면 내 영혼이라도 팔고 싶은 심정이에요."

"영혼을 팔겠다고?"

그가 재빨리 되물었다.

"굳이 비유를 한다면 그렇다는 거죠. 근데 그 카메라가 당신거라구요? 혹시 농담하는 거 아

녜요?"

"여름 한철 내내 도로 공사판에서 일했고, 단 일 센트라도 모을 수 있는 데까지 모으다 보니

가을쯤엔 그 기계를 내 손에 넣을 수가 있었소."

앨리슨이 한층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도로 공사판의 사람들은 고양이 쫓는 일에조차도 나 같은 사람을 고용하지 않을 거예요."

"그렇게 상심할 필요 없어요. 내 걸 쓰면 되니까."

놀란 그녀가 몸을 발딱 일으켰다. 앨리슨의 눈동자가 다시 빛을 발했다.

"정말이에요? 정말 내가 써도 돼요?"

그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대개 나는 가족들이 살고 있는 에밀리로 여행할 때만 그걸 써요. 우리는 루즈벨트 호수 가

에 자그마한 별장을 하나 갖고 있는데, 나는 대부분의 촬영 작업을 그 호수와 숲 주변에서

하고 있어요. 내가 도시에 머무르는 것은 야생 동식물을 그리는 것만으로는 충분한 벌이가

되지 않기 때문에 모델 일을 부업으로 하기 위해서요. 그러니, 아까, 얘기했지만 당신이 쓰

고 싶을 땐 당신 것처럼 써도 돼요."

"정말요?"

앨리슨은 아직도 실감나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

"물론, 정말이라니까."

릭은 그렇게 말하며 팔짱을 끼고 천천히 몸을 뒤로 젖혔다.

"하지만 당신에게 완전히 준다는 얘기는 아니고 그저 쓰고 싶을 때 쓰라는 거요."

앨리슨은 너무 좋아 흠뻑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눈동자를 잠시 내리깔면서 코끝을 찡긋거렸

다. 다음 순간, 두 눈을 반짝 뜨고 그의 시선과 마주치자 그녀의 입술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빙그르 떠올랐다.

"만약 내가 그걸 갖고 도망치면요?"

두 사람은 반쯤 눈을 감고서 장난이나 하듯 천천히 몸을 의자 뒤로 기댔다.

"그렇다면 이 기회에 내가 그 물건으로부터 눈을 떼는 일은 절대로 없을 거라고 공언을 해야

겠군. 그리고 당신에게서도."

순간, 앨리슨은 그의 발이 자신의 히프에 닿을 정도로 가까이 자신의 의자에 걸쳐 올려져 있

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토록 나른한 듯 긴장을 풀고 있음에도 그는 믿기 어려울 만큼 잘생

긴 모습이었다. 생기 있게 움직이고 있는 눈동자는 그가 아직 전혀 졸리지 않다는 걸 얘기해

주고 있었다.

웨이트리스에게 주문할 때, 릭은 그녀가 커피에 설탕만 넣는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

사실 앨리슨이 지난 이틀 동안 웃었던 것은 제이슨과 함께 지냈던 몇 달 동안에 웃었던 것보

다 더 많았다. 그녀와 릭 랭은 믿기 어려울 만큼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점점 확

인해가고 있었다.

릭이 계산을 마친 것은 거의 열두 시가 지나서였다. 앨리슨은 뒤에 서서 잔돈을 꺼내려고 꼭

끼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집어 넣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벽에 기댈 때 약간 짓눌리는 머리칼, 그리고 뒷머리에 닿을 듯 말 듯한 낡은 재킷의 구겨진

칼라. 순간,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그의 비뚤어진 매무새를 고쳐 주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러나 앨리슨은 그 충동을 떨쳐 버리려고 잠자코 자신의 점퍼단추를 채운 뒤 스카프를 목에

감았다.

"다 됐소?"

릭이 몸을 돌리고 물었다.

앨리슨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고 문 쪽으로 걸어 나왔다. 그는 거의 팔이 스칠 듯 가깝게

걸으면서 그녀를 위해 무거운 유리문을 열어 주었다. 밖으로 나와 주차장을 가로지르면서도

그녀는 가죽 장갑이 거의 스칠 정도로 자신의 뒤에서 바짝붙어 걷고 있는 릭을 의식하지 않

을 수가 없었다.

이윽고 앨리슨은 눈 한 무더기가 쌓여 있는 주차장 한복판에서 멈춰 섰다.

"내 차는 저기 있어요."

그는 고개로 반대편을 가리켰다.

"내 차는 저기 있소."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저, 햄버거 고마웠어요. 아주 재미있었구요."

"언제든지."

늦은 시간이라 사방은 고요했다. 들리는 건 레스토랑의 네온사인 뒤에서 들리는 통풍기 돌아

가는 소리뿐이었다. 앨리슨은 고개를 들어 릭을 쳐다보았다. 차가운 밤공기 속에서 그가 하

얀 입김을 내뿜고 있었다. 릭은 전혀 웃음기가 없는 표정으로 자신의 장갑만 자꾸 세게 조이

면서 그녀 앞에 서 있었다.

"잘 가요."

"안녕."

그러나 그는 여전히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릭의 숨결이 빨라지

고 있다는 걸 마침내 깨달았다. 그 깨달음에 반응하듯 따뜻한 기운이 순간적으로 그녀의 전

신을 휘감아 올라왔다. 그녀의 심장 역시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는 간신히 마음

을 수습하고 결심한 듯 자신의 밴을 향해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가 재빨리 그녀의

뒤를 따라 온다싶더니 장갑 낀 손이 그녀의 어깨를 덥썹 붙잡았다. 그 바람에 두사람은 살

얼음 위에서 하마터면 미끌어질 뻔했다. 겹겹이 껴입은 겨을 옷 사이로 그의 손의 감촉이 느

껴질 리 만무했건만 한순간 그녀는 오싹한 한기로 느꼈다.

그녀가 차문을 열자 릭은 가볍게 제지하면서 손잡이를 붙잡은 채 가만히 뒤로 물러서서 기다

렸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인사를 할 요량으로 그를 힐끗 돌아봤다.

"다시 한 번 고마웠어요. 잘 가요."

"그러죠."

생각보다 칼칼한 목소리를 의식했던 탓인지 그는 헛기침을 한 뒤 다시 대답했다.

"그러죠."

더 맑기는 했지만 낮고, 부드러운, 그러나 다소 혼란스러운 목소리였다.

그녀가 차에 오르려는 순간, 그의 손이 다시 그녀를 붙잡으며 돌려 세우려 했다.

"앨리슨?"

그가 장갑 긴 손으로 그녀의 양팔을 붙잡는 순간 그녀가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차

와 열려진 차문이라는 자그만 공간 속에서 릭의 손이 그녀를 가까이 끌어당겼다.

차가운 밤공기가 오히려 뜨겁게 느껴졌다. 그가 그녀를 점점 가까이 끌어당기고 있었다. 그

의 입술이 가까이 다가오는 동안한 쪽으로 비스듬히 젖힌 그의 고개 뒤편으로 네온사인의 빛

이 번득였다.

"안 돼요."

그녀는 결국 고개를 돌려 버리면서 손바닥을 들어 그를 제지하고 말았다.

그러나 어깨로 가해 오는 압력은 더욱 세지고 있었다.

"대체 뭘 두려워하는 거죠?"

"날 밀어붙이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요."

"단 한 번의 키스를 그렇게 불러요?"

따뜻한 그의 숨결이 그녀의 볼을 스쳤다.

"난, 그래요."

그녀는 그를 쳐다보지 않은 채 간신히 대답했다.

"이왕이면 한 번 시도해 보고 내가 더 밀어붙이지 않나 확인해보고 싶지 않소?"

이제 그의 손은 두 사람의 점퍼가 맞닿을 만큼 가깝게 그녀를 끌어당겼다. 다시 앨리슨은 릭

의 눈을 바라다보려 했지만 주차장의 불빛을 받아 분홍빛을 발하는 그의 머리와 이마, 콧잔

등 외엔 그의 모든 부분이 어둠 속에 숨어 있었다.

"단 한 번의 키스라고 했어. 난 촬영하는 동안 카메라 뒤에서 열기를 뿜어 내는 당신을 보며

내내 이 생각만 해왔소. 우린 그때 무언가를 공유하고 있었다고 난 생각했소. 우리 두 사람

을 사로잡고, 흥분과 전율에 떨게 하는 그 무엇을. 당신은 그렇지 않았다고 말하지 말아요.

그만큼 많은 걸 공유한 우리가 단순한 작별키스조차도 무리일까?"

"얘기했었죠. 난 어떤 관계든 맺고 싶지 않다고."

"나 역시 마찬가지요. 난 더도 덜도 아닌 한 번의 키스만 원한다니까. 난 당신이 좋고 당신

과 함께 보낸 시간과 일들이 좋소. 그러니 그런 감정을 얘기하는 방식으로 키스보다 더 나은

게 있을까?"

이제 앨리슨은 저항 의지를 점점 잃어 가고 있었다. 릭의 얼굴이 차츰 아래로 내려오다가 마

침내 따뜻한 입술로 그녀의 입술을 가볍게 스쳤다. 한 쪽 볼에 닿는 그의 코의 서늘한 감촉

때문인지 그의 입술의 온기가 더욱 선명하게 전해져 왔다. 그녀는 스르르 눈을 감았다.

부드러운 입술의 터치가 점점 오래 끌어지자 앨리슨의 경계심도 차츰 흔들렸다. 그는 입술을

떼지 않은 채 그녀를 더욱 끌어당기면서 저항을 풀지 않고 있는 그녀의 팔을 자신의 양팔사

이에 끼워 넣게 한 뒤 꼭 눌렀다. 그녀의 딱딱한 저항이 어느 정도 풀어졌다고 느끼자 그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등으로 손을 옮겨서 감싸듯이 안았다. 그 동안 그의 고개는 더욱 대담하

고 관능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제 앨리슨의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던 제이슨과 아픈 과거에 대한 경고의 목소리는 저 멀

리서 헛된 공명으로만 울리고 있었다. 오직 심장이 거세게 뛰는 소리만이 그녀의 귓속을 점

령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 그의 등으로 가만히 손을 올려놓았다.

그녀의 입술이 슬며시 열리자 그의 혀가 기다렸다는 듯이 밀고들어왔다. 그녀는 그 따뜻하고

촉촉한 혀끝의 감촉을 자신의 혀로 받아들이면서 살갗과 살갗이 최초로 맞닿는 탐색의 율동

에 온몸으로 퍼지는 짜릿한 전율을 느꼈다.

그런데 등뒤에서 갑작스런 손 움직임이 느껴지자 그녀는 일순 당황했다. 그가 장갑을 벗는다

는 걸 깨달은 순간, 그의 맨손이 그녀의 목과 머리 뒤를 감싸 안고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그의 촉촉한 혀가 그녀의 입술 안쪽의 보드라운 부분에 슬며시 미끄러드는가 싶더니 이내 부

드럽게 밀어붙이듯이 그녀의 입술 끝을 핥았다. 그녀의 심장은 터지기 일보 직전이 되었다.

이제 그의 키스는 더욱 거칠고 격렬해졌다.

릭이 단단한 팔로 히프를 힘껏 조여 오는 동안 앨리슨은 자신의 복부를 세게 누르는 그의 청

바지 지퍼 사이로 딱딱한 감촉이 살아 올라오는 걸 느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있는지를 미처 깨닫기도 전에 그의 몸놀림에 맞춰 자신의 히프도 원을 그리듯 움직이고

있었다.

잠시 후, 예상보다 더 깊어졌다고 생각한 탓인지 릭은 앨리슨의 머리 뒤에서 주먹 쥐듯 손가

락을 그러쥐더니 천천히 고개를 젖혔다.

그들의 숨소리는 높고 거칠었으며 차가운 대기 속으로 하얀 입김을 거칠게 토해 내고 있었다

. 앨리슨이 그의 턱에 이마를 기댄 채 호흡을 고르는 동안 릭이 슬며시 눈을 내리 감으면서

몸을 축 늘어뜨렸다.

"후―."

그러나 그 소리도 반쯤은 목에 걸려 버렸다.

앨리슨은 자신의 몸이 냉정을 되찾기를 애타게 기다렸다. 그러나 그녀의 의지처럼 쉽사리 되

기는커녕 반대로 어렵다는 사실만 실감할 뿐이었다.

'그 역시 자신의 몸 안에서 일어난 감각의 변화를 내보이지 않았던가!'

"한 번의 키스."

한참 만에 그가 잠긴 목소리로 겨우 말을 꺼냈다.

"약속한 것이니 지켜야겠지."

고삐 풀린 말처럼 마구 뛰어가려는 감정을 통제하고 싶은 생각에 앨리슨은 이렇게 빈정거렸

다.

"그 정도면 내가 당신의 핫셀블러드를 쓸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가 웃음을 터뜨리더니 고개를 들고 대답했다.

"아직은."

앨리슨은 그의 팔로부터 몸을 뺐다. 릭은 특별한 반응 없이 그녀를 풀어 주었다.

"글쎄, 난 그런 것 같은데요."

그녀는 역시 이죽거리며 양손을 주머니에 꽃고서 발걸음을 뗐다.

"내가 한 번의 키스로 영혼을 팔았다고 얘기했었을걸요."

릭은 장갑을 다시 끼면서 그녀의 일그러진 표정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늘 그 정도에서 끝내다 보면 내게는 영혼까지 팔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순간, 앨리슨은 다시 그의 품에 뛰어들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면, 그녀

가 손에 넣고 싶은 건 그의 핫셀블러드 이상이라는 얘기가 될 것이다.

앨리슨이 복잡한 생각들과 싸우고 있는 동안, 그가 턱으로 그녀의 밴을 가리키며 명령을 내

리듯 말했다.

"자, 빨리 타라니까, 내 말 들리오?"

그녀는 말 잘 듣는 순한 학생처럼 그가 시키는 대로 차에 올라탔다.

"연락하겠소."

그는 더 이상의 말이 필요없다는 듯이 이 한마디만으로 작별인사를 대신했다.

그리고 문을 닫은 후 몇 발짝 물러서서 그녀의 밴이 출발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코너를 도

는 순간 그녀는 백미러를 통해 그의 모습을 확인했다. 그는 여전히 그 자리에 우뚝 서서 밴

이 멀어질 때까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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