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빌스펜서] 네 곁에 가까이-5화 (5/11)

5

수요일, 앨리슨은 릭의 전화를 은근히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전화하지 않았다. 그녀

는 목요일 밤 촬영을 위해 그와 다시 대면한다면 막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막막했다.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대책이 서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평소와 다름없이 태연하게 행동하리라

결심했다. 특별한 내색을 하지 않고 여유있는 농담까지 할 수 있다면, 편안하고 공적인 관

계를 유지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었다. 그날 앨리슨의 주요 일과는 정원 호스를 끌어들여

호수 물을 채우는 작업이었다.

그 다음에 그녀는 모닥불을 만들기 위해 우선 바닥에 석면부터 깔았다. 만약 경비원이 행여

그녀가 방 한복판에서 불을 피우려는 걸 본다면 이제는 펄펄 뛸 게 분명했다. 하지만 다행인

지 불행인지 그 건물은 원체 구식이라 화재 경보나 스프링 쿨러 시스템이 전혀 되어 있지 않

았다.

목요일 오전, 그녀는 인공 호수에 물을 가득 채운 뒤 혹시 누수가 되지는 않을까 걱정스러워

꼼꼼히 체크했다. 그리고 주조명과 보조 조명 및 컬러 필터들 일체를 다시 설치했다. 그녀

는 수면 위를 비치는 희미한 달빛의 효과를 얻기 위해 배경막에서 작은 원을 오려낸 뒤 스트

로보들 중 한 개에 오렌지 빛 필터를 부착해 두었다.

오후 다섯 시경, 그녀는 다소 떨리는 손가락으로 카메라의 필름을 감았다. '이건 어리석은

짓이야. 이건 비지니스이며 릭 랭은 함께 작업을 하는 모델일 뿐이야'라고 수십 번은 다짐하

며 .

그렇지만 왜 평정을 찾지 못하는 것일까?

어쨌든 혼란스런 심정 속에서도 그녀는 카메라를 삼각대 위에 설치하고 스튜디오를 가로질러

흩어져 있는 호스를 감았다 나머지 잡동사니를 다 치우고 나자 문득 관리인에게 자동 펌프

를 부탁해 두었던 일이 생각났다.

그 흉칙한 물건을 질질 끌다시피 하면서 스튜디오에 들어서는 순간, 앨리슨은 세트 앞에 서

있는 릭을 발견했다. 그는 그녀가 꾸민 세트를 세밀히 살펴보고 있었다. 인기척을 느낀 릭이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안녕."

그가 가볍게 인사했다.

그의 모습을 발견한 순간 무언가 따뜻한 느낌이 그녀의 혈관을 타고 올라왔다. 짧았던 작별

키스를 잊기 어려웠던 것일까.

"안녕."

"해냈군."

그가 호수와 모래, 그리고 불을 피울 준비가 되어 있는 장작에 눈짓을 보내며 미소를 머금었

다.

"그럴 수 있다고 얘기했잖아요."

그러면서 앨리슨은 세트로 천천히 다가갔다.

"저 조명은 내 추측으로 물 위에 비친 달의 효과를 내려는 모양인 것 같은데?"

그는 배경막을 통과하는 스트로보와 낮게 설치한 카메라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렇게 되길 기원해야죠. 아직 찍어 보지도 않았고 결과를 보지도 않았으니까."

"그건 그렇고 저 물은 어떻게 채웠소?"

"정원용 호스로요."

"그리고 촬영이 끝난 뒤엔 저 기계로 모조리 빨아들일 심산인거요?"

"그렇죠."

앨리슨은 양 손바닥을 탁 치며 씩씩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간단하죠?"

"그 정도로 자신을 평가 절하 하지 말아요. 이건 간단하다는 말 이상인데. 아주 기발한 것

같소."

그리고 다시 세트를 쳐다보았다.

"보아 하니 장작들을 구하러 또 한바탕 원정을 갔었겠군."

"그랬죠."

"그땐 어떤 차림으로?"

그가 이죽거리며 물었다.

"착한 모범생처럼 입었죠. 참, 당신은 수영복 가져 왔겠죠?"

"물론!"

그러면서 주먹만큼 작게 접은 수영복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가져 오긴 했지만 지금 당장은 갈아입고 싶진 않은데, 여긴 마치 육류 보관 창고처럼 추우

니."

"너무 걱정 말아요. 장작불이 몸을 덥혀줄 테니까."

"글쎄, 난 비비엔 주치니 양께서 해결해 주실 거라 생각했었는데."

릭은 재킷 주머니에 손가락을 건 채 그녀를 내려다보며 웃었다. 그는 앨리슨이 황망히 시선

을 돌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주친스키라니까요."

그녀는 릭을 쳐다보지 않으며 말했다.

릭은 여전히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미소를 흘리며 그녀의 탱탱한 히프와 또박또박 걸어갈 때

힘이 주어지는 탄탄한 허벅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술렁였다. 그녀는 탈의실로 들어가 불을 켰다. 그녀의 곧게 뻗은 탄탄

한 등은 운동 선수의 뒷모습처럼 힘이 느껴졌다.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꽃고 탈의실 문틈에

비스듬히 기대고 서 있는 그녀는 마치 샴푸 광고에 나오는 모델 같았다. 그의 시선은 이제

사파리 점퍼의 어깨 견장과 허리에 맨 벨트, 그리고 앞가슴을 덮고 있는 뚜껑 달린 주머니로

옮겨 갔다. 상의에 맞춘 듯 긴 부츠 안에 바짓단을 접어 넣은 탐험가 같은 차림이었다. 그

런데 그녀의 머리 위에는 오늘도 예의 그 선글라스가 걸려있었다. 해가 저물어 가는 시각인

데다가 실내의 조명 역시 침침한데도 말이다.

"탈의실 안에 찬 공기가 못 들어가도록 문을 닫아 놓았었죠."

그녀가 말을 꺼냈다.

"반쯤 언 상태에서 사진을 찍을 순 없잖아요?"

"주치니 양이 있는데 무슨 걱정이겠소?"

앨리슨은 여전히 손을 주머니에 꽃은 채 허리가 꺾일 정도로 크게 웃었다.

"경고해 두겠는데요. 만약 다시 한 번만 그렇게 얘기했다간, 그녀가 여기 들어서는 순간 오

일 대신에 토마토 소스를 머리에 뿌릴 지도 모르겠어요."

사실 그도 오일을 바르는 것이 젖은 몸 상태를 표현하거나 조명 아래서 윤기 나는 피부를 연

출하기 위해서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리 내키지는 않았다.

그때 문이 활짝 열리더니 귀까지 인조 모피를 푹 뒤집어쓰다시피 한 푸른 눈의 아가씨가 들

어왔다. 그녀는 실내에 들어서자마자 대뜸 이렇게 입을 여는 것이었다.

"먼젓번처럼 여전히 춥네요. 이렇게 추워 가지고선 오들오들 떨다가 건포도처럼 쭈글어들고

말 거야."

릭과 앨리슨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비비엔은 그들이 왜 웃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듯이 그 큰 눈으로 두 사람을 멍청히 쳐다보았다.

"릭 랭, 비비엔 주친스키를 소개 할게요."

앨리슨은 그녀의 이름을 똑바로 발음하기 위해 고개를 똑바로 쳐들고 긴장해야 했다.

"비비엔, 이쪽은 릭 랭이에요. 당신과 함께 포즈를 취할 분이죠."

릭이 손을 내밀었다.

아주 천천히, 그야말로 관능적인 걸음걸이로 비비엔이 다가왔다.

비비엔은 날카롭고 긴 손톱을 예쁘게 손질한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릭의 손가락을 힘주어 잡

았다. 그리고는 그 길다란 속눈썹을 아래 위로 움직이며 릭의 전신을 훑어내렸다.

"와우, 끝내 주는군요."

순간, 릭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러나 여전히 손을 잡고 놓지 않는 비비엔에게 곧 보

조를 맞추었다.

"내가 보기엔 비비엔 당신도 대단한데요. 당신처럼 아름다운 분과 함께 사진을 찍게 되어서

정말 기쁩니다."

비비엔은 뽀족한 손톱으로 그의 손등의 털을 슬쩍 쓸어 보면서, 노골적인 시선을 던졌다.

"어머, 웬걸요. 정말 뿅가 버릴 사람은 나예요. 당신 정말로 멋져요. 릭, 추운 것도 벌써 잊

어 버릴 정도라니까요."

앨리슨이 가볍게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자 비비엔은 그때서야 탈의실 문틀에 비스듬히

기대 선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랭 씨도 여기가 너무 춥다고 불평했으니, 어쩌면 두 사람이 합심해서 따뜻하게 만들 수 있

겠군요. 안 그래요?"

앨리슨은 비비엔을 향해 환하게 밝혀 놓은 탈의실로 어서 들어오라는 몸짓을 했다.

"당신부터 먼저 시작하는 게 어떨까요. 미스 주……."

그녀는 말을 끊었다가 잠시 후 끝을 맺었다.

"미스 주친스키 ?"

비비엔은 부리나케 탈의실로 들어와서는 이렇게 말했다.

"밝아서 화장하기에 딱 좋겠어요."

"굳이 따로 손보지 않아도 될 정도로 화장이 아주 잘 되어 있군요. 그러니 특별히 고치진 말

고 베이비 오일을 가지고 올 동안 옷이나 갈아입도록 하세요. 참, 머리는 원래 곱슬인가요?"

"뭐라구요?"

비비엔이 거을 속에서 도톰한 입술을 뽀족이 내민 채 물었다.

"머리가 원래 그 정도로 곱슬이냐구요. 물에 젖은 효과를 내기 위해 당신 머리에 베이비 오

일을 바를 참이거든요."

비비엔이 심각하게 자신의 머릿결을 쓰다듬었다.

"오일이라구요! 내 머리에? 난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러면 당신이 물 속에서 방금 나왔다는 걸 어떻게 알아볼 수 있겠어요?"

"쳇, 그래야 한다면 할 수 없죠. 당신이 고용주이니까. 하지만……."

비비엔은 포기했다는 듯 승낙은 했지만, 훨씬 풀이 죽어 있었다.

"당신이 먼저 옷을 갈아입는 게 어떨까요, 비비엔. 그럼 약간 시험해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비비엔은 마지못해 문을 닫으면서도 손가락 두 개로 릭에게 따라오라는 듯 신호를 보냈다.

앨리슨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깨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릭의

반응을 살펴보고 싶어 참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릭은 짐짓 음흉한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다급하다는 듯 양손을 비벼대며 말했다.

"이런, 기다릴 수 없을 것 같은데."

릭은 일부러 과장되게 히죽거렸다.

"그럴 줄 알았어요."

잠시 후, 문이 열리고 관능적인 허리와 복부가 훤히 드러난 비키니 수영복 차림의 비비엔이

모습을 나타냈다. 그녀는 양팔을 넓게 벌리며 가까이 다가왔다

"어때요?"

"휘익―."

릭이 가볍게 휘파람을 불었다.

"멋있네요."

앨리슨은 덤덤하게 소감을 밝혔다.

"오일 바를 준비가 됐어요. 토마토 소스를 좀 가져 오면 시작하죠."

앨리슨은 이렇게 말하면서 자리를 떴다.

"뭐, 뭐라고요?"

비비엔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릭, 이제 당신 차례예요."

앨리슨이 릭을 향해 말했다.

"토마토 소스는 흔히 통용되는 농담이에요, 비비엔. 신경쓰지 말아요."

앨리슨은 비비엔에게 그런 심술궂은 술수를 부린 자기 자신이 한심해졌다. 그런 식의 농담은

그녀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도대체 자신이 그런 말을 하리라고 생각이나 해 보았던가? 비비

엔은 프로처럼 행동하는데 정작 아마추어처럼 행동하는 사람은 앨리슨 자신이었다. 사실 비

비엔 주친스키는 완벽할 정도로 균형 잡힌 미인이었다 앨리슨은 그녀에 대해 슬그머니 질투

심을 느끼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정확히 이 분 후에 탈의실 문이 다시 열렸다.

"이봐요, 숙녀분들, 이리 들어와요. 여기가 훨씬 따뜻하니까."

릭이 맨발로 문간에 서 있었다. 벗은 가슴과 드러난 맨 다리,다만 흰색 수영 팬티만이 구릿

빛으로 그을린 탄탄한 육체의 중심부를 가리고 있었다. 비비엔과는 달리, 릭은 자신의 벗은

몸매를 과시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두 여자를 탈의실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데는 성공했다

.

"아, 알았어요. 들어갈게요!"

비비엔이 환성을 지르며 달려 들어갔다.

문 안으로 들어가서 릭에게 베이비 오일 병을 건네는 길지 않은 시간이 앨리슨에게는 참으로

곤혹스러웠다. 그녀의 눈에서는 이미 장난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숨이 멎을 만큼 멋있었다. 번쩍거리는 금빛 털이 가슴뿐만 아니라 T자형으로 복부는 물

론, 팔과 다리도 덮고 있었다. 그는 거울 앞에서 한 손 가득 오일을 따른 다음 어깨 위부터

바르기 시작했다. 그의 등뒤에 서 있던 앨리슨의 시선이 탱탱한 피부와 잘 발달된 근육으로

덮인 그의 넓은 어깨를 지나 좁다란 엉덩이로 움직였다. 그의 뒷모습은 오히려 굴곡이 없었

다. 그의 몸은 육체미를 과시하는 남성상이라기보다는 예술가의 개념 속에 존재하는 이상적

인 육체의 형태라 해야 옳았다.

거울 속에서 그의 시선과 맞부딪친 순간, 앨리슨은 그가 자신을 내내 주시하고 있었음을 알

아차렸다. 그러나 그는 별다른 반응을 내색하지 않고 계속해서 오일을 발랐다. 이 점 역시

제이슨과는 달랐다. 제이슨이 늘 자신의 육체를 오만하게 과시했던 요란한 스타일이었다면,

릭은 자만심을 찾아볼 수는 없으면서도 겸허하고도 당당하게 행동한다는 점이 달랐다. 그는

어떠한 성적인 암시도 담지 않은 담담한 표정으로 거울을 향한 채 오일 바르기만 계속할 뿐

이었다.

비비엔은 깜찍하게 생긴 발등을 팔걸이에 올려놓은 자세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역시 보기 좋게 그을린 주황빛이군.'

오일을 발라 반짝이는 일직선으로 뻗은 완벽한 각선미가 앨리슨의 여자로서의 허영심을 살짝

건드렸다.

비비엔은 보란 듯이 다리를 뻗은 채 릭을 바라보고 있었다.

"등에 발라줄게요."

앨리슨이 몸을 약간 비스듬히 눕힌 채 의자에 앉아 있던 비비엔의 뒤로 다가섰다.

비비엔은 마치 자신이 플레이보이의 바니 걸이라도 된 듯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시카고에 있

는 플레이보이 클럽에 여행 갔던 일을 재잘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동안에도 감탄스런 시

선을 릭으로부터 떼지 않았다.

"비비엔, 이제 머리 끝에 오일을 발라야겠어요. 괜찮죠?"

"꼭 그래야 돼요?"

비비엔은 다시 풀이 죽은 모습이 되었다.

"물에 젖은 분위기를 낼 만한 다른 방안이 없다면요."

비비엔은 릭의 곁에 서서, 결심했다는 듯이 오일을 덜어 굽실굽실한 머리칼에 바르기 시작했

다.

"등에 바르는 것 좀 도와 주지 않겠소?"

릭이 앨리슨을 향해 불쑥 입을 열었다. 그리고는 그녀의 대답도 듣지 않고 어깨 너머로 병을

들이대며 거울 속에서 그녀의 시선을 붙잡았다.

순간, 그녀는 릭에게 선뜻 손을 내밀지 못했다. 그러나 앨리슨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나마 그가 미소 짓거나 빈정거리지 않는 것이 얼마나 다행이랴.

앨리슨은 오일을 한 손 가득 따르며 어느새 제이슨과의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제이슨과의

관계가 시작되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그의 등에 오일을 발라 준 일이 발단이었던 것이다.

제이슨 이래 처음으로 만져 보는 남자의 감촉이 그녀의 아픈기억들을 여지없이 파헤치고 있

었다.

'그를 위해 이러기를 몇 번이었던가? 그리고 그가 자신을 위해 오일을 발라 주던 일은?'

그녀는 제이슨에 대한 생각을 머릿속에서 떨쳐 버리겠다는 듯 이를 앙다물고 얼굴을 잔뜩 찡

그렸다.

더 이상 제이슨에 대한 생각은 하지 말자. 오일 향도, 매끄럽고 관능적인 살갗의 유혹도 생

각지 않으리라.'

그녀의 손가락이 우연히 릭의 머리칼을 스치는 순간, 단단한 근육과는 또 다른 부드러운 감

촉이 손끝으로 전해져 왔다. 두 개의 상반된 감각이 그녀를 묘하게 자극해 정신이 산란해졌

다. 얼떨결에 그녀가 고개를 든 순간 거울 속에서 자신을 조용히 관찰하고 있던 릭의 시선과

마주쳤다.

앨리슨은 불현듯 그가 자신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 같은 불편한 심정이 되어 즉시 시선을

그의 등으로 내리깔았다. 그리고는 오일을 더 털어 내어 등의 중심으로부터 수영복의 허리줄

까지 바르기 시작했다. 그날 밤의 가벼운 키스가 다시금 떠올랐다. 그리고 그 키스에 덧붙여

그가 한 말도. 그는 내뱉듯이 "난 이러지않을 수 없어"라고 말했던 것이다.

사랑, 고통, 쾌락, 그리고 쓰라림이라는 단어들이 제이슨이라는 이름과 뒤섞이면서 앨리슨은

혼돈의 나락으로 빠져들어 갔다. 순간, 그녀의 손가락이 그의 갈비뼈 부근을 건드렸고, 릭

은 움찔하며 물러섰다.

앨리슨도 화들짝 놀라 정신을 수습하면서 지금 앞에 있는 사람은 제이슨이 아닌 릭이라는 사

실을 깨달았다. 다시 거울 속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간지럼을 잘 타는 편이라서."

그가 굳이 이유를 설명했다. 덕분에 앨리슨은 마법에서 깨어났다.

"미안해요. 다음번엔 잊지 않을게요."

앨리슨은 그에게 병을 건네주었다.

"당신 머리에도 발라야죠."

"뭐라구?"

"당신 머리에도 오일을 바를 거라니까요. 참, 비비엔, 어떻게 됐죠?"

"이런 식으로 기름 범벅이 되는 건 싫지만, 어쨌든 오일이 머리에 영양분을 공급한다니까 나

쁠 건 없겠죠."

"두 사람 모두 준비가 끝나는 대로 세트로 오세요. 조명을 밝혀 둬야겠어요."

커다란 창으로 바라보이는 바깥에는 이미 어둠이 자욱히 깔린 뒤였다. 실내에서 유일하게 불

이 밝혀진 공간은 탈의실뿐이었다.

앨리슨은 릭에 대한 생각을 떨쳐 버리고 촬영 준비를 시작했다. 우선 그녀는 스트로보의 방

향을 조절해 가며 차례로 통나무와 물, 그리고 모래를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도록 했다.

맨발의 릭과 비비엔이 추위 때문에 덜덜 떨며 탈의실에서 나와 기구들 한가운데 서 앞뒤로

움직이고 있는 앨리슨의 모습을 찾았다.

"아, 다들 준비가 됐군요. 한 가지 말해 둘 게 있어요. 추위 때문에 참기 힘들겠지만, 불을

피울 때 나는 연기가 빠져 나가도록 창문을 약간 열어 놓아야 할 것 같아요. 하지만 불기운

때문에 실내는 곧 따뜻해질 거예요. 이렇게 추운 곳으로 불러내 미안하지만, 어쨌든 좀 견뎌

주세요. 괜찮죠? 그리고 릭, 당신은 저기 통나무 위에 앉구요. 비비엔은 그 아래 모래 바닥

에 앉아서 그의 뻗은 다리 쪽으로 약간 비스듬히 기댄 자세로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는 거예

요. 자아, 이제 기본 포즈를 잡아 보죠. 너무 뻣뻣하게 그러고 있지 말아요. 자, 긴장을 푸

세요. 먼저 불을 피우고 스트로보를 마지막으로 체크해 봐야겠어요."

비비엔이 소름 돋은 어깨를 문지르며 세트로 다가섰다

"모래를 조심히 밟아요."

앨리슨이 얼른 지적했다.

"그 다음 천천히 건너가요. 모래가 흐트러지지 않게."

이제 비비엔은 이빨을 딱딱 부딪치며 떨고 있었다

"릭, 먼저 통나무 위에 앉지 그래요?"

앨리슨은 떨고 있는 두 사람에게 아랑곳 않고 지시를 계속 내렸다

"비비엔이 당신 다리에 기대기만 하면 곧 뜨거워질 텐데요, 뭐."

앨리슨의 목소리에는 농담기가 배어 있지 않았다.

비비엔이 조심스럽게 모래 위를 지나가는 동안 앤리슨은 성냥불을 켜서 작은 나뭇가지에 불

을 붙였다. 이어 앨리슨은 정확한 간격을 두고 스트로보를 재빨리 켠 다음 파인더에 얼굴을

대고 카메라의 각도를 조절했다. 그리고는 몸을 웅크리고 수면 위에 비칠 달을 잡기 위해 카

메라 각도를 조절하면서 반복해서 스트로보를 켰다.

주조명에는 달빛과 비슷한 분위기를 내도록 파란 필터를 끼웠다. 앨리슨이 조명을 켜자 릭의

원래 머리 빛깔은 사라지고 찬란한 후광을 받아 더욱 미묘하면서도 완벽한 효과를 냈다. 비

비엔 또한 오일을 바른 머리칼 주위가 더욱 환싱적인 분위기를 연출해내고 있었다.

다음으로, 앨리슨은 지나치게 선명한 그림자를 조절하기 위해 오렌지 빛 필터를 끼웠다.

"오우케이, 준비 완료."

앨리슨은 이렇게 외치고는 세트로 다가가서 촬영 개시 신호를 보내기 위해 양손으로 허벅지

를 짚었다. 그리고 모래 위에 닿을 듯 몸을 낮추었다.

그녀는 그 상태에서 릭의 자세 교정을 지시했다.

"릭, 몸을 약간 비틀어 봐요. 아니, 너무 많이 돌렸어요. 좋아요. 그리고 약간 고개를 숙이

구요. 그리고 비비엔, 당신은 릭의 몸 위를 기어오르는 듯한 자세를 취했으면 좋겠어요. 엉

덩이 뒷부분을 약간 들어 올려요. 조금만 더. 복부가 슬쩍 드러나도록. 좋아요. 이제 당신

왼손은 적당한 곳에 놓고 오른손으로 그의 가슴을 쓸어 내리는 시늉을 해봐요."

그러자 비비엔은 릭의 무릎 아래쪽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며 그의 가슴 한복판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두 사람은 순식간에 프로 기질을 발휘하며 완벽한 포즈를 취했다.

앨리슨은 호주머니에서 얼른 빗을 꺼내 비비엔의 아름다운 머리칼 몇 가닥을 그녀의 입술 쪽

으로 살짝 흐트러뜨렸다.

'완벽해!'

"자, 그 상태로 움직이지 말아요."

앨리슨은 됫걸음치면서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는 빗으로 릭의 목 뒤를 덮

고 있는 머리칼을 살짝 흐트린 뒤에야 카메라로 돌아와서 파인더 안에 잡힌 영상을 체크했다

. 그런데 이번에는 모래가 제대로 퍼져 있지 않은 것이 눈에 띄었다. 그녀는 비비엔의 다리

위로 모래를 슬쩍 끼얹었다. 다시 파인더와 스트로보를 체크한 뒤 그녀는 이글거리며 타오르

고 있는 모닥불이 두 사람의 매끄러운 피부와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에 내심 만족했

다. 하지만 비비엔 쪽으로 몰려 있는 모래가 릭의 주위에는 적절하게 퍼져 있지 않은 것이

다시 눈에 거슬렸다. 그녀는 재빨리 삼각대 주변을 돌면서 모래 한줌을 긁어 모아 그의 어깨

근처로 획 뿌렸다.

이번에야말로 흠 없는 장면이 포착되었다. 그녀는 다시 스트로보를 체크한 뒤 연달아 여섯

번을 켠 뒤 카메라의 동시 발광 장치에 연결했다. 무릎을 구부린 자세로 카메라로 다가가 촬

영을 개시하기 직전, 앨리슨의 목소리는 비단결처럼 부드러워졌다.

"아주 좋아요. 자, 이제 두 사람은 서로 맞대고 있는 살결의 감촉을 상상해 보세요. 갈망하

듯이. 자, 입술에 침을 촉촉하게 적시구요."

그들의 매끄러운 입술이 모닥불의 불빛을 받아 반짝였다.

스트로보가 번쩍 터뜨려지면서 셔터가 처음으로 열리며 필름 상에 나타난 영상을 잡았다. 그

때부터 앨리슨의 심장은 마구 뛰기 시작했다. 그들은 정말 완벽한 연인의 모습을 연출해 내

고 있었다.

"약간 몸을 펴요. 이비엔, 그리고 눈썹을 조금만 더. 더. 아니, 너무 올리지 말고. 이제 턱

을 약간 들구요. 그를 너무도 사랑하고 있다고 상상해 봐요."

찰칵!

"멋져요!"

카메라 주위를 왔다 갔다 하며 때론 엄격하게, 때론 달래듯 주문을 하는 앨리슨의 가슴은 흥

분으로 터질 것 같았다.

"릭, 이번에는 그녀의 입가에 묻어 있는 머리칼을 당신이 긴 손가락으로 쓰다듬는 거예요.

하지만 그녀의 예쁜 입술을 가리면 안 돼요. 카메라가 볼 수 있도록 하세요. 손가락 좋구요.

자, 이제 입술을 가까이 대고."

찰칵!

"비비엔, 이번엔 혀끝을 살짝 내밀어 봐요. 그리고 손을 그의 가슴에 갖다 놓는데, 막연히

대는 게 아니라 부드럽게 쓰다듬어봐요."

그러나 이 대목에서 완벽한 조화가 흐트러졌다. 주문대로 포즈를 취하던 릭과 비비엔이 동시

에 웃음을 터뜨린 것이다.

그러나 일에 몰두해 있는 앨리슨은 따라 웃을 수가 없었다.

"됐어요 자, 두 연인들께서는 원래 하던 일로 돌아갑시다. 먼저 무언가 주고받는 듯한 시선

을 만들어 봐요. 그리고 비비엔, 당신은 혀끝이 약간 비치도록 입술을 아주 조금만 벌려 봐

요. 좋아요. 아주 좋아."

찰칵!

"잘했어요. 자, 이제 릭은 손가락을 확 펴고 그녀의 머리칼 속으로 집어 넣으세요. 당신은

그 풍성하고 아름다운 머릿결을 사랑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당신은 넋을 잃고. 아니, 너

무 깊어요. 그러면 당신의 멋진 손가락이 잠겨 버리니까 안 돼요. 자, 부드럽게. 부드럽게."

찰칵!

"릭, 그 멋진 손을 조금만 더 사용해 보죠. 좀더 관능적으로 움직이면서. 좋아요! 비비엔 당

신도 그의 손놀림에 반응을 보여야죠."

릭은 몸에 힘을 빼고 손가락을 구부리면서 비비엔의 볼을 쓰다듬었다. 그의 손놀림에 따라

비비엔은 더욱 간절히 그를 원하는 모습으로 고개를 비스듬히 젖혔단. 그리고, 입술을 살짝

연 채 길다란 속눈썹을 관능적으로 내리깔았다.

찰칵!

"자, 이제 비비엔, 당신이 손가락을 사용할 차례예요. 그 섬세한 손가락으로 당신의 마음속

에 있는 것을 표현해 봐요."

비비엔의 손이 슬그머니 릭의 벗은 무릎 쪽으로 내려가자 즉시 그의 표정이 변했다. 그의 어

깨와 팔은 사진이 허락하는 이상을 말하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스물네 컷을 찍었다. 그 동안 앨리슨은 비비엔 주친스키와 릭 랭의 존재

를 잊고 있었다. 단지 그들을 순수한 예술 대상으로 바라보았으며 머리카락 한 올조차 놓치

지 않을 만큼 지독한 세밀함을 추구했다.

첫번째 필름이 반쯤 돌아갔을 무렵, 앨리슨은 비비엔으로 하여금 좀더 몸을 들어 올려 릭의

가슴에 기대는 포즈를 취하게 했다.

한편, 릭에게는 거의 비비엔의 가슴에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손을 얹게 한 다음, 그녀의

손을 그의 히프에 놓으라고 지시한 뒤 얼른 카메라로 돌아왔다.

그 순간의 릭과 비비엔은 말 그대로 피사체였으며, 그녀가 창조해 내는 예술 작품과 분리할

수 없는 한 부분일 뿐이었다. 앨리슨은 자신의 혈기와 열정을 모조리 그 안에 쏟아 붓고 있

었다.

필름을 갈 때가 되어서야 앨리슨은 허리를 폈다.

"오우케이, 잠깐 몸들을 좀 펴요. 대신 모래 조심해야 돼요. 그 상태에서 흐트러지면 안 되

니까."

그녀는 낡은 냉장고에서 새 필름을 꺼내 재빨리 교환한 후, 모닥불을 다시 한 번 살폈다 그

리고는 곧 작업을 재개했다.

일에 속도가 붙은 그들은 앨리슨의 지시가 떨어지기 바쁘게 몸짓 언어를 연출해 냈다. 다시

필름을 바꿀 무렵, 앨리슨은 두 사람이 몸을 밀착시킨 상태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거의 입술

이 닿기 직전의 관능적인 표정을 짓도록 주문했다. 각자의 손을 상대방의 허벅지에 올려 놓

으라는 주문도 했다. 그리고 릭에게는 비비엔에게 비스듬히 기대면서 그녀가 굴복하는 듯한

자세로 고개를 젖히고 있는 동안 그녀의 터질 듯한 가슴에 닿을 듯 말 듯 입술을 가져 가라

는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촬영이 오랜 시간 이어지는 동안 모델들의 근육이 차츰 굳어지면서 당연히 그들의 표정 역시

딱딱해져 가고 있었다. 앨리슨은 시간을 최소한으로 줄이도록 신속하게 움직였지만, 그들의

입에서 어느새 옅은 한숨이 새어 나오는 것을 눈치챘다.

그런데 셔터를 누르기 일보 직전 비비엔이 펄쩍 뛰어올랐다.

앨리슨은 카메라로부터 고개를 번쩍 들었다.

"피곤해요, 비비엔?"

"아뇨. 뭔가가 날 물었어요."

그녀는 잠시 허벅지 아래를 긁다가 다시 원래 포즈를 취했다.

그런데 앨리슨이 다시 셔터를 누르기 직전, 이번에는 릭이 몸을 꿈틀했다. 다시 실패.

"아무래도 좀 쉬어야겠군요."

"아뇨."

그들이 동시에 대답했다.

"내친김에 계속해서 끝내 버리죠."

릭의 의견이었다.

"비비엔, 당신도 괜찮겠죠?"

"그럼요. 하지만 이 모래가 아무래도……. 아얏!"

비비엔이 비명을 지르면서 펄쩍 뛰어올랐다.

그제서야 앨리슨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당신도?"

릭이 비비엔에게 물으며 갑자기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자신의 종아리와 허벅지 안쪽을 들여

다보았다.

"아무래도 어떤 놈이 나를 저녁 식사 거리로 여기고 있는 모양인데."

"세상에! 우리 둘 다라구요!"

비비엔은 아예 다리 한 쪽을 들어 올리고 본격적으로 긁어 대기 시작했다.

마침내 앨리슨은 실내 전등을 켰다. 그리고 가짜 모래밭 곁에 쭈그리고 앉아 모래 속을 살피

기 시작했다. 당장은 아무것도 눈에 띄지 않았다. 앨리슨은 흰 종이를 모래 위에 잠시 놓아

두었다가 불빛 아래에 대고 조심스레 살폈다 이윽고 그녀는 작고 검은 점이 종이 위에서 재

빠르게 움직이는 걸 발견했다.

그녀는 불안한 표정으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래도 두 사람이 유머 감각이 있었으면 좋겠네요. 이건 모래벼룩처럼 보이는군요."

"모래벼룩이라구요 !"

비비엔이 펄쩍 뛰었다.

"날 물었던 게요?"

"그런 것 같아요. 따뜻한 불기운 때문에 활발하게 움직였나 봐요."

이제 비비엔은 참을 수 없다는 듯 온몸을 박박 긁어 대기 시작했다.

"정말 미안하게 됐어요."

앨리슨은 진심으로 사과하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다음 일을 수습할 일에 눈앞이 깜깜했다.

'맙소사. 이제 어떡하지? 저 벌레들을 어떻게 퇴치해야 나머지촬영을 끝마칠 수 있을까? 스

튜디오 안에는 살충제도 없는데.'

앨리슨은 낙담한 목소리로 이렇게 덧붙였다.

"지금으로선 저 성가신 것들을 없앨 방도가 없군요. 어쩔 수 없이 촬영을 여기서 마치고 지

금까지 작업한 걸로 만족할 수밖에 없겠어요. 정말 미안해요."

"지금 감아 놓은 필름으로 앞으로 몇 컷이나 더 찍을 수 있죠?"

릭이 물었다.

"열셋이요."

릭이 비비엔을 바라보았다.

"글쎄, 나는 열세 번 정도라면 견딜 수 있을 것 같은데. 비비엔, 당신은 어때요?"

그러자 금세 그녀의 표정이 환해졌다.

"제길, 어쩔 수 없죠. 벌레들도 먹고 살아야 할 테니까."

나머지 촬영을 마칠 동안 그들은 앨리슨이 놀랄 정도로 최상의 유머 감각으로 버텄다.

"흠, 이 친구는 아주 오랜만에 포식을 할 모양이군."

릭이 익살을 떨었다.

"당신의 다리 안쪽을 맛보는 거라면 나래도 저럴걸요."

비비엔이 넉살좋게 되받았다.

"아무래도 이곳에 다시 발을 들여 놓으려면 보건소장의 허가서라도 받아야 하지 않겠소, 비

비엔?"

"소방서 소장님에겐 입을 꼭 다물구요."

"내 생각엔 다음에 포토 이미지의 일을 하기 전엔 생명 보험이라도 들어야 할 것 같은데. 비

비엔, 당신 생각은?"

"여부가 있겠어요. 폐렴 일보 직전에다 등에는 저 통나무에 긁힌 상처하며, 벼룩에 온통 물

린 이 다리 좀 보세요."

"이제, 그만 됐어요. 두 사람 다 이제 끝났으니까."

마침내 앨리슨이 촬영 종료를 선언했다.

시계 바늘이 이미 열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몸을 쭉 펴고 굳어진 근육들을

풀었다.

"백오십사 컷이었어요. 두 사람 다 정말 대단했어요."

"우리가 손해 배상 청구를 하지 않길 바란다면 손상된 우리의 자존심을 달래 줘야 할 텐데."

"빌어먹을 벌레들!"

비비엔이 소리를 꽥 지르며 다시 몸을 긁어 대기 시작했다.

"진심으로 사과할게요. 그래도 당신들 두 사람은……."

앨리슨은 적당한 단어를 찾느라 잠시 주춤했다.

"의젓했어요."

그러자 비비엔이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릭을 향해 물었다.

"내가 별로 뜨겁지 않았다는 말인가요?"

그들은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들은 아주 잘해 냈어요. 내 얘긴 정말 성실하고 진지했다는 뜻이에요."

앨리슨은 비비엔이 파인더에 포착되는 외적인 아름다움보다 더 중요한 끈기와 의지의 소유자

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많은 모델들과 일해 보았지만, 대부분은 시간이 지나면서

근육의 통증 때문에 점점 인내심을 잃고 마는 경우가 허다했다. 만약 벼룩이 우글대는 모래

속에서 포즈를 취하라고 한다면 뭐라고 할까! 하지만 비비엔은 짜증 나는 상황에서도 불평

않고 오히려 유머 감각까지 발휘하며 참고 견딘 것이다.

"이런 경우 고소하고도 남을 만한 모델들을 많이 알고 있죠."

"내가 고소할 게 있다면, 그건 머리에 덕지덕지 바른 오일을 씻어 낼 수 없을 때께요."

비비엔이 입심 좋게 불평을 했다.

"아무렴요. 비비엔, 당연히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어요. 자, 탈의실을 곧바로 지나면 샤워

부스가 나와요. 깨끗한 타월 및 세면도구 일체가 준비돼 있어요."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비비엔은 탈의실로 줄달음질쳤다. 릭은 카메라를 삼각대에서 내려

마지막 필름을 되감고 어지럽게 널려 있는 선들을 정리하는 앨리슨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

보고 있었다.

"도와 줄까요?"

"전혀 그럴 필요 없어요. 이미 너무 많이 도와 주었잖아요."

앨리슨은 카메라에 렌즈 덮개를 부착했다. 문득 고개를 들고 릭을 쳐다본 그녀는 그가 자신

을 뚫어져라 지켜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 그녀의 눈앞엔 카메라가 없었다. 이제부터

릭 랭은 그녀의 모델이 아니라 한 남자로서 비쳐질 가능성이 다분했다.

앨리슨이 비비엔에 대해 건전한 존경심을 갖게 되었다면 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여야 했다.

그늘 진정한 프로로서의 적절한 경험은 물론, 힘든 상황을 견eu 낼 수 있는 능력과 그에 준

하는 소양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봐요, 당신 추운가 봐요. 떨고 있으니."

그녀의 목소리에 릭은 꿈에서 깨어난 듯 몸을 움찔했다. 그녀는 이제 능숙하고 민첩한 동작

으로 전선들을 마저 정리하고 있었다.

"나 말이오?"

"탈의실에 들어가서 비비엔이 샤워를 마칠 때까지 입고 있을만한 옷을 찾아보지 그래요?"

그는 탈의실로 가는 대신 앨리슨의 앞으로 다가서서 그녀의 손에 감겨 있던 전선을 빼앗았다

. 한순간 그녀는 저항했다.

"아니, 내가 할 수 있다니까요."

"나도 할 수 있소. 그렇게 독립심 강한 고집 불통처럼 굴지 말아요."

"그렇지만 당신은 피곤하잖아요."

"그래요. 하지만 당신은 어떻소?"

"안 그렇다고는 할 수 없지만, 아무튼 촬영이 끝나면 마음이 홀가분해져서 몇 시간은 끄덕

없어요. 집에 돌아가면 즉시 쓰러져서 한숨 실컷 잘 거예요."

"이 일을 아주 좋아하는군요. 그렇죠?"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쳤다. 방금 전까지 그들이 해왔던 일을 한순간에 잊게 만드는 눈

빛. 앨리슨의 양손이 스르르 떨어졌다.

"그래요."

거의 꿈꾸는 듯한 목소리였다.

"이 세상의 다른 어떤 것도 이런 기분을 느끼게 하지 못할 거예요. 오늘 밤은 정말……."

그녀는 세트와 장막을 씌워 놓은 각종 기구들과 손 안에서 흘러 내린 전선을 차례로 바라보

았다. 이윽고 그녀의 시선이 그에게로 와 멎었다.

"그건 극도로 순수한 희열 같은 거였어요, 내겐."

그녀가 엄숙한 목소리로 말을 맺었다.

"당신이 얼마나 멋진지 알고 있소, 앨리슨?"

릭이 나직이 말했다. 앨리슨이 발산하는 강한 열정에 감동한 듯한 목소리였다. 자신의 일에

대한 열정으로 그녀의 두 눈은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달콤한 칭찬이 그녀의 심장에 정면으로 날아와 꽃혔다.

그녀는 미소를 지었지만, 그를 정면으로 바라보지는 못했다. 그가 앨리슨이라고 부른 건 이

번이 처음이었다. 칭찬할 때의 과장되지 않은 어투가 그녀의 마음을 훈훈하게 했다.

제이슨과 일했던 수 개월 동안, 그는 단 한 번이라도 순수하기는 커녕 늘 과장된 감정만을

분출했었다. 그는 늘 수탉같이 거만한 표정으로 현상된 사진들을 바라보았다. 간혹가다 그가

마음에든 작품을 발견하였을 때조차도, 그는 늘 자신의 자만심만을 앞세웠던 터라 앨리슨은

마음 한편으로 공허함을 느끼곤 했다.

지금 그녀는 제이슨과 견주어 볼 패 릭이 얼마나 다른지 새삼 깨닫고 있었다. 따뜻하고, 센

스 있으며, 사려 깊은 사람.

"고마워요."

그녀는 조용히 대답했다. 그의 칭찬을 순수하게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당신도 마찬가지예요."

그녀는 부드럽게 덧붙였다.

그들의 시선이 한참 동안 서로에게 머물러 있었다. 마침내 그가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고맙군요."

그 순간 비비엔이 탈의실에서 장총거리며 뛰어나왔다. 그녀는 도착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인

조 모피를 두르고 아주 생기 있는 표정이었다.

"자, 이제 샤워는 완전히 당신 차지예요, 하니!"

그러면서 그녀는 교태 부리는 태도로 릭을 향해 걸어갔다.

"하지만 내가 오늘 밤 당신을 잃기 전에, 진짜로. 정직한 굿나잇 키스를 하고 싶어요. 당신

의 그 백만 불짜리 입술에 말예요.겨우 일 센티도 될까 말까 한 거리에 떨어져 있는 당신의

입술을 보고도 무려 네 시간 동안이나 참아 내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요?"

그리고는 다음 순간, 비비엔은 대뜸 릭의 목에 팔을 두르더니 그의 고개를 숙이게 하고는 대

담하고도 진한 키스를 퍼부었다.

그는 갑작스런 일격에 일순 당황한 듯했다. 하지만 앨리슨이 그의 주춤거리는 모습을 잠깐

눈치챘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역시 비비엔의 진한 프렌치 키스에 적극적으로 응하기 시작했

다.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던 앨리슨은 목 언저리가 후끈거려옴을 느꼈다. 한편으론 저토록 대담

한 행동을 천연덕스럽게 해대는 당돌한 여자에 대한 미묘한 질투심까지 맞물리면서 그녀는

어디다 시선을 둬야 할지 몰랐다.

마침내 릭으로부터 몸을 뺀 비비엔은 그를 향해 노골적으로 야한 시선을 보냈다.

"당신 정말 끝내 주는군요. 혹시 카메라가 없을 때 날 만나고 싶거들랑, 잊지 말고 꼭 비비

엔에게 전화해 줘요. 알았죠?"

릭이 뒤로 젖혀진 그녀의 얼굴을 마주보며 커다랗게 웃었다.

그의 양손은 여전히 그녀의 허리 위에 놓여 있었다.

"명심하죠. 다만 우리가 서로 벼룩을 몸에 옮기는 불상사가 발생하게 될지 모르겠소만."

비비엔이 그의 어깨를 장난스럽게 쳤다.

"오, 그 점도 마음에 드는군요. 난 몸매도 좋으면서 유머 감각까지 뛰어난 남자가 제일 좋더

라. 당신 정말 대단해요."

그러면서 그녀는 그를 덥썩 안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아무런 주저 없이 그로부터 팔을 뺐다.

"흠, 이제 가 봐야겠어요."

비비엔의 대담한 행동을 차마 그대로 볼 수 없어 몸을 돌리고있던 앨리슨이 비비엔의 어깨를

감싸 쥐고 문간까지 따라 나갔다.

"비비엔, 정말 수고 많이 했어요. 다시 함께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오길 바래요."

그건 진심이었다. 비록 나중에 육십 초는 무척이나 곤혹스러웠지만, 앨리슨은 진심으로 비비

엔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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