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빌스펜서] 네 곁에 가까이-4화 (4/11)

4.

다음날, 앨리슨은 벽돌 운반 대를 빌려주지 못하겠다는 앤더슨 제재소의 한 고집불통과 또다시 한바탕 심한 언쟁을 벌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벽돌 구입가가 오십 달러 이하라는 것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자신의 상황을 설명했지만, 상대방은 막무가내였다. 그는 한술 더 떠 무례하기 짝이 없는 어투로 왁왁 소리를 질러대기까지 했다.

[이것 봐요, 아가씨. 우린 어떤 업무용 빌딩이든 간에, 그것도 육층까지 배달해 줄 생각은 없다고 했잖소. 리프트가 없다면 갖다 줄 수 없단 말이오. 정 그렇게 벽돌을 갖다 놓고 싶다면 아가씨 혼자 하슈.]

[하지만...]

전화는 이미 끊어진 뒤였다. 앨리슨은 수화기를 요란하게 내려놓은 뒤 신경질적으로 책상 귀퉁이를 걷어찼다. 통제 불가능할 정도로 화가 치밀 때마다 그녀가 흔히 하는 버릇이었다. 그때 전화 벨이 다시 울렸다. 지금 같아선 전화를 받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지만, 앨리슨은 마지못해 수화기를 집어 들고 험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말씀하세요!]

상대방은 당황했는지 잠시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그렇게 몇 초가 지난 후 수화기 너머로 남자 목소리가 들려 왔다.

[아, 아무래도 잘못 건 것 같습니다.]

앨리슨은 순간 자신이 얼마나 거칠게 전화를 받았는지를 깨닫고는 수화기를 고쳐 쥐고 좀더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 잠깐만 요. 미안합니다. 여긴 포토 이미지예요. 무슨 일이신데요?]

[스콧 양?]

[네. 그런데, 누구시더라. 어머 릭 랭 씨예요?]

[잘 맞췄어요. 그런데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아주 기분이 안 좋은 것 같은데.]

앨리슨은 회전 의자에 더욱 깊숙이 몸을 묻고, 책상 모서리를 툭툭 건드렸다.

[미안해요. 날 무슨 독사 같은 여자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사실 어떤 때는 나도 참을 수가 없다고요. 분통이 터진다고요. 남자들 때문에.]

[아니, 내가 뭘 어 쨌다고?]

릭이 장난스레 대꾸했다.

[아뇨, 당신이 뭘 잘못했다는 게 아니라. 나도 울분을 발산할 데가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내가 부탁한 건 조그만 벽돌 운반 대 하나였는데, 그 못된 작자가 자기네 트럭 운전수한테 빌딩 앞에다가 몽땅 그걸 쏟아 버리고 오라고 얘기하겠대 잖아요! 사실 난 벽돌을 옮기느라 여섯 번씩이나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해달라고 부탁하려던 것도 아니었어요! 흥, 그들이 보기엔 아깝게 에너지를 낭비할 만큼의 분량이 아니었던 거죠. 내가 산 벽돌 말이에요. 만약 리프트를 사용할 수 없다면 벽돌들을 부릴 수가 없다는 거예요, 글쎄!]

릭은 그녀가 성난 곰처럼 분에 못 이겨 씩씩거리는 모습을 머리 속에 그려 보았다. 그림이 완성되자 그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앨리슨은 알 만하다는 듯한 그의 웃음 소리를 듣자 갑자기 쥐구멍이라고 찾고 싶어졌다. 그가 웃음 끝에 이렇게 물었다.

[이젠 속이 좀 후련해요?]

[아뇨, 제길, 난 지금 그 벽돌들을 꼼짝없이 혼자 날라야 한다고요. 아이고, 끔찍해. 난 몰라...]

앨리슨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수화기에 대고 있는 대로 분통을 터뜨렸다. 그러나 잠시 후, 어느 정도 평정을 되찾은 그녀는 마침내 자기 자신에게 어이없다는 듯 싱겁게 웃었다.

[정말 미안해요. 당신에게 그럴 일이 아닌데. 당신이 잘못한 것도 아니고요. 게다가 만약에 당신이 나에게 일을 의뢰하려던 고객이었다면 어떡할 뻔했을까요? 첫마디부터 정이 뚝 떨어졌을 거야.]

[그럴지도 모르죠. 게다가 당신은 내가 왜 전화했는지도 모르고 있잖소.]

그러자 앨리슨은 다리를 꼬고 한 쪽 팔꿈치를 책상에 기대 우아한 포즈를 취한 다음, 즉시 살랑거리며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포토 이미지에 전화하신 걸 환영합니다. 뜨거운 커피에, 환영의 포옹, 그리고 매 컷마다 무료로 화장이 제공되고요. 자, 그러니 다시 오실 거죠. 네에?]

그녀는 집게손가락으로 머리칼을 둘둘 말아 올리며 전화선을 타고 들려오는 릭의 시원한 웃음 소리를 들었다. 어제 저녁 숲속에서의 싱그런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통나무를 가지고 익살을 떨던 모습, 그녀를 등에 업고 내달리던 모습...상념에 젖어 있던 그녀를 그의 경쾌한 목소리가 깨웠다.

[난 환영의 포옹을 받지도 않았을 뿐더러, 내 기억이 맞다면 커피를 산 것도 내 쪽이 아니었던가요?]

[하지만 촬영할 때 무료로 화장해 줄 거구요. 그리고 작업이 끝나면 커피 한잔 사죠. 그럼 비긴 거죠?]

[포옹은 어떻게 하고?]

순간 뜨거운 어떤 것이 앨리슨의 가슴속에서 꿈틀했다. 그녀는, 자신이 해서는 안 될 유희에 빠져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앨리슨은 그럴듯한 대답을 찾으려고 몸을 뒤로 젖히고 천장에 시선을 두었다.

[음, 날 등에 업고 달리기까지 했잖아요! 그런 건 뭐라 부를 거죠?]

[만만치 않군요. 앨리슨 스콧 양, 이번에는 비긴 걸로 해둡시다. 사실 내가 전화한 이유는 그런 얇은 신발을 신고 어제 저녁 같은 날씨에 동상이나 걸리지 않았나 궁금해서요.]

[신발 신는 데는 별로 지장이 없어요.]

[코감기라도?]

[천만에요.]

[정말 다행이군. 적어도 내가 당신의 불평 사항 목록을 추가하지는 않게 되었으니. 남자들에 대한 당신의 불평 말이오.]

앨리슨은 다이얼을 만지작거리다가 슬며시 미소를 띄웠다.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의 사려 깊은 마음 씀씀이에 가슴이 훈훈해져 왔다. 매티 외의 다른 사람이 안부를 물어 온 건 참으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분명 제이슨은 그런 타입이 아니었다. 늘 제이슨의 비위를 맞춰야 했던 건 오히려 그녀 쪽이었다.

[그건 그렇고, 그 벽돌들을 어떻게 할 거죠? 내가 도와 줘요?]

[아니, 그런 것까지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내 일이니까요. 난 그 벽돌들로 플라스틱 판을 내려 누른 다음 호수 분위기를 낼 물웅덩이를 만들 계획이거든요.]

[설마 농담이시겠지.]

[아니에요. 정말이라니까요. 호수 없는 호숫가 봤어요?]

[차라리 여름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진짜 물가에서 찍는 게 쉽지 않겠소?]

[그럼 도전이란 걸 해볼 수 없잖아요.]

[이제 보니 대단히 도전적인 기질까지 있군요, 스콧 양?]

[다분히 그렇다고 볼 수 있죠. 더욱이 이런 식의 계약은 늘 계절과는 상관없이 이루어지거든요. 이 일을 수락할 때도 당장에 해결해야 될 문제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이 일은 도약의 발판으로 삼을 좋은 기회죠. 이번에 찍을 표지는 내년에 연속으로 선보일 시리즈의 첫번째 작품이거든요. 만약 내가 그들의 요구를 만족시켜 준다면 계속해서 이 일을 얻을 수 있을 거예요. 그 다음달 생활비 걱정을 하지 않고 매달 지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 기분 나도 잘 알죠. 당신의 용기에 정말 감탄했소. 하지만 아직도 두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못 믿겠는데요. 물웅덩이에, 호숫가, 그리고 모닥불이라?]

[날 믿지 못하는군요, 랭 씨?]

[그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지만, 사실은 그래요. 영 불가능한 얘기로 들리니.]

[절실히 원하는데 안 될 게 어디 있겠어요. 난 금년 상반기에 선보일 혜더웨이 로맨스 중에서 가장 멋진 표지를 찍고 싶어요. 그래야 그들이 내 문지방을 뻔질나게 드나들면서 앞으로 수백 번을 더 부탁하죠.]

릭은 이 여자에 대해 점점 더 감탄하고 있었다. 이제 그는 앨리슨이 어떻게 스튜디오 안에 물웅덩이를 만들 수 있는지 한시라도 빨리 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건 그렇고 그 벽돌들은 어떻게 할 참이죠? 내가 도와 줘요? 난 리프트 같은 기계는 갖고 있지 않지만, 그 대신 튼튼한 두 팔이 있으니까.]

[고마워요. 하지만 이미 충분히 도와 줬잖아요. 나머지는 내 힘으로 어떻게 해볼래요. 문제는 생각보다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는 거지만. 그렇다면 촬영을 하루 정도 연기할 수밖에 없겠죠. 세트가 다 만들어지면 전화할게요. 만약 목요일에 촬영이 어렵다면 금요일도 괜찮겠어요?]

[물론. 아무 때나 괜찮소.]

그리고 잠시 들은 선뜻 다음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앨리슨은 그대로 전화를 끊어 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릭은 이제 그녀가 만나 봤던 사람들 중 가장 사려 깊고 따뜻한 사람들 중 한 사람이 되어 가고 있었다.

[저, 신경 써 줘서 정말 고마워요. 하지만 얘기했듯이 미리 닭고기 스프를 만들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우리 집 닭들이 들으면 아주 좋아하겠는데.]

그들은 잠깐 동안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다시 야릇한 기대감이 담긴 수화기 특유의 전 자음만이 울리고 있었다.

[전화할게요.]

마침내 결심한 듯 앨리슨이 약속했다.

[목요일 아니면 금요일 저녁 여섯 시에 봐요.]

[그러죠. 그럼 잘 있어요.]

그러나 그의 인사가 있고 난 후에도 앨리슨은 선뜻 수화기를 내려놓지 못했다. 당연히 그가 먼저 끊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십초 정도가 지나도 아무런 소리가 들려 오지 않았다. 마치 처음으로 교실 건너편에서 한 남학생의 집요한 시선을 받고 있는 여고생이라도 된 듯 묘한 흥분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다. 그리고 오초가 더 지난 뒤, 앨리슨은 찰칵 하는 소리를 들었다. 앨리슨은 수화기가 뜨거운 화덕이나 되는 것처럼 얼른 내려놓은 뒤 의자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그리고 양쪽 호주머니에 손을 구겨 넣고는 여전히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전화기를 바라보았다. 앨리슨 스콧, 바보같이 들떠 있구나! 그녀는 나직이 이 말을 되풀이했다. 가서 벽돌이나 옮기시지! 앨리슨은 잡동사니가 쌓여 있는 빌딩 뒤편의 공터로 밴을 몰았다. 거기에는 그녀가 주문한 단단한 검정 색 플라스틱 판과 벽돌들이 엉성하게 쌓여 있었다. 그녀가 혼자 힘으로 벽돌들을 운반 대에 싣고 제네시스 빌딩 정문 앞으로 돌아왔을 때는 벌써 두 시간이나 지나 있었다. 그녀는 관리인의 휘둥그래진 시선에는 아랑곳 않고 조그만 화물용 운반 수레를 차 앞에 갖다 댔다. 하지만 그 동안 그녀의 속에서는 울화가 부글부글 끓어 오르고 있었다. 차라리 날씨가 풀릴 때까지 기다리다가 칼룬 호수에서 촬영을 할까 보다! 바야흐로 오후 네 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워낙 추운 날씨인데다가 고충 빌딩 사이로 불어오는 을씨년스러운 바람 때문에 앨리슨이 느끼는 체감 온도는 더욱 낮았다. 추위도 그녀의 울화를 식혀주진 못했다. 앨리슨은 부르르 몸을 떨며 가죽 장갑을 끼고 한번에 두개씩 벽돌을 밴으로부터 운반 대 위에 옮기는 고단한 작업을 시작했다. 라디오에서는 세찬 바람 때문에 체감 온도가 영하 사십 도는 될 것이라고 했다. 앨리슨은 두터운 모자를 귀와 이마 위까지 한껏 내려 썼다. 매서운 공기에 두 눈이 시릴 지경이었다. 그녀가 상체를 굽힐 때마다 차갑고 매서운 바람이 겹겹이 껴입은 옷 틈으로 여지없이 파고들었다.

[빌어먹을 물건들 같으니!]

앨리슨은 나직이 욕설을 내뱉으며 막 벽돌 두 개를 내려놓은 뒤 두 개를 더 집으려고 돌아섰다. 코에선 콧물이 쭈르르 흘러내렸고, 손가락은 막대 고드름이나 다름없었다. 낡은 군용 파카에다가 눈썹까지 모자를 뒤집어쓰고 있는 꼴이 영락없이 심통 난 새끼 곰이었다.

[스콧 양, 몸을 천천히 굽히지 않으면 탈장에 걸려요.]

앨리슨은 어정쩡하게 벽돌을 든 채 화들짝 몸을 돌렸다. 그녀는 운반 대 옆에 기대어 서서 재미있다는 듯이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릭을 발견했다. 이제 그 지저분하고 낡아빠진 모자는 아래로 처지다 못해 그녀의 두 눈을 다 덮어 버릴 지경이었다. 그녀는 머리를 뒤로 젖히고 모자 틈으로 그의 모습을 확인했다. 순간, 앨리슨은 코로부터 입술로 흘러 내리는 따뜻한 액체의 감촉을 느끼고 기겁을 했다. 어쩔 수 없이 코를 훌쩍거리는 그녀에겐 연신 이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맙소사. 마치 히말라야 눈사람 꼴일 거야! 게다가 빌어먹을, 하필이면 이때 콧물이 흐를 게 뭐람?

[아니, 날 어떻게 찾았어요?]

[스튜디오의 문이 잠겨 있지 않고 불도 켜져 있더군요. 그래서 분명 벽돌을 나르고 있겠구나 싶었죠.]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그녀의 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가죽 장갑을 손에 끼자마자 열려 있는 밴의 뒤 칸에 올라탔다. 그녀는 기계적으로 얼른 몸을 굽히면서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리고는 손가락 틈으로 이렇게 소리 질렀다.

[오, 안돼! 보지 말아요! 난 정말 처참한 꼴이죠?]

그러나 그는 함박 웃음으로 답을 대신했다. 이어 장난스러운 그의 손길에 의해 그녀의 모자가 위로 젖혀지고 무릎에 묻고 있던 얼굴이 얼떨결에 들어 올려졌다.

[내가 보기엔 성실히 일하는 여성으로 밖엔 안 보이는데요. 자, 어서 일하러 갑시다.]

봄이 오기만 해봐라. 그녀는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이 지저분한 모자를 땅에다 묻어 버리고 말 테다! 그녀는 일어섰다. 자신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 있으리란 걸 알았지만, 다행히 주위가 어두워 그가 확실히 볼 수 없으리라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녀는 웃음 짓고 있는 파란 눈에 시선을 맞추면서 모자를 약간 위로 젖혀 썼다. 그러나 모자는 곧바로 미끄러져 내려왔다. 앨리슨은 지금의 모습을 조금 나아 보이게 하느라고 헛된 시도로 꾸물거릴 시간이 없었다. 그녀는 마치 방금 썰매를 타다 돌아온 일곱 살짜리 아이 같은 모습이었다. 다시 콧물이 슬그머니 흘러 내리는 걸 느끼는 순간 그녀는 기겁을 했다. 릭은 벽돌들을 든 채 그 자리에 서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 앨리슨을 보며 무례하게 웃었다.

[당신 콧물이 흐르고 있소.]

그는 재미있다는 듯이 그녀에게 가르쳐 주기까지 했다. 앨리슨은 뒤로 물러서서 일부러 요란하게 코를 훌쩍이고는 어린애처럼 장갑 낀 손등으로 코를 쓱 문질렀다.

[참, 휴지도 없네. 못 말리겠군. 참, 그리고 당신, 예의를 안다면, 꼭 그렇게 지적을 해야겠어요?]

릭은 이죽거리더니 들고 있던 벽돌을 내려놓았다.

[보이는 걸 안 보이는 것처럼 할 순 없잖소?]

그는 이렇게 말하더니 비스듬히 서서 주머니를 뒤지더니 꾸깃꾸깃한 손수건을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보기엔 쓰던 것처럼 꾸깃꾸깃하지만, 그렇진 않소. 난 세탁을 직접 하는데 다림질엔 영 취미가 없어서.]

[난 지금 쓴 것, 단것 가릴 처지가 아니에요.]

앨리슨은 뒤로 돌아서서 그의 구깃거리는 손수건에 얼른 코를 묻었다. 남자의 손수건을 써본 건 일생 일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영화에서는 여자들의 머리카락 몇 가닥이 빠져 나와 있는 모습도 고혹적으로 보이던데.]

앨리슨은 이렇게 투덜거렸다.

[지금 내 앞에 있잖소.]

그녀의 목 뒤로 모자에서 빠져 나온 한줌의 머리카락을 그가 슬쩍 잡아당기는 게 느껴졌다. 앨리슨은 살아 생전에 이처럼 우스꽝스러운 선머슴 꼴을 누군가에게 보였던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릭은 그런 앨리슨의 심정을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는 지저분한 야전 점퍼와 루돌프 사슴 같은 빨간 코 끝, 우악스러운 모자 아래로 겨우 보일까 말까 한 앨리슨의 눈썹까지도 귀여울 뿐이었다. 그녀는 코를 다 푼 뒤, 돌아서서 그에게 손수건을 내밀다가 즉시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어머, 세탁해서 드려야 하는 건데.]

하지만 릭은 별로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그녀의 손에서 손수건을 빼앗아 주머니 속에 구겨 넣었다.

[웃기지 말아요. 어서 벽돌이나 나릅시다.]

그는 기운차게 일할 채비를 서둘렀다. 모델 같은 편안한 일을 하는 남자에게선 좀 체로 찾아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그녀가 처음 그의 스냅 사진을 접하던 순간, 다소 제멋대로인 쾌락주의자의 모습을 읽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현실의 그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걸 계속 증명해 주고 있었다. 그들은 거의 얘기조차 나누지 않은 채 묵묵히 벽돌 나르는 일을 했다. 그들이 내뿜는 입김은 차가운 대기 속에서 흰 결정체처럼 보였다. 벽돌을 운반 대에 모조리 실은 뒤 릭이 그녀에게 말했다.

[나한테 차 열쇠를 줘요. 밴을 주차장에 세워 두고 올 테니까. 대신 그 동안에 혼자 운반 대를 밀면 안돼요.]

그가 밴의 앞쪽으로 사라지자 앨리슨은 뒤 트렁크의 문을 내리 닫았다. 힘든 일을 곁에서 도와 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멋진 일인가! 그녀는 수 년 동안 거의 모든 일을 혼자 해오고 있었다. 더 나은 상황은 생각해 보지도 않았었다. 그런데 기다리라는 그의 훈계에 훈훈한 느낌이 몸 전체로 퍼져 가는 건 어찌 된 일일까 그는 차를 세우고 돌아와서 운반 대 뒷부분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는 눈으로 맞은편을 가리켰다.

[당신은 앞에서 끌어요. 내가 밀 테니까.]

[알겠습니다!]

앨리슨은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앨리슨은 육층까지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자마자 릭의 곁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는 그의 시선이 계기판으로부터 다시 자신에게 꽂히는 걸 느꼈다. 당연히 그 순간부터 그녀는 자신의 차림새가 못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아마도 이제까지 만들어진 것 중 가장 우스꽝스럽고 지저분한 것들만 골라 걸친 꼴이리라. 그녀는 포기한 듯 머리를 뒤로 젖히고 계기판만 바라다보기로 했다.

[정말 끝내주는 모자군요.]

그가 웃음을 머금은 목소리로 말했다. 계기판의 숫자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앨리슨은 그 흉측한 모자를 아마 위로 사납게 젖혔다.

[날씨에 맞춰 제대로 옷도 입을 줄 모르는 멍청한 사우스 다코다 여자 애 치고는 그리 나쁘다곤 할 수 없겠죠.]

앨리슨은 그를 향해 샐쭉 웃어 보였다.

[육층에서 호수와 호숫가, 그리고 모닥불을 보게 된다면 그 말을 철회하겠소.]

[의심 많은 사람.]

엘리베이터가 육층에 멈춰 섰다. 앨리슨이 운반 대 위에서 재빨리 뛰어 내린 뒤 덜컹거리는 철제 문을 열어 제치자 두 사람은 합심하여 엘리베이터 안에서 운반 대를 끌어냈다. 혹시 문제의 경비원이 근무하는 날이 아닐까? 아니나 다를까. 그 경비원이 복도 저편에서 휘둥그래진 눈으로 이번에는 벽돌 무더기를 끌어내리는 두 남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릭은 이번에도 두 손을 들어 보이고는 두 눈이 휘둥그래진 사내를 향해 이렇게 얘기했다.

[그저 내 여자 친구를 태워 주고 싶어서요.]

그리고 릭이 벽돌 더미를 향해 배우 같은 몸짓으로 인사를 하자 앨리슨은 얼른 그 위에 올라탄 뒤 인디언 식으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러자 릭은 그녀가 올라탄 운반 대를 얼른 스튜디오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스튜디오 문을 닫자마자 두 사람은 또다시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릭이 운반 대 위로 벌렁 드러누웠다. 앨리슨은 문가에 기대 서서 요 몇 년 동안은 누구하고도 이런 즐거움을 느껴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상기했다.

[정말 능란하던데요. 아마 그 경비원 아저씨는 당신 말을 믿었을 거예요!]

앨리슨이 피곤한 손으로 모자를 벗자 스파게티 가락처럼 멋대로 엉켜 있던 긴 머리가 풀어졌다.

[만만치 않긴 당신도 마찬가지였소. 그 위에 올라타고, 마치 풍년제에 가는 인디언 공주처럼 의기양양하게 앉아 있는 것 하며...당신이야말로 정말 대단했소!]

[내가 정말 그랬나요?]

앨리슨은 뻐기듯이 되물었다. 릭은 즉각 그녀를 아래위로 쭉 훑어본 뒤 못 말리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래도 전에 내가 했던 얘기는 철회해야겠군요. 내 생전에 본 가장 심란한 차림새이니.]

[정말로 이마 한가운데에 벽돌 자국을 만들고 싶어요?]

[아니, 잠깐만.]

릭은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렸다.

[거울이나 봐요.]

[정말 거울을 봐야 할 사람이 누군데 그래요! 당신 머리는 마치 소몰이용 지팡이로 흐트러뜨려 놓은 것 같은데. 지금 나한테 손가락질 할 입장이 아니란 말이에요.]

앨리슨은 이렇게 엄포를 놓고는 방을 가로질러 갔다. 릭은 그녀가 들어간 작은 방에 불이 켜지는 걸 지켜보았다. 다음 순간, 그는 날카로운 비명 소리를 들었다. 그는 운반 대에서 내려와 천천히 실내를 가로질러 그녀가 서있는 방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밝은 조명으로 보아 탈의실이 분명한 그 방에서 앨리슨은 혀를 때어 물고는 거울 앞에 꼼짝 않고 서있었다.

[내 말이 맞죠?]

그가 은근히 약을 올렸다.

[그러네요.]

앨리슨은 덤덤하게 시인한 뒤 빗을 집어 들고 묵묵히 머리를 벗어 내리기 시작했다. 릭은 여전히 문가에 기대 서서 빗질을 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매서운 겨울 바람이 그녀의 콧잔등을 핑크 색으로 물들여 놓았고, 헐렁한 군용 점퍼 안에 여성적인 선이 숨어 있었다. 그때 스튜디오 문이 덜컥 열리는가 싶더니 경비원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 왔다.

[이봐요. 별일 없어요, 아가씨?]

앨리슨과 릭의 시선이 거울 속에서 동시에 부딪쳤다. 곧바로 그들은 킥킥거리기 시작했다.

[경비원 아저씨요. 아마 내가 당신을 덮치기라도 한 줄 알았나 보군.]

[내 외모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놀리는 걸 그만두지 않으면, 아저씨한테 사실이라고 얘기할 거예요.]

그러면서 앨리슨은 그를 슬쩍 째려보았다.

[이봐요! 거기 누구 없어요?]

다시 한번 고함 소리가 들려 왔다. 앨리슨은 릭의 곁을 황급히 지나서 탈의실 문을 열어 제쳤다. 경비원은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 벽돌 더미의 구석에 나뒹굴고 있는 통나무, 그리고 탈의실 문틀에 기대어 서있는 릭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여기 별일 없소?]

경비원이 다시 물었다.

[비명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아, 그건 저였어요.]

그러면서 앨리슨은 고갯짓으로 어깨 너머를 가리켰다.

[저 남자가 뻔뻔스러운 짓을 하려고 하잖아요. 아저씨, 하지만 괜찮아요. 난 쿵후 유단자거든요. 걱정해 주셔서 고맙지만, 제 힘으로 해결할 수 있어요.]

경비원은 몸을 돌리고 못마땅한 듯 고개를 흔들었다. 이윽고 스튜디오 안에 두 사람만이 남게 되자 릭은 그녀를 윽박질렀다.

[만약 경비원이 신고를 한다면 당신이 공원에서 통나무 훔친걸 얘기해야겠소.]

[내가 훔치지 않았어요. 당신이 그랬지.]

[오, 그러신가? 그렇다면 저 통나무가 당신 스튜디오에서 뭘 하고 있지?]

앨리슨은 순진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거야 모르죠. 그게 어느 날 불쑥 여기에 나타났더라고 요. 마치 당신처럼.]

릭은 문 틀로부터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는 장갑을 벗었다. 그리고는 운반 대 위에 뛰어오르자마자 그녀에게 큰소리로 지시했다.

[그러고 있지 말고, 이리 와서 벽돌 내리는 거나 도와요, 아가씨. 열 받으면 당신 혼자 놔두고 가버릴지도 몰라요.]

그들은 두 시간 동안이나 묵묵히 힘을 합쳐 일했다. 그들은 스튜디오 한 구석에 두 개의 동심원 모양으로 벽돌들을 쌓아 올렸다. 릭이 운반 대를 하역 장에 갖다 놓으러 간 사이, 앨리슨은 검정 플라스틱 판을 펼쳐서 호수 밑바닥을 만들기 위해 몇 조각으로 잘랐다. 그리고 릭이 돌아오자 두 사람은 플라스틱을 벽돌로 쌓은 안쪽 원을 덮도록 배열한 뒤, 바깥 원으로 내리 눌렀다. 그들은 앞뒤로 기다시피 하며 플라스틱의 틈새를 메워 나갔다. 그리고 호수 위를 비추는 달빛의 효과를 내기 위해서 어느 정도의 물을 이 임시 방편의 웅덩이에 갖다 부어야 할지도 생각해 보았다. 다음으로 모래 차례였다. 앨리슨으로서는 일전에 릭이 인공 호수 주변으로 모래 자루들을 대충 쌓아 두었던 것이 그렇게 다행일 수 없었다. 그들은 자루를 하나씩 이어 가며 벽돌로 쌓은 벽들을 메워 나갔다. 그러자 점점 어색한 인공의 맛이 사라져 갔다. 마지막으로 통나무가 남았다. 그들은 앨리슨이 계획했던 자리로 통나무를 옮겨 다 놓았다. 이윽고 세트가 어느 정도 완성된 듯 하자 앨리슨은 뒤로 몇 걸음 물러선 뒤 손가락으로 사각형을 만들어 실제 카메라에 어떻게 잡힐지 구도를 가늠해 보았다. 아직 카메라를 삼각대 위에 설치해 놓지 않았던 터라 그녀는 릭에게 양해를 구했다.

[저기 통나무 위에 잠깐 앉아 볼래요? 대충 어떤 모양새가 될지 가늠 좀 해보 게요.]

[그거야말로 내 일이니까.]

그는 정중하게 통나무 위에 걸터앉았다. 릭이 양팔을 느슨하게 무릎 위에 올려놓고 앉아 있는 동안 그녀는 최상의 배치를 짜내느라 앞뒤 양 옆을 오가며 고심했다. 릭은 앨리슨의 무릎과, 목요일 밤에 카메라가 세워질 높이에서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그녀의 진지한 표정을 바라보았다. 삽시간에 그녀는 자기 확신에 찬 씩씩한 직업 여성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가장 하고 싶은 일을 할 때 짓는 그 진지한 표정으로. 이미 군용 점퍼는 벗어 버린 뒤라 그녀는 흰색 스웨터에 편안한 청바지 차림이었다. 몸을 앞으로 굽힐 때마다 머리카락이 쓸려 내려오면서 그녀의 볼을 덮었지만, 앨리슨은 그것조차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참 뒤, 갑자기 앨리슨이 몸을 세우더니 깊은 생각에 잠겨 있을 때의 버릇으로 윗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방 구석에 세워져 있는 스트로보(카세논 가스를 사용한 광도가 높은 촬영용 플래시 장치)를 힐금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무슨 생각을 하다가 갑자기 씩 웃고는 손뼉을 치며 환성을 질렀다.

[그래, 그렇게 하면 될 거야.]

[다행이군.]

릭이 가벼운 한숨을 내쉬면서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지금 몇 신 줄이나 알고 있소? 자그마치 여덟 시 반이라고요. 난 저녁도 못 먹었는데, 당신도 마찬가지겠지만.]

그는 통나무에서 몸을 일으키고는 앨리슨 곁을 지나 문 쪽으로 가면서 고개를 슬쩍 틀었다.

[자, 어서 나가죠. 햄버거는 내가 사겠소.]

책상 위에 쌓아 둔 점퍼들을 가지러 가면서 앨리슨은 나무라는 투로 말했다.

[그건 안 될 말이에요. 날 그렇게 도와 주지 않았다면 모를까. 정작 식사를 대접해야 할 사람은 나예요.]

그는 이번에도 기계적으로 앨리슨의 점퍼부터 먼저 집어 들고 그녀가 팔을 끼도록 기다렸다.

[내가 먼저 말했으니까.]

[내가 사는 거 아니면 안 가겠어요.]

그녀가 고집스럽게 우겼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일이잖아요."

"늘 이렇게 고집을 세우는 거요?"

"아뇨. 하지만 일부러 나에게 찾아와서 내 척추뼈를 지켜 주는 남자들에게는 그래요."

"좋아요. 당신이 이겼소."

그리고 릭은 들고 있는 점퍼를 가볍게 흔들었다.

"자, 어서 입어요. 난 굶어 죽기 일보 직전이니까."

앨리슨은 점퍼를 입은 뒤 끝까지 단추를 채우고, 문제의 모자를 다시 집어 들었다. 그리고

릭이 점퍼를 입는 동안, 익살스러운 태도로 다시 모자를 이마 위까지 눌러 썼다.

"내 차 아니면 당신 차?"

엘리베이터로 가는 길에 그가 물었다.

"각자 차를 몰고 가면 어떨까요? 그렇게 하면 식사 후에 집으로 돌아가기도 편할 테니까."

"그럽시다."

일층에서 두 사람은 약속 장소를 정한 뒤 각자의 차로 향했다.

약속 장소에 먼저 도착한 앨리슨은 자신의 차에서 내린 순간, 울상이 되고 말았다. 현금을

제대로 챙겨 갖고 나오지 않았다는 생각이 그제서야 떠오른 것이다. 그녀는 지갑을 꺼내 돈

을 세어봤지만 잔돈 몇 문만이 짤랑거릴 뿐이었다. 그 돈으로는 두 개의 햄버거는 커녕 음료

를 사기에도 부족했다.

'맙소사. 이 일을 어쩐담.'

그녀는 부엌 서랍에 수표책을 넣어 두고 나온 걸 깨달았다. 바야흐로 거리를 오가는 차량의

꼬리도 점점 짧아지고 있었다. 그녀는 릭의 차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랐다. 꼼짝없이 그가

나타날 때까지 이렇게 주차장에서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포르쉐의 유리창으로 그의 모습이 슬쩍 비추는 것 같았다. 앨리슨은 얼른 뛰어가 그가 주차

시킬 때까지 어정정한 모습으로 기다렸다. 그녀가 그의 차 유리를 노크하자 그가 창문을 내

렸다. 그녀는 양손을 점퍼 주머니에 찌른 채 민망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정말 난 한심하지 뭐예요. 돈도 충분히 없으면서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왔으니. 저기,

괜찮다면 우리 집에 가서 오물렛 먹지 않을래요?"

"그것도 좋은 생각이군요."

"여기서 그리 멀지 않아요. 난 '섬들의 호반'에서 살거든요."

"곧 뒤 따라가겠소."

그녀는 밴으로 뛰어가면서 자신의 바보 같은 처신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눈 더미 사이로 뚫어 놓은 차도 위로 릭이 몰고 오는 차의 불빛이 희미하게 나타났다.

앨리슨이 어두컴컴한 차고로부터 뛰어나오자 그는 이번에도 차고 문을 내려 주려고 기다렸다

. 앨리슨은 그의 한결같은 정중한 매너에 다시 한 번 감탄했다.

여성의 권익이 어느 정도 신장된 오늘날, 대부분의 남성들이 잊어 버린 예의 범절들을 그는

전혀 가식 없는 태도로 재현하고있었다. 앨리슨은 그가 이러한 신사적인 방식으로 자신을 대

할때면 왠지 특별한 감동을 받곤 했다.

앨리슨은 아파트로 향하는 계단을 올라가면서 내심 미소를 지었다. 숙녀라기보다는 참전 용

사 같은 자신의 차림새를 생각하면서. 그런데도 그는 매 순간마다 기사도 정신을 발휘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가 너무도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바람에 호의를 받아들이는 게 어색한

그녀 자신이 오히려 바보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들은 신발에 묻은 눈을 털어 낸 뒤 화사하게 꾸며진 그녀의 아파트로 들어갔다. 릭은 앨리

슨이 미처 뒤돌아보기도 전에 지저분한 부츠부터 벗었다.

"어머, 그럴 필요 없는데."

그러나 그는 부츠를 가지런히 밀어 놓은 뒤 방안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야, 여긴 완전히 한여름이네. 이걸 모두 혼자서 했소?"

"네. 난 초록색을 좋아하거든요. 보시다시피."

"나도 그렇소."

그는 실내에 놓아 둔 장식품 하나하나를 눈여겨보며 점퍼를 벗어 들더니 무의식적으로 그녀

에게 건넸다.

"정말 뛰어난 감각이군요. 만약 사진을 그만두면 인테리어 사업에 뛰어들어도 되겠소."

"고마워요. 하지만 너무 비행기 태우진 마세요. 얼굴이 빨개지잖아요. 그건 그렇고, 좀 앉으

세요."

릭은 그녀의 볼이 정말로 달아오르는지를 확인이라도 하듯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고는 어깨

너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정작 그녀 자신은 점퍼들을 옷걸이에 거느라 정신이 없었

다.

옷을 다 걸고 몸을 돌리는 순간, 그녀는 자신을 보며 미소 짓고있는 그의 눈길과 마주쳤다.

"자, 어서 앉으세요. 금방 올게요."

앨리슨이 부리나케 자리를 뜨자, 그는 방안을 서성거리며 스테레오와 싱싱한 식물들, 그리고

베란다에 놓여진 소파 겸용 침대등을 둘러보았다.

거실은 환한 조명과 선명하고 다채로운 컬러, 광택 나는 마루, 금속 액자에 끼운 다양한 아

트 포스터들로 화사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한 구석에 장식용 이젤이 세워져 있는 걸 눈여겨

본 릭은 왜 그녀가 이젤을 빈 채로 놓아 두었는지 한 순간 의아했다.

그는 주머니에 양손을 찌르고, 맞은편 코너로 걸어가서 그네처럼 공중에 매달리도록 걸어 놓

은 의자의 고리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여전히 의심이 많군요?"

앨리슨이 거실로 들어서면서 대뜸 물었다.

릭은 어깨 너머로 힐끗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입술 연지를 새로 바르고, 머리도 단정하

게 빗은 상태였다. 발에는 헐렁한 파란색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내 마음을 아주 잘 읽는 것 같소?"

"우리 집에 오는 손님마다 그 의자로 가서 조심스레 살펴본 뒤 이렇게 묻곤 하죠. 정말 여기

앉아도 떨어지지 않나요?"

"난 아니오. 아직 그렇게 묻질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러려고 했겠죠."

"아니, 안 그렇소."

이제 앨리슨은 부엌으로 건너가 달걀을 꺼내려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 묘하게도 그녀는 분명

히 릭이 그렇게 물어 올 거란 예감이 들었었다.

"이봐요. 여기 앉아도 떨어지지 않나요?"

그러나 그는 벌써 둥그런 바구니처럼 생긴 의자에 몸을 묻고 있었다. 하지만 아주 조심스럽

게. 마치 체중을 완전히 실으면 의자가 떨어지기라도 할 것처럼.

"전혀요!"

그녀의 대답이었다.

그는 웃으며 배 위로 양손을 엇갈려 놓았다. 그리고 그네 타듯 뒤꿈치를 가볍게 차 올리면서

건너편에 있는 그녀를 불렀다.

"오리 놀이 어때요?"

"뭐라구요?"

앨리슨은 커다란 보울을 찾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오리 놀이. 어렸을 때 그네를 차오를 때 발아래로 기어가는 친구들 보고 오리라고 부르지

않았소?"

"아, 그거!"

앨리슨은 계란을 그릇에 깨뜨려 넣으며 문득 어린 시절을 생각하고 웃었다.

"아니, 우리는 그렇게 부르지 않았던 것 같은데요."

그녀는 기억을 짜내느라 머리를 흔들었다.

"그걸 어떻게 불렀는지 도저히 생각이 나질 않네요."

"부끄러운 줄 알아요. 다 잊어 버렸다면 그 중요한 것들을 나중에 당신 아이들에게는 어떻게

가르칠 작정이오?"

"난 애가 없잖아요."

릭은 그네 의자에 편안히 앉아 달걀 거품을 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팔

의 움직임에 따라 윤기 나는 머리칼이 찰랑거렸으며, 헐렁한 스웨터 안으로 그녀의 가슴 선

이 봉긋하게 드러났다. 그의 시선은 이제 그녀의 뒤쪽으로 움직였다. 깔끔한 머리 끝자락,

균형 잡힌 엉덩이, 그리고 길고 호리호리한 다리.

'당신은 아이를 갖게 될 거야.'

그는 자신이 방금 본 것에 감탄하며 이런 결론을 내렸다.

"아이를 가질 계획이 없는 거요?"

"아직은요. 난 우선 경력을 다져야 해요. 지금으로선 일에 박차를 가할 시기라고 여겨지거든

요."

릭은 그녀의 동작 하나하나가 마음에 들었다. 민첩하면서도 정확한. 그녀는 이제 손바닥을

허벅지에 쓱 문지르고는 소금 병을 찾으려고 찬장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중이었다.

앨리슨은 돌아보지 않아도 그의 시선이 자신을 따라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건 무척 당황스러우면서 한편으론 썩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녀는 찬장 안을 들

여다보다가 다소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이거 미안해서 어쩌죠? 오물렛 안에 넣을 게 참치밖에 없네."

앨리슨은 그를 향해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돌아섰다. 순간, 그녀는 겨우 십오 센티미터 정도

뒤에서 자신을 주시하고 있던 릭을 보고는 엉겁결에 뒤로 물러섰다.

"참치 오물렛?"

릭이 양미간을 찌푸린 채 물었다.

"참치 오물렛을 만들어 주려고 날 이리로 유혹한 거요?"

"난 당신을 유혹하지 않았을 뿐더러, 게다가 실험은 발명의 어머니라는 말도 있잖아요."

"실험이 아니라 필요로 알고 있는데."

"글쎄, 뭐가 됐든지 말예요."

앨리슨은 상관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현재로선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게 바로 실험이니깐요. 그렇죠?"

"좋아요, 참치 오물렛이라. 참고 견디는 수밖에 없겠군. 하지만 당신이 그렇게 고집만 피우

지 않았다면 지금쯤 한창 맛있는 햄버거를 먹고 있었을 거요."

"가끔은 뭐랄까, 여자로서의 자존심이라는 게 발동하거든요."

앨리슨은 참치 캔을 따기 위해 그에게 등을 돌렸지만, 바짝 다가서 있는 그의 존재가 아무래

도 신경이 쓰였다. 그런데 뚜껑이 열리자마자 그가 털썩 캔을 빼앗더니 냉큼 참치살을 손으

로 집어 입으로 털어넣는 것이었다.

"미안."

그러나 그의 목소리에는 전혀 뉘우치는 기색이 없었다

"지금 굶어 죽기 일보 직전이거든요. 그리고 당신이 그나마 몽땅 망쳐 버리기 전에 온전한

참치 맛이라도 봐야 되겠기에."

"그럼, 차라리 참치 샌드위치를 만들까요?"

그러나 다음 순간, 앨리슨은 익살스럽게 손을 흔들었다.

"방금 생각이 났는데 빵이 다 떨어졌군요."

"단 한 가지, 당신을 탓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사람의 가슴을 쿵 내려앉게 하는 그 능력이오.

그리고 그는 몸을 돌려 스테레오 곁으로 가 버렸다.

"파이브 센서스를 좋아하나 보죠?"

릭이 테이프들의 제목들을 훑어보며 말했다.

그 물음에 한 순간 싸한 통증이 그녀의 가슴을 훌고 지나갔다. 릭의 등을 바라보는 그녀는

목구멍으로 무언가가 울러 치밀어 오르는 걸 느꼈다.

그가 순간적으로 몸을 획 돌려 그녀를 바라보려 하자 앨리슨은 얼른 찬장으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네."

그녀는 겨우 한마디를 뱉어 냈지만, 그 말은 얼음 송곳처럼 날카롭고 차가웠다.

릭은 자신이 그녀의 아픈 부분을 건드렸다는 사실을 즉시 알아차렸다. 그녀에게서 다시 배어

나오는 방어적 태도에 그는 오싹한 한기를 느꼈다.

"한 곡 틀어도 되겠소?"

앨리슨은 말없이 프라이팬만 쏘아보고 있었다. 만약 릭이 우연히라도 제이슨이 좋아했던 노

래를 튼다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하면서. 하지만 그녀 자신도 파이브 센서스를 좋아

했다. 그러니 파이브 센서스만 안 된다고 말할 수도 없을 터였다.

"그러세요."

이제 그녀는 한층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도대체 무슨 조화로 저토록 삽시간에 돌변할 수 있는지 의아해하는 그를 놔둔 채 하던 일로

되돌아갔다.

그녀가 오물렛을 막 완성할 즈음, 멜리사 맨체스터의 노래가 실내에 울려 퍼졌다.

그녀는 내심 안도하며 스테레오 곁에 서서 자기를 지켜보고 있는 그를 흘깃 쳐다보았다.

'묻지 말아요.'

그녀는 마음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제발 묻지 말아요.'

고맙게도 그는 묻지 않았다. 대신 그는 소파에 앉아서 그녀가 부를 때까지 기다리기로 한 것

같았다.

그는 몸을 죽 펴고 발목을 다른 쪽 무릎 위에 올려놓고는 양손을 배 위에 포개 놓은 채 식탁

을 차리고 있는 앨리슨을 비스듬히 훔쳐 보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갑작스런 방어적 태도의

원인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남자일 거야.'

그녀의 태도로 미루어 보아, 그 남자가 어떤 노래와 특별한 관계를 갖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 그는 이 집에 다시 오게 돼도 파이브 센서스의 노래는 절대로 틀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준비됐어요."

앨리슨이 테이블 곁에 서서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킨 뒤 방을 가로질러 가 그녀 곁에 섰다.

"내가 한 말이 본의 아니게 당신을 곤란하게 했다면 미안하오. 그게 어떤 일이건 간에 당신

을 곤란하게 할 생각 따윈 조금도 없었소. 정말 미안하오."

앨리슨의 입술이 살짝 벌어지며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으며 어렵게 말을 꺼냈다. 그녀의 목소리가

간헐적으로 떨리고 있었다.

"그게 어디 당신 잘못인가요? 내가 극복해야 할 일이에요. 그게 전부예요."

그의 진지한 눈길이 그녀에게 무언가를 묻고 있었지만, 릭은 더 이상의 질문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대신 그는 앨리슨이 앉도록 의자를 당겨 주었다.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자, 이제 앉으실까요."

앨리슨은 싱긋 미소를 지어 보인 뒤 자리에 앉았지만, 초저녁부터 그들을 감싸고 있던 흥겹

고 들뜬 분위기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들은 그 방안을 배회하는 어떤 망령이 그들 사이를 갈

라 놓기라도 한 듯 어색한 침묵 속에서 묵묵히 식사만 하고 있었다. 앨리슨은 가끔씩 자신에

게 와 꽃히는 릭의 시선을 애써 외면했다. 그의 시선이 풀이 죽은 그녀의 입술에서, 축 처진

어깨로, 이어 그녀의 왼손으로 옮겨졌다. 아무런 반지도 끼어져 있지 않은.

그리고는 한때 그 방을 함께 썼을 어떤 남자의 흔적을 찾으려는 듯 거실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나 그녀의 방에서는 그 남성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어떠한 사진이나 잡지도 눈에 띄지

않았다.

이제 릭의 시선은 다시금 그녀에게 모아졌다. 맵시 있는입술, 보기 좋게 부풀은 가슴, 갸름

한 턱, 조개 같은 귀, 힘없이 시선을 떨어뜨리고 있는 눈, 그리고 기계적으로 숟가락을 움직

이고 있는 손으로 시선을 움직였다. 그는 팔꿈치를 식탁 모서리에 받치고 앨리슨 쪽으로 슬

며시 몸을 기댔다.

"혹시 내가 침범하지 말아야 될 구역에 발을 들여 놓으면 언제든 제지하시오."

릭이 이런 말로 입을 열었다.

"누군가 허락한 사람이 있는 거요?"

앨리슨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무언가를 숨기는 듯한 눈빛이었다.

"네."

그녀는 이제 더는 못 먹겠다는 듯 포크를 내려놓았다.

"내 자신이요."

그 순간 릭의 두 눈에 분노의 빛이 번쩍 스쳤다.

"내 얘기는 그게 아니란 걸 당신도 잘 알고 있잖소. 난 지금 당신 삶 속에 어떤 남자가 존재

하느냐고 묻고 있는 거요."

다시 앨리슨의 가슴이 거세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제이슨에게 생각이 미치자 이상

하게 냉정해지는 기분이었다.

"아뇨."

그녀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원하지도 않구요."

릭은 입술을 꾹 다물고 잠시 그녀를 관찰했다.

"나쁘진 않군. 하지만 물어 볼 수밖에 없었소. 지난 이틀 저녁은 나로선 기막히게 즐거운 시

간이었소."

릭은 그녀로부터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의자 뒤로 몸을 깊숙이 묻으면서 철제 팔걸이에 팔꿈

치를 내려놓았다.

한편, 그녀는 깍지낀 손가락으로 이마를 꾹꾹 눌러댔다. 짧은 한숨이 그녀의 입술로부터 새

어 나왔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어요. 하지만 그뿐이에요."

"그렇소?"

"그래요!"

앨리슨이 사납게 대꾸했다. 그러나 그녀의 입술은 알게 모르게 떨리고 있었고, 눈빛은 무언

가를 숨기고 있는 기색이 역력했다.

"누군가가 당신에게 상처를 주었고, 당신은 다시는 그 빌어먹을 일을 되풀이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느낌을 내가 받았다면?"

"그렇다 해도 당신이 상관할 일이 아니잖아요."

앨리슨은 어깨를 꼿꼿이 펴며 고개를 치켜 올렸다.

"그거야 두고 볼 일이고."

릭은 정색을 하고서 한치의 의혹도 숨어 있지 않은 확신에 찬 어조로 대답했다.

"난 함께 일하는 모델들과는 어떠한 사적인 관계도 만들지 않겠다는 원칙을 갖고 있어요. 미

안해요. 혹시 당신이 어떻게 생각했는지 ……."

앨리슨의 눈동자가 어렴풋이 흔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접시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러니까, 내 얘기는……. 당신을 절대로 끌어들이고 싶지 않다는 거예요."

"당신은 그러지 않았소. 매사에 숙녀다움을 잃지 않았으니까. 이젠 됐나요?"

두 사람의 눈동자가 부딪쳤다. 미세하게 흔들거리는 갈색 눈동자와 침착한 파란 눈동자가.

그 순간 앨리슨은 자신의 의지를 배반하듯 다시 한 번 그의 흠잡을 데 없는 용모에 기가 질

리는 것 같았다. 비록 그를 온전히 신뢰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이한 순간만이라도 그

가 진지하다는 사실을 믿고 싶었었다. 그의 얼굴에서는 정면 승부 없이는 쉽게 물러서지 않

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뿜어 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얼른 마른 입술을 축였다.

"정말 긴 하루였어요."

"그만 됐소. 난 가겠소."

그가 벌떡 일어서더니 접시를 들고 개수대로 갔다.

앨리슨은 저토록 완벽한 신사에게 이처럼 쌀쌀하게 굴 수밖에 없는 자신이 한심해지면서 일

말의 죄책감마저 들었다. 그러나 제이슨과의 일이 있고 난 후 그녀의 자위적 본능은 철저히

단련된 상태였다.

'릭을 빨리 내보낼수록 좋으리라.'

릭은 현관 앞까지 터벅터벅 걸어가서는 문간에 등을 기댄 채 부츠를 신었다.

그녀는 옷장에서 그의 점퍼를 꺼내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하고있는지 채 깨닫기도 전에 제이슨

에게 했던 버릇대로 그가 팔을 끼도록 옷을 펼쳐 들었다

순간, 릭의 얼굴에 잠깐 놀라는 기색이 스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몸을 돌려 팔을 끼웠

다. 그런 다음 다시 한 번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어정쩡한 자세로 기다리고 있

는 동안 천천히 단추를 채웠다.

앨리슨은 닳아빠진 그의 재킷 칼라가 점점 좁혀지는 걸 망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일부

러 천천히 단추를 채우고 있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이제 그는 마지막 단추를 채운 취, 느긋하게 주머니에서 장갑을 꺼냈다. 앨리슨은 그의 앞에

선 어느 곳에도 안전하게 눈을 줄수 없다는 사실을 실감하며, 그의 손을 응시했다. 릭은 느

릿느릿 장갑에 손가락을 끼워 넣으며 자꾸 피하려는 듯한 그녀의 얼굴을 살피고 있었다.

이제 그는 옷을 완전히 차려 입고 떠날 준비가 되었건만, 도무지 현관 문을 열 기미를 보이

지 않았다.

"난 당신이 예전에 한 얘기를 기억하고 있소. 그리고 당신이 아까 한 얘기가 무슨 뜻인지도

알겠고."

그의 목소리가 더욱 낮아졌다.

"하지만 난 이렇게 해야겠어."

다음 순간, 앨리슨은 자신의 턱을 들어 올리는 그의 장갑 낀 손에서 얼핏 가죽 냄새를 맡았

다고 막연히 느꼈다. 그리고 부드럽고 따스한, 살짝 열린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닿았다

. 장갑낀 단단한 손이 그녀의 어깨를 부여잡고 위쪽으로 끌어 올렸다. 그녀는 완전히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 잠시 후 두 사람의 입술이 살며시 떨어졌다.

그는 고개를 들고 앨리슨의 두 눈을 잠시 들여다보았다. 놀라서 다물지 못하고 있는 열려진

두 입술에 시선이 멎었다

"끝내주는군."

그는 달콤한 목소리로 한마디 속삭였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가 버렸다. 떨리는 가슴을 주체

하지 못하는 앨리슨을 차가운 밤공기 속에 그대로 남겨둔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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