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찬란한 적황색 머리칼로 변신한 비비엔 주친스키가 스튜디오를 방문했다. 그녀의 얼굴은 사진에 나타난 것처럼 길어 보이지는 않았다. 잡티 하나 없이 깨끗한 피부는 아직도 지난 여름에 선 탠 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입술은 관능적이라는 말 외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을 듯했다. 투명한 파란 빛이 도는 두 눈은 거의 오십 센트 짜리 동전처럼 둥글었다. 앨리슨은, 무겁게 내려앉을 것처럼 드리운 굵고 긴 속눈썹이 풍부한 그늘을 만들어 주는 그런 눈이야말로 가장 멋진 사진을 만들어낸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가슴, 가슴 역시 눈썹처럼 내려앉을 만큼 풍만했다. 비비엔 주친스키는 사진으로 표현할 수 있는 모든 장점들을 갖춘 완벽한 외모의 소유자였다. 그녀의 가장 큰 단점이라면, 앨리슨이 한눈에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도무지 머리에 든 게 없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이 점은 사진으로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마치 분쇄기처럼 요란하게 껌을 씹고 있었다. 그리고 대화 도중이라도 상관 않고 수시로 루즈를 꺼내 도톰한 입술 위에 덧바르곤 했다. 그녀가 시종 말끝마다 붙이는.끝내준다. 라는 단어엔 앨리슨 조차 미소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어머, 끝내주는 스튜디오네요.]
비비엔은 대뜸 들어오자마자 이 말부터 내뱉었다.
[어머, 그 부츠 좀 봐! 어디서 샀어요? 나도 비슷한 건 있는데 그것처럼 끝내주진 않거든요. 정말 끝내주네.]
앨리슨은 일순 놀랐다. 이제까지 그녀와 함께 작업했던 대부분의 모델들은 비교적 지적이고, 얌전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대개 다른 전문직을 꿈꾸고 있는 학생들로, 모델 일은 학비를 조달하기 위한 방편인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비비엔 주친스키는 완전히 다른 경우에 속했다.
[참, 남자 모델은 어떻게 생겼어요? 내 말은요, 끝내주는 몸매를 갖고 있느냐는 거예요.]
[아주 끝내줘요.]
앨리슨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당신처럼요, 비비엔.]
[와, 정말 요? 난 잘빠진 남자가 좋더라.]
[혹시 수영복 있어요?]
[그럼 요, 수십 벌은 될걸요.]
[그림 촬영 때 몇 개 가져 올 수 있어요?]
[물론이고말고요.]
[책에서는 여주인공이 파란색 비키니를 입은 걸로 되어 있어요.]
[세상에, 난 끝내주는 파란색 비키니를 갖고 있다고요. 지난 여름에 샀는데 메이든의 구조 원들이 눈을 떼지 못하더라니 까요. 난 그때 매일 다른 비키니를 갈아입고 해변에 갈 생각이었는데, 글쎄 그땐 수영복이 다섯 벌밖에 없었거든요. 근데 엿새 동안 나가야 했었으니...내가 어떡했겠어요?]
그리고 나서 그녀는 도리 없다는 표정으로 손바닥을 쳤다.
[그런데 그때 이 비키니를 찾아낸 거예요.]
[비비엔, 그럼 그 수영복 여섯 벌을 모두 가져올 수 있겠죠?]
어떤 면에선 비비엔 처럼 단순한 성격이야말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전형적인 타입일 수도 있었다. 비비엔은 한 손을 허리 게에 갖다 댄 채 큰 눈으로 앨리슨을 순진하게 바라보았다.
[오우, 그럼 요. 그러고말고요.]
[그럼 목요일 저녁에 보죠.]
[그래요. 참 그 부츠 어디서 샀는지 다시 얘기해 줄 수 있어요?]
그 순간, 앨리슨은 비비엔을 고용한 게 실수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접어 두기로 했다. 앨리슨은 대책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며 비비엔이 방금 떠난 문가에 서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신고 있는 굽 높은 부츠를 내려다보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래, 정말 끝내주는 부츠야.]
다음날 오후, 앨리슨은 양손에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든 채 온통 모래 천지가 되어 버린 스튜디오 한복판에 난감한 표정으로서 있었다. 릭 랭이 산소통과 오리발, 호스, 그리고 파이프 따위를 한 아름 안고 스튜디오 안으로 막 들어서던 찰나였다.
[안녕.]
그녀는 화들짝 놀라 릭을 올려다보았다. 한 순간 그의 출현에 반가워 하는 자신을 깨달으며.
[어머, 안녕. 세상에, 그걸 가져 왔군요!]
앨리슨은 쓰레받기를 집어 던지고 양손을 허벅지에 대충 문지른 뒤 문간으로 뛰어갔다.
[이 물건들을 당신 혼자 옮길 수나 있었겠소? 이렇게 무거운데...]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너무 고마워요. 적어도 오늘 하루, 한가지 문제는 해결했군요.]
[일이 뜻대로 안 되나 보죠?]
릭은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모래랑 앨리슨의 지저분한 얼굴에 눈길을 주었다. 그녀는 여전히 낡은 청바지와 재킷을 입고 있는 그를 쳐다보았다. 아무리 좋게 봐도 뭇 여성들의 시선을 붙잡는 남자가 입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차림새였다.
[그런 것 같아요.]
앨리슨은 너저분한 쓰레기 더미를 눈으로 가리켰다.
[아무래도 이걸 찍기 위해 플로리다로 날아가야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중이에요. 우리가 거기에 닿기 전에 비비엔이 날 돌아 버리게 할지도 모르지만.]
[비비엔 이라는 아가씨가 당신이 원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나 보군요?]
[비비엔은...]
앨리슨은 그럴듯한 단어를 찾다가 슬며시 악동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비비엔은...끝내줘요.]
릭은 사적인 농담을 내뱉을 때 그녀의 입술 한 귀퉁이가 슬쩍 기울어진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았다. 앨리슨이 미소 지을 땐 그녀의 입술도 눈을 따라 웃었다. 오늘 그녀는 은회색 골덴 바지에 발목까지 오는 짙은 카키색 워커를 신고 있었다. 마치 오리 사냥을 나서는 사교계 아가씨처럼 보였다. 아주 귀여워.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터틀넥 스웨터 위에 후트 점퍼까지 받쳐 입은 것 하며. 그러나 머리 위로 올려져 있던 선글라스가 다시 그녀의 눈을 가렸다.
[비비엔에게 어떤 문제라도 있는 거요?]
[전혀요!]
그러나 앨리슨이 대뜸 내뱉은 말엔 무언가 야릇한 암시 같은 게 담겨 있었다.
[전혀요. 그녀는 정말 얼굴도 예쁘고 멋진 몸매를 가지고 있더군요.]
[나로선 다행이군요.]
릭은 일부러 히죽거렸다.
[그나 저나 언제 그녀에게 키스할 수 있는 거죠?]
[원하신다면 아무 때나. 내가 보기엔 그런 기회가 얼마든지 생길 것 같더군요. 나중에 만나보면 알겠지만, 주친스키 양은 한마디로 끝내주는 몸매를 가진 남자들을 좋아한대요.]
그는 몸을 뒤로 젖히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멋지고 편안한 웃음 소리, 그러나 자만심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매력적인 웃음이었다.
[좀 도와 줘요?]
릭이 친절하게 물었다.
[안 물어 볼 줄 알았어요. 저 빌어먹을 마대 자루가 왜 그렇게 무거운지. 마루 한복판에서 옴짝달싹 도 않는 거 있죠.]
릭은 어느새 남루한 재킷을 벗어서 냉장고 모서리에 아무렇게나 걸쳐 놓았다.
[어디다 옳길 건지 말만 해요.]
앨리슨은 배경 막이 걸린 한 구석을 가리켰다. 그가 마대 자루귀퉁이를 움켜잡고 잡아 끄는 동안 그녀는 얼른 그곳으로 가서 길다란 스탠드를 치웠다. 그리고 릭이 나머지 자루들을 옮기는 동안 그녀는 모래 부스러기들을 치웠다. 그런데 그가 무거운 자루를 끄느라 힘을 쓸 때마다 등줄기로 불끈불끈 솟아 오르곤 하는 근육들에 그녀는 자꾸 시선이 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이런 일을 늘 혼자 했나요?]
빈 공간에 자루를 밀어 넣던 그가 툴툴거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가끔은 요. 해야 할 일은 하는 편이죠. 가령 어떤 초보 강습이 필요한 경우도 있죠. 가끔은 내가 뭘 해야 하는지 알면 놀래실 걸요.]
[그건 이미 지난번에 여기 왔을 때부터 알아봤죠.]
[지난번이라고 노련하게 일축해 버리다니, 아주 점잖으시군요.]
앨리슨은 빗자루의 움직임에 눈을 주면서 이렇게 응답했다.
[이 모래도요. 난 골재 회사에서 이걸 얻었어요. 대신에 난 내년 여름에 한창 성수기를 맞을 그 회사의 작업 장면을 무료로 몇 장 찍어 주기로 했죠. 아마 크리스마스 시즌에 낼 달력이나 그 비슷한 거에 실을 건가 봐요.]
릭은 스튜디오를 한바퀴 획 둘러보았다.
[촬영하는 일의 성질에 따라 이렇게 많은 장비들이 소용된다는 건 미처 몰랐어요. 내 경우엔 이미 나에게 맞게 조절된 간단한 장비만 있으면 되거든요.]
[어머, 당신도 사진 작가예요?]
앨리슨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야생 동식물을 그리는 화가죠. 하지만 주로 내가 촬영한 사진을 보고 그릴 때가 많아요.]
그녀는 릭이 장터에서 약 장사를 한다고 했어도 그보다는 더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화가라고요?]
[하지만 당신의 경우처럼 이름을 날릴 수 있는 화려한 직업은 아니죠. 그래서 부업으로 모델 일을 하고 있는 거요.]
[내가 학교 사진을 찍는 것처럼요.]
[뭐라고요?]
[나도 학교 사진 작업을 해요. 그러니까 학교 건물과 의자들, 일렬로 세운 학생들 등등!]
그녀는 이 말을 하면서 양손을 펴서 귀 옆에 갖다 대고는 광대 같은 시늉을 지어 보였다.
[그 일 역시 돈벌이 때문에 하는 거죠.]
[뉴욕에 있는 출판사하고 일을 한다면 당신의 경력에도 상당히 도움이 되겠군요.]
[지금 뭐라고 말할 순 없지만, 물론 도움이야 되겠죠.]
앨리슨은 결심한 듯이 다시 비질을 시작했다.
[한때는 출발이 좋았던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다음 순간, 앨리슨은 고개를 푹 수그리더니 말을 멈춰 버렸다. 릭은 다시 비질만 열심히 해대는 그녀를 말없이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런데 뭐죠?]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빗자루를 내팽개치고는 파일 박스 쪽으로 몸을 돌려버렸다.
[내가 이 지역 광고 대행사하고 했던 일을 좀 볼래요?]
[물론. 아주 재미있겠는데요.]
그녀의 뒤를 따라오면서 릭이 쾌활하게 대답했다. 앨리슨이 엄청난 재능의 소유자라는 걸 그가 눈치채는 데는 삼십 초도 걸리지 않았다.
[대단하군요.]
릭은 앨리슨의 사진 작품들을 열심히 들여다보며 그녀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말했다.
[착상이 아주 신선하고 사진에 생기가 있어요.]
그의 말은 옳았다. 정적인 대상에겐 생기를, 움직이는 대상에겐 속도 감을, 눈으로 보여지는 대상에겐 맛과 향을 가미할 수 있는 게 그녀의 능력이었다. 그리고 릭은 그녀가 개인적으로 남녀 한 쌍의 모델을 선호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녀가 찍은 대부분의 상업 광고는 대개 남녀 한 쌍의 모델을 주축으로 이루어진 것들이었다.
[정말 잘 봤소. 아주 멋져요, 정말로.]
[겉보기엔 그렇겠죠.]
그가 흘금 앨리슨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맨 위에 놓여있는 사진만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눈에 띄게 잘생긴 남자모델이 찍힌 사진이었다. 올이 굵은 셔츠를 입은 그 남자는 묵직한 반석과 색깔이 바랜 외양간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그 낡은 건물은 남자의 수려한 용모와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곳은 인공 세트가 아니었다. 그림자로 보건대 그녀는 해가 지상으로부터 낮게 떠 있을 때, 예컨대 새벽이거나 황혼 무렵에 촬영한 게 분명했다. 사람뿐만 아니라 돌과 나무 판자까지도 진하고 묵직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파인더 뒤에 숨은 부정할 수 없는 그녀의 예술가적 감성이 한 컷 한 컷에서 어김없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릭 랭이 사진들을 뒤적거리고 있는 틈으로 앨리슨은 제이슨의 얼굴이 잠깐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그 순간 또다시 날카로운 상실감에 가슴이 저려왔다. 하지만 이번엔 직업적인 의미에서의 낭패감 같은 것이었다. 제이슨과 함께 한 직업이 그녀의 작품 활동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기에 더욱 그랬다. 제이슨 애덜리를 잃은 것은 그녀에게 단순한 연인을 잃은 이상의 타격이었다. 문득 고개를 든 릭은 그녀의 표정이 심상치 않게 일그러져 있음을 알아차렸다. 순간, 그가 자기를 관찰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앨리슨의 볼이 발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사진 속을 뒤지다가 가장 마음에 드는 사진 한 장을 집어 냈다.
[난 이걸 봉 아페티 잡지에 팔았어요.]
그것은 옅은 호박색 와인이 들어 있는 병을 통해서 비추는 얇게 자른 싱싱한 사과와 치즈를 찍은 사진이었다.
[음, 보기만 해도 입에 침이 고이는군요.]
앨리슨은 릭을 향해 잠시 눈을 흘겼지만, 그는 여전히 사진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얼마나 자주 제이슨은 이런 미사여구를 남발했던가. 즉흥적이고, 입에 발린 칭찬들. 단둘이 작업할 때마다 그 거부할 수 없이 매력적인 미소를 입가에 흘리며 나의 감정을 기만했던 그 칭찬들. 그리고 나는 바보처럼 추호의 의심도 없이 그 모든 것을 믿었었지. 그녀는 그 생각을 떨쳐 버리려고 재빨리 침을 삼켰다. 그리고는 얼른 선글라스를 바로 쓰고 어깨를 쭉 펴면서 양손을 호주머니에 꽃은 채 몇 발짝 물러섰다.
[저, 오늘 모래 주머니를 옮겨 주어서 정말로 고마웠어요.]
앨리슨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진심으로.]
도피임이 분명한 쌀쌀 맞은 거부였다. 스튜디오 안에 갑자기 냉기가 감돌았다. 그녀의 돌연한 변화에 잠깐 어리둥절하던 릭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하지만 그는 즉시 벗어 놓았던 재킷을 집어 들었다.
[가기 전에 뭐 또 도와 줄 일은 없소?]
[아뇨. 이제 퇴근하려던 참이었어요.]
[그렇다면 따끈한 커피 한잔 어때요? 여긴 바깥보다도 더 추운 것 같은데.]
[늘 그런걸요. 라디에이터를 한껏 틀어 놓아도 소용없어요. 이젠 면역이 됐다니까요.]
릭은 가만히 서서 기다렸다. 이 여자는 지금 내 청을 승낙도 거절도 못한 채 교묘히 회피하고 있는 거야.
[아무래도 구식 스타일의 수영복을 찾아 봐야겠군요. 무릎까지 내려오는 길다란 것으로. 이곳이 늘 이렇게 춥다면 말이죠.]
[오, 그건 걱정할 필요 없어요. 비비엔이 따뜻하게 덥혀 줄 테니까요.]
[지금, 당신이 그 비비엔 이란 여자에 대해 점점 이상하게 생각하도록 만들고 있는 거 알고 있소?]
그는 앨리슨이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그녀의 입술 끝이 살짝 말려 올라갔지만, 억지 웃음임이 역력했다.
[저런, 난 굳이 비비엔의 대해 어떤 평을 하자는 건 아니었어요. 사실 그녀는 뭐랄까. 약간 특이하게 보인다고 나 할까. 뭐 그런 정도죠.]
앨리슨은 다소 미안한 듯한 어투로 말했다.
[그녀가 똑똑하지 않다는 사실을 정중하게 표현하는 한 방법이겠죠.]
[내가 누구에게 감히 그런 말을 할 수 있겠어요?]
사실 요 몇 달 동안 제이슨에게 푹 빠져 있었던 그녀 자신이야말로 그다지 똑똑한 편은 못 되리라. 어쩌면 비비엔 주친스키 같은 아가씨처럼 마음에 드는 남자와 함께 지내다가 서로에 대한 흥미가 시들해지면 별다른 앙금 없이 헤어지는 그런 관계가 더 현명한 건지도 몰랐다. 릭 랭은 재킷의 단추를 모조리 채운 뒤, 양손을 호주머니에 깊숙이 찌른 채 서있었다.
[그런데 늘 그 선글라스 뒤에 눈을 감추는 이유가 뭐죠?]
[뭐라고요? 아, 이거!]
앨리슨은 억지로 경련적인 웃음을 터뜨리며 얼른 선글라스를 벗었다.
[내가 이걸 쓰고 있다는 것조차 몰랐어요.]
[그러셨겠지.]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쳤다. 진지한 눈빛, 그는 흔들리지 않는 단호한 시선으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방금 난 당신에게 커피 한잔 할 생각이 없냐고 물었더랬소. 내가 보기엔 당신이 그 대답을 교묘히 피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 제안의 진의를 파악하기도 전에 앨리슨은 짜릿한 감정을 느꼈다. 맙소사, 비비엔의 표현대로라면 이 사람은 정말 끝내주는구나. 그 말이야말로 이 순간엔 너무도 적절한 표현이 아닐까. 게다가 그는 어느 여자라도 고개를 돌릴 만큼 미남이 아닌가? 하지만 그의 제안이 아무리 유혹적이더라도 앨리슨은 제이슨에게서 얻은 비싼 교훈을 잊어서는 안 되었다.
[고맙지만 더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어서요. 굵은 통나무를 찾아 내야 하거든요.]
릭은 복잡한 생각을 정리라도 하려는 듯이 천천히 머리를 흔들었다.
[뭐라고요?]
[통나무 말이에요. 난 호숫가에 놓을 통나무가 필요하다고요. 사실 요 며칠째 날씨가 추워서 숲속에 가는 걸 미루고 있었어요. 대충 저 부근에다 나무 몇 개를 놓을 계획이거든요.]
앨리슨은 그렇게 말하며 실내 구석을 가리켰다.
[모래 자루도 제대로 못 옮기면서, 이젠 숲에서 통나무들을 끌고 오겠다는 얘기요? 그것도 당신 차로?]
[정확히 얘기하면 밴 이죠.]
[당신 밴으로, 언제 멈춰 버릴지 모르는 저 삐걱거리는 엘리베이터로, 이곳으로 실어 나르겠다? 그것도 당신 혼자서 말이오?]
앨리슨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해봐 야죠.]
[안돼. 당신은 그럴 수 없소. 그 자리에서 허리가 어떻게 돼버릴 거요. 그럼 난 비비엔 주치니 하고 키스할 기회를 영영 잃게 될 거고.]
앨리슨은 어이가 없어 웃음을 터뜨렸다.
[주친스키 라니까요.]
그녀는 웃음을 그치지 않으면서 말을 이었다.
[어머, 당신이 그 기회를 놓치는 게 그렇게 큰 손해가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군요.]
[흠, 그래요? 그 판단이야 내가 해 야죠. 아무래도 통나무를 모으는 일을 도와 줘야 할 것 같군요. 미스 주치니 라는 이름만 들어도 달콤한 무언가가 떠오르니 말이오. 아마도 나는 끝내주는 몸매에다 앙증맞고 깜찍한 얼굴을 좋아하는 것 같소.]
이렇게 넉살을 떨고 있는 그의 눈엔 장난기가 가득했다. 그는 여전히 헝클어뜨린 머리칼에 허름한 부츠를 신고 폐기 일보 직전인 재킷의 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서있었다. 배관공과 잡화상, 그리고 회계사들로 엮어진 보통 사람들의 세상과 당당히 마주하고서. 빌어먹을! 앨리슨은 이런 그가 좋았다. 그가 은막 스타와도 같은 외모를 가져서 만은 아니었다. 그는 조급하지 않게 사람을 설득하는 힘과 유연한 유머 감각의 소유자였다. 무엇보다 그는 지난 일년 전부터 앨리슨에게 커피를 함께 마시자고 초대한 최초의 남자가 아닌가. 제 컵도 제대로 씻지 않으면서 그녀의 술을 모조리 축 내곤 했던 제이슨 애덜리 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그렇다면 우선 커피 한잔을 들고 내 차로 통나무를 실어 오면 되겠군요.]
엘리슨은 할 수 없이 이렇게 제안했다.
[사실 난 지금 꽁꽁 얼어붙기 일보 직전이에요. 차라리 밖에 나가 쓸만한 통나무가 있는지 찾아 보는 게 낫겠소.]
릭은 빙그레 웃으면서 요란하거나 가식적이지 않은 단순한 어깻짓으로 나가자는 시늉을 했다. 그녀는 문 뒤에 세워져 있던 옷걸이에서 자신의 재킷을 집어 들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 릭이 재빨리 앨리슨으로부터 옷을 빼앗더니 그녀가 팔을 끼우도록 들고 섰다. 제이슨 이라면 꿈도 못 꿀 행동이었다. 생각이 제이슨과의 생활에 미치자 앨리슨은 그가 소매를 구기지 않고 옷을 입을 수 있도록 재킷을 들고 서있었던 사람은 오히려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앨리슨은 옷을 입을 때 남자로부터 도움을 받는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를 잊은 지 오래 였다. 릭 랭과 함께 삐걱거리는 낡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면서 방금 있었던 그 순간이 더욱 선명한 느낌으로 새록새록 다가왔다. 그녀는 놋쇠로 만든 엘리베이터의 문짝과 낡은 계기판만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을 관찰하고 있는 그의 눈초리가 못내 불편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그녀의 밴 앞에 다다랐을 때 그는 다시 한번 앨리슨을 놀라게 했다. 운전 석 쪽으로 그녀를 쫓아오더니 그녀로부터 재빨리 차 열쇠를 빼앗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장갑을 벗고 문에 열쇠를 꽂았다. 그녀는 그 모든 행동들을 믿기 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요즘 세상에도 이런 행동을 하는 남자가 남아 있던가? 그러나 릭은 그녀의 놀란 표정에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싱긋 미소만 짓고는 열쇠를 건네주었다. 그리고 그녀가 올라타기를 기다린 다음 운전 석 옆 자리로 향했다.
[요즘은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이 많지 않아요.]
그녀가 대뜸 지적했다.
[어떤 행동 말이오?]
[코트 입는 걸 도와준다든가 차 문을 열어 주는 것 등.]
[내가 잠깐씩 방심할 때마다 어머니께서 내 머리를 쥐어 박아가며 가르치셨소. 대략 스물 아홉 번 정도 맞고 나니까 몸에 습관으로 배게 되더라고 요. 상상해 봐요. 이 나이에도 잊어 버릴 때마다 여전히 어머니에게 혼나고 있을 내 모습을.]
앨리슨은 그의 말에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이야기는 릭을 한층 더 인간적으로 보이게 했다.
[맙소사. 지독하게 추운 날씨군.]
그는 몸을 부르르 떨며 얼음이 얇게 슬어 있는 유리창을 가리켰다.
[남쪽으로 돌려서 십이 번 고속 도로를 타요. 시내 한복판에서 통나무를 찾을 만한 데를 알고 있으니까.]
[시내 한복판에서요?]
[거의 그렇다 할 수 있죠. 테오도어워스 공원이니까.]
[테오도어워스 라면 공공 장소잖아요. 그건 법에 저촉된다고요. 만약 들켜 봐요. 벌금 물 게 뻔한데.]
릭은 그녀의 말에 삐딱하게 악동 같은 미소를 지었다.
[아직도 난 어머니에게 더 맞아야 한다니까. 하지만 뭔가 몰래 한다는 건 재미있는 일 아닌가요. 물론 당신의 결정에 달려 있소. 내 말은 FBI의 수배자 명단에 당신이 오르는 데 굳이 내가 기여하고 싶지는 않다는 거요.]
그녀가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어떡하죠? 당신이 그렇게 할 것 같으니. 그럼 난 당신이 결국 그 비비엔 주치니와 키스하는걸 못 보겠네요.]
[주친스키.]
릭이 이번엔 올바른 성을 대며 꼿꼿이 세운 재킷 칼라위로 함박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러면 당신은 주정부 교도소의 벽 안에서 쓰라린 고통을 맛보게 될 거고.]
두 사람은 테오도어워스 공원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한껏 유쾌한 대화를 나뒀다. 앨리슨이 샌드위치 가게 앞에 차를 대자마자 재빨리 뛰어내린 릭이 잠시 후 뜨거운 커피 두 잔을 들고 왔다. 선명한 파란색과 부드러운 분홍빛이 교묘히 배합된 늦은 오후의 햇살이 구름 사이로 내비치고 있었다. 너무도 아름다운 정경에 앨리슨은 날씨가 춥다는 사실도 잊어 버렸다. 릭이 그녀에게 커피 잔을 건넸다. 그리고는 앨리슨이 한 손으로 잔을 쥐고 나머지 손의 장갑을 벗어 이빨 사이로 무는 모습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그는 눈썹까지 덮고 있는 우스꽝스러운 그녀의 모자를 보고는 웃음을 지었다.
[크림과 설탕을 얼마나 넣을지 안 물어 봤군요.]
[대개는 설탕만 넣지만, 오늘은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미안, 다음 번엔 꼭 기억하죠.]
릭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뒤 주변을 둘러보았다.
[멋진 밴 이군요.]
[네. 정말 그렇죠? 이제 일년 반만 더 할부금을 치르면 돼요. 난 늘 자재들을 들고 왔다 갔다 하는 터라 이런 차가 꼭 필요했거든요. 밴을 산 건 내가 내린 결정 중 최고였어요.]
[난 타고 다니는 차에는 그다지 구애 받지 않는 편이죠.]
그가 자기 생각을 말했다.
[목적지에만 데려다 준다면 털털거리는 고물 차든 최고급 스포츠카든 상관하지 않소.]
말쑥한 외모를 받쳐 줄 매끈한 은색 포르쉐를 사는 것이 제이슨의 꿈이었다. 앨리슨으로서는 가치관이 그토록 다른 남자를 알게 된 게 참으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어때요. 아름답죠?]
그들은 편안한 침묵을 즐기며 서쪽으로 운전해 갔다. 저무는 태양 빛을 받아 온 주변이 검은 윤곽만으로 또렷이 되살아 나는 순간이었다. 전화선도, 네온사인도, 길거리의 신호등도 찬란한 하늘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피조물일 뿐이었다. 이처럼 매섭게 추운 오후에 추위를 불평하지 않고 운전을 즐겨봤던 게 얼마나 오래 되었더라? 앨리슨은 자신도 놀라울 따름이었다. 차츰 빽빽이 늘어선 참나무 숲의 윤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앨리슨은 차를 워스파크웨이 쪽으로 돌려 널따란 산림이 펼쳐진 공원으로 향했다. 여러 공간으로 구획된 수목 원의 언덕배기에서 아이들이 썰매를 지치고 있었다. 현란한 스키 복을 입은 사람들이 스키를 타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스웨터만 입고 조깅하는 사람도 보였다. 그들이 내뿜는 숨결이 찬 공기 속에서 하얀 솜사탕처럼 응고되어 버리는 듯했다. 그들은 공공 구역의 중심부로 꺾어진 길로 접어들었다. 얼어붙어 버린 워스 호반과 스키어들의 산장, 그리고 스키 도약 장을 지나자 사람의 손길이 거의 미치지 않은 울창한 산림이 나타났다. 왁자지껄한 도시 한복판에 이처럼 원시적인 자연이 자리잡고있다는 사실 자체가 앨리슨에겐 경이로웠다. 두 사람을 태운 밴은 기울어 가는 겨울날의 늦은 오후 햇살이 만들어 내는 길다란 나무 그림자를 밟으며 달렸다. 릭은 앨로이즈 버틀러 야생 식물원과 조류 보호 구역지라는 표지판이 세워진 가파른 언덕을 가리켰다.
[요즘 같은 시기에 진짜 야생화를 찾아 다니는 사람이라면 실망하겠지만.]
그는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어쨌든 들키지 않고 저 안에서 통나무 하나 정도는 집어 올 수 있을 것 같은데.]
언덕 꼭대기에는 말끔히 포장된 주차장이 있었다. 프로급 스키어들이 남겼을 법한 가느다란 발자국 외엔 티 한 점 없이 깨끗한 백설의 벌판이었다.
[벌써 몸이 따뜻해졌나 보죠?]
앨리슨은 차 문을 여는 릭을 향해 말했다.
[물론!]
그는 호주머니에서 장갑을 꺼내 손에 긴 다음 재킷의 칼라를 더욱 곧추세운 뒤 차에서 뛰어내렸다. 그들이 숲속에 발을 들여놓자 어둠은 더욱 순식간에 몰려왔다. 그들은 눈을 잔뜩 뒤집어쓰고 있는 이정표들을 따라 걸었다. 이정표들이 어찌나 찾기 편하게 세워져 있었던지 앨리슨과 릭은 차에서 겨우 백 미터도 못 간 지점에서 눈에 파묻혀 있다시피 한 길다란 통나무 한 개를 발견했다. 릭이 눈을 털어내자 일 미터 이십 센티 정도 길이로 절단된 나무의 몸통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건 어떻소?]
나무 곁에 쭈그리고 앉은 릭이 그녀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앨리슨은 통나무로부터 차까지의 거리를 가늠해 보았다.
[거의 비슷하긴 하지만 너무 무거울 것 같아요.]
릭은 반대편으로 걸아가서 무릎을 끊고 나무를 약간 들어올려 보았다.
[반은 썩은 것 같군요. 제대로 찾은 건 같은데...아무래도 사람들이 쫓아오면 빨리 뛰어야 하니까.]
[내가 이걸 들 수 있을 것 같아요?]
[그건 알 수 없지만, 시도는 해봐 야죠.]
앨리슨은 그의 반대쪽으로 가서 대충 잡을 곳을 정한 뒤 일부러 커다란 기합을 넣은 뒤 통나무를 번쩍 들어올렸다.
[내가 했어요. 해냈다고요!]
그때 릭이 그녀의 어깨 너머 한 지점을 쳐다보는가 싶더니 무척 심각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었다.
[오, 수사관님, 내가 그러지 않았어요. 단지 난 이 썩은 나무뭉치를 훔치러 오자는 이 아가씨의 꼬임에 넘어가서 그만...예, 99년 형은 물론 합당하지요. 그럼 요. 뭐라 시든 달게 받겠습니다.]
앨리슨은 들고 있던 통나무로 그를 향해 거세게 밀어붙였다. 통나무가 근육질로 이루어진 그의 단단한 복부에 세게 닿았다. 그러자 그가 쿵 하고 바닥에 쓰러지더니 아주 드라마틱한 포즈로 복부를 움켜잡았다. 그는 마치 급소에 일격을 당한 듯이 비틀거리다가 이렇게 중얼거렸다.
[아까 한 마...말은 철회하겠습니다. 수사관님, 저 여잘 보내 주세요. 그 빌어먹을 통나무에 대한 대가는 제가 모조리 치르겠습니다!]
그러자 앨리슨 역시 한술 더 떠 그의 장난에 가세했다.
[오, 수사관님, 오늘 저 남자가 종일 생각한 거라곤 여자들하고 키스하는 것밖에 없었답니다. 하물며 맨 처음 눈에 띄는 물건으로 자신을 지키려는 한 여자를 벌하실 수가 있겠어요?]
이제 릭은 마치 가슴에 총구가 겨누어진 것처럼 장갑 긴 두 손을 번쩍 들었다.
[아, 안돼요. 안돼. 난 결백하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그 빌어먹을 통나무를 혼자서 당신 밴에 끌어 올려야 할 거요! 난 그냥 걸어서 가겠소!]
그리고는 이내 몸을 획 돌려 오던 길로 되돌아가 버리는 것이었다. 무릎까지 쌓인 눈 속에서 웃고 있는 앨리슨을 혼자 내버려두고.
[이봐요. 이건 불공평하잖아요. 당신은 긴 부츠를 신었고, 내건 겨우 발목까지 올라오는 건데.]
그녀는 보라는 듯 한 쪽 다리를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그의 등뒤에 대고 목청을 높였다.
[당신처럼 긴 부츠가 아니라니까요!]
[따라와요. 내가 길을 터 놓았으니.]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말했다. 그는 그녀가 쉽게 따라올 수 있도록 발로 눈을 치우면서 길을 터 주는 중이었다. 정말이지 세심한 배려이긴 했지만, 어쨌든 그녀는 쌓인 눈길 위를 터벅거리며 걸어야 했다. 그녀는 그를 따라잡으려 고 거의 뛰다시피 겅중거렸다.
[이봐요. 기다리라고요. 정말 제정신이 아니군요.]
그러자 릭이 문득 걸음을 멈추더니 어깨 너머로 힐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가 그를 거의 따라잡았다고 생각한 순간, 다시 그는 몸을 돌려 걸음을 재촉했다. 앨리슨은 또다시 그의 구두 뒤축만 따라다니는 꼴이 되었다. 앨리슨은 이렇게 추운 계절에 숲속에 와본 것이 몇 년은 된 것 같았다. 태양이 거의 저물어 가면서 하늘은 이제 라벤더 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온 세상이 모조리 흰 눈으로 덮여 버린 듯했다. 눈은 소리조차 포근히 감싸 안아 버렸는지 주변의 모든 사물들이 보드랍고 따스한 기운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런데 앞서 가던 릭이 갑자기 멈춰 섰다. 앨리슨 역시 기계적으로 멈춰 섰다. 그들 머리 위의 나뭇가지 위에서 새 울음 소리가 들려 왔다. 그 소리는 서늘한 대기 속으로 청명하게 울려 퍼졌다. 다음 순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릭이 무언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앨리슨의 눈이 그의 손가락 끝을 따라갔다. 커다란 나무아래로 눈 덮인 풀밭 위에 선명한 청홍 빛의 홍관조가 앉아 있는 게 아닌가!
[내가 사진을 찍고 그리는 게 바로 이런 종류요.]
그가 조그만 목소리로 속삭였다. 하지만 흥관조는 그의 목소리에 놀라 날개를 퍼덕거리며 날아가 버렸다. 앨리슨은 나뭇가지들 틈새로 언뜻 드러나는 진홍 빛의 깃털을 눈으로 좇았다. 갑자기 다시 태어난 듯한 신선한 감정이 새록새록 솟아오르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머리 위에 드리워진 흰 테두리의 나뭇가지들을 올려다보았다.
[도심 한복판에 이런 곳이 있다니, 믿기 지가 않아요.]
[전엔 여기 와본 적이 없었나요?]
릭은 여전히 높다란 가지들을 올려다보면서 말했다. 앨리슨은 고개를 들어 위로 세운 칼라의 가장자리를 슬쩍 덮고 있는 그의 금발을 바라보다가 다시 평온한 숲에 시선을 주었다.
[아뇨. 여기까진 와보지 않았더랬어요. 공원에 와보긴 했어도 이곳까지 올라와서 오솔길 끝에 뭐가 있을까를 알아볼 생각은 해보지 않았으니까요.]
릭은 고개를 뒤로 젖힌 채 묵묵히 하늘만 바라보고 서있었다. 한참 만에야 그가 한마디를 불쑥 던졌다.
[평화롭군. 그렇지 않소?]
[음, 그렇군요.]
새들조차 지저귐을 멈췄다. 그녀는 문득 릭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다시 깊은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앨리슨은 그 동안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생활 속에서 이런 식의 원초적인 기쁨을 누릴 기회가 극히 적었었다.
[고향을 떠나 생활하고 있는 내가 가장 그리워하는 게 바로 이런 거요.]
[시골에서 자랐어요?]
[그렇소.]
릭은 그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눈 속에 발을 파묻다시피 한 채 그 자리에 서있었는지를 그제서야 깨달은 듯했다.
[당신 발이 얼지 않았나 모르겠군요.]
[그러면 어때요.]
막상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발에 전해져 오는 느낌이 심상치 않았다.
[다시 저리로 가서 그 통나무를 옮겨 오는 게 좋겠군.]
[그래야 될 것 같아요.]
그러나 앨리슨은 그곳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못내 아쉬웠다. 새 소리 대신 시끄러운 자동차의 소음과 나뭇가지가 아닌 그 도로 표지들에게 시달릴 생각을 하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발에 감각을 잃어 버린 건 아니오?]
앨리슨은 빙그레 미소를 띄우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순식간에 밀려드는 어둠으로 인해 그의 얼굴은 거의 윤곽을 알아보기 힘들었다.
[무슨 발 말인가요?]
[잠깐만,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요.]
릭은 이렇게 당부한 뒤 혼자 힘으로 나무를 서둘러 옮겼다. 그리고는 주차장을 가로질러 뛰어와서 대뜸 그녀에게 등을 보이면서 돌아섰다.
[여기 업혀요.]
[뭐라고요!]
[업히라니까.]
그가 머리로 앞길을 가리켰다.
[당신을 이 지경에 빠뜨린 것도 나니까 당신을 이 궁지에서 꺼내 줘야 하지 않겠소?]
[그럴 필요 없어요. 어차피 감각도 없으니까. 발의 감각이 완전히 마비되어 버렸는지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어요.]
앨리슨은 눈 속에 감춰진 다리를 내려다보며 애처롭게 말했다.
[제길, 지금 당신이 날 점점 죄책감에 몰아넣고 있다는 걸 알고 있소?]
[하지만, 맙소사, 내가 만일 업혀 봐요. 정작 디스크에 걸릴 사람은 당신일걸요.]
[당신 같은 나무 젓가락 때문에? 웃기지 말아요.]
그녀는 더 이상 우기는 것도 무리일 것 같아 릭의 등에 업힐 수밖에 없었다. 그는 단단한 팔로 그녀의 양다리를 꼭 들어 올렸다. 앨리슨은 그의 등판에 볼을 대고, 벙어리 장갑을 긴 손을 그의 목에 둘렀다. 그가 주차장을 내달리는 동안 앨리슨은 이렇게 .그의 등에 업혀 있다는 사실이 점점 기가 막혔다. 자신의 존재가 왜소해 보이고 바보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하지만 아주 재미없진 않았다. 릭에게선 찬 공기의 냄새가 느껴졌다. 그리고 비누 아니면 쉐이브로션 같기도 한 어떤 채취가 실려 왔다. 그녀는 도대체 어떻게 하여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나를 따져 보려 했지만 도무지 생각의 가닥이 잡히질 않았다. 그저 떠오르는 생각이라곤, 더 이상 아프지도 않고 오히려 이 상황이 재미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남자는 자신을 웃게 만드는 특별한 재주가 있음이 분명하다는 생각도. 밴에 다다르자 그녀는 그의 등으로부터 미끄러져 내려왔다. 그리고 두 사람은 힘을 합해 별탈 없이 통나무를 차에 실을 수 있었다. 그러자 그때부터 앨리슨은 젖은 강아지처럼 오들오들 떨기 시작했다.
[내가 운전하는 게 어떻겠소?]
릭이 물었다.
[당신은 빨리 두 다리를 히터 밑에 갖다 대고 녹여야 해요.]
[싫어요. 너무 얼어서 히터에 녹이기가 무섭게 다리를 잃어 버릴 것 같아요.]
[미네소타 여자들이란!]
그가 못 말리겠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도대체 날씨에 맞춰서 옷도 제대로 입을 줄 모르니.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고장을 뻔히 알 텐데도.]
[내가 미네소타에서 태어나고 자랐는지 어떻게 알아요?]
[아니란 말이오?]
[아니에요. 내 고향은 사우스 다코타 라고요.]
[그래요. 그렇다고 해둡시다. 그런데 밤새 내내 여기서 얘기하고 싶은 거요, 아니면 발을 녹이러 시내로 돌아가고 싶은 거요?]
그들이 시내에 반쯤 다다랐을 무렵, 컴컴한 길을 가르는 헤드라이트만 바라보고 있던 그녀가 갑자기 릭에게 물었다.
[늘 이런 식이에요?]
[이런 식?]
앨리슨은 어깨를 으쓱했다.
[모르겠어요. 재미있다고 해야 할지.]
앨리슨은 자신을 훑어 내리는 릭의 시선을 느꼈다. 잠시 후 그는 고개를 돌리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기분 좋을 때만.]
다시 제이슨의 기억이 밀물처럼 몰려왔다. 이런 식의 감언 이설이 너에게 남겨준 게 무엇이었지? 그녀의 내부에서 준엄한 경고가 되살아 났다. 더군다나 이 남자는 완전히 새로운, 거부할 수 없을 만큼 지나치게 완벽한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어쩌면 제이슨을 잃은 데 대한 반작용일지도 몰랐다. 자신이 좋아하는 환상적인 영웅의 모습에 릭을 끼워 맞추는 건, 두 사람이 탄 밴이 차량의 흔적이 드문 한적한 거리에 멈췄다. 제네시스 빌딩의 중앙 홀로 통나무를 옮기던 두 사람은 공교롭게도 빌딩 경비원과 딱 마주쳤다. 릭과 앨리슨은 즉시 그 커다란 통나무가 마치 릭의 이빨사이에 문 이쑤시개나 되는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한술 더 떠 릭은 수상쩍어 하는 늙은 경비원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안녕하세요?]
라고 인사까지 건넸다. 고물 엘리베이터 안에 통나무를 억지로 쑤셔넣는 모습을 지켜보는 경비원의 여전히 수상쩍어하는 얼굴을 뒤로 하고 그들은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것을 보기 위해 돌아섰다. 앨리슨과 릭은 서로를 마주보다가 문이 닫히자 결국은 참았던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는 아마도 여전히 입을 다물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서있을 거요.]
앨리슨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아마 저 아저씨는 이 일을 시작한 이래 가장 궁금한 수수께끼를 갖게 되었을 거예요. 시내 한복판의 빌딩 육층에서 우리가 이 커다란 통나무를 갖고 무슨 짓을 했는지 몇 달 동안이고 궁금해 하도록 해야지.]
그들은 통나무를 스튜디오 안으로 밀어 넣은 뒤 앞뒤로 받들고 구석에 갖다 놓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들은 발작적으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단. 마침내 모래 주머니 근처에다 통나무를 내려놓자마자 릭은 그 위에 털썩 주저앉아 크게 심호흡을 했다.
[이번 모델 일을 맡을 때 부차적으로 이런 일이 따르리라고는 꿈도 못 꾸었는데.]
[고마워요. 나 혼자였다면 이번 일은 제대로 해내지 못했을 거예요.]
[천만에.]
실내는 점점 고요해졌다. 조용한 빌딩 안에서 엘리베이터가 삐걱거리며 움직이는 소리만이 들려 왔다.
[아마 경비원이 분명할 거요. 저 미친 두 남녀가 도대체 뭘 하고 있나 확인해 보려고 올라오고 있는 중일걸.]
릭의 짐작이었다.
[때가 되면 설명해야겠어요.]
이윽고 릭이 두 손으로 무릎을 짚고 벌떡 일어났다.
[난 목요일 밤에 비비엔 주치니와 이 통나무 위에서 기막힌 약속이 있으니까 아무래도 오늘은 집에 가서 심신의 휴식을 취해야 할 것 같군요.]
앨리슨은 문간으로 먼저 가서 불을 켠 다음 릭을 엘리베이터 앞까지 전송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경비원이 바로 엘리베이터 안에 우뚝 서서 여전히 의심이 가시지 않은 눈초리로 두 사람을 살펴보고 있는 게 아닌가. 다시 엘리베이터가 아래로 내려가자 릭은 그를 향해 손가락을 흔들어 보였다.
[안녕.]
장난기가 발동한 앨리슨 역시 그를 따라 했다.
[경비 아저씨가 마스터 키를 갖고 있어요. 아마 조만간 그가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와서 진실을 낱낱이 파악할 거라는 데 십 달러를 걸겠어요.]
하고 싶은 말은 아직 남아 있었다. 앨리슨은 릭을 이대로 보내는 게 웬 지 아쉬웠다. 그녀의 밴 까지 함께 걸어간 그는 다시 앨리슨을 위해 문을 열어 주었다.
[태워 줘서 고마웠소.]
[당신도요.]
그녀는 미소 지어 보였다. 그 역시 미소로 답하고는 그녀가 차에 올라타자 문을 닫은 뒤 작별 인사를 보냈다. 돌아오는 길에 앨리슨은 도대체 어디에 그의 단점이 숨어 있었던 가를 다시 한번 골똘히 생각해 보았다. 조만간 드러나겠지. 하지만 지금으로선 이 남자가 믿어지지 않을 만큼 멋지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