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빌스펜서] 네 곁에 가까이-2화 (2/11)

2.

고색 창연한 제네시스 빌딩에는 화물용과 승객용 엘리베이터가 한대씩 밖에 없었다. 하지만 앨리슨이 출근했을 때는 그나마 삐걱거리기라도 하던 구박다리 기계들이 모조리 고장이었다. 단숨에 육층까지 뛰어올라 스튜디오의 문을 열어 제친 그녀는 숨이 턱까지 차올라 있었다.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린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녀는 쏜살같이 실내를 가로질러 수화기를 부여잡고 숨이 차 헉헉거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포토 이미지입니다.]

[여보세요. 저는 릭 랭 이라고 합니다만, 그 번호로 전화해 달라는 연락을 받아서요. 절 만나고 싶어하는 분이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릭 래...엥?]

그러다가 문득 떠오르는 바가 있었다.

[아아! 리처드 랭 씨! 노스스타에서 사진을 보내 온 그분이군요!]

[맞아요. 하지만 난 주로 릭 이라고 불리죠.]

앨리슨은 전화선을 타고 흘러 나오는 유쾌하고도 꾸밈 없는 목소리에 긴장이 풀렸다. 그의 목소리는 깊고도 남성다운 울림이 배어 있었으며 무엇보다 듣는 이의 마음을 편하게 다독이는 부드러움이 느껴졌다. 이 남자의 약점을 은근히 기대하고 있던 그녀의 기대는 여지없이 빗나가고 말았다.

[좋아요, 릭. 잘 들으세요. 난 사진만 보고 선뜻 결정을 내리는 스타일이 아니에요. 그래서 계약 전에 한번 만나 보았으면 하는데, 괜찮겠어요?]

[물론이죠. 충분히 납득할 만하군요.]

다시 그의 영상이 앨리슨의 뇌리에 떠올랐다. 불현듯 그녀는 자신이 무척 바보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남자의 얼굴에서 어떤 허점을 찾아낼 수 일단 말인가?

[제발 양해해 줬으면 해요. 난 이번에 맡은 일을 통해 그와 비슷한 일을 계속 맡아서 할 수 있기를 고대하고 있거든요. 그런데 당신에 대해 아는 거라곤 그...]

[그래요. 충분히 이해하겠어요. 때때로 흑백 사진은 사람을 헷갈리게 할 수 있죠.]

앨리슨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얼굴이 달아오르다니! 그녀의 모습조차 볼 수 없는 시가지 건너편에 있는 사람과 전화로 얘기하면서 말이다. 그는 여전히 침착한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데, 자신은 잔뜩 긴장한 데다 얼굴까지 달아올랐다는 사실이 마땅치 않았다.

[언제 시간이 되세요?]

[아무 때나 조절하면 돼요. 언제 만나길 원하죠?]

[내일 오후 한시는 어떨까요?]

[좋아요.]

[그렇다면 내 스튜디오로 올 수 있겠어요?]

[물론이죠.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 만 준다면.]

앨리슨은 그에게 주차할 장소와 삐걱거리는 낡은 엘리베이터가 갑자기 서버릴 경우에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해서까지 세세한 요령을 알려주었다. 그녀는 처음으로 그의 웃음소리를 들었다. 경쾌하면서도 무게가 있는 깊은 톤의 웃음 소리였다.

[그럼 내일 한시에 보죠.]

전화를 끊자마자 그녀는 회전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양 손가락을 깍지 끼우고 정수리에 손바닥을 눌러 댔다. 정말 우스운 일이었다. 직접 만나 보지도 못한 남자의 약점을 찾아내려고 그렇게까지 혈안이 되어 있다니. 그의 목소리가 여자처럼 간지럽다든가, 문법이 엉망이라든가, 아니면 혀 짧은 소리라도 내길 기대하면서 말이다. 앨리슨 스콧, 제발 정신 좀 차려라. 그녀는 이렇게 스스로를 꾸짖으며 벌떡 일어섰다. 그는 제이슨이 아니지않은가. 게다가 그와 함께 살 것도 아니고...다음날 오후, 릭 랭이 포토 이미지의 문을 밀고 들어왔다. 그리고 등을 돌리고 있던 여자에게 어제 자기와 전화로 얘기한 여자 분을 찾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의 목소리를 못 들었는지 오래 된 오크 목 회전 의자에 앉아 이쪽으로 등을 돌린 채 돌아보지 않았다. 굽 높은 갈색 부츠를 신은 한쪽 다리를 널따란 창틀에 얹어 놓고, 다른 쪽 발목은 무릎 위에 올려놓은 자세였다. 어깨 부근에서 출렁거리는 갈색 머리와 알이 큰 선글라스를 머리 위로 걸치고있는 게 특이했다. 실내에서! 이제 그의 눈길은 길게 뻗은 다리를 꼭 감싸는 청바지와 회색스웨터, 그리고 두 번 정도 그녀의 목을 감고 있는 로직 스카프로 천천히 옮겨 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가 사과 값을 흥정하는 이탈리아 과일 장수마냥 천장을 향해 삿대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가 사인을 했다고 해서 나머지 돈을 돌려 받을 수 없다는 거예요?]

이제 무릎 위에 놓여 있던 다리를 까딱거리면서 그녀의 몸짓은 더욱 요란해졌다. 릭은 여전히 미소를 띄운 채 그녀의 얘기를 듣고 서있었다. 까딱거리던 다리가 갑자기 멈추더니 그녀의 턱이 아래로 떨어졌다.

[그렇게 못하시겠다고요?]

그녀는 확인하듯 다시 물었다.

[수영장에선 안 된다고요?]

이제 그녀는 선글라스를 바로 쓰고 아주 순진한 목소리로 바꿨다.

[그러니까, 사실대로 얘기하자면 난 잠수하는 법을 배우고 싶진 않아요.]

그녀는 무릎 위를 신경질적으로 긁었다.

[내가 원하는 건 촬영 작업을 위해 이틀 동안 그 장비를 쓰고싶다는 거예요. 내 계획은...]

그러다가 그녀는 얼른 귀로부터 수화기를 뗐다. 어떤 남자의 고함 소리가 수화기 바깥까지 들릴 정도였다.

[이봐, 아가씨. 거참 이상한 아가씨네. 당신 사정이야 우리가 알 바 아니지. 훈련을 받아야...]

갑자기 의자가 앞으로 당겨졌다. 그녀는 부츠 굽으로 마룻바닥을 힘껏 걷어찼다.

[글쎄, 꼭 그렇게까지...]

그러다가 그녀는 말을 멈췄다. 잠시 그 쪽의 대답을 듣는가 싶더니, 이윽고 성난 목소리로 퍼부어 대기 시작했다.

[이것 보세요. 난 그런 거보다는...]

다시 그녀는 수화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녀는 무릎 위에 놓여 있던 전화기에 수화기를 요란하게 내려놓았다. 그리고 엿 먹으라는 시늉을 해보이고는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는 듯 팔짱을 끼고 이렇게 중얼거렸다.

[당신 같은 작자한텐 이게 어울려!]

릭 랭은 더욱 진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곧 신중한 표정으로 돌아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실례합니다.]

의자가 갑자기 핑그르르 돌았다. 그 바람에 그녀의 선글라스가 코 아래로 떨어지고, 수화기도 바닥에 떨어졌다. 그녀는 재빨리 선 끝을 잡아 전화기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전히 발그레하게 상기된 표정으로.

[얼마 동안이나 거기 그렇게 서있었죠?]

[얼마 안돼요.]

그는 그녀의 얼굴에 떠오르는 홍조와 꼭 다문 입술, 그리고 눈을 감추고 있는 커다란 선글라스를 차례로 바라보았다.

[미안하군요. 약간 일찍 와서...]

그는 미소 띤 얼굴로 앞으로 나서면서 손을 내밀었다.

[릭 랭 이라고 합니다.]

[앨리슨 스콧 이에요.]

그는 그녀의 손을 쥐고 한번 흔든 다음, 너무 낡아 이상하게 변한 재킷의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날 자세히 보길 원한 것 같은데.]

그는 한쪽 다리에 체중을 실은 그야말로 편한 자세로 서있었다. 여전히 매력적인 편한 미소를 입술에 머금고서. 순간, 앨리슨은 면접을 보이고 있는 사람이 오히려 자기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그랬죠. 난...]

그녀의 양 볼은 이제 달아오르다 못해 거의 따끔거리기까지 했다.

[잘 들으세요. 나, 난 그렇게 불량한 사람이 아니에요.]

엘리슨은 그가 분명 방금 전의 거칠고, 점잔 치 못한 자신의 태도를 봤을 거라는 생각 때문에 막연히 전화기를 가리키면서 변명하듯 말했다.

[내가 그 남자에게 잠수 훈련을 받고 싶지 않다고 얘기하는 걸 들으셨을 테죠? 난 사람들을 속이는 사람이 아니에요. 가끔씩 사진을 찍기 위해 기초 훈련 정도는 받아야 할 정도로 험한 일이 있긴 해요. 그런데 난 이번 일을 하기 위해선 스쿠버 장비가 필요했고, 그래서 난 장비만 있다면 다이빙을 한번 시도해 볼 수도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죠. 그리고 아주 간단한 기초 지식만 배웠으니 나머지 돈은 되돌려줄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 작자가 얼마나 비열한지...]

그녀는 당황함을 감추려 하다 보니 졸지에 목이 메였다. 그래서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이런 식으로 궁지에 몰리기는 앨리슨으로서는 흔치 않은 경우였고, 그걸 그대로 드러내 보인 건 더더욱 그랬다. 릭은 매력적인 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그의 재미있어 하는 표정과 청바지를 입은 쭉 뻗은 다리와 몸매를 거의 혼란스러운 심정과 경탄이 섞인 표정으로 바라다보았다.

[내가 당신을 판단하러 온 게 아니고 당신이 날 판단할 사람이 아닌가요? 그러니 난 그걸 들었다는 사실조차 잊어 버린 걸로 하죠.]

앨리슨은 스스로에게 진정하라고 타일렀다. 비록 그가 첫눈에 제이슨과 다르다는 걸 눈치챘다고는 하지만, 그는 또 다른 미남이었고, 또 다른 제이슨 이었다. 하지만 당장의 느낌으로는 제이슨에게 배어 있었던 교만함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옷차림조차도 지나치게 평범했다. 그의 차림새는 일전에 매티가 얘기 한 그대로였다. 너무 오래 입어 칼라가 거의 해진 낡은 재킷에 물 빠진 청바지, 이곳 저곳을 다녔음 직한 낡아빠진 카우보이 부츠 등. 완전히 여미지 않은 재킷 사이로 12라는 흰 숫자가 씌어진 경기용 보라색 스웨터가 언뜻 보였다. 이제 앨리슨의 시선은 스웨터를 떠나 그의 얼굴로 옮겨졌다. 다음 순간, 그녀는 백십 볼트의 전압에 감전이라도 된 듯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매서운 바깥 바람에 약간 분홍빛으로 상기된 잡티 하나 없이 매끄럽고 건강한 피부였다. 곧게 뻗어 내린 콧날이 불빛을 받아 반짝거리고, 머리 결은 모진 일월의 바람에 흩날릴 대로 흐트러진 채였다. 그의 머리 색은 완벽한 금발이었다. 그 빛깔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두터운 모자로 머리를 감싸는 눈 덮인 일월의 한복판에서 신이 내린 선물 같았다. 살짝 웨이브진 머리칼이 귀와 관자놀이와 이마에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었다. 그녀는 그 머리를 단정하게 벗으면 오히려 우스울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그를 너무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자 바로 시선을 돌렸다. 의심할 바 없이 이 남자는 사진보다 실물이 더 나았다.

[대행사로부터 이 계약 건에 대해 뭔가 들은 바가 없나요?]

[아뇨. 다만 당신에게 연락하라고 만 하더군요.]

그는 스튜디오 내부를 흘금 둘러보았다. 낡고 삐걱거리는 책상 곁에 걸어 둔 굵은 삼베 주머니, 구식 냉장고, 천장에서 내려오는 파이프 틈에 걸어 놓은 둘둘 말린 배경 막, 각종 의자들, 화분 몇 개, 베개, 삼각대 위에 놓아둔 카메라, 반사용 우산, 섬광촬영장치, 그 외에 각종 촬영 도구들이 잡다하게 널려 있었다. 하지만 얼어붙은 창을 통해 들어온 밝은 오후 햇살이 스튜디오 전체를 환하게 비춰 주고 있었다. 소위 그녀의 집무실 이라고 볼 수 있는 공간에는 책상이 하나 있고, 두 개의 철제 캐비닛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근처에 있는 문 하나는 창문 없는 방으로 연결되어있었지만, 내부가 어두워 그는 그곳이 어디에 소용되는지 알 수 없었다. 릭이 스튜디오를 찬찬히 살펴보고 있는 동안, 앨리슨은 그를 찬찬히 살펴보고 있었다. 그가 좀더 목이 깊이 패인 셔츠를 입었다면 가슴의 털을 확인할 수 있었을 텐데...그것이 못내 아쉬웠다. 하지만 그녀는 어떻게 그걸 물어봐야 할지 난감했다. 그의 눈길이 다시 앨리슨에게 꽂혔다. 그녀는 다시 목 언저리가 달아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책 표지예요. 출판사측에선 두 커트가 필요하대요. 한 장은 앞 표지, 나머지는 뒤 표지 용으로.]

[어떤 종류의 책이죠?]

[로맨스 소설이에요.]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이 그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지만, 이내 어깨를 으쓱하고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모델과 함께 포즈를 잡아본 적 있나요?]

[몇 번 있었소.]

[여자 모델하고는요?]

[한번.]

[어떤 광고 였죠?]

[남녀 조깅 복인가 뭔가, 대충 그런 종류였소.]

그녀는 광택 나는 이 남자의 흑백 사진을 바라보았던 그 순간을 상기했다. 이 남자처럼 변화 무방한 입술 선을 가진 사람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말을 꺼내기 전에 감정의 상태를 미리 얘기해주는 듯 표현력이 풍부한 눈썹도.

[그렇다면 절 위해서도 일을 해주실 수 있을까요?]

앨리슨이 물었다.

[당신이 먼저 날 위해 뭔가를 해준다면.]

이리저리 움직이던 그의 시선이 자신의 모습이 반사되는 그녀의 선글라스에 가서 멈췄다.

[그 선글라스를 벗는다면 나도 당신을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저런!]

앨리슨은 재빨리 선글라스를 머리 위로 올렸다.

[깜빡 잊었어요.]

[훨씬 낫군요. 그런데 어디까지 얘기했었죠?]

[날 위해 뭔가 해줄 수 있다고 했었죠.]

그가 축 늘어진 주머니에서 양손을 빼고는 손바닥을 들어 올렸다.

[분부만 내리시죠.]

앨리슨은 책상 앞으로 돌아 나와 그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섰다. 그녀는 꼭 끼는 청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꽂았다.

[성난 표정을 한번 지어 봐요.]

그러자 마술이 벌어졌다. 순식간에 그의 눈썹이 아래로 처지며 분노의 빛이 눈에 가득해졌다.

[교활하게.]

그녀가 재빨리 소리쳤다.

[뭐라고요?]

[교활하게 보이도록요.]

앨리슨은 그의 코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되풀이했다. 그러자 즉각 그의 눈썹이 치켜 올라가더니 마치 자기를 방해하는 것이 무언지 알고 있다는 듯 협잡꾼처럼 곁눈질로 냉장고 쪽을 흘끔거렸다. 앨리슨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그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변하는 것이 너무 재미있어서 손뼉을 치고는 다시 명령했다.

[피곤한 표정.]

그의 입술이 살짝 벌어지면서 입술 양끝이 약간 처졌다. 동시에 눈의 광채도 사라지면서 마룻바닥에 힘없이 시선을 떨어뜨리는 것이었다. 완벽했다. 앨리슨의 가슴은 환희로 콩콩 뛰었다. 그는 정말로 자연스러웠다! 그녀는 마치 축구 팀의 전위 공격수처럼 몸을 반쯤 굽히고는 두 손으로 무릎을 꽉 그러쥐었다.

[나한테 달려들어 봐요!]

앨리슨이 그를 향해 대뜸 소리를 질렀다. 그의 멋진 입술이 마치 끈으로 조미는 가방처럼 오므라들었다. 눈빛도 험악해졌다. 깎아놓은 듯한 광대뼈 위의 피부가 탱탱하게 당겨지는 듯했다. 그녀는 그의 이름, 나이, 피부색을 잊었다. 그의 잘생긴 얼굴조차도. 오직 지금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마술만 주시할 뿐이었다. 앨리슨은 전혀 어려움 없이 자신의 주문에 척척 응하는 그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한다는 사실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었다. 그 순간 자신의 눈동자가 얼마나 생기 있게 움직이는지, 자신의 얼굴이 얼마나 극적으로 상기되고 있는지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위협적인. 재미있어 하는. 당황한. 기뻐하는.]

그녀가 단어를 뱉어 내기가 바쁘게 그는 표정을 바꾸었다.

[열정적으로!]

그 순간 그의 눈길이 처음으로 그녀에게 와 멈췄다. 마치 만질 수 없는 그 무언가에 대한 욕망의 끈을 서서히 잡아 끌듯 그가 앨리슨을 향해 몸을 움직이는 동안, 그의 눈길은 내내 그녀에게서 떠날 줄을 몰랐다. 그의 눈은 시를 말하고 있었고, 그의 입술은 키스를 암시하는 듯했다. 애타는 듯한 표정으로 서있는 그의 모습이 너무도 그럴듯해서 그녀는 일순 몸이 꼿꼿해지며 얼른 뒤로 몇 발짝 물러섰다. 그러자 그는 즉시 태도를 바꾸어 예의 그 편하고 느긋한 자세로 되돌아왔다. 이제 그의 눈은 아무런 감정도 담고 있지 않았다. 이윽고 앨리슨이 숨을 몰아 쉬자 그녀의 이마와 관자놀이를 덮고있던 앞머리가 풀썩거렸다. 이어 그녀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정말로 즐거웠다는 듯이.

[세상에. 늘 이렇게 하는 거예요?]

[뭐라고요?]

[이렇게...이렇게 즉석으로!]

그는 다소 놀란 것 같았다.

[즉석이라고요?]

그가 약간 웃었다.

[그럼 요.]

앨리슨은 짐짓 활발한 표정으로 그의 앞에서 몸을 흔들며 부츠 굽으로 바닥을 내리 쳤다.

[마치 전자동 기계처럼 즉각적이군요! 그런 다양한 표정이야말로 모델에게 필요하다는 걸 잘 알고 있나 봐요.]

[글쎄. 딱히 그런 생각을 해보진 않았소. 이 일을 그리 오래 했던 것도 아니고, 난 다만 하라는 대로 했을 뿐이니까.]

[네. 그렇지만 정말 완벽했다고요.]

이제 앨리슨은 함빡 미소를 지으면서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머리를 흔들었다. 맙소사! 자기가 무얼 했는지조차 모르고 있다니! 그에겐 깎아 만든 듯한 외모나 기막힌 골격, 건강한 피부와 사람을 사로잡는 눈매 이상의 무엇이 있었다. 그건 일종의 카리스마라고 해야 옳았다! 그건 바로 사진 작가들이 항상 찾아 헤매는 것이었지만, 좀 체로 발견하기 어려운 것이기도 했다. 그는 그녀가 원하는 모든 분위기를 즉각적으로 연출해 냈다. 얼굴 표정뿐만 아니라 몸 전체로, 자연스러우면서 자극적인 힘을 발산할 줄 알았던 것이다. 앨리슨은 그가 연출한 분위기에 흠뻑 취해 그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갑자기 그녀는 멍한 표정으로 정수리를 꼭 부여잡고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깨닫자 슬그머니 손을 내리고 책상가로 걸어갔다. 그리고 팔짱을 꼭 끼고 창문을 바라보면서 흥분된 가슴이 진정되기를 기다렸다.

[저, 실은 꼭 하나 부탁할 게 있어요. 다소 비정상적인 요구가 될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는 앨리슨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서 방어적인 벽을 감지했다.

[아직 달려드는 모습도 보지 못했잖소? 다음 건 뭐요?]

그러면서 릭은 빙긋 웃어 보였다. 앨리슨은 어깨 뒤로 흘끔 그를 쳐다보았다.

[재킷을 벗어 봐요.]

[그러죠.]

그는 앨리슨의 요구에 선뜻 응했다. 그는 벗은 재킷을 책상 한 귀퉁이에 아무렇게나 걸쳐 놓았다. 그의 팔과 가슴이 보기 좋은 윤곽을 드러냈다. 앨리슨은 순간적으로 숨을 죽였다. 하지만 곧 이 남자는 그저 모델일 뿐이라는 사실을 상기했다.

[이젠 그 스웨터도요.]

그는 이번에도 그녀의 요구에 순순히 응했다.

[스웨터라, 그러죠.]

그는 재킷을 벗을 때보다 훨씬 느릿느릿한 동작으로 스웨터를 벗기 시작했다. 그는 스웨터 안에 흰색 브이넥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가 어정쩡한 자세로 스웨터를 쥐고 있는 동안, 그녀는 초조한 듯 손가락을 퉁기더니 또 다른 명령을 내렸다.

[그 티셔츠도요.]

마침내 그의 얼굴에 의심스럽다는 표정이 나타났다. 그는 매력적인 눈으로 그녀를 빈정거리듯 쳐다보았다. 이어 책상 위와 사무실 벽을 훑어보더니 양미간을 찌푸리며 그녀에게 다시 눈을 돌렸다.

[이것 봐요, 아가씨.]

앨리슨은 몸을 획 돌려 그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내 이름은 스콧 이에요. 앨리슨 스콧.]

[좋아요, 스콧 양. 난 그런 수상쩍은 요구에 응할 생각은 없소. 내가 듣기엔...]

[나도 마찬가지예요, 랭 씨.]

[도대체 그 책이 어떤 종류의 로맨스인지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했소.]

[그건 당신이 생각하는 식의 포르노가 아니라고요. 하지만 티셔츠 하나 벗는 데 그렇게 까다롭게 군다면 당신 아니어도 이 일을 하겠다는 사람이 줄을 섰다는 사실을 알아 두세요.]

[하지만 우선 그 이유를 알아야겠소.]

[얘기했잖아요. 로맨스 소설이라고. 사니벨 섬을 배경으로 한 단순한 로맨스 소설이에요.]

내가 왜 이리 방어적으로 되어 가고 있지. 그녀는 스스로 의아해졌다. 뜻하지 않게 기막힌 육체를 가진 사람과 대면하고 있어서? 그의 벗은 가슴이 어떨지를 궁금해 하고 있어서? 그러나 앨리슨은 즉시 자신의 실수를 인정해야 했다. 의심의 여지를 남기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아마추어적이고 유치한 행동이 아닐까? 그녀는 당장 그에게 정식으로 부탁을 한 뒤 모든 의혹을 일소 시켜야 했다. 앨리슨은 마침내 정직해지기로 결심했다.

[내가 알고 싶은 건 당신 가슴에 털이 있느냐 하는 거예요. 사실 약간 바보 같은 부탁 같기는 하네요.]

그는 아무 말도 없이 티셔츠를 벗었다. 그리고는 꼭 긴 낡은 청바지만 입은 채 그녀의 앞에 섰다. 그는 제이슨 이래 그녀가 벗은 가슴을 본 최초의 남자였다. 앨리슨은 그를 마주 대하면서 자신의 생각이 궤도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무척 애를 써야 했다. 하지만 그가 멋지다라는, 남자답다는 의미에서. 사실을 부인하긴 어려웠다. 그녀는 마음껏 관찰하라는 듯 그대로 가슴을 드러내 보이고 서있는 이 남자 앞에서 유리창의 얼음을 녹일 정도로 화끈거리는 자신을 느꼈다. 그는 자신의 가슴을 힐끔 내려다보더니 고개를 들고 앨리슨을 쳐다보았다.

[이 정도면 되겠소?]

순간, 앨리슨은 마치 자신이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는 남학생을 몰래 들여다보고 낯을 붉히는 십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그녀가 대답을 마치자마자 그는 머리 위로 셔츠를 뒤집어썼다. 그의 머리가 셔츠 밖으로 드러나기도 전에 질문이 던져졌다.

[그런데 이 사진을 찍을 때 난 무슨 옷을 입는 거죠?]

[수영복이요. 갖고 있나요?]

[물론.]

셔츠 위로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균형 잡힌 남자다운 몸매에 어울리지 않게 장난꾸러기 소년처럼 머리가 헝클어져 있었다.

[수영복 색깔은요?]

앨리슨은 다시 책상 쪽으로 돌아가면서 물었다.

[흰색이오.]

[완벽하군요. 밤에 촬영할 땐 흰색이 조명을 더 잘 받거든요.]

그는 눈썹을 모으며 그녀의 움직임을 쫓았다. 앨리슨은 책상에서 사무적인 태도로 펜과 필기 판을 집어 들고 무언가 끄적 거리고 있었다. 앨리슨은 펜을 멈추지 않은 채 계속 물었다.

[혹시 다리나 등에 흉터 같은 건 없나요?]

[없소.]

이제 그는 스웨터를 입는 중이었다.

[혹시 낯선 사람과 키스하는 거에 대해 거부감 같은 건 없겠죠?]

그는 재킷 소매에 팔을 끼다 말고 아연한 표정으로 앨리슨을 바라보았다.

[낯선 사람에게 키스를?]

[그래요.]

앨리슨은 짐짓 진지한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태연한 표정을 짓기 위해 눈물겨운 노력을 하면서.

[누구하고?]

앨리슨은 여자 모델 사진 한 장을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이 여자예요.]

그는 사진을 한번 쓱 훑어보았다.

[그러니까 그 표지의 또 다른 주인공이로군.]

[그래요. 내가 볼 땐 컬러를 아주 잘 받는 사람인 것 같은데...]

그는 사진의 원면에 씌어진 이름을 소리 내어 읽었다.

[비비엔 주친스키.]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면서 웃었다. 실내를 꽉 누르고 있던 긴장감을 어느 정도 해소 시켜 주는 웃음이었다.

[이런 이름이라면 틀림없이 키스하는 법을 아주 잘 알고 있을 것 같은데요!]

그의 농담이 차디찬 긴장을 녹였다. 앨리슨 역시 그의 너스레에 다소 기분이 풀린 듯 한층 부드러운 목소리로 맞장구 쳤다.

[내가 생각해도 좀 우스웠어요.]

그녀는 좀더 긴장을 풀고 그를 다시 쳐다보았다.

[사실, 당신은 말할 것도 없겠지만...저도 사실은 오늘 좀 불편했어요.]

그녀는 창을 지나 스튜디오 안쪽으로 천천히 움직였다.

[난 이런 종류의 일 때문에 모델을 써본 적이 없었거든요. 하마터면 일을 몽땅 그르칠 뻔했어요. 당신을 불편하게 한 점은 사과할게요.]

앨리슨은 어깨 너머로 힐끔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여전히 책상 가에 서있었다.

[괜찮아요. 키스를 할 수 있다는데 뭘.]

그러더니 그는 사진의 뒷면을 다시 쳐다보았다.

[비비엔 주친스키 하고.]

그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말을 끊었다. 그리고는 사진을 책상 위에 슬쩍 던져 놓은 다음 스튜디오를 가로질러 앨리슨 곁으로 다가왔다.

[혹시 몇 가지 물어 봐도 괜찮겠소?]

[그럼 요. 뭐든지요.]

[음, 그런데 굳이 밤에 촬영해야 하는 이유가 뭐죠?]

그녀는 질문의 뜻을 알겠다는 듯이 빙그레 미소를 머금었다.

[아직도 맘을 놓지 못하고 있는 것 같군요, 랭 씨.]

[당신 얘기가 더 수상쩍다는 걸 인정해야 할 거요.]

[밤 분위기를 내려는 거예요. 모닥불을 피워 놓은 호숫가가 배경이거든요. 조명을 조절하려면 밖이 완전히 캄캄해야 돼요. 보시다시피 여긴 창문 투성이잖아요.]

그녀는 손바닥으로 유리창을 쓸어 보다가 스튜디오를 한바퀴 획 둘러보았다.

[모닥불을?]

그가 믿기 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요.]

앨리슨은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새침데기마냥 한쪽 눈썹을 삐딱하게 올렸다.

[여기서 말이오?]

[그럼 요. 여기 서죠. 내가 못할 것 같은가요?]

릭은 어깨를 으쓱했다.

[만약 제대로 해낸다면 대단한 속임수가 될 것 같군요. 그건 그렇고 총 몇 장이나 찍을 예정이죠?]

[음, 아마 예순 다섯 장쯤. 그러니까 앞, 뒤 각각으로요.]

그는 가볍게 휘파람을 불었다. 이 여자는 보기보다 대단히 진지하고, 헌신적이며, 성실한 작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는 스튜디오 어디에서 호숫가의 분위기를 내려는지 궁금하다는 듯 다시 한번 실내를 둘러보았다.

[믿으라니까요.]

그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앨리슨이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날 저녁에 와보면 그럴듯한 호숫가가 만들어져 있을 거예요. 그러면 당신은 수영복을 입고 예쁜 아가씨에게 키스만 하면 되는 거예요. 그래도 어려워요?]

[천만에요.]

[그렇다면 일을 원하는 건가요, 아닌가요, 랭 씨?]

[이 일은 정말로 정직한 일이죠? 혹시 무슨 이상한 술수라도?]

[맙소사. 정말로 의심 많은 사람이군요. 물론 포즈가 다소 야할지는 모르겠어요. 어쨌든 이건 로맨스 소설이기 때문에 남녀가 포즈를 취해야 하니까. 하지만 최종 결과는 아주 세련된 연인의 모습일 거라고요.]

릭의 눈에 장난스러운 빛이 번득였다.

[흠, 점점 재미있어질 것 같긴 한데.]

[그렇다면 할 의향이 있어요?]

[촬영은 언제죠?]

[목요일 밤이요. 일단 세트를 만들어야 하니까요. 사실 그게 골칫거리긴 하지만...]

[스쿠버 장비 때문에?]

[아뇨. 그건 아니에요. 그건 다음 작업에 소용될 거니까요. 난 미리 계획을 세우는 편이거든요.]

[내가 친구한테 몇 가지를 빌릴 수 있는데 좀 도움이 될까요?]

그녀의 얼굴이 놀라움으로 환해졌다.

[정말이에요?]

그는 아래로 펼쳐진 눈 덮인 시가지를 흘끗 내려다보았다.

[그렇게 어려우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데, 당신 생각은?]

[그럼 스쿠버 강습을 받지 않아도 되겠군요.]

그녀는 예기치 않은 제안에 기쁜 듯, 진지한 어조로 덧붙였다.

[사실 가끔씩은 사진 찍는 일이 오히려 가장 쉬울 때가 있어요. 본 작업보다 세트를 만드는 일 때문에 머리가 셀 지경이라니까요.]

[아직 까진 전혀 그런 것 같지 않은데요.]

릭은 느긋한 미소를 띄우면서 그녀의 머리와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 순간 앨리슨의 가슴속으로 경계심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영락없이 제이슨을 연상시키는 모습이었다. 그녀의 경계심을 여지없이 무너뜨려 버렸던 장난스러우면서도 아첨하는 듯한 넉살 좋은 태도. 제이슨은 그녀의 좌우명 제1번을 단번에 깨뜨렸었다. 남자 모델들과는 사적인 관계를 맺지 말라는. 아첨이 아니라 악의 없는 농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다시 방어적인 자세로 팔짱을 끼자 릭 랭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는 경계를 풀고 있을 때는 아주 멋진 여성으로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스스로 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자기 주위로 울타리를 치곤 했다. 도대체 무엇이 그녀를 저 토록 방어적인 자세로 이끄는지 그는 알 수 없었다.

[장비는 조만간 갖다 드리죠.]

[오, 그러실 것까진 없어요. 내가 직접 가지러 갈 수 있어요.]

[그것도 좋겠죠.]

[정말 고맙게 생각해요.]

[그런 생각일랑 버리세요.]

그는 문간에서 싱긋 미소를 지으며 돌아다보았다.

[적어도 그 비비엔 주치니 라는 여자와 키스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으니.]

[주친스키 예요.]

그리고 그는 가버렸다. 팔짱을 끼고 있던 앨리슨의 양팔이 천천히 풀어졌다. 그녀는 릭 랭의 잔영이 남아 있는 문 쪽을 응시했다. 앨리슨은 무심결에 한 손으로 긴 머리를 쓸어 을렀다. 그리고 이성을 마비시켜 버릴 수도 있었을 어떤 느낌에 얼얼해지는 목뒤를 천천히 주무르기 시작했다. 아직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단 말이니, 스콧? 그는 널 이용하려는 또 다른 얼굴 반반한 남자에 불과하다고. 그 사실을 잊어선 안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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