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빌스펜서] 네 곁에 가까이-1화 (1/11)

네 곁에 가까이/라빌 스펜서.

1.

[노스스타 에이전시입니다.]

앨리슨 스콧은 책상 위에 두 다리를 올려놓은 채 삐걱거리는 고물 회전 의자 뒤로 바싹 몸을 기댔다.

[난 이제까지 당신들이 봤던 사람 중에서 가장 섹시한 남자가 필요해요. 지금 당장 요.]

[이봐요. 당신 누구요?]

걸쭉한 목소리가 되받았다.

[앨리슨, 당신이구먼?]

[그래요. 매티, 저예요. 그리고 내가 지금 한말은 장난이 아니에요. 난 지금 기막히게 멋진 남자를 찾고 있다고요. 깎아 만든 듯한 윤곽에다 굽이치는 밝은 금발에 푸른 눈이어야 해요. 하지만 갈색이라 해도 나쁠 건 없고. 어쨌든 딕 트레이시 같은 턱에 해시계의 바늘 같은 곧고 날카로운 코에다가 몸매는...]

[아니, 이봐. 앨리슨! 잠깐만, 도대체 그런 남자를 찾아내 뭘 하려고? 스크린 테스트라도 해보겠다는 거요?]

[전혀 관계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실은 책 표지 때문이죠.]

[뭐?]

[책 표지요.]

앨리슨의 목소리는 점점 흥분되어 가고 있었다.

[실은 뉴욕의 혜더웨이북스로부터 한달 전에 의뢰를 받았어요. 그리고 난 지금 그 책을 읽고 난 인상을 얘기한 거구요. 어제 우편으로 책을 받아서 밤새 샅샅이 읽은 결과, 그 일을 맡기로 결심했어요. 그래서 뉴욕에 곧바로 전화를 걸었죠. 오, 매티, 이런 기회는 흔하지 않을 거예요. 이번 주 안에 계약서를 보내 준대요. 그러니까, 매티, 당신이 그 표지에 적합한 모델을 찾아 주셨으면 해요.]

[그렇다면 어디 당신이 원하는 주인공의 외형을 구체적으로 얘기해 봐요. 내가 도울 수 있을지 봅시다.]

앨리슨은 재빨리 적어 놓았던 메모를 뒤져 한 줄 한 줄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또박또박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금발, 파란 눈, 남성미가 풍기는 미남에 나이는 대략 스물 다섯 살 가량, 키는 육 피트 정도, 근육질...맙소사. 매티, 출판사측에서는 도대체 이런 조건에 딱 들어맞는 남자가 있을 거라고 정말 믿는 걸까요?]

앨리슨은 이렇게 반문하며 기가 막히다 는 듯 종이를 접었다.

[당신은 마치 비평가나 표지 제작자로 고용된 것처럼 얘기하는군.]

[나야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죠. 사실 난 이런 작가들이 앞뒤표지 사이에 뭘 끼워 넣는지는 관심 없어요. 하지만 이건 내가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기회라고요. 만약 일만 성사된다면, 난 독자들이 표지를 처음 접하는 순간 단번에 반할 만한 멋진 그림을 보낼 거예요. 그러니까 매티, 당신은 나에게 그럴듯한 자료나 보내주고 결과만 기다리세요.]

[오케이. 그렇다면 여자 모델은?]

[아, 잠깐만 요.]

앨리슨은 다시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수첩의 페이지를 넘겼다.

[음, 여기 있네요. 이십대 초반에 붉은 빛이 도는 적황색 머리, 푸른 눈, 늘씬하면서 나긋나긋한 몸매여야 하구요. 참 그리고 매티, 특히 머리 색이 중요해요. 독자들은 그 부분에 상당히 민감하거든요. 그러니까 어깨 길이 정도의 적황색, 알았죠?]

[적황색이라 어디 한번 찾아 보지. 내일 우편으로 사진들을 보내 주겠소.]

[고마워요, 매티.]

[참, 앨리슨?]

[네?]

잠깐 동안 머뭇거리다가 매티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 친구는 아직 안 돌아왔소?]

순간, 앨리슨의 등이 축 처졌다. 그녀는 책상 위로 시선을 내리깐 채 두통을 가라앉히기라도 하려는 듯 이마를 문질렀다.

[아뇨, 이젠 더 이상 기대도 하지 않아요, 매티.]

[소식도 없었소?]

[전혀요.]

앨리슨은 매티의 한숨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괜한 걸 물어 봤군. 미안해요. 날 용서해 주겠지?]

정작 한숨을 내쉰 건 그녀 쪽이었다.

[매티, 제이슨 애덜리가 초일류 악당으로 돌변한 게 어찌 당신 탓이겠어요?]

[그거야 그렇지만 물어 보는 게 아니었는데.]

[됐어요. 그가 떠난 이후로 난 많이 무뎌졌으니까요.]

[그래, 내가 걱정하는 게 바로 그거라고.]

[매티, 지금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고함에 가까운 앨리슨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매티가 흠칫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오. 신경 쓰지 말아요. 됐소? 아무튼 자료는 내일 우편으로 부치겠소.]

앨리슨이 마저 질문 할 겨를도 없이 전화가 딸깍 끊겼다. 하지만 격앙된 기분은 어느 정도 가라앉은 상태였다. 앨리슨은 제이슨 애덜리 라는 이름을 머리 속에서 털어내 버리려고 애를 깼다. 앨리슨은 그에 대한 기억을 떨쳐 버리려는 듯 갑자기 의자를 한바퀴 빙글 돌리고는 벌떡 일어나서 카키색 바지에 양손을 깊숙이 찔러 넣었다. 그리고는 양다리를 넓게 벌리고 우뚝 서서 전면 유리창을 통해 미네아폴리스 시가지를 내려다보았다. 건물은 낡은 데다 금이 간 벽 사이로 바람마저 새어 들어왔지만, 넓고 밝은 까닭에 사진 스튜디오로 쓰기엔 안성맞춤이었다. 한때 이 빌딩은 제분 회사의 사옥으로 쓰였으나 오래 전에 카펫 회사로 바뀌었다. 그때 조명을 낮추고, 벽을 세분하여 방을 여러 개로 만들었으며 은은한 음악이 건물 전체에 흐르도록 선을 연결했었다. 그러나 지금 망연히 바깥을 내려다보고 있는 앨리슨에게 들리는 것이라곤 머리 위를 통과하는 낡은 배수관에서 온수가 지나갈 때 나는 부글거리는 소리뿐이었다. 그나마 흡족하게 덥혀 주지도 못하는 온방 시설이지만...북향으로 뚫린 창 때문에 일월의 추위가 더욱 혹독하게 느껴졌다. 작게 나뉜 격자 무늬 창문 귀퉁이엔 늘 자그마한 얼음 알갱이들이 작은 개울을 만들고 있었다. 앨리슨은 주먹 쥔 손끝으로 창 한복판을 닦아 보았지만, 유리창은 이내 뿌옇게 흐려졌다. 앨리슨의 주먹이 차가운 유리 위로 힘없이 미끄러지는가 싶더니 갑자기 얼음 같은 창틀을 세게 내리쳤다.

[빌어먹을, 제이슨, 지옥에나 가라!]

앨리슨은 허공에 대고 벌컥 소리를 질렀다. 그의 얼굴, 목소리, 그리고 몸...그녀가 절대적으로 믿고 마음을 맡겼던 모든 것이 일시에 떠올랐다. 그녀는 양팔에 얼굴을 묻었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 내렸다. 다음 순간, 그녀는 고개를 번쩍 들고 머리칼이 출렁거릴 정도로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이윽고 그녀는 눈물을 훔치고 끓어오르는 울분을 삼켰다.

[꼭 갚고 말겠어, 제이슨 애덜리. 그게 이 세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 되더라도! 앨리슨은 텅 빈 스튜디오와 창 밖에 펼쳐진 흐린 하늘에 대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게 약속했다. 그리고 그녀는 고통을 잊으려는 듯 미친 듯이 일속에 파묻혔다. 사실 책 내용은 단순했다. 사니벨 섬에서 휴가를 보내던 한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첫눈에 반하고, 오십 페이지쯤에 가서 서로의 품에 안기고, 백 페이지쯤에 가서 헤어지고, 오십 페이지 정도 오해가 더 이어지다가 마지막에 가서 해피 엔딩. 대충 이런 내용의 전형적인 로맨스였다. 어쩌면 남자 주인공의 분위기가 제이슨 애덜리와 너무 흡사해서 그처럼 그 책에 빠져들었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그 때문에 그녀는 처음에 표지 촬영에 선뜻 달려들기를 꺼려했는지도 모른다. 바로 제이슨이 포즈를 취하지 않으면 뭔가 부족할 듯해서. 그러나 여성 독자들로 하여금 얼토당토않은 신데렐라 콤플렉스에 빠져들게 하는 그런 책들에 대해 평소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이 일이 자신의 경력과 재정에 얼마만한 도움이 될지 알고 있던 터라 결국 수락을 하고 말았다. 앨리슨 스콧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신데렐라 스타일의 해피 엔딩은 슈퍼마켓 진열대에 놓인 문고판 로맨스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하루 일을 마치고 PDQ마켓에서 스파게티와 미트볼 깡통에 손을 뻗으면서 앨리슨은 다시 한번 그 모든 사실을 통렬히 의식했다. 이젠 제이슨이 떠나고 없는 그 텅 빈 집의 문을 열고 혼자 걸어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 싫었다. 집! 앨리슨은 한때 그들이 막연히 호수들 이라 불렀던 곳을 돌아 미네아폴리스의 도심 가를 빠져 나오면서 그 단어를 떠올렸다. 그 지역은 칼룬, 헤리어트, 노코미스, 아일랜드, 세다르 등 다섯 개의 호수들이 아름다운 호반 도시를 형성하고 있었다. 앨리슨은 섬들의 호수의 서쪽에 위치한 이층짜리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그 건물은 전형적인 옛날 집이었지만, 1900년 이래 잘 보존되어온 건물이었다. 올해는 유난히 눈이 많이 와서 어깨 높이까지 눈이 쌓인 바람에 차도를 지나 집 후미에 외따로 떨어진 차고까지 가는 길에도 일층 창문의 꼭대기만 언뜻 보일 뿐이었다. 그녀는 차고 문을 내린 뒤 얼어붙은 호수를 흘금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보기만 해도 춥다는 듯 따뜻한 코트 칼라에 서둘러 턱을 묻고 방으로 연결된 계단을 올라갔다. 집! 그녀는 열쇠를 돌리는 손길을 멈추고 망연히 서있었다. 육 주가 지났건만, 아직도 그녀는 제이슨의 대한 감정을 정리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결심한 듯 영하의 바깥 날씨를 뒤로 하고 현관문을 닫았다. 앨리슨은 미네소타의 혹한 속에서 한줌이나마 여름의 향기를 끌어들이기 위해 공들여 장식했던 거실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광택 나는 원목 마룻바닥, 한참을 돌아다닌 끝에 찾아낸 선명한 색상의 스칸디나비아산 러그, 초록과 노랑 무늬의 쿠션을 깔아 아늑함을 더해 주는 버드나무 의자, 그리고 열대 우림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들도록 무성하게 자란 야자수, 셰플레라, 필로덴드론스 등이 심어진 화분들과 흰색 창틀과 테이블, 그리고 네 개의 좁고 긴 창 앞에 놓아 둔 흰색 화분 받침대 위에 작은 꽃들이 만개한 화분들...게다가 레몬 색과 흰색이 섞인 로만쉐이드 커튼은 더욱 서늘한 분위기를 연출해 주고 있었다. 한 쌍의 프렌치 도어는 호수를 내려다보는 베란다로 통해 있었고, 그녀가 좋아하는 흔들 의자 뒤에 흰색 왕골 갓이 씌어진 스탠드가 놓여 있었다. 곳곳에 밝음과 여유로움이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그랬다. 그건 따사로운 여름의 향기였다. 그녀는 얼마나 이 공간을 아끼고 사랑했던가. 그리고 제이슨...하지만 이제 이곳은 그의 부재만을 더욱 절실하게 확인시킬 뿐이었다. 버드나무 가지로 만든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고 멋진 눈동자를 굴리면서 그녀를 장난스럽게 바라보던 제이슨. 그리고 이제껏 렌즈에 담았던 모습 중에 가장 육감적인 입술로 그녀를 놀리곤 하던 제이슨...제이슨. 제이슨. 그는 어느 곳에나 있었다. 철제 의자에 앉아 유리 식탁 위에 팔을 얹고 모닝 커피를 마시던 그. 대개는 맨발이었던 그가 한쪽 다리를 의자 팔걸이에 걸치고 음악에 맞춰 몸을 까딱거리던 모습. 제이슨. 양손을 깍지 긴 채 목을 받치고 삐걱거리는 낡은 침대에 모로 드러누워 있던 그. 그녀의 옷들과 나란히 걸린 자신의 옷을 고르던 탐색하는 듯한 눈길, 허리에만 수건을 두른 채 휘파람을 불면서 짧게 깎은 머리를 말리던 제이슨. 아도니스의 얼굴과 몸을 가졌던 제이슨. 때때로 앨리슨은 자기처럼 평범한 외모의 소유자가 제이슨 처림 찬란한 남자를 찾아 냈다는 사실이 믿기 지 않았었다. 완벽하게 조화된 근육과 균형 잡힌 얼굴 윤곽은 앨리슨에게 내재되어있던 여성성만큼이나 그녀의 예술적 감성을 자극했다. 제이슨과 함께 있으면 그녀의 카메라는 항상 빛이 났다. 사실 그의 얼굴은 단순한 앵글 하나만으로 잡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그와 함께 지내는 동안, 그녀의 일도 활기를 띠었다. 스포츠 의류, 가죽 제품, 자동차 용품, 심지어는 과자까지도 그의 얼굴이라면 못 팔게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실제로 트윈 시티스 광고 대행사들의 생각도 그러했다. 사진들이 늘어 가면서 그들은 젠틀맨스 리뷰 지의 패션 난에 진출할 계획을 세워 두고 있었다. 그것은 앨리슨의 오랜 꿈이기도 했다. 그러나 젠틀맨스 리뷰 정도의 잡지에 사진들을 게재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삼천 내지는 사천 장의 사진들을 찍어야 했다. 그녀는 빛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빛의 밝기에 상관없이, 가능한 모든 포즈로 그의 모습을 찍어댔다. 매번 셔터를 누를 때마다 그에 대한 사랑도 그만큼 증가하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그리고 육 주 전, 집에 돌아온 그녀는 반쯤 비어 있는 자신의 옷장을 발견했다. 그러나 없어진 건 그의 옷가지와 면도기 뿐만이 아니었다. 그 동안 공들여 모아둔 네거티브 필름들도 한꺼번에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그 순간 그녀의 모든 꿈이 날라가 버렸다. 그가 남겨 놓은 것이라곤 포스터 크기로 확대해서 이젤 위에 놓아둔 사진 한 장뿐이었다. 그 사진 아래부분에는 급히 휘갈겨 쓴 필체로 이렇게 쓰여있었다.<미안해, 자기. 사랑하는 제이슨.>그 이젤은 등나무 의자의 건너편 구석에 세워져 있었다. 그러나 앨리슨이 마침내 그가 돌아오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받아들인 이래 그곳은 텅 비어 있었다. 그녀는 손상 당한 자존심의 상징과 팔지 않았던 광고 사진들, 더불어 온갖 기억들을 벽장 속에 처박아 버렸다. 그러나 사진을 숨겨 버릴 순 있었지만, 고통만은 쉽게 숨겨 버릴 수가 없었다. 때로 그것은 어느 때보다 날카로운 고통으로 그녀의 폐부를 찌르곤 했다. 심지어는 그녀가 표지를 촬영하기로 작정한 이 달러짜리 로맨스 소설과 같은 사소한 일에서조차 말이다. 그녀가 제이슨에게 원했던 것도 그 소설의 내용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그녀는 몸을 홱 돌려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선 채로 스파게티를 데워 먹었다. 건너편에 앉아 있곤 했던

제이슨의 모습이 떠올라 그녀는 아직도 식탁에 홀로 앉기를 꺼렸다.

'빌어먹을 로맨스 같으니! 또 그 주인공은 어쩜 그다지도 제이슨의 기억을 생생하게 되살리

게 생겼단 말인가! 게다가 매티는, 또 내 순진한 부탁은 어떻고!'

스파게티는 마치 도배용 풀마냥 시금털털했지만, 어쨌든 공복은 채워 주었다. 이제 식사는

그저 음식을 넘기는 행위였지, 더이상 두 사람이 함께 했던 즐거운 향연이 될 수 없었다. 그

녀의 부엌은 기능을 상실한 지 이마 오래였다. 오직 거실겸 식당만이 그녀가 머무는 곳이었

다.

앨리슨은 한 손에는 컵을, 한 손에는 냄비를 든 채로 싱크대 앞에 기대 섰다. 아무 생각 업

이 고개를 돌리자 비어 있는 이젤이 눈에 들어왔고, 순간 또다시 제이슨에 대한 생각이 불청

객처럼 찾아왔다.

'지금 그는 어디 있을까? 누구와 함께 있을까? 모델 일은 다시 시작했을까?'

뜨거운 눈물이 핑그르 도는 것을 느끼며 그녀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부르짖었다.

'지옥에나 가라, 제이슨 애덜리. 만약 다시 찾아왔을 때 그 잘난 낯짝과 몸뚱어리의 모습이

내 거실에 남아 있으리라 기대하고 있다면 꿈 깨시지!'

하지만 다음 순간 포크가 힘없이 냄비 안으로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동시에 냄비 역

시 싱크대로 떨어졌다. 그녀는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는 회한과 절망에 머리를 양팔에 묻었다. 다음날은 그야말로 생존을 위한 처절한 투쟁이라 해야 옳았다. 앨리슨은 삼각대 위에 설치된 카메라에 코를 들이박고 앞니 빠진 국민학교 이학년 생들을 찍느라 무려 여섯 시간을 보냈다. 이일은 예술 행위라고는 좀 말하기 뭣하지만, 어 쨌거나 스튜디오의 임대료는 보장해 주었다. 오후 세 시경, 아이들의 촬영이 끝날 무렵 바깥 기온이 급강하하기 시작했다. 앨리슨은 이마까지 모자를 푹 눌러 쓰고 목에는 목도리를 칭칭 감은 후 밴을 몰고 스튜디오가 있는 시내로 향했다. 스튜디오 창문엔 얼음이 두껍게 서려 있었고, 마룻바닥사이로는 외풍이 솔솔 들어왔다. 그런데 매티가 약속했던 자료들이 벌써 우편으로 도착해 있었다. 그녀는 자동 응답기를 서둘러 체크 한 뒤 급한 용무가 없다는 걸 확인하고는 우편물을 갖고 집으로 향했다. 오늘은 다소간의 기대감이 있었기에 어제의 우울한 귀가와는 달랐다. 겨자 색 봉투 안에는 익숙한 매티의 글씨로 씌어진 메모가 눈에 띄었다.<전체가 컬러가 아니어서 미안하오. 하지만 컬러로 찍어도 손색이 없을 몇 명을 골랐소.>먼저 열 다섯 명의 여자 모델들의 자료부터 검토하기 시작했다. 컬러와 흑백이 섞여 있었는데, 그녀가 주문한 대로 한결같이 어깨 길이의 머리였다. 그녀는 테이블과 소파 가장자리에 사진들을 한 장씩 죽 내려놓았다. 몇 명은 얼굴이 예뻤지만, 완전히 넋을 잃게 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녀는 다소 실망한 뒤, 이번에는 남자들 사진을 꺼냈다. 슬쩍 벌어진 입술 사이로 이빨 한 개가 드러내 보이며 미소 짓는 얼굴은 완전 어린 장난꾸러기의 분위기였다. 또 다른 사진은 진지한 표정에 비해 다소 개성이 부족한 듯했다. 다음은, 얼굴도 잘생긴 데다 체격도 건장했지만, 앨리슨이 보기엔 가슴에 전혀 털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가 염두에 두고 있는 포즈대로라면 가슴의 털이 상당히 중요했다. 다음은 담배 아니면 술 광고에나 어울릴 법한 험한 인상이었다. 그런데 그 험한 인상 다음의 사진이 드러나는 순간, 입으로 가져 가던 컵을 든 그녀의 손길이 문득 멈췄다. 그녀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아지면서 쿠션에 기대고 있던 몸이 앞으로 당겨졌다. 한참을 그녀는 그 얼굴을 응시하다가, 컵을 입에 가져 갔다. 입안이 바짝 말라 들어가는 듯했기 때문이다.

[세상에, 맙소사!]

앨리슨은 컵을 내려놓은 뒤 흩어져 있던 사진들 중에서 문제의 상반신 사진 한 장을 집어 들고 벌떡 일어났다.

[대단해. 정말 멋져.]

그 얼굴은 사람의 것이라 기엔 너무도 완벽했다. 머리카락은 아무렇게나 빗어 넘긴 상태였고, 그의 눈빛은 탁자 위의 스탠드 아래서 미묘한 빛의 떨림을 반영하는 듯 따뜻하고 편안해 보였다. 곧게 뻗은 오뚝한 콧날, 긴 뺨과 단단해 보이는 턱, 그리고 그 입...그녀는 사진 작가의 눈으로 그 얼굴을 뜯어보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여자로서의 감각도 반응하고 있었다. 윗입술의 윤곽은 그야말로 완벽했다. 입술 양끝의 완벽한 대칭, 그리고 적당히 도톰한 아랫입술은 사진 찍을 당시의 기분을 반영이라도 하듯 지긋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잘생긴 귀, 지나치게 굵지 않으면서도 강해 보이는 목, 사진 속에선 한쪽으로 약간 비스듬히 보이는 어깨 역시 흠잡을 데라곤 없어 보였다. 특이하게도, 그는 한쪽 칼라가 삐뚜르름 하게 올라가고 다림질이 제대로 안 된 셔츠를 입고 있었다. 흔히 외모를 파는 남자들이 선호하는 말쑥한 복장이 아닌 게 오히려 이상했다. 열려진 재킷 안에 입은 오픈 넥 셔츠의 단추는 적당히 끌러진 채였다. 여기까지군. 앨리슨은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의 가슴엔 분명 털이 무성할 거라는 데 걸라는 데로 걸겠어. 앨리슨은 사진의 뒷면을 보았다.<리처드 랭 금발. 파란 눈.>그녀는 그 메모를 읽고 또 읽었다. 이 정도로 충분하다고 느꼈던 걸까? 리처드 랭. 금발에 파란 눈. 세상에 이처럼 완벽한 외모를 가진 남자에 대해 이것밖에 할 얘기가 없단 말인가? 이 남자는 누구일까? 왜 이전에는 노스스타 광고 대행사의 자료 철에서 그의 얼굴을 보지 못했던 걸까? 그는 모름지기 사진 작가들이라면 마땅히 꿈꾸는 이상적인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앵글의 각도를 잡기에 더할 나위 없이 이상적인 골격과 영상으로 표현하기 좋은 수려한 외모, 그리고 살아있는 듯한 턱과 풍부한 감정을 표현해 낼 수 있을 것 같은 입. 그녀는 화가 났을 때와 미소를 머금고 있을 때 그의 입술 선이 어떻게 변할지를 상상해 보았다. 한술 더 떠서 인화지에 박힌 그의 얼굴이 과연 실물로 움직일 땐 어떨까를 상상해 보기도 했다. 그의 가볍게 미소 짓고 있는 입 양쪽에는 매력적인 웃음 선이 새겨져 있었다. 리처드 랭. 스물 다섯 살, 금발, 파란 눈, 사람을 사로잡는 얼굴. 마치 제이슨 처럼...그러나 앨리슨은 제이슨의 이름이 뇌리에 떠오르기 전에 서둘러 그 생각을 지워 버렸다. 리처드 랭. 바로 당신이 적격이야! 앨리슨은 약간 몸을 뒤로 젖힌 채 사진 속의 얼굴을 다시 응시했다. 그녀는 벌써 그에게 어떤 포즈를 부탁할 것인지, 카메라 앵글은 어떻게 잡을 것이며 조명이나 배경은 어떻게 배치할 것인지를 머리 속에 그려 보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에게 어울릴 만큼 예쁜 여자 모델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적어도 그녀가 보기엔 그랬다. 사실 앨리슨은 남자주인공을 사로잡을 만한 여자 주인공의 모습을 그려 보고 있었던 터였다. 그런데 정작 이 정도의 외모를 가지고 있는 남자라면 오히려 여자 상대를 구하기가 어려우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앨리슨은 싱크대에 컵을 내려놓고 침실로 갔다. 그리고 셔츠와 청바지를 파란색 실내복으로 갈아입고 다시 리처드 랭을 떠올렸다. 그의 얼굴에서 기어코 흠을 찾아내야겠다는 생각에 다시 거실로 가 사진을 집어 들었다. 그때까지도 그의 얼굴은 줄곧 그녀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앨리슨은 그의 사진이 컬러였으면 더 좋았을 거란 생각을 했다. 흑백 사진처럼 그의 피부는 깨끗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주근깨가 덕지덕지 났을지도 모르고, 불그스레하거나 누르스름한 혈색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흑백이라지만, 그의 피부가 매끈하고 탄탄하리라는 것 정도는 금방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집요하게 흠을 찾아내려 하다가 결국은 이남자가 매우 고약한 성미를 가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까지 미쳤다. 제발 정신 좀 차려라. 그녀는 스스로를 질책했다. 그게 무슨 상관이겠니, 앨리슨 스콧! 넌 지금 그의 사진 한 장만을 달랑 갖고 있는 거잖아. 행여 그 남자가 포악하다 해도 그게 너와 무슨 상관 이겠냔 말이야! 하지만 그날 밤, 앨리슨은 좀 체로 잠이 들지 못했다. 제이슨이 그렇게 가 버린 이후, 일에 대해 이처럼 가슴 설레며 고대했던 적은 없었다. 다음날 아침, 앨리슨은 매티에게 전화를 걸어 여자 모델들을 더 찾아봐 줄 것을 부탁한 뒤 점심 약속을 했다. 피터스 그릴의 닭 스프에서 모락모락 피어 오르는 김을 보자, 앨리슨은 그야말로 몇 주 만에 처음으로 시장기를 느꼈다. 매티가 어떤 모델을 골랐냐고 묻자 앨리슨은 리처드 랭의 사진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이 친구로군!]

매티가 짧고 억센 손가락으로 사진을 가리켰다.

[내 그럴 줄 알았지! 이 친구를 고를 줄 알았다고, 금발과 파란 눈이라는 얘기를 듣자마자 난 그의 사진을 봉투 속에 집어 넣었다고. 필름 작업하기엔 그야말로 적격일 거요.]

[정말로 해보고 싶어요, 매티.]

앨리슨이 진심으로 말했다. 앨리슨은 매티의 손에 들려 있는 사진을 힐금 보고는 다시 한번 그의 완벽한 모습에 감탄했다. 그녀는 지나가는 투로 매티에게 이렇게 물었다.

[이 사람에 대해 따로 아는 건 없어요?]

[글쎄 별로. 내가 그 친구를 처음 봤을 때도 물 빠진 바지에, 도대체 여자의 손길이라곤 미치지 않은 것 같은 구겨진 셔츠 차림 그대로였소. 매우 특이한 케이스지. 우리 고객들 대부분은 어떻게 든 모델로 발탁되기 위해서 기를 쓰고 멋지게 차려 입는 편인데 말이오.]

[음, 나도 그 정도는 알아차렸어요. 그의 셔츠는 마치 백년 전쟁을 치르고 온 병사의 윗도리 같지 않아요? 그리고 이 머리...세상에 매티, 이 머리 좀 보세요! 이건...]

[자연스럽지.]

매티가 딱 잘라 말했다.

[네, 그렇군요.]

앨리슨은 머리를 조아리고 다시 사진으로 시선을 던졌다.

[자연스럽죠. 그의 나머지 부분처럼요. 내가 궁금한 건 이 사람의 가장 큰 흠집이 뭘까 하는 거예요. 외모로는 도저히 흠을 잡을 만한 구석이 없으니...]

[아마도 성질이 아닐까. 반반하게 생긴 친구들 대부분이 그렇듯 말이오.]

그건 참으로 실망스러운 대답이었지만, 사실 일리 있는 말이기도 했다.

[그럴지도 모르죠.]

앨리슨은 사진을 멀찌감치 밀어 놓으며 시인했다.

[남자 모델들의 자존심에 대해 굳이 나에게 강의하려 들지 말아요. 적어도 나는 제이슨 애덜리 라는 사람을 겪어 본 후이니까.]

[미안하오. 자꾸 어제부터 그 친구를...]

[아니, 매티. 괜찮아요.]

앨리슨은 손바닥을 들어 괜찮다는 시늉을 했다.

[그가 떠나 버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라면 애당초 어떤 구체적인 합의나 조건도 없이 대뜸 그를 받아들이지 말았어야 했어요. 그건...뭐랄까. 그건 어리석은 백일몽 같은 거였다고 나 할까요. 하지만 이젠 끝났어요. 이제 어느 정도 충격에서 벗어날 때도 됐고. 이젠 정말로 일에 매진해서 이름도 날려 보고, 그게 이루어지고 나면 정말로 인생을 함께 하고 싶은 남자를 선택할 거예요. 절대로 남자가 먼저 날 선택하게 내버려두진 않을 거라고요.]

[흠, 글쎄. 만약 그렇게 할 거라면, 어디 안정된 배관공이나 잡화상, 아니면 회계사를 찾아보는 게 어떨까?]

[그런 걱정 일랑은 접어 두세요. 매티, 나도 나름의 교훈을 체득했으니까요. 내가 만날 사람은 우선 너그럽고 겸손하고 정직해야 돼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해요.]

시종 미소 지으며 그녀의 얘기를 듣고 있던 매티가 마침내 웃음을 터뜨렸다.

[이봐, 만약 그런 친구를 찾아낸다면 두 명을 발탁하는 게 어떨까? 한명은 나한테...]

그들은 배꼽을 잡고 웃었다. 앨리슨도 자신의 비현실적인 환상에 웃음을 터뜨렸다. 앨리슨은 과연 그런 남자가 이 세상에 있기나 할 지부터가 의심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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