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차갑고 축축한 공기 때문에 떨고 있는 질리언의 몸을 덮어주기 위해, 벤은 흔들거리는 해먹에서 일어나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갑자기 희미한 소리에 본능적으로 그는 고개를 들었다. 황소 같은 커다란 형상이 베란다의 그늘을 뛰쳐나가더니, 소름끼치는 침묵이 잠시 흘렀고, 갑자기 번쩍이는 칼날이 높이 솟았다. 질리언이 그와 두트라의 사이에 꼼짝없이 끼여 있었다. 벤은 공포와 분노가 뒤섞인 원초적인 고함을 지르며, 난폭하게 그녀를 해먹에서 끌어내렸고, 동시에 뒤로 몸을 빼면서 권총을 더듬어 찾았다.
간신히 권총을 쥐는가 싶더니 그만 균형을 잃고, 그는 자신의 해먹을 가로질러 한쪽으로 넘어졌다. 질리언을 본체만체 하면서 두트라는 사납게 흔들리고 있는 해먹과 널브러진 그녀의 몸 위로 뛰어 올랐고, 사악한 즐거움이 담긴 미소를 지으며 벤을 덮쳤다. 벤이 다행히 한쪽으로 구르자 칼날이 해먹을 가르며 반으로 찢어졌고, 그를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벤은 넘어지면서 무릎으로 세게 차는 공격자세로 두트라를 뒤쪽으로 보내버렸지만 쓰러뜨리진 못했다.
넘어지던 찰나 벤의 어깨가 세게 부딪히면서 권총을 떨어뜨렸다. 그는 총을 다시 쥐면서 귀중한 몇 초가 허비된 걸 깨달았다. 두트라가 기운을 되찾았고, 번쩍이는 칼날을 높이 세우며 다시 덤벼들었다.
벤은 한쪽 무릎으로 일어섰다. 옆에 서 있는 질리언은 간신히 두 발로 일어서고 있었다.
「도망가!」
벤이 소리치며 그녀를 밀었다.
하지만 벤은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두트라가 칼을 마구 휘저었고, 벤은 몸을 날려 불빛이 있는 문 안으로 물러났다가 어깨로 두트라의 배를 세게 박으며 돌진했다. 동시에 왼손으로 두트라의 칼을 쥔 손을 움켜쥐고 팔을 꼼짝 못하게 하자, 두트라는 더 이상 칼을 휘두를 수가 없었다. 맹렬한 공격을 받자 사납게 으르렁거리긴 했지만 두트라는 황소 같은 힘을 지닌 사내였다. 두트라가 총을 보고, 벤의 두 손을 움켜쥐는가 싶더니 총 쥔 손을 꺾었다.
그들은 목숨을 건 격투로 엉겨 붙었다. 승자만이 먼저 무기를 쓸 수 있었다.
두트라는 해마다 열리는 격투경기의 선수였다. 그는 뒤로 굴러, 머리 너머로 루이스를 집어던지는 기술에 훤했지만, 당장은 루이스와 손에서 총을 빼앗을 수 없다면 작전이고 뭐고 저놈에게 총 쏠 시간과 영역만 확보시켜주는 셈이었다.
두트라는 베란다의 이엉지붕을 받치고 있는 나무기둥으로 벤은 세게 밀어 붙였다. 날카롭고 울퉁불퉁한 기둥 모서리가 벤의 등에 박혔다. 두트라의 작은 머리통이 총알같이 앞으로 돌진하며, 벤을 박으려 했다. 벤은 고개를 뒤로 돌리며 기둥에 몸을 단단히 붙이고는, 지레작용을 이용해 두트라의 발목을 걸어 확 들어올렸다. 두트라가 눈 깜짝 할 새 퉁겨 나가면서 둘 다 빗속으로 굴러 떨어졌다.
질리언은 두 발을 끌면서 다시 일어섰다. 두트라가 보이는가 싶더니, 이내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가 바로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위험 속으로 내던지며 도망가라고 소리치는 걸 들었다. 너무나 악몽 같은 상황으로 그녀는 한동안 얼어붙은 듯 멍청하게 서 있었고, 그리고 번개 불빛으로만 희미하게 보이는 두 남자가 비에 흠뻑 젖은 채 진흙 속을 뒹굴고 있는 모습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우르릉거리는 천둥소리가 온 사방을 울리고 있었다.
그녀의 뒤편에서 불이 켜지더니 베란다를 가로질러 약한 빛이 새어나왔다. 시끄러운 소리로 사야드가 잠이 깼던 것이다.
불켜는 스위치 소리와 동시에 질리언은 일종의 안도감을 얻었고, 마치 두 개체가 연결이라도 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녀의 머릿속은 다시 이런 일이 벌어진 데 대한 분노로 가득 찼고, 거세게 타오르는 분노로 제정신이 아니었지만, 자신도 믿어지지 않는 자제력으로 안정을 되찾으려 애썼다. 소리를 지른다는 건 미처 생각지도 않았지만, 낮고 동물적인 울림이 그녀의 목을 진동시키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거라곤 두트라뿐이었고, 흉측하게 생긴 작은 머리통이 시야에 가득 들어오자, 다른 건 보이지도 않았다. 생각할 시간이나 여유도 없이 대뜸 그녀는 빗속으로 뛰어 들었고, 그들을 뒤쫓았다.
그녀는 두트라의 등에 올라타서, 두 손으로 축축하고 지저분한 머리칼을 잔뜩 움켜잡아 잔인하게 비틀고는 사력을 다해 뒤로 힘껏 당겼다. 두트라는 고통으로 울부짖었고, 고개를 뒤로 젖히며 아픔을 이겨보려고 안간힘을 쓰자 굵은 목에서 힘줄이 불끈 솟았다.
그녀는 숨이 넘어갈 듯 다급하게 고함치는 벤의 소리를 들었지만,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순 없었다. 두트라의 머리칼을 틀어쥐며 뒤쪽을 공격했다. 두트라의 목덜미를 느슨하게 할 정도로 한 움큼의 머리카락이 뜯겨나가며 그녀는 진흙으로 내동댕이쳐졌고, 손가락 사이에는 아직도 검은 머리카락이 잔뜩 쥐어져 있었다.
두트라는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며 미쳐 날뛰었다. 그리곤 벤을 덮치며, 육중한 몸무게로 그를 진흙 바닥에다 짓눌렀다. 지레 역할까지 못하겠지만 힘껏 등을 들어올리면서, 벤은 죽을힘을 다해 성난 황소 같은 놈과 버티고 있었다. 도저히 두트라를 던져낼 수가 없었다. 격분한 두트라가 무기를 제거하려고, 총을 쥔 벤의 손을 바닥에 찍기 시작했다. 벤은 절망적으로 간신히 버티면서도 권총을 놓치지 않는 데 온힘을 집중시켰다. 이 총이야말로 그의 유일한 희망이었던 것이다.
질리언은 발을 동동 굴렀고, 바로 뒤에서 사야드가 소리치고 있었다. 판자촌의 사람들이 깨어나 빗속으로 몰려나와 지켜보고 있었다.
두트라의 무릎이 벤의 몸을 누르고 있었으므로 벤이 다리로 공격하기에는 너무 높은 위치였다. 질리언은 굳은 결의를 다지며 축구선수처럼 정확한 발걸음으로 표적에 눈을 고정시킨 채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녀는 단숨에 격투의 중심부로 들어가, 정확히 오른쪽 지점을 다리로 후려쳤다. 그녀는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부츠로 두트라의 급소를 강타했고, 다시 공격을 더했다.
두트라는 상스런 비명을 질러대며 온몸을 뒤로 꺾는가 싶더니 한쪽으로 그게 기울였다. 벤이 몸을 일으켜 권총을 겨누었다. 총알이 두트라가의 관자놀이를 정확하게 관통했다. 거구가 휘청거리며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벤은 힘겹게 두트라의 몸을 밀치며 빠져나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질리언은 몇 발짝 떨어진 곳에 우두커니 서서, 떨어지는 빗방울에 얼굴과 머리와 옷을 적시고 있었다. 그녀는 두트라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마치 두트라가 다시 움직이는 걸 기다리는 듯 주먹을 불끈 쥐었고, 가슴은 격하게 오르내리고 있었다.
「질리언?」
그가 조심스레 다가왔다.
「그는 죽었어.」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작은 복수의 여신같이, 그리고 으르렁대는 동물과도 같이 두트라의 등으로 뛰어 올랐을 때, 그녀가 내던 그 낮고 싸늘한 소리를 그는 기억했다 아주 부드럽게 그녀의 팔을 쓰다듬으며 다른 쪽으로 데려갔다.
「그는 죽었어. 질리언, 내가 쏘았잖아.」
그녀는 멈칫 하더니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내 목숨을 구했어. 뭘로 그를 쳤지? 그게 놈의 주의를 끌었던 것 같은데.」
그는 낮고 차분한 어조로 계속했다. 그녀는 잠시 입을 다물더니 반짝이는 눈으로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의 급소를 차버렸어요.」
정중하고 조그만 목소리는 충격적이었다. 벤은 저절로 움찔해지려는 걸 억눌렀다.
「자, 질리언. 이제 비를 피하자고.」
그의 팔이 그녀의 허리를 부드럽게 껴안았다. 그녀는 그의 팔에서 스르르 빠져나가더니, 멈춰선 그를 남겨두고 진흙 위에 그대로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를 안아 올리려 했지만, 그녀의 표정에 떠오른 뭔가가 그를 멈추게 만들었다. 이미 자신도 겪은 바가 있듯이, 지금 그녀의 기분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살인적인 분노를 내뿜고 있는 자신을 다시 추슬러야 했다. 지금 그녀는 혼자만 있고 싶을 것이다.
베란다에서 사야드가 그에게 소리쳤다. 사야드는 희고 긴 잠옷을 입고 오른손에 칼을 들고 어 있었다.
그는 질리언을 쳐다봤다. 그녀는 어깨를 떨구고 고개를 숙인 채, 거기에 그냥 앉아 쏟아지는 비를 맞고 있었다. 그녀는 이미 흠뻑 젖어 더 이상 비에 젖을 데도 없을 정도였다. 내키진 않지만, 벤은 그녀를 혼자 남겨두고 다샤으데게 걸어갔다.
「자네, 여기에 대해 설명을 해야겠지.」
그녀는 깊고 쉰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저 남잔 누구지?」
「모든 걸 얘기해드리죠.」
그가 말했다.
「커피 좀 끓어주시겠어요? 차도 괜찮소. 질리언은 지금 따뜻한 게 필요할 거요.」
사야드는 잠시 멈춰 서서 그녀의 환대가 석연치 않다는 말이라도 들은 듯이 그를 노려보았다.
「물론, 수건도 좀 가져오지.」
그리고는 두트라의 몸으로 시선을 던졌다.
「저걸 치워야겠군.」
판자촌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빗속에 서서 시체를 쳐다보고 있었다. 세뇨라가 그들에게 소리쳤다.
「시체를 창고로 가져가.」
그러자 서너 명이 앞으로 나와 두툼한 팔다리를 나눠 쥐고는 두트라를 질질 끌고 아침까지 창고 안에 던져두었다.
세뇨라가 안으로 들어가 버리자, 이제 벤은 질리언에게 돌아와 옆에 웅크리고 앉았다.
「됐어, 질리언. 사야드 부인이 수건을 가져올 거야. 몸을 말리고, 커피를 마시자고. 괜찮겠지?」
고개를 들고 그를 보았다.
「꿈인가요?」
그녀가 말했다. 그는 긴장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꿈이 아니라 생시야. 큰일을 겪었으니 그럴 만도 하지. 현실로, 모든 게 분명히 제자리로 돌아온 거야.」
「맞아요.」
그녀는 한숨지으며 두 발로 일어섰고, 모든 근육이 아직 제 기능을 다하지 않는 것처럼 천천히 아주 주의 깊게 움직였다. 그의 팔이 다시 그녀의 허리에 둘러졌고, 그들은 천천히 베란다로 걸어갔다. 비가 그치고 폭풍이 지나가자, 그는 고개를 들고 구름 사이로 언뜻 비치는 별들을 바라보았다.
노파가 수건 두 장을 가지고 나왔다. 질리언은 건네 받은 수건으로 얼굴을 닦은 다음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세심하게 문지르기 시작했다. 갈아입을 만한 옷도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최대한 세심하게 입고 있던 옷을 닦고 있었다.
그러나 세뇨라가 그들을 보더니 험악하게 입술을 오므렸다.
「자네들에게 맞을 만한 옷이 있을 거야. 내 남편은 자네만큼 큰 남자였으니, 세뇨르. 맙소사, 신께서 당신의 비천한 영혼들을 타락시킨 게지, 쯧쯧. 그리고 아가씬 내 치마와 블라우스를 입어, 불쌍한 병아리 같으니.」
정말 불쌍한 병아리가 된 기분이었다. 그녀는 흠뻑 젖었고 흙투성이인데다가, 기직맥진해 있었다. 사야드가 옷을 꺼내왔고, 질리언은 벤과 같이 저쪽 베란다로 가 서로의 사생활을 지키며 옷을 갈아입었다. 사야드의 치마는 너무 길고 커서 종아리 중간부분까지 길게 내려왔지만, 세뇨라가 화려한 장식띠를 가져다주자, 질리언은 그걸 허리에 두르며 예쁘게 매듭을 지으려고 애썼다. 흙투성이의 부츠를 벗어버렸지만, 갈아 신을 신발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벤 역시 맨발이었다.
사야드가 이번엔 그들을 위해 낡은 가죽 신발 두 켤레를 가져다주었다. 작은 신발도 질리언에게 헐렁한 편이었지만, 발이 빠지지 않도록 조절할 정도는 됐다.
그리고 탁자에 둘러앉아 뜨겁고 향긋한 커피를 마시며, 카페인으로 쿵쾅거리며 날뛰던 흥분을 어느 정도 달랬다. 질리언은 창백한 표정으로 조용히 앉았고, 벤은 모든 상황을 낱낱이 사야드에게 털어놓고 있었다. 대부분은 털어놓았지만 보석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단지 두트라가 탐사 중에 질리언의 오빠를 죽였고, 그리고 목격자인 그들마저 죽이려 했다고 설명했다. 충분한 설명은 아니었지만, 사야드는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
대신 사야드는 다소 충격적인 말을 툭 내뱉었다.
「여기 사람들이 아침에 내륙으로 시체를 옮길 거야. 집 가까이 시체를 묻을 순 없지. 자네도 알다시키 악취가 진동을 하잖아.」
두트라가 살아 있을 때보다 더 지독한 악취를 풍길 수 있을지 벤은 의심스러웠지만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정부에 보고해야 한다는 말은 아무도 꺼내지 않았다. 이런 외떨어진 촌사람들은 오늘과 같은 시시콜콜한 일들을 주로 스스로 해결하곤 했던 것이다.
「사야드 부인.」
질리언이 불렀다.
「저, 화장실 좀 쓸 수 있을까요?」
사야드가 커피를 가져왔을 때 감사의 말을 한 후로 처음으로 그녀가 말문을 열었다.
나이 지긋한 사야드는 상냥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집 뒷부분을 가리켰다. 질리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벤은 그녀가 나가는 걸 지켜보면서, 그녀의 숙여진 머리를 안쓰럽게 쳐다보고 있었다.
「여잔 괜찮을 거야.」
사야드가 말했다.
「그녀는 강해. 지체없이 공격을 하더군. 바보같이 찔찔 짜거나, 안절부절 손이나 쥐어짜는 데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말이야.」
「알고 있소. 보통 남자 열 명 합친 것보다 더 용기 있는 여자요.」
10여 초 후, 그는 갑자기 발을 구르며 일어섰다.
「제기랄!」
즉시 그들이 자던 베란다로 달려나갔다. 배낭이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또, 뭔가?」
노파가 뒤에서 씩씩거리며 물었다. 그는 끊임없이 욕을 해대며 선창까지 단숨에 달려갔다. 별빛으로 반짝이는 강을 배경으로, 구명정에 오른 질리언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그녀가 시동을 걸기 위해 줄을 열심히 당기기 시작하자, 그는 다급하게 고함쳤다. 세게 두어 번 당기자, 작지만 든든한 모터에 생명을 불어넣은 듯, 구명정이 선창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의 발이 선창의 널빤지를 쿵 하고 구를 때쯤, 그녀는 이미 150미터나 떨어져 있었고, 시시각각 간격을 넓혀가고 있었다. 벤은 우두커니 선창에 서서 그녀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걸 지켜보았다.
주먹을 불끈 쥐고, 알고 있는 욕이란 욕을 다 퍼붓고 있을 때, 사야드가 옆에 다가왔다.
「여자가 왜 달아났나?」
그녀가 대뜸 물었다.
「말다툼을 했소.」
벤이 말했다. 그리곤 축축한 머리카락 사이로 손을 쑤셔 박았다. 맙소사, 자신이 얼마나 멍청했는지 아직도 믿어지지 않았다. 방금, 그것도 자신의 입으로 질리언의 용기에 대해 찬사를 쏟아내고 있지 않았는가! 질리언이 쉽사리 굽히지 않으리란 걸 간파했더야 했고, 이런 사태를 예측했어야 했다.
「심각한 언쟁이었나 보군. 그냥 말다툼 정도가 아닌 것 같은데.」
「맞소. 꽤 심각하오.」
그가 투덜거렸다.
「여자를 붙잡으면 어쩔 건가?」
세뇨라가 호기심을 드러내며 물었다. 벤은 난폭한 방법들을 서너 개 떠올렸지만, 그 생각을 곧 떨쳐버렸다.
「키스할 거요.」
마침내 그가 말했다.
「그리고 사랑을 나눌 거요.」
무릎이 후들거렸고, 결국은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난 그녀와 사랑에 빠진 거요.」
멍하니 말하며, 시커먼 강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아!」
사야드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자넨 내 생각만큼 바보는 아니군. 곧 동이 틀 거야. 한 시간 안에 말이야. 그때 여자를 따라잡으면 돼.」
「난 배도 없소. 사야드 부인.」
「배로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려고?」
그녀가 소리쳤다.
「내 비행정을 이용하는 게 훨씬 빠를 텐데! 내가 자넬 태워주지.」
벤은 고개를 들었고, 온몸에서 강렬한 희망의 기운이 훨훨 타오르고 있었다.
「난 비행면허를 가지고 있소, 부인.」
「그럼, 자네가 직접 몰게나. 하지만 내 비행정을 돌려주지 않으면, 내 자넬 찾아내서 따끔한 맛을 보여줄 거야. 하! 준비가 다 됐나 보군. 여자가 가진 연료는 얼마나 되지?」
「다음 정착지까진 갈 수 있을 테지만, 그때쯤이면 연료를 다시 채워야 할 거요.」
「그럼, 거기서 여잘 기다리면 되겠군.」
질리언은 어슴푸레하게 반짝이는 넓은 강줄기를 따라 계속해서 나아갔다. 그녀는 결국 해냈지만, 승리감이라든가 흥분 같은 건 느껴지지도 않았다. 단지 피곤할 뿐이었고, 전보다 더 지쳐 있었다. 밤에 있었던 사건으로 녹초가 될 만도 했다. 여자 혼자 구명정으로 강을 누비고 다니는 게 얼마나 위험하지 잘 알았지만, 다른 대안이 없었다. 만약 같이 마나우스에 도착했다면, 그녀가 벤에게서 여왕의 심장을 빼내 올 기회는 거의 없었다. 이번이 유일한 기회일지도 몰랐기 때문에, 질리언은 바로 행동에 옮겼다.
그를 다시 볼 기회는 없을 것이다. 그가 어떻게든 그녀를 붙잡기만 한다면, 사실 그러길 바랐지만, 그럴 가능성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판자촌에는 작은 보트가 보이긴 했지만, 낡은 모터보트만 몇 대 있었고, 이렇게 빠른 구명정을 따가 잡을 만한 성능은 없었다. 그가 다 쓰러져 가는 선창에 서서, 속사포처럼 욕을 퍼부어 대는 모습이 마지막 기억으로 그녀의 가슴속에 아로새겨졌다.
마나우스에 도착하려면 며칠이나 더 걸릴 지 몰랐고, 마침 공급품을 구명정에 놔두었기 때문에 식량은 문제없었다. 하지만 유일한 걱정거리는 연료였다. 사실 그녀의 수중에는 한푼도 없었던 것이다. 연료를 충당하기 위해선 식량과 교환해야 할 것이다. 배고픈 거야 그다지 큰 걱정거리가 아니었지만, 혹시 연료를 구하지 못한다면 노를 사용해야 했다. 그러면 벤은 그녀를 따라잡을 수 있는 확실한 기회를 얻는 셈일 테고, 그런 만약의 사태는 그녀가 건너야 할 난관이 될 것이다.
어스름한 진줏빛을 내뿜으며 새벽의 기운이 하늘을 밝히기 시작했고, 동시에 시시각각으로 어둠을 몰아내고 있었다. 열대의 밀림은 북쪽 지방보다 더 강렬하게 깊고 생생한 색조로 가득 채워졌고, 단조로운 밤의 색을 떨쳐버렸다. 아마 1, 2 주만 지나면 그녀는 내륙으로 돌아갈 것이고, 이번에는 정부가 후원하는 탐사대를 조직할 것이다. 그들은 지구상의 위치를 계산하는 좌표측정기구를 옮겨와 인공위성으로 사발지형의 정확한 좌표를 알아낼 것이다. 그런 후에는 비행기로 사발지형에 도착할 수도 있었다. 그러면 사발지형은 좀더 수월한 여행길이 될 것이다. 스톤 시티는 다시는 예전과 같진 않겠지만, 탐사하는 사람들은 그곳이 지닌 신비감에 적절한 존경을 보낼 것이다.
쓰라린 고통으로 가슴이 울렁거렸지만, 그녀는 자신이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작은 경비행기 한 대가 머리 위에서 윙윙거리자 그녀는 깜짝 놀랐다. 헬리콥터나 경비행기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확실하지는 않았다. 이런 문명의 불협화음을 들은 지도 여러 주가 지났던 것이다.
배를 멈추고 연료탱크를 살펴보니 겨우 몇 센티미터만 남겨져 있었다. 다음 정착지까지 도착할 수도 없다면, 강변의 정착민들과 거래를 해봐야 했다. 어떻게든 그녀는 마나우스에 도착할 것이다. 고기라는 건 있을 수 없었다.
시계를 가지고 있지 않아서 정확한 시간을 알 수는 없었지만, 그녀는 태양을 보고 시간을 계산하는 데 차츰 익숙해졌다. 다음 정착지가 시야에 들어온 때는 아침나절이 조금 지난 후였다. 다 쓰러져 가는 오두막들은 버팀대 위에 간신히 자리잡은 모습으로 강둑에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연료가 얼마 남지 않았고, 그녀는 선택의 여지도 없이 구명정을 세웠다.
정착지의 풍경은 어제의 장면과 별반 다를 게 없이, 아이들이 선창으로 달려나왔고, 부모들은 뒤에 서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녀를 반갑게 맞이하러 나온 남자가 있었다. 풍채가 당당한 신사가 열대 반바지에 샌들과 넓은 밀짚모자로 성장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훌렁 벗은 맨가슴에는 곱실거리는 회색 털이 가히 무성한 숲을 이루고 있을 정도였다.
「세뇨리타, 혼자인가요?」
예상했던 대로 그의 무성한 회색 눈썹은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처졌다.
「어쩌다 보니, 그래요.」
그녀가 말했다.
「난 마나우스로 가야 해요.」
「하지만 좋은 생각은 아니군요. 이곳은 아주 위험하오. 그리고 당신은 모자가 필요하군요.」
「난 연료가 필요해요.」
「네, 네. 물론이죠. 하지만 우선 우리 집으로 가야 해요. 내 아내가 당신에게 모자와 차가운 음료수를 대접할 거요.」
그녀는 잠시 망설였다.
「고마워요. 정말 그러고 싶지만, 전 돈이 없어요. 세뇨르.」
「모아레즈.」
그가 대답했다.
「전 볼리바르 모아레즈죠. 내 아내는 안젤리나고, 그녀는 천사 같아요. 당신도 곧 보시면 알겠지만. 돈 걱정은 말아요, 세뇨리타. 당신은 혼자고, 도움이 필요해요. 우린 기꺼이 도울 거구요. 이제 이리 와요. 빨리!」
그는 어떤 꼬마에게 구명정을 지키도록 말해놓고는, 정중하게 손을 내밀어 질리언이 선창으로 오르는 걸 도왔다. 그녀는 배낭을 쥐고 그의 도움을 받아들였다.
아주 매력적인 세뇨르 모아레즈보다 적어도 스무 살은 어려 뵈는 여자가 베란다로 나왔다.
「볼리바르?」
여자가 그를 불렀다.
「여보, 손님이 왔소.」
그가 큰 소리로 대답했다.
「사랑스런 아가씨가 우리 도움을 필요로 하오.」
모아레즈는 안경이 필요한가 보군. 질리언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흐뭇했다. 사랑스럽다고? 긴장과 피로로 틀림없이 초췌해 있을 테고, 머리는 이틀 동안 빗질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안젤리나 모아레즈는 앞으로 나와, 재치 있게 질리언을 원기 왕성한 자신의 남편에게서 구해주었다.
「아가씨, 시원한 안으로 들어가요. 얼음도 있고, 뭘 좀 마실래요?」
얼음이라는 말만 들어도 그녀는 기대감으로 거의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폐가 되지 않아야 될 텐데.」
간신히 말을 이을 정도였다.
모아레즈의 부인은 향긋한 실내로 그녀를 이끌었다. 모든 방의 천장에는 선풍기가 시원하게 돌아가고 있었고, 창문마다 가리개와 덧문들이 있었다.
「이름이 뭐예요, 아가씨?」
안젤리아는 투명한 녹색의 음료를 컵에 따르고, 얼음조각을 띄워 넣으며 물었다.
「질리언, 질리언 셔우드예요.」
그녀는 시원한 음료를 한 모금 들이켰고, 새콤한 라임 맛이 달콤하고 찡하게 퍼지자 이루 말할 수 없이 감미로웠다.
「모자가 있어야겠네요.」
안젤리나는 남편과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제가 당신이 쓸 모자를 찾아 올 동안 편하게 쉬고 계셔요. 여긴 이 마을과는 안 어울리게 현대적인 배관시설을 해놓았죠. 우리가 결혼할 때 볼리바르가 그래야 한다고 주장했죠. 내가 도시 출신이어서 그런지 그는 내가 가난하다고 느끼는 걸 싫어했거든요.」
현대적인 배관시설이라고? 질리언은 망연자실하게 여주인을 따라갔고, 안젤리나는 더위를 차단시킨 창문이 있는 작은 방으로 그녀를 안내했다.
「손님용이죠.」
안젤리나가 설명했다.
「전용 욕실도 있어요. 제가 모자를 찾을 동안 혼가 계셔도 괜찮죠? 편히 쉬고 계셔요.」
질리언은 완전히 뚝 떨어져 보이는 방에 홀로 남겨졌다. 그녀가 침대를 본 지도 몇 주나 지났던 것이다. 전에도 문화적인 충격을 경험한 적이 있었고, 한때 친숙했던 것들에 차차 익숙해지면 곧 이 충격이 사라질 걸 알았지만, 지금은 너무 지쳐 있었다. 그녀는 배낭을 내려놓고, 조심스런 걸음으로 욕실로 향했다. 그곳엔 윤이 나는 변기와 세면대, 그리고 진짜 욕조가 있었다. 사치스럽진 않았지만 실용적이었다.
자신이 촌뜨기처럼 느껴지는 건 놀라운 일이었다.
하지만 콸콸 쏟아지는 물은 정말 상쾌했다. 얼굴과 손을 씻고, 세면대 옆에 놓여진 빗으로 엉킨 머리를 가지런히 정돈했다. 욕조를 사용하고 싶은 생각이 들 것 같아 더 이상 꾸물거리지 않았다. 욕실을 나오자, 그녀는 다시 침대와 대면하고 있었다.
그녀는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조금씩 침대에 익숙해질 수 있을까? 정말 천국 같은 기분이 들 거야.
안젤리나가 싫어하지 않길 바라며,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아 보았다. 그러자 피로가 그녀를 집어삼키는 것 같았다. 잠깐만이야, 스스로에게 다짐하면서 그녀는 침대 머리판에 몸을 기대고 다리를 침대 위로 사뿐히 얹었다. 매트리스는 약간 울퉁불퉁했지만 아주 푹신했고, 그녀는 황홀하게 눈을 감았다. 정말 천국 같은 기분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몸에서 긴장이 풀리기 시작하는 걸 느꼈다.
갑자기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화들짝 놀라며 소름이 쫙 돋았고, 눈이 번쩍 뜨였다. 상식적으로 손님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 안젤리나가 보러 온 것이리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녀의 반응은 아직도 밀림에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안젤리나가 아니었다. 벤이 문가에 서서, 문틀에 어깨를 기대고는 골똘히 생각하면서 그리고 위험스런 눈빛으로 조용히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가슴이 무섭게 쿵 내려앉았고, 입 안이 바짝 말랐다. 아무 말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침대 머리판에 기대고 누워 공포로 온몸이 마비된 채, 시선을 그에게 못 박고 있었다. 자신이 벤을 두려워하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었지만, 지금은 두렵기 그지없었다. 그녀의 생각은 사방으로 불꽃처럼 흩어졌다.
그의 표정은 딱딱했고 턱은 굳어져 있었다. 배낭이 바닥에 놓여 있는 걸 분명히 알았다. 그가 할 일은 배낭을 집어 올리고 걸어 나가는 게 전부일 테고, 그를 막을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배낭 쪽은 눈길도 주지 않고, 계속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이때까지 결코 본 적이 없는 그런 눈빛이었다. 그의 냉혹한 표정에 그녀의 몸이 본능적인 경고를 울리며 사시나무 떨듯 떨리고 있었다.
「베… 벤.」
그녀는 거의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는 문에서 곧장 방안까지 들어왔고, 조용히 문을 닫았다. 두어 걸음 만에 침대 끝에 섰다. 커다란 근육질의 몸으로 방안을 꽉 메운 것 같았다. 그녀의 맥박은 빠르고 얕게 마구 뛰고 있었고, 두 손을 올리며 몸을 보호하려 했지만 부질없는 몸부림임을 깨달았다.
그는 그녀의 반응을 무시하며 몸을 굽혔고, 커다란 손이 치마 밑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거친 손길로 그녀의 팬티를 쥐고는 밑으로 벗겼다. 드러난 살결 위로 차가운 공기가 스치자, 그녀는 자신의 나신과 취약 부분이 노출되었음을 예리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그가 뭘 하려는지 깨닫자, 충격적인 전류가 온몸을 관통했다. 벤은 그녀의 다리를 벌렸고, 잠시 그녀의 섬세한 살결을 그대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한번 더 그녀의 얼굴을 뚫어져라 응시하며 잠시 있었다. 그의 한쪽 무릎은 침대 위에, 다른 쪽 발은 단단히 바닥에 고정시킨 채, 그녀의 벌어진 다리 사이에서 행동을 개시했다. 조용히 바지단추를 풀어 부풀어오른 그의 남성을 자유롭게 하더니 한 손을 그녀 옆의 매트리스 위에 놓은 채, 그녀의 골짜기 안으로 깊게 침투하여 자리를 잡았다.
그녀의 몸이 자신의 의지를 배반하고 기대에 부푼 긴장을 준비했다. 그가 거칠고 가차없는 동작으로 그녀의 충격받은 몸 안으로 파고들자, 그녀의 몸 깊숙한 곳에선 온통 긴장의 열기가 곤두섰고, 끝없이 파고드는 침입에 대응하고 있었다. 그의 몸에서 내뿜는 열기가 그녀를 감쌌고, 그녀의 열기 역시 온몸을 불태우고 있었다. 그녀의 깊숙한 심연 근육에서 보내는 저항을 다스릴 때까지 그는 그녀 안에서 자신을 억누르며 끈질긴 애무와 집요한 공격으로 그녀의 몸을 부드럽게 녹였고, 그녀가 자신을 받아들이고 있는 걸 분명히 깨닫도록 했다.
「날 안아.」
그가 초조하게 말하자 얼떨결에 그녀는 그의 말을 따랐다.
두 팔로 그의 넓은 어깨를 살며시 감싸자, 그녀는 그의 떨리는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그녀 위에 있었고, 그녀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는 느리고 깊은 공격에 호흡을 같이 했다.
그녀는 너무 놀라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애무에서 그녀의 모든 걸 지배하고자 하는 소유욕을 느꼈고, 남자의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는 걸 예리하게 깨달았다. 그는 그녀가 떠나가는 걸 온몸으로 거부하고 있었다.
그는 한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부드럽게 감싸며 들어올렸고, 그녀의 시선을 붙들어 맨 채 더 힘차고 빠르게 그녀 안으로 돌진했다. 침대의 머리판이 벽에 부딪치며 쿵쿵거리는 소리를 울렸다. 그녀가 그의 옆구리를 붙잡자, 그는 점점 더 높이 절정을 향하여 그녀를 몰고 갔고, 황홀하고 미칠 것 같은 감각이 모든 근육을 헤집으며 소용돌이쳤다. 그녀의 몸 안에서 훨씬 더 강해지는 그를 느낄 수 있었고, 그를 더 깊이 받아들이기 위해 엉덩이를 들어올리자, 자신의 아스라한 비명도 생생히 들을 수 있었다. 그는 그녀의 시선이 한시도 다른 곳을 향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녀가 절정에 있을 때도, 자신이 그녀 안에서 해방감으로 활개칠 때도, 꿰뚫을 듯한 푸른 눈으로 그녀를 꼼짝없이 붙들면서, 그녀가 그의 여자임을 인정하도록 재촉했다.
잠시 후 그는 그녀를 부드럽게 욕실로 이끌어 물을 틀고, 그녀는 욕조 안에 넣어주었다.
「그런데, 안젤리나는 어떻게 하죠?」
그녀가 속삭이며 그에게 기댔다. 그녀의 다리가 간신히 몸을 지탱하고 있었고, 그들은 아직 격정의 여운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었다.
「우릴 방해하지 않을 거야.」
그가 굶주린 듯한 진한 키스를 퍼부었다. 도저히 그녀에게서 손을 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난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어. 그들은 이해하지. 그들 생각에 이건 아주 낭만적인 일이거든.」
「당신이 날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녀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하지만 어떻게….」
「비행기.」
그가 짧게 대답했다.
「사야드 부인의 것이지. 내가 조종면허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아니요.」
부드럽게 놀리는 그의 말에 대답할 수도 없었다. 그녀는 미지근한 물줄기 아래에서 팔을 축 늘어뜨린 채 서 있었다. 정말 기가 막히게 상쾌한 물줄기였다. 기운이 다 빠지고 지칠 대로 지쳐, 이 물줄기를 따라 자신도 하수구로 휩쓸려 내려갈 것만 같았다. 그리고 갑자기 숨을 삼켰다.
「왜 배낭만 가지고 떠나지 않은 거죠? 내가 당신을 막을 수 없다는 걸 알잖아요. 이럴 필요는 없었는데.」
그녀가 매우 놀란 것은 자신이 여왕의 심장을 가지고 달아났을 때 그에게 상처를 입혔고, 그리고 단지 그 상처 입은 마음을 달래기 위해 그가 격정적인 사랑의 행위를 시도했다는 점이었다.
「당신은 사태를 직시하지 못하는 것 같군. 내가 뒤쫓아온 건 바로 당신 때문이오.」
그는 비누를 문질러 풍부한 거품을 내고는, 손으로 그녀의 몸을 부드럽게 문지르기 시작했다.
「다시는 내게서 달아나지 못할 거요.」
「하지만 왜 화가 안 난 거죠?」
그녀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물었고, 상황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화났어. 미치도록 화가 나서 계속 당신과 그 짓만 할지도 몰라.」
그녀의 웃음소리가 참지 못하고 터져 나오는 건 어쩔 도리가 없었다. 충격과 긴장이 몸에서 한꺼번에 빠져나가자, 그녀는 울기 시작했다 벤은 그녀를 가까이 당기며 품안에 꼭 끌어안았고, 둘은 물줄기 아래에 그대로 서 있었다. 그는 달래듯이 부드럽게 속삭이며 고개를 그녀 쪽으로 숙였다. 결국 그녀를 달래는 유일한 방법은 다시 사랑을 나누는 것뿐인 것 같았고, 그는 행동에 옮겼다. 그는 그녀를 들어올려, 그녀의 심연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그녀의 훌쩍임은 곧 격정적인 헐떡거림으로 바뀌었고, 잠시 후 그녀는 심오한 환성을 자아내고 있었다.
그들의 육체적 관계가 자아내는 때묻지 않은 정열은 그에게도 위안을 가져다주었다. 몇 시간 동안 그녀를 영원히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여 있었지만, 그녀는 그가 놀랄 만큼 순종적으로 자신의 몸 안으로 그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팔로 그를 껴안았을 때 벤은 세상을 다 얻은 듯했다. 최소한 내년까지는 그녀를 그의 시야에서 벗어나게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런 공포에서 회복되려면 그 정도 기간은 걸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