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낯선 시간속의 향기-21화 (22/24)

21

「왜 내게 말하지 않았죠?」

그녀가 혼란스러운 듯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모두에게 숨긴 건 이해되지만, 왜 내게 말해주지 않았죠?」

그는 재빨리 속도를 늦추고 조종기를 고정시켰다. 그녀는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서 다이아몬드를 무릎에 올려놓고 있었다. 아무리 거친 원석 그대로지만 보석은 눈이 부시게 화려했으며, 그 크기에 어안이 벙벙할 정도였다. 질리언은 아연실색해서 보석을 힘겹게 응시하고 있었다.

벤은 빠른 동작으로 총과 탄알을 다시 쥐고는 무기를 허리띠에 꽂고, 탄알을 호주머니에 넣어 두었다. 그리고는 그녀의 떨리는 두 손에서 다이아몬드를 낚아채 손수건으로 다시 싸더니 원래대로 배낭에 집어넣었다. 여전히 입을 꾹 다문 채 그는 배낭을 들고 조종기로 돌아가 자리에 앉았다.

질리언은 허수아비가 아니었다. 어림도 없는 일이지. 그녀는 배낭과 그를 번갈아 보며 눈썹을 모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죠?」

그녀가 따져 물었다.

「무슨 일인지 당신도 알 텐데. 난 다이아몬드를 찾아냈소.」

그가 간단히 말했다.

「케이츠가 그날 아침 당신을 본 거죠? 그렇죠? 그래서 그가 총을 쏘기 시작했고요.」

「그래.」

그가 속도를 올렸고, 구명정은 전속력으로 질주해 나갔다. 소음으로 대화는 불가능했고, 질리언은 뱃머리에 앉아 바람에 머리를 날리며 한참 동안 강물만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벤은 그녀가 충분히 혼자 정리할 시간을 가졌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으나, 사실 그녀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화가 치밀어 그와 대화를 나눌 만큼 가까이 다가가 앉았다.

「난 사진과 기록장 모두 남겨두고 왔어요.」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스톤 시티나 안자르에 관한 증거가 없어요. 이 다이아몬드는 안자르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걸 사람들에게 직접 확인시킬 수 있어요. 사람들의 주의를 끌 수 있고, 내 말도 들을 거예요. 그럼 탐사대도 보낼 테고, 적어도 아빠의 말은 입증될 테고, 릭의 시신도 회수할 수 있을 거예요.」

「내가 다시 데려다주지.」

그가 성급하게 말했다.

「다이아몬드로 뭔가를 증명할 필요는 없어.」

그녀는 한치의 흔들림 없는 초록색 눈으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당신이 왜 경비를 댄다고 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군요.」

「그래.」

그는 배낭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걸로 많은 돈을 쥐게 될 테니까.」

「아뇨. 사양하겠어요. 그런 돈은 쓰고 싶지 않아요.」

분노가 끓어올랐다.

「그런 돈이라니, 무슨 뜻이지? 이건 피묻은 돈이 아니라고. 그리고 다이아몬드 만으론 확실한 증거가 될 수 없어. 이 염병하게 커다란 다이아몬드가 브라질 정부측의 손에 들어가는 것만 확실할 뿐이지. 난 이걸로 탐사대를 다시 스톤 시티로 보낼 수도 있고, 나 자신도 한몫 챙길 수 있소. 아마 당신은 이걸로 잘난 체나 하는 유명인사들을 설득해서 탐사대를 조직해서, 당신 아버지의 이름을 새롭게 하는 동시에 자신의 이득도 챙기고 싶겠지만 말이야. 내가 좀 멍청한 건지, 거기에 무슨 큰 차이가 있는지도 모르겠군. 어쨌든 내 생각이 훨씬 더 현명한 처사라구.」

「다이아몬드는 브라질 사람들 몫이에요. 피라미드가 이집트에 속하듯이 말이죠. 당신은 피라미드의 무덤을 파헤친 도굴꾼들이 옳다고 생각해요? 역사가 도굴당했는데도?」

「이건 좀 다른 문제요, 질리언. 이 다이아몬드는 적어도 스톤 시티만큼이나 중요하거든. 사원이나, 그 무시무시한 석상들, 도시 그 자체도, 그리고 사발지형 안에 있는 건 모두 다 중요하고, 당신 같은 사람들이 앞으로 200년 동안 연구해야 할 것들이지. 하지만 이 다이아몬드에 그런 의미는 없소.」

「그건 가격을 매길 수 없는 유물이에요.」

「유물!」

그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이건 그냥 빛나는 돌멩이일 뿐이야. 그저 사람들이 갖고 싶어하는 보석일 뿐이지. 관 위의 벽장에 그냥 석류석을 놓아도 똑같은 의미가 될 거라구. 그러면 그걸로 우린 뭘 할 거라고 생각해? 아무리 타조 알만한 석류석이라도 다이아몬드가 받는 10분의 1 값도 못 받지.」

그녀의 얼굴이 돌처럼 굳어졌다.

「그걸 갖는 건 도둑질이에요.」

「제기랄!」

그는 넌더리를 내며 내뱉었다.

「젠장, 질리언. 이걸 찾아오는 데 손가락도 하나 까딱하지 않은 놈들에게 이 원수 같은 보석을 갖다 바치려고 내가 이런 위험을 무릅쓴 줄 알아? 우린 목숨을 걸고 그곳을 발견해냈어.」

「당신은 일에 대한 보수를 받았어요.」

그녀가 날카롭게 지적했다.

「그리고 내가 없었으면 당신은 그걸 찾아낼 수도 없었고요. 사실 당신 대신 내가 찾아내려고 했어요. 당신이 쓸쩍하는 동안 난 당신 미끼에 걸려 속아넘어간 셈이고요.」

「난 뭔가 발견하리라고는 기대도 안 했었어.」

「왜죠? 모든 게 내가 말한 그대로 있었잖아요.」

「난 다이아몬드를 가만히 앉아서 건네 받은 게 아니라구.」

그가 쌀쌀맞게 말했다.

「포기해.」

「날 강에 던질 셈인가요?」

그녀가 물었다.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마나우스에 도착해서 당국에 알리는 일뿐이군요.」

「내가 가진 걸 어떻게 증명할 거요?」

그의 푸른 눈이 얼음처럼 싸늘해졌다. 질리언은 무기력한 분노에 젖으며 침묵했다. 그녀는 자신이 당국으로 가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정부는 일일이 조사해보고는, 그녀 아버지는 무모한 계획으로 꽉 찬 사람이었고, 괴짜 아버지에 괴짜 딸이라는 정보만을 늘릴 것이다. 또한 그들은 그녀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고, 아버지의 모든 계획이 뻔한 결과로 나타났듯, 별로 대수롭지도 않은 막연한 목적을 위해 그저 대중의 관심이나 끌어보려고 그녀가 이야기를 지어냈다는 결론을 내릴 것이다.

벤은 영리하니까 브라질에서 다이아몬드를 팔지 않을 것이다. 아마 불법적인 통로로 거래를 하겠지만, 여왕의 심장이 벨기에의 엔트워프 항에 나타나리라는 건 내기해도 좋을 만큼 뻔한 사실이었다.

보석은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겠지만, 그 출처는 영원히 짙은 안개에 쌓인 채 신비감과 가치만을 더할 것이다. 그리고 혹시 누군가를 돋보이도록 하기 위해 부분 부분으로 잘려지고 나뉘어져서, 여러 개로 구색을 맞춘 장신구 세트로 만들어진다면? 여왕의 심장이 잘려진다는 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그 보석은 한 문화의 중요한 심장부분이었고 고스란히 보존되어야 했다.

「그만 화 풀어.」

그가 충고했다.

「내가 말한 대로야. 당신을 다시 그곳에 데려가겠어. 당신이 원하는 건 안자르의 증거이고, 분명히 그걸 얻게 될 거야.」

그녀는 몸을 일으켜 뱃머리로 돌아가, 강만 하염없이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자신들의 대화를 방해하는 거리감에 그는 지금 괴로웠다. 그녀를 세게 흔들며 자신과 마주보도록 하고 싶었다. 그는 상식적으로 행동했지만, 그녀는 지금 얼토당토 않는 이상주의를 펼치고 있었다. 제기랄, 왜 좀더 주의하지 않았을까? 그녀가 총알을 꺼내면서 배낭을 뒤적거릴 거라곤 미처 생각지 못했다.

맹렬한 분노가 치밀었다. 지금 그녀에게 청혼한다면 다이아몬드에 대한 일을 발설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로 오해할 것이다. 모든 게 뒤죽박죽이 되어버렸고, 그가 진심으로 그녀와 결혼하고 싶어하는 걸 확신시킨다는 건 부질없는 희망이었다. 모든 사실을 진작 털어놓기라도 했다면. 그는 난생 처음으로 결혼에 대해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지만, 질리언은 그를 믿지도 않을 뿐더러 그가 전부 없었던 일로 게워낸다 해도 그의 뺨을 후려칠 것이다.

정말 개 같은 날이군!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총격전이 있었고, 배는 가라앉았다. 또 자신이 결혼을 간절히 원한다는 걸 깨달은 지금 질리언은 그에게 단단히 화가 나 있었다.

그의 인내력이 점점 바닥났다.

무엇보다 두트라의 죽음을 확인해야 한다는 직감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러나 우선 질리언을 그곳에서 안전하게 떼어놓은 후, 다시 총격을 반복하더라도 두트라의 일을 완전히 마무리하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를 보호하는 게 일단 급선무였다.

케이츠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았다. 벤은 케이츠가 아직 살아 있을 가능성이 없다는 걸 잘 알았다. 사실 케이츠의 큰 실수는, 돈에 관련된 일이라면 부모마저도 쉽게 배신할 수 있는 두트라와 같은 인물을 고용한 것이었다. 케이츠는 두트라가 필요했지만, 두트라에게 케이츠는 이제 무용지물이었다. 아주 간단한 논리였다.

하지만 설령 두트라가 죽진 않았다 해도, 그래서 그 상태로 강둑까지 가거나 덧날 위험이 없는 부상 정도라고 억지로 추측해도, 어쨌든 두트라는 부상을 입은 몸이고 자신들을 추격할 방법도 없었다. 여기 열대밀림에서 감염은 거의 치명적이었고, 두트라가 자신을 치료할 만큼 약초에 대해 잘 모른다면, 그의 생존은 불가능한 일 같았다. 그런데도 왜 아직 걱정이 되는 것일까?

이 걱정은 완전한 결말을 봐야 하는 것이었다.

두트라는 부서진 배의 파편에 달라붙어, 구명정이 선회하는 소리를 듣자 물밑으로 살짝 숨었다. 순간 자신의 피가 강으로 흘러들어, 육식동물들의 표적이 되는 걸 떠올렸고, 수천 개의 날카로운 이빨들이 자신의 몸에 꽂히는 순간을 상상하자 등골이 오싹했다. 마침내 구명정의 모터 소리가 멀어지자, 그는 수면으로 떠올랐지만 배들은 급속도로 침몰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벗어나는 일이 우선 급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셔츠를 길게 찢어 오른팔의 상처를 질끈 동여매고는, 다시 깊은 강물 속으로 잠수했다.

두트라는 팔을 사용할 수 없었지만, 거의 초인적인 힘으로 강둑까지 헤엄쳐 갔고, 기진맥진해서 뭍으로 기어올랐다. 그리고 거기에 누워, 이때까지 들었던 모든 욕설을 다 동원해서 벤 루이스를 저주했다. 바보 같은 놈, 그놈은 왜 훤한 대낮에 그것도 한참 동안이나 배를 세우고 있었지? 전에는 그런 짓을 하지 않았잖아. 그런데 오늘은 왜 그랬지? 아마 그 잡것과 시시덕거리느라 그랬을 거야. 그년은 왜 밤까지 다리를 오므리고 있지 않은 거야?

이런 상황 따윈 완전히 두트라의 예상 밖이었다. 미리 준비한 방법으로 공격할 수도 없었다. 사실 그들이 잠든 한밤중에 살며시 숨어들려고 했었다. 그랬다면 아주 쉬웠을 텐데. 헌데 오히려 뒤통수를 맞은 건 두트라였고, 루이스에게 거의 죽임을 당할 뻔했다.

그러나 두트라는 멀쩡히 살아 있었다. 게다가 그들은 지금 두트라가 죽었다고 생각할 것이고, 오히려 그가 더 유리한 셈이었다. 그는 계속 그들을 추적할 것이고, 설혹 따라잡기도 전에 그들이 마나우스에 도착한다 해도 결과는 뻔할 것이다.

두트라는 약간의 원기를 회복하자, 간신히 두 발로 일어섰고, 잠시 생각에 잠긴 뒤 상류로 향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판잣집을 지나쳐 왔던 것이다. 그곳엔 음식과 배 같은 것도 있을 것이고, 아마 무기도 있을 것이다.

벤은 안전한 주거지를 찾아 밤 동안 잠을 청하는 게 나으리라 여겼지만, 허비한 시간을 만회하려면 그날은 도저히 그럴 수 없는 걸 알았다. 그는 구명정을 강의 물살에서 벗어나게 하여 한적한 백사장으로 들어갔다.

「텐트에서 하루 더 자리란 걸 예상한 것 같군.」

그가 말했다.

그녀가 구명정 앞쪽으로 옮겨간 뒤로 그가 꺼낸 첫마디였지만, 그녀는 그냥 그곳에 고집스레 머물러 있었다. 그녀는 대답도 하지 않았고, 그가 구명정을 강둑에 정박시킬 때 축 늘어진 잔가지들이 얼굴을 치지 않도록 뒤로 살짝 물러났을 뿐이었다.

그는 최대한 신중하게 구명정을 숨겼다. 혹시 약탈자들에게 두 명 뿐인 숫자가 들통난다면, 특히 한 명이 여자라는 사실은 남자 열 명보다 훨씬 더 쉽고, 군침 도는 표적이 될 것이다. 그들은 강둑에 즐비하게 늘어선 빽빽한 관목림에서 벗어나 내륙으로 향했고, 그는 작은 텐트를 세울 만한 곳을 물색했다. 그리고 질리언은 식량을 조금 꺼내 간단한 음식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는 텐트를 세운 뒤 그녀를 향해 아주 과장된 표정을 던졌다. 그리고 옆에 쭈그리고 앉아 이 침묵의 시위를 끝내리라 결심했다.

「이봐, 그만 삐죽거리는 게 어때? 당신이 이 일을 맘에 들어 할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스스로가 손해를 괜히 더 늘리고 있단 말 들어본 적 없어? 당신이 다이아몬드를 가질 건 아니지만, 그 외에 당신이 바라는 모든 건 아직 가질 수 있지. 안자르의 증거와 당신 아버지의 명예 말이야.」

「아뇨, 싫어요.」

그녀가 대답했다. 그는 우선 그녀가 실제 자신에게 말을 한 것에 안도했고, 그리고 그녀가 말한 바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무슨 뜻이지?」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다이아몬드를 판 돈으로 탐사대를 후원하겠다는 건 무조건 거절하겠단 뜻이에요. 당신 뜻대로 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나까지 거기에 가담시킬 필요는 없죠. 마나우스에 도착하는 즉시 난 비행기를 탈 것이고, 당신 눈앞에서 사라질 테니 말이에요.」

그 정도면 충분하고도 남았다. 그의 성질이 격렬하게 들끊어 올랐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는 그녀의 팔을 움켜잡고 자신을 마주보도록 그녀를 억지로 돌렸다.

「지옥으로 가버려.」

그는 침착하게 뜸을 들이며 내뱉었다.

「그래요? 날 막을 방법이라도 있나요? 납치?」

그녀도 격분하며 비꼬는 어조로 말했다.

「그래야 하다면.」

「당신이라면 그럴 수 있겠죠. 이건 아주 중대한 건수니까.」

그녀는 팔을 획 비틀어 뺐다.

「그리고 아까 말한 충고는 자신한테나 받아들여요. 당신 손해나 더 늘리지 않는 게 어때요? 다른 탐사대를 조직해서 자신의 양심을 위로하려는 생각은 잊어버리고, 헛수고 말아요. 당신 생각대로 날 억지로 끌어들일 방법은 없을 테니 말이에요.」

「내 양심을 달랠 필요는 없어.」

그가 살벌하게 말했다.

「난 당신이 증거를 갖도록 해주겠다고 말했고, 또 내가 말한 그대로 할 거니까. 당신을 그곳까지 억지로 끌고가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야.」

「오, 내 의견과는 상관없이 당신이 날 유명하게 만들어줄 거라고요? 그게 누이 좋고 매부 좋고란 밀이죠? 그래도 도둑질은 도둑질이에요.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도대체 누구 것을 훔쳤다는 거요? 브라질 국민들? 박물관에 처박아둘 다이아몬드로 혜택을 볼 사람이 누구지? 보안상의 이유로 구경도 못하게 할 텐데. 90퍼센트 정도는 다이아몬드를 보지도 못할 테고, 설령 본다 해도 별반 다를 게 없지. 그리고 내가 다이아몬드를 땅속에서 캐낸 거라면 어쩔 테야? 똑같은 다이아몬드지만 그러면 가질 권리가 있는 거야? 발견한 사람인 임자인 셈이지, 안 그래?」

그가 펄펄 뛰며 고함쳤다. 평생 이렇게 격분한 적도 없었다.

「당신은 역사를 훔친 거예요.」

「젠장, 당신이 그곳에 빌어먹을 유리조각을 갖다놓아도 안자르의 역사는 분명히 똑같아질 거요.」

「하지만 유리조각이 아니라 여왕의 심장이 있었어요. 평생동안 난 과거를 존중하고 우리가 발견한 역사의 티끌이라도 모두 소중히 해야 한다고 배웠고, 그건 바로 우리가 누구고 오늘날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한 우리 자신의 일부분이기 때문이죠. 난 당신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수많은 밤 동안 총을 꼭 쥐고 도굴꾼들로부터 그런 곳들을 지키기 위해 뜬눈으로 지새우며 보초를 서 왔어요. 그런데 내가 지금 그 도굴꾼들의 중 하나가 되리라고 생각하나요?」

그는 더 이상 할말이 없었다. 벽돌로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만약 하나님이 이보다 더 고집이 센 여자를 만드셨다면 절대로 얼굴도 보고 싶지 않았다. 이 여자만 해도 그를 완전히 미칠 지경까지 몰고 갔다.

오늘밤은 어쩔 수 없었다. 그가 해야 할 말은 다한 셈이었다. 이제 그녀가 좀더 생각하도록 내버려두면, 혹시나 그녀의 상식이 돌아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녀는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고 싶어했고, 그는 방법을 제안했다. 그녀도 더 나은 방법이 없으리란 걸 인정할 것이다.

그날 밤 내내 둘 사이엔 찬물을 끼얹은 듯한 침묵이 흘렀다. 식사를 끝내고 모든 걸 정리한 후에, 그는 무뚝뚝한 동작으로 텐트를 가리켰고,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좁은 텐트에서 그녀는 그와 닿지 않으려고 힘겨운 노력을 했다. 오늘 일어난 모든 일들로 그는 머리끝까지 화가 나 있었다.

다음날도 어젯밤과 다름없이 시작되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벤을 지워버렸는지, 그가 더 이상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말을 건넬 때나 그녀는 짧은 관심, 그것도 아주 잠깐의 관심을 보인 걸 제외하면 최소한의 눈길도 그에게 보내지 않았다. 그녀가 대답하는 동안만이라도 그나마 머물던 관심이지만 가능한 한 짧은 대답뿐이었다. 그녀의 태도는 대답하는 게 성가시단 걸 여지없이 드러낼 정도로 공손했다.

그녀가 생각할 시간을 충분히 갖도록 하기 위해, 그는 자신이 구명정의 속도를 무심코 늦추고 있는 걸 깨달았다. 그녀의 상식이 돌아오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는 자신이 그만큼 오랜 시간을 참을 수 있기만을 바랐고, 사실 자신을 억제한다는 게 얼마나 힘든 건지 미처 알지도 못했던 것이다. 그녀의 고의적인 무관심은 그를 분노케 했다. 그녀는 그의 여자였고, 결코 놓치지 않을 것이며, 그녀를 곁에 두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것이다. 그녀가 아주 신랄하게 제안했던 납치도 포함해서 말이다. 설령 그가 그런 짓을 못할 거라 여긴다면, 그녀는 자신의 남자를 전혀 모르는 것일 테지.

가장 중요한 핵심은, 그녀는 그의 여자이고 그는 그녀의 남자란 것이다. 그녀가 어떻게 감히 이 점을 무시할 수 있지? 어떻게 감히 그들을 강렬하게 묶어주고 있는 매듭을 스스럼없이 자르려고 할 수 있지? 그녀가 그런 짓을 한다면 벼락 맞을 일이었다.

첫 번째 정착촌에 도착했을 때에도 여전히 밝은 햇살이 한껏 남아 있었다. 그곳은 전기와 의례적인 발전기가 있긴 했지만, 다 쓰러질 것 같은 촌구석이었다. 벤이 다 허물어져 가는 선창에다 구명정을 접근시키자 꼬마들이 뛰어 나왔다. 대략 열 다섯 채쯤 되는 판잣집과 조금 더 큰 건물이 한 채 있었고, 판잣집과 피장파장인 모습이었지만 이 건물은 보통 집의 구실을 할만큼은 컸다. 이 촌구석에는 유리로 된 창문도 없었고, 모든 지붕들은 심지어 큰 편이라는 건물까지도 짚으로 된 이엉지붕이었다.

「왜 멈춘 거죠?」

질리언이 물었고, 그가 먼저 말을 걸지 않으면 입도 안 뗀다는 자신의 규칙을 처음 깨뜨린 것이었다.

「우리가 잘 만한 곳이 있으면 여기가 더 안전해. 강 지역에 있는 많은 약탈자들과 위험하게 맞닥뜨릴 필요는 없잖소.」

자신이 듣기에도 퉁명스런 말투였다. 그녀가 그에게 화났듯이 그도 그녀에게 화가 났다.

꼬마들이 재잘거리고 있었고, 약간 수줍게 뒤에 물러서 있는 아이들도 있었다. 좀더 나이든 주민들도 호기심을 드러내고, 아이들보다는 덜 친절한 눈빛으로 누추한 현관과 창문에서 내다보고 있었다. 키가 크고 좀 수척한 노파가 큰 건물에서 나와 선창으로 내려왔다. 그녀는 허리띠도 없이 바지와 소매 없는 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강한 열기를 막아주는 다 해진 밀짚모자를 머리에 쓰고 입술 한쪽에는 얇은 담배를 물고 있었다.

「누구요?」

그녀가 남자만큼 거친 목소리로 물었다.

「벤 루이스. 이쪽은 질리언 셔우드요. 어제 우리 배가 침몰해 이 구명정을 타야 했소.」

노파가 어깨를 으슥했다.

「당신네는 배와 구명정도 가질 만큼 부자인 것 같은데, 여기엔 뭐 하러 왔소?」

「잘 곳만 있으면 되오. 이곳이 강둑보다 안전하고, 우린 식량도 있으니 당신네 것을 축내진 않을 거요.」

노파를 그를 구석구석 훑어보았다. 그는 배가 가라앉을 때 그대로 모습이었기 때문에 셔츠도 입지 않고 있었다. 사실 그의 강한 상체가 그녀의 구미를 당겼는지, 노파는 미소를 지었다. 다소 당황되긴 했지만 자연스레 관찰하는 행동 같았다.

「난 마리아 사야드야. 여긴 내 통상 거래지역이고, 남는 방은 없지만 남는 해먹은 있지. 내 베란다에서 자도 황송한 거야.」

「고맙소, 사야드 부인.」

분명히 그녀는 자비로운 인물 같지 않았다.

「당신네는 나와 식사할 거야. 이번 주까지 지나가는 쥐새끼 한 마리도 없었고, 난 새로운 얼굴과 마주하는 게 좋아.」

「정말 고맙소.」

그가 다시 말했다.

사야드는 질리언이 라틴의 시간개념으로 생각한 바대로, 9시나 10시쯤 저녁식사를 시작해, 간단한 세 가지 종류의 음식이 있을 뿐인데도 두 시간 동안이나 끌었다. 이 건물엔 전기시설이 있었지만, 낮은 전압의 전구는 등잔불 정도의 밝기였다. 그리고 천장에 달린 큰 선풍기는 굼벵이처럼 천천히 돌고 있었다.

질리언은 깨어 있는 게 벅찰 정도로 힘들었다. 그저 공손하게 대화에 참가하면서 연신 하품을 삼키고 있었지만, 시계가 자정을 향할수록 점점 더 대화를 따라가기가 힘들어졌다. 벤은 완전히 정상적으로 보였고, 세뇨라와 몇 년간 알고 지낸 사이처럼 친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질리언은 그가 종종 여자를 임신시킨 적이 있는지 궁금했다.

하루종일 질리언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벤이 아주 태연하게 그녀의 꿈을 박살내고도 그의 계획에 동참할 걸 기대한다는 사실은 그녀에게 큰 상처였고, 어쨌든 일말의 양심을 놓치지 않아야만 했다. 그의 계획에 동참한다는 건 그녀 자신의 파멸이 될 것이다. 대신 현실을 직시해야만 했다. 그녀는 이 모험의 끝을 항상 직시하고 있었고, 자신이 미국으로 돌아가는 것만이 유일한 결말이었던 것이다. 그와 좋은 관계가 아니면 나쁜 관계로 헤어져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아직 결정되지 않은 유일한 사항은 여왕의 심장에 관한 일이었다. 벤은 나름대로 계획이 있었지만, 그녀가 거기에 동의하고 옆에 서서 그의 계획대로 척척 진행시키는 걸 지켜볼 필요는 없었다. 그녀는 하루종일 머리를 짜내며, 어떻게 하면 다이아몬드를 벤에게서 살짝 빼내어 마나우스로 돌아갈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확실한 계획이 서질 않았다. 빈틈을 노리고 있다가 기회가 생기면 붙잡아야 할 것이다. 실패할 지도 몰랐지만 시도는 해봐야 했다.

사야드가 일어나 그들에게 잘 자란 인사를 건넨 시간은 자정이 지난 후였다. 그녀는 한 곳으로 들어가 피곤한 한숨을 지으며 눈을 감았다.

벤도 다른 해먹으로 들어갔지만, 한 동안 잠을 이루지 못하고 누워 어둠 속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원했다. 사랑을 나눌 것을 제안한다면 뻔한 일이 벌어질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를 즐겁게 하는 안타까운 희롱도 없을 거고, 아마 1센티미터도 다가오지 못하게 하리란 건 불 보듯 뻔했다. 하지만 격분한 이 상황에서도 그녀를 품에 안고, 그녀가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 알려주고 싶은 욕구와 고통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마침내 그는 잠이 들었다. 하지만 두 시간쯤 후에 폭풍으로 잠이 깼고, 두터운 구름 속에서 천둥이 우르릉거리고 번개가 번쩍이고 있었다. 사야드가 그에게 걸칠 셔츠를 갖다주었고, 서늘한 바람이 그에겐 오히려 편안함을 주었다. 질리언은 꼼짝도 않고, 점점 추워지는지 양팔로 몸을 감싸고 잠들어 있었다. 거대한 은빛 커튼과도 같은 장대비가 판자촌을 씻어내고 있었고, 연이어 번쩍이는 번개가 이곳을 비추고 있었다.

한편 강둑 아래에선, 우람한 형체가 조용히 선창을 향하고 있었다. 그는 구명정을 보고 재빨리 강을 따라 내려왔고, 자신을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 훔친 배 아래로 푹 잠겨 있었다. 또한 넓은 차양의 밀짚모자를 훔쳐 감쪽같이 위장했다.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자정이 지나 몇 시간이 조용히 흐르자, 그는 판자촌으로 되돌아갔다. 비가 내리기 시작하자, 그가 내는 발소리를 더 잘 숨겨주었다. 우선 구명정을 찾았지만, 그 안엔 공급품 상자들을 제외하곤 아무것도 없었다. 거기에 다이아몬드가 있을 거라곤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어쨌든 어느 하나도 간과하고 싶지 않아 샅샅이 뒤졌다. 그리고 공급품을 자신의 배로 가져갔다. 오늘밤 이후 루이스는 더 이상 이것들이 필요 없을 거야.

루이스와 여자는 집안에 있을 것이다. 두트라가 빗속을 걸어가는 동안, 그의 손에 쥐어진 칼은 주르르 물기를 흘리며 빛나고 있었고, 이제 조용히 그 집을 둘러보면서 표적을 찾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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