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낯선 시간속의 향기-20화 (21/24)

20

그날 밤 그녀는 그의 품에서 잠들었다.

다시 해먹에서 잠들 거라고 예상했지만, 벤이 침낭을 펴고 모기장을 설치하자 작은 텐트가 만들어졌다. 아마 그녀가 들끓는 벌레 속에서 잠들길 싫어한다는 걸 기억해낸 모양이었다. 그녀는 그의 어깨를 베고 누워, 어느 때보다 편안하다는 생각을 했다. 산을 떠난 후 무더운 열기가 다시 시작되었지만, 움직이지도 않고 그에게 꼭 밀착해서 잠을 청했다. 이렇게 그를 느낄 수 있을 때가 그 어느 때보다 더 행복했다. 그를 애달게 알고 귀찮게 하는 순간도 더없이 좋았지만, 이렇게 그가 그녀를 꼭 안고 있을 때만큼 만족스러운 순간은 없었다.

둘만이 함께 한 날들은, 오늘로 거의 일주일째였다. 마나우스로 돌아가는 길은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타고 내려가는 길이므로 훨씬 짧은 시간이 걸릴 거라는 그의 말이 생각났다. 그와 함께 있는 모든 순간을 한시라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사실 마나우스에 도착하는 날이면 모든 게 급속도로 변할 것이고,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처리한 다음 미국으로 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이렇게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일단 배에 오르자 모든 게 너무 편안해서, 요 며칠간은 마치 휴가 중인 것만 같았다. 이전에는 어설프고 불편해 보였던 화장실만 해도 지금은 사치스러울 정도였고, 기름불에 요리하는 것마저 즐거움 그 자체였다. 심지어 몇 가지 되지 않는 음식으로도 만족에 겨울 정도였다. 미리 여분으로 남겨두었던 각자 갈아입을 옷도 생겼다. 그녀는 자신의 생활신조를 새삼 되새겨 보았다. 인생은 단조롭지만 참으로 즐겁다고.

강변에는 대나무로 얇게 지은 판잣집들이 스쳐 지나갔고, 이제 ‘문명의 세계’로 잠식해 들어가는 중이었다. 지금은 판잣집이 드문드문 보이지만, 하류로 내려갈수록 더 많은 집들이 강둑에 즐비하게 늘어서 있을 것이다. 이 집들은 개인 거주지이긴 하지만 곧 임시거주지가 될 수도 있었고, 우르르 몰려 있는 판자촌이더라도 강을 정기적으로 오가는 상인들에 의해서만 외부 세계와 접촉하고 있었던 것이다.

외딴 판잣집에서 꼬마 두 명이 뛰어나와 열렬하게 손을 흔들었다. 아마 벤과 질리언이 상인들이라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단지 배를 보고 흥분한 것인지도 몰랐다. 질리언도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 답례했다. 그들의 생활에는 흥을 돋울 만한 일도 별로 없었던 것이다.

「가이드 일은 얼마나 자주 하죠?」

그녀는 느긋하게 물으면서 이대로 강이나 밀림에서 여생을 보내는 일을 상상했다.

「내키는 만큼. 대개 일을 시작하기 전에 약간의 휴식기간을 갖는 게 좋아. 휴식기간은 일을 얼마나 오래 했느냐에 따라 다르지. 진정으로 아마존을 경험해보고 싶은 관광객들과 일주일을 보낸다면, 휴가도 일주일이면 충분하지만, 대부분 더 길게 걸리거든. 이번 일을 맡기 전에는 두 달짜리 일을 했고, 한 달 가량 쉰 후 다른 일을 찾을 심산이었지.」

「그런데 왜 이 일을 맡았죠?」

「호기심 때문이오. 난 케이츠가 어떤 부류인지 알았고, 그가 뭘 찾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싶었소. 게다가 그는 썩 괜찮은 급료를 선불로 지불했소.」

그녀는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지붕을 받치고 있는 기둥에 기대었다.

「스톤 시티에서 그날 아침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왜 케이츠가 당신을 쏘았죠? 그 때문에 두트라가 일을 벌이게 된 건가요?」

「그런 것 같소.」

그는 서서히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이미 계획했던 게 틀림없어. 케이츠의 총성이 두트라에겐 신호였을 거요.」

「하지만 왜 그런 일이 시작된 거죠? 우리가 보물을 발견한 것도 아니잖아요. 일이 일어날 만한 다른 이유도 없구요.」

그녀가 그 사건에 대해 곰곰이 생각한다면 비상한 두뇌로 조각조각을 맞추기 시작할 테고, 사이의 빈 공간을 눈치챌 거란 걸 예상했어야 했다.

「난 일찍 깨어나 캠프를 빠져나갔지. 케이츠는 내가 뭔가에 매달려 있다고 확신했는지 날 미행했더군. 그는 다이아몬드가 오래 전에 사라졌고, 사원이 금으로 채워지지 않은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거야.

「내가 텐트 밖으로 기어나갔을 때 두트라는 날 쏘지 않고, 그냥 쳐다보며 웃고만 있었어요.」

「아마 죽이기 아까웠겠지.」

벤은 그때 상황을 떠올리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말 그대로.」

「그때 전등 대신 총을 쥐고 있었더라면. 내 생각이 그렇게 짧았다는 게 지금도 한심스러워요.」

「당신은 내가 시키는 대로 잘 했어. 그러지 않았다면 난 죽도록 허둥대며 시간을 낭비했을 거요.」

「그렇긴 하지만. 릭을 살릴 수도 있었을 텐데.」

「그래도 릭은 죽었을지 몰라. 일단 벌어진 일에는 후회란 있을 수 없어. 당신이 릭을 실수로 쏠 수도 있었고, 이제 이랬다면 저랬다면 하는 후회는 그만하지. 쓸데없는 시간 낭비일 뿐이야.」

그의 거친 논리에 그녀는 미소지었지만 기분은 우울했다.

벤은 후회 따위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사람이었고, 한눈 팔지 않고 과감하게 결정해서 앞만 보고 전진하는 사람이었다. 장난과 재치 있는 익살로 자신의 강인한 일면을, 아니 가장 큰 부분을 감추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곳에서 있었던 일을 결코 잊을 수 없었다. 벤을 얕보던 사람들은 위기에 닥쳤을 때에야 자신들의 실수를 깨달았다. 그녀 역시 처음엔 그를 얕보았으나 이내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지금까지 잊지 않고 있었다. 벤은 평범과는 거리가 먼 부류로, 모험가이자 탐험가였다. 자신만의 규칙을 만들어 그대로 밀고 나가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가 없는 인생이란 얼마나 지루하고 재미없을까? 벤의 근처에 있기만 해도 흥분으로 몸이 달아올라 미칠 것만 같았다. 누구보다 강하고 위험한 남자가 바로 벤이었다. 과연 벤? 견줄 만한 상대가 있기나 할까?

「난 당신이 술주정꾼인줄 알았어요.」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난 그때 당신이 드러눕고 싶어 환장이라도 하는 줄 알았지.」

「물론, 당신 관심사는 그런 것일 테죠.」

「네, 아가씨.」

그가 점잔을 빼며 말했다.

「다 지난 일이오.」

「하지만 당신은 여전해요.」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거요. 오늘은 괜찮소?」

주도권을 쥔 그녀가 만면에 미소를 활짝 띠며 고개를 저었다.

「내일.」

「내일은 괜찮다면서 오늘은 왜 안 된다는 거요?」

「내가 그렇게 말했으니까요.」

「그 귀여운 머릿속이 이미 권력의 맛으로 물들어버린 것 같군.」

그는 여전히 미소지으며 그에게 키스를 띄워 보냈다.

그의 몸이 긴장되면서 굳어지기 시작했지만, 미소만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그녀의 눈가에 남아 있던 그늘도 없어졌고, 마냥 행복해 보였다. 그는 이런 행복한 표정이 영원히 그녀의 얼굴에 머물도록 해주고 싶었고, 그리고 매일 아침 웃으면서 그녀를 깨우면 잠에 취한 눈과 만족스런 몸짓으로 손을 그의 가슴에 올린 채 그를 향해 돌아눕는 그녀의 모습을 간절히 그려보았다.

열대의 태양이 내리쬐고 있었지만, 그는 갑작스레 둔기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으로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동공이 갑자기 확대되자 태양 빛이 거의 눈을 멀게 할 정도로 고통스레 눈을 찌르고 있었다. 벤은 타륜을 생명선이라도 되는 듯이 꽉 쥐고 호흡을 조절하려고 애썼고, 그리고 자신을 정상적인 세상의 축으로 되돌려놓으려고 애썼다.

그는 질리언은 마나우스에 묶어놓고, 그걸 뭐라고 부르던 간에 계속 그녀와의 관계를 유지하기로 결심했었다. 그에게는 단순하고 솔직한 방법이었고, 어쨌든 그녀를 자신의 곁에 두고 싶었다. 매일 밤 그녀와 같이 자고 싶었다. 그건 논리적으로 동거를 의미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런 건 생각지도 않았을 테지만, 이런 생각을 떠올리자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핵폭탄 같이 충격적인 깨달음을 얻은 순간 모든 게 결정됐고, 문제의 핵심을 덮고 있던 장막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는 질리언을 영원히 원했다.

‘동거’란 전혀 영구적이지도 않고 영 탐탁지가 않았다. 더 강력한 법적 관계가 필요했다. 이전까지만 해도 특정한 여자와 관련시킨 ‘결혼’이란 단어는 존재하지도 않았지만, 질리언과 함께라면 충분히 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녀는 벤의 여자로 평생동안 남아 있을 것이다.

그는 손을 부르르 떨면서, 계기반 속도를 줄이고 천천히 강변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궁금한 듯 주위를 살폈다.

「무슨 일이죠?」

그의 몸 전체가 눈에 띌 정도로 떨리고 있자 그녀는 깜짝 놀랐다. 그를 진정시키기 위해 다가가 팔로 그의 허리를 부드럽게 감쌌다.

「벤? 뭐죠? 뭐가 잘못됐나요?」

「잘못된 건 없어.」

그가 앙 다문 이 사이로 내뱉었다.

「당신을 가져야 해. 지금 당장.」

요 며칠 동안 그녀를 즐겁게 해주던 익살스럽고 기발한 애원이나 열에 들뜬 소리와는 달랐다. 그의 눈에는 장난기라곤 없었고, 표정은 심각했다. 그는 여전히 떨고 있었고, 그녀의 눈에도 강한 근육의 떨리는 파문이 느껴질 정도로 긴장되어 있었다.

「거절은 하지 마. 제발, 이번만은.」

그는 더 이상 말도 이을 수 없었다. 그의 온몸이 격렬한 욕망으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녀는 잠시 망설였고, 혼란스럽고 놀란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리곤 자신이 할 일을 알았다. 그녀는 땀에 젖은 그의 어깨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고는 지붕 아래고 가서 그를 맞을 준비를 했다.

배가 안전하게 정박할 때까지 그녀는 옷을 벗고 침낭에 누워 그를 기다렸다. 그가 다가왔을 때에도 그녀의 눈에는 영문을 모르는 호기심이 어려 있었지만, 그는 바지를 끌어내리고 그녀의 품에 잠겼다. 즉시 그녀의 안으로 들어가 강하게 첫 번째 돌격을 시도하자 그녀는 고통으로 움찔했지만, 그를 더 단단히 움켜잡으며 필사적인 그의 몸을 위로하려고 애썼다.

그녀의 안에서 끔찍한 긴장감이 서서히 누그러지며 강하게 떨리던 근육도 안정되었다. 그녀와의 친밀한 접촉으로 참을 수 없던 고통이 해소된 것 같았다.

그녀는 그의 어깨와 목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검은 머리카락 속으로 스르르 손을 넣었다. 잠시 후 그는 팔꿈치에 자신의 무게를 실었고, 짙은 심연과도 같은 강렬한 푸른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천천히 뜨겁고 현란한 키스로 그녀의 입술과 목을 탐닉하며 고통스러우리 만치 감미롭게 그녀를 애무하기 시작했다.

연인들의 절묘한 일치를 한껏 향락하느라, 정오의 뜨거운 열기가 지나가는 것도 몰랐다. 이전에 나누었던 열정적인 사랑은 모두 오늘을 위한 준비였을 뿐이었다. 온몸을 달콤하게 녹이는 이 환희의 손길을 멈추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모든 감각이 고통스러우리 만치 뜨겁게 불타올랐고, 피부를 쓸어내리는 손길이란 손길은 끊임없는 기쁨의 탄성을 자아냈다. 그가 부드럽게 유두를 핥자, 그녀의 거칠고 고통에 찬 환성으로 놀란 새들이 푸드득 하늘로 날아올랐다. 시간이 정지하여 이 순간이 영원히 끝나지 않기만을 바랬다.

그녀는 말하고 싶지도, 이유를 묻고 싶지도 않았다. 지금 말을 꺼내면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두려움마저 들었다. 가슴에선 감정이 북받쳐 올라와 숨을 쉴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그녀는 벤을 너무나 사랑했던 것이다.

마치 시간을 잊은 듯 끝없이 깊은 무의식만이 존재하는 몽롱한 꿈결을 거니는 것 같았지만, 그녀는 분명히 깨어 있었다. 오후의 정점에 있던 태양 빛이 조금씩 미끄러지더니 타오르는 빛줄기가 지붕 아래로 기울어져 있었다. 벤이 일어나 기지개를 켜더니 무릎을 구부리고 바지를 주워 입었다.

평소의 도발적이고 능수 능란한 표정이나 혹은 점잔이라도 빼는 태도를 예상했지만, 지금 그의 표정은 약간 누그러졌고, 아직도 심각해 있었다. 강한 팔로 그녀를 쉽게 일으켜 세우고는 한참 동안 그녀의 머리에 뺨을 댄 채 꼭 껴안고만 있었다. 그런 다음 그녀에게 강렬한 키스를 퍼부으며 말문을 열었다.

「누가 지나가기 전에 옷을 입자고.」

「판잣집을 지나온 후론 아무도 못 봤고, 하루종일 지나가던 배도 한 척 없었잖아요.」

친숙한 미소가 다시 되살아났다.

「당신의 표현주의 경향은 익히 알고 있지. 야노마미들 앞에서 활보하고 다닐 때부터 말이오.」

그녀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당신이 제안한 거였잖아요.」

「그래. 하지만 당신이 윗도리라도 걸치고 있을 줄 알았어.」

「셔츠도 빨아야 했어요.」

이런저런 농담이 오가는 동안 그녀는 옷을 다 입었고, 이제 자신들은 배가 고프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녀는 통조림 재료를 섞어 끓인 즉석 생선 스튜를 만들었다. 그들의 식욕을 만족시키는 건 이제 대수롭지 않은 문제로, 빈약하고 평범한 식단에 점점 익숙해진 것이다. 아마 완벽한 음식이 오히려 식상하게 느껴질지도 몰랐다. 그들의 위도 이제 문명세계에 다시 익숙해져야 할 것이다.

벤은 시동을 걸고 강둑에서 배를 후진시켜 조심스레 돌리며 천천히 후미를 벗어나 물살을 타고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는 하류로 내려가는 다른 배를 보고 속도를 늦춰 앞질러 갈 수 있도록 배려했다.

질리언은 손을 이마에 대고 희미한 햇빛을 가리며 지나가는 배를 지켜보았다.

「저 배는 우리 것과 똑같이 생겼어요.」

그녀가 덧붙였다.

「우리가 타고 온 또 한 척의 배처럼 보여요.」

시선을 모으고 그 배의 조종사에게 초점을 맞추자, 우람한 어깨와 아주 작은 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두트라!」

도저히 믿고 싶지 않은 심정과 공포가 뒤섞인 어조로 그녀가 헐떡였다.

벤이 힘껏 속도기를 앞으로 밀치자, 반동으로 배가 물살에 떠오르며, 기계 소리가 크게 울부짖었다. 이와 동시에 두트라는 방금 지나친 배를 알아봤는지 역시 전속력으로 조종기를 당겼다.

「엎드려!」

벤이 즉시 소리쳤다.

「내 권총을 이리로 밀어줘.」

젠장, 강에 도착한 후로 한시도 총을 떼어놓지 않았지만, 좀전에는 아주 예외적인 상황이었다. 그는 다급한 심정으로 총을 찾았다.

두트라가 발사한 총알은 정확한 조준거리를 벗어나 머리 위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질리언은 벤의 총을 찾아내었고, 눈에 띄지 않도록 바닥에 착 붙은 채, 손과 무릎으로 기어가서 쭉 내민 그의 손에 쥐어주었다.

「물러서. 놈은 날 노릴 거야. 나만 봤으니까.」

「그럼, 당신도 몸을 숙여야죠. 바보 같이!」

그리고는 그의 바지를 덥석 잡아당겼다.

두 척의 배는 방향을 틀어 전속력으로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벤은 타륜을 재빠르게 우측으로 돌리며, 단 몇 초라도 시간을 벌고, 무수한 암초에 배가 좌초되지 않기만을 빌었다. 갑작스런 흔들림으로 질리언은 균형을 잃고 공급품 창고 쪽으로 굴러갔다. 두트라가 다시 총질을 하자 이번 총알은 나무 난간에 박혔다.

벤이 권총을 올려 발사했지만 두트라는 잽싸게 한쪽으로 피했고, 재빨리 조준해서 다시 한 번 쏘았다. 자신과 목표물이 야생마처럼 날뛰는 배 위, 함께 흔들리는 이 상황에서 뭔가를 정확하게 맞춘다는 건 순전히 행운일 것이다. 하지만 벤은 두트라를 계속 공격할 정도의 실력은 있었다.

질리언은 무릎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두 개의 총알이 배의 나무 벽을 관통하자, 그녀는 갑파넹서 납작하게 웅크리고 있었다.

벤이 다시 총을 쏘았고 총알은 수면으로 파고들었다. 매캐한 총탄가루가 그녀의 코를 간지럽혔다.

두트라보다 20미터 정도 앞선 채 그들은 강을 질주하고 있었다. 벤은 한쪽 무릎을 세운 채 선미 쪽으로 돌아섰고, 전화 박스 만한 화장실을 제외하면 시야를 가리는 건 없었다. 두트라가 바로 뒤에 있었고, 그들의 배에서 내뿜는 프로펠러의 물살 안으로 들어와 거리를 점점 좁혀가고 있었다. 벤이 쏜 이번 총알은 타륜을 맞추긴 했지만, 두트라는 다시 휙 피했다.

총알이 막 큰 속도계를 간신히 빗겨가자 벤은 앞을 보았고, 바로 뒤를 따라오는 두트라는 속도를 올려주는 물살 덕택에 더 쉬운 기회를 포착했다. 두트라는 훨씬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벤은 험악한 욕설을 내뱉었다. 바짝 뒤쫓고 있는 두트라와 총질을 해대며,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배를 조종하는 건 무리였다. 저 자식이 운 좋게 그의 등을 쏠 수도 있었고, 그러면 질리언은 혼자 남아 두트라와 대면해야 할 것이다.

「질리언, 당신이 배를 조종해야겠어. 할 수 있겠지?」

그녀는 망설일 새도 없이 앞으로 기어왔다.

「조심해요.」

그녀가 기계의 굉음 속에서 소리쳤다.

「당신이나 조심해. 가능한 한 몸을 낮추고, 놈의 눈에 띄지 않도록 한쪽으로 비켜 있어.」

그녀는 그의 지시대로 한쪽으로 몸을 굽히고 한 손으로 타륜을 잡은 채 뱃머리를 살짝 엿볼 수 있을 만큼만 고개를 들었다. 벤은 재빨리 선미로 기어가 화장실 벽 뒤로 숨었다.

총알이 날아들자 그는 배를 붙이고 납작하게 엎드렸고, 몸 아래서 울리는 배의 진동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곤 무릎을 세워 재빠르게 총성을 세 번 울렸다. 두트라가 비명을 지르며 한쪽으로 쓰러졌지만, 벤은 본능적으로 치명적이지 않은 부상임을 감지했다. 단지 스친 정도였다. 그는 신경을 곤두세운 채 기다렸고, 몇 초 후 두트라는 다시 튀어 올라 팔을 힘차게 쭉 뻗으며 총구에 섬광을 일으켰다. 벤도 동시에 발사했고, 두트라가 다시 비명을 지르더니, 한쪽 어깨를 움켜잡으며 옆으로 쿵 쓰러졌다.

배는 거칠게 요동쳤고, 기계 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저 자식이 엉뚱하게 배의 추진기를 쏘았군! 저쪽 배가 계속 따라붙고 있었고, 속도계는 최고 속력을 가리키고 있었지만, 타륜은 손댈 필요도 없이 안정된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꽉 잡아.」

벤이 고함치면서 뱃머리로 돌진했다.

「저놈이 우리 배를 박으려고 해.」

질리언은 황급히 어깨너머로 시선을 던졌고, 금속끼리 맞부딪치는 굉음을 내며 추진기가 멈출 때에도 타륜을 놓치지 않으려고 꽉 쥐고 있었다. 절망적으로 그녀는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타륜을 돌리며, 두트라의 배와 부딪히지 않으려고 몸부림쳤다. 둔한 속도로 배가 한쪽으로 선회했지만, 그런 보람도 없이 저쪽 배가 쿵 하고 부딪혔다. 그녀는 머리를 벽에 세게 부딪치며 갑판 저쪽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벤은 마지막 순간에 지붕 기둥을 움켜잡아서 밖으로 내던져질 뻔한 위기를 간신히 모면했다.

그녀가 정면 충돌을 피할 정도로 배를 돌려놓았던 것이다. 두트라의 배가 바로 후미를 들이받고는 난폭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두트라의 배는 계속 앞으로 돌진해왔고, 추진기는 여전히 거세게 돌아가고 있었다. 부지직 하고 나무 갈라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두트라의 배 앞부분과 그들의 배 선미가 함께 좌초되며 형편없이 찌그러졌다. 그 여파로 타륜과 속도계가 망가졌고 엔진히 꺼져버렸다.

갑작스런 침묵이 신경을 쥐어짜는 듯했고, 그녀는 충돌의 굉음이 얼마나 컸는지 간신히 생각해내고 있었다. 희미한 의식 속에서 겨우 일어서려고 애썼지만, 모든 감각이 휘청거리는가 싶더니 다시 그녀의 무릎이 꺾였다.

공급품들이 죄다 갑판 위에 흩어져 있었다. 벤은 충돌로 총을 떨어뜨렸지만, 운 좋게도 강으로 떨어뜨리진 않았다. 권총을 낚아채어 온몸을 긴장시킨 채 선미를 향해 샅샅이 겨누었다.

「괜찮아?」

그가 짧게 물었다.

「네.」

확실하진 않지만 그녀가 대답했다. 견딜 만할 것이다.

그가 배의 뒷부분으로 힘겹게 다가가자, 두트라의 배가 그들의 배를 깔아뭉개서 박살을 내버린 게 보였다. 시커먼 액체가 갑판을 지나 뱃머리 쪽을 들이키려 다가오고 있었다. 배들은 아직까지는 물위에 떠있었다.

「가서 구명정을 물에 띄워.」

그가 어깨너머로 소리쳤다.

그녀는 현기증을 떨쳐내며 기울고 있는 갑판을 지나 구명정으로 기어갔다. 시시각각으로 기우는 정도가 더해지는 것 같았다. 그들에겐 겨우 몇 분밖에 남지 않았지만, 배에서 내릴 시간은 있을 것이다.

벤의 부츠까지 물이 차 올랐다. 그는 부서진 뱃머리의 파편을 한쪽으로 밀쳤다. 두트라는 어디 있지? 두트라가 뱃머리에 있었다면, 이 부분이 완전히 박살난 정도니 그는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두 번이나 뒤쫓아온 놈이잖아. 피가 묻은 나무조각이 보였다.

그러나 죽었는지 살았는지 두트라는 보이지도 않았다. 배가 파도에 오르내리며 삐걱대는 나무판 말고는 아무 소리도, 움직임도 없었다.

충돌로 두트라는 강으로 떨어졌을 수도 있었다. 그가 의식불명이었다면, 지금쯤 죽었을 것이다. 두트라가 쥐도 새도 모르게, 게다가 이 짧은 시간에 강변까지 갈 수 있었을까? 벤은 강둑을 자세히 살펴보았고, 바람에 살짝 흔들리고 있는 종려나무 잎들을 훑으며 흔적을 찾아보았다. 하지만 모든 게 정상적으로 보였고, 나비들이 태연하게 훨훨 날아다니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부서진 배로 고개를 돌렸지만, 배들이 너무 심하게 부서져 같이 가라앉고 있는 이 마당에 몇 분만이라도 일일이 조사하긴 무리였다. 모든 게 아래로 가라앉기 전에 배를 떠나야 했다. 그는 두트라가 난파선의 다른 편에 매달려 있을 가능성도 생각했지만, 찾아낼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지금은 최대한 빨리 구명정을 띄우고 필수품을 챙겨 배에서 떠나야 했다.

이제 종아리까지 물이 찼다. 그는 허우적거리며 가파르게 기운 갑판을 지나 질리언이 구명정을 끌어 올려놓은, 공기를 넣을 만한 공간이 되는 뱃머리까지 나아갔다. 배의 한쪽에는 기압을 유지시키는 공기탱크가 때마침 장착되어 있었고, 그녀는 탱크를 꺼내 구명정의 주둥이에 갖다댔다.

벤도 구명정을 꼭 붙잡으며 도왔고, 그녀는 공기탱크의 꼭지를 틀었다. 쉭쉭 거리는 무서운 쇳소리와 함께 공기가 구명정 안으로 쏟아졌고, 30초쯤 후에 구명정은 적당한 압력으로 부풀어올랐다. 여섯 명이 타도 될 만큼 큰 구명정은 이제 그들의 생명을 맡길 수 있는 유일한 끈이었다. 재빨리 그녀가 꼭지를 잠그자 벤은 마개를 덮었다. 그리고 기둥에다 구명정의 밧줄을 묶고 구명정을 배 밖으로 밀었다.

「타!」

그가 명령하자 질리언은 난간을 기어가 구명정에 올라탔다. 벤은 총을 그녀에게 맡겼다.」

「잘 지키고 있어. 두트라를 아직 못 찾았어. 물에 빠졌는지 어떤지 확인할 수 없어.」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왼손으로 난간을 잡아 구명정을 배에 바짝 붙였고, 오른손에는 총을 꼭 쥐고 있었다.

벤은 배낭을 낚아채 구명정에 던져넣었고, 다이아몬드를 잘 챙겨왔는지 확인할 틈도 없었다. 우선 텐트가 필요할 것이다. 그는 구명정에 설치할 작은 모터를 난간 너머로 건넸다. 겨우 1킬로그램도 안 되는 무게였지만, 그녀는 총을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힘겹게 건네 받았다. 젠장, 여자들이란! 가스통도 실었고, 공급품 상자들도 난간으로 건네자, 그녀는 모터를 받치고 서서 짐들을 차례로 건네 받았다.

배가 삐걱거리며 급경사로 기울어졌다.

「됐어요. 이제 타요.」

그녀가 외쳤다.

「노!」

그가 소리치며 노를 던졌다. 그녀는 화난 표정으로 말했다.

「노와 모터가 우선이잖아요. 빨리 와요. 당장!」

그녀의 말을 따라야 한다는 걸 깨닫자, 그는 기둥에서 밧줄을 벗겨낸 후 난간을 훌쩍 뛰어 넘어 드디어 구명정으로 내려앉았다.

그리고 신속하게 뒷부분으로 가서 가스통을 모터에 연결하고는 가스가 분출하도록 진공관을 꾹 눌렀다. 동시에 어깨너머로 소리쳤다.

「배낭에서 새 총알을 꺼내. 총알이 다 떨어졌어.」

질리언은 구명정에서 곤두박질치지 않으려고 조심스레 배낭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앞 주머니에, 지퍼를 열어.」

그가 지시했다. 제발, 기도하는 심정으로 줄을 당기자 모터가 굉음을 질렀다. 다시 연속적으로 세 번 빠르게 당기자, 작은 모터에 시동이 걸리면서 반가운 진동이 시작되었다.

질리언은 차가운 총알에 손끝이 닿자 하나를 꺼내면서, 갑자기 중간을 뒤적거리던 손끝에 뭔가 이상한 감촉을 느꼈다.

박살 난 배 두 척이 물 속으로 깊이 가라앉았다. 벤은 조종기를 잡고 소용돌이치는 이곳에서 벗어나 안전한 거리까지 구명정을 이끌었다. 웬만큼 멀어지자, 벤은 날카로운 눈초리로 잔해들을 조사했으나 두트라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구명정으로 배가 침몰한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았으나 헛일이었다. 아마 두트라는 강바닥에 가라앉아 지금쯤 고기밥이 됐는지도 몰랐다.

벤은 이제 조종기 옆에 자리잡고 앉아 구명정으로 이 큰 강을 따라 마나우스까지 가는 모든 세부사항을 생각하고 있었다.

한편 질리언은 배낭을 뒤지고 있었다. 그가 당황한 표정으로 욕설을 내뱉었을 땐, 이미 손수건으로 감싼 것을 들어올리고 있었다. 천 조각이 떨어지자 태양 빛에 반사되어 수천 갈래로 붉게 퍼지는 섬광들로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여왕의 심장이군요.」

그녀는 혼란스런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불쑥 내뱉었다.

「당신이 찾아냈군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