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낯선 시간속의 향기-16화 (17/24)

16

이튿날 동트기 전 벤은 조용히 캠프를 빠져나갔다. 모두들 세상 모르고 푹 잠들어 있었다. 그의 예상이 빗나가지 않는다면, 케이츠는 약탈한 보물이 없는 게 확실하기 때문에 더 이상 이곳에 머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기회가 있을 때 여왕의 심장을 다시 가져다 놓는 게 나으리라.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캠프 한편에 깨어 있던 케이츠는 벤이 막 시야에서 사라지는 걸 보았다.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저 자식이 뭘 하는 거지? 케이츠는 서둘러 권총을 챙기고 두트라의 텐트로 다가가 가능한 한 소리를 죽이며 속삭였다.

「두트라!」

코를 고는 소리가 잠시 잦아드는가 싶더니 다시 계속되었다.

「두트라!」

케이츠가 다시 말했다.

「제기랄, 일어나란 말이야.」

코를 고는 소리가 멈추고 우락부락한 거구가 뒤척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드디어 일어나 앉았다.

「뭐야?」

부루퉁한 불평이 터져 나왔다.

「지금 루이스가 캠프를 살짝 빠져나갔어. 내가 뒤쫓아갈 테니 총소리가 들리면, 알지?」

「알았어요.」

두트라가 대답했다.

케이츠는 더 이상의 설명은 늘어놓지 않고 벤 루이스를 뒤쫓아갔다. 벤이 일단 캠프를 빠져나가자 앞서가는 희미한 불빛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먹었다. 그의 시선은 쉴새없이 루이스를 뒤쫓았다. 그는 루이스가 사원에 대해 말하기 전 혼자 그곳에 있었던 사실에 대해 밤새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혹시 다이아몬드가 거기에 있었다면 루이스는 그걸 그대로 두었을까? 만일 자신이 그런 상황에 있었더라면 어떻게 행동할지 뻔했다. 그럼 루이스도 다르게 행동할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루이스는 결코 자신의 규칙을 깨뜨릴 사람이 아니었다.

케이츠가 떠난 뒤, 두트라는 텐트에서 기어나와 무지막지한 손에 권총을 살며시 쥐었다. 잔인한 기대감에 젖어 날카로운 앞니를 드러내고 흉악한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두트라의 가장 가까운 텐트에 있던 릭은 투덜거리며 뒤척이다가 다시 잠이 들었다.

페페와 유로지오는 케이츠의 급박한 속삭임이 들리자 잠이 깼다. 그리고 어둠 속을 응시하며 가만히 누워 있었다. 질리언도 이상스런 경계심으로 갑자기 깨어났다. 그녀는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그녀의 텐트 근처에는 아무 소리도 안 들렸지만, 무슨 소리가 나긴 났었다. 숨쉬는 소리인가? 어떤 침입자가 동굴 통로를 빠져나가는 건가? 그런 것 같진 않았다. 통로에는 빛이라곤 전혀 없었고, 동물들은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동굴로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텐트 입구를 약간 열어서 바깥에 무슨 일이 있는지 비춰볼 심산으로 손전등으로 손을 뻗었다.

모두들 평화롭게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벤은 한쪽 무릎을 땅에 대고 몸을 숙여 손수건에 싼 다이아몬드에 덮인 흙을 털어 낸 다음, 조심스럽게 다이아몬드를 들어올렸다. 손수건을 걷어내고 셔츠 안으로 흙이 들어가지 않게 세심하게 먼지를 한번 털어 낸 다음, 옷안으로 다이아몬드를 다시 감싸 넣었다.

「딴 생각을 하고 있는 줄 진작에 알았지.」

느닷없이 나타난 케이츠가 등뒤에서 소리쳤다.

「젠장!」

벤은 투덜거리며 재빨리 바닥에 몸을 던졌다. 이와 동시에 손전등을 떨어뜨렸지만 빌어먹을 다이아몬드를 떨어뜨리지 않은 건 확실했다. 케이츠가 그를 향해 총을 쏘았지만 어둠 속으로 빗나갔다.

캠프 내의 모든 사람들은 총소리에 놀라 텐트 밖으로 기어나오기 시작했다. 페페와 유로지오는 텐트의 뒤쪽 입구를 몰래 열고 밖으로 빠져나왔다. 제일 먼저 비센테가 밖으로 나오자, 두트라는 미소를 지으며 그의 머리를 관통시켰다.

캠프에서 총소리가 메아리쳤다. 벤은 총격전을 벌이고 있는 와중에도 피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질리언!

케이츠를 쏘았지만, 정확히 조준할 시간이 없었다. 일부러 총알을 멀리 빗나가게 쏘면서 케이츠가 계속 오발하도록 유도했다. 벤은 희미한 빛과 빽빽한 덤불 숲이 좋은 방패막이란 걸 깨닫자, 뒤로 기어가 캠프 쪽을 향해 죽어라 뛰기 시작했다. 케이츠는 나중 문제였다. 지금 당장 질리언에게 가야 했다.

질리언은 두 번째로 텐트에서 나왔다. 두트라의 짐승 같은 미소가 그녀에게 못 박혔지만, 쏘지 않고 이 순간을 어떻게 즐길 것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조르지가 밖으로 나오자 두트라는 생각할 여지없이 그를 쏘았다. 하지만 총알은 빗나갔고, 조르지는 다행히 한쪽으로 피신했다. 조르지의 뒤에서 릭이 혼란스런 표정으로 텐트에서 반쯤 몸을 빼고 있었다. 릭은 비센테를, 다음은 총을 들고 서 있는 두트라를, 그리고 질리언을 보고 두트라가 자신을 겨누고 있는 와중인데도 그녀에게 소리쳤다.

「질리언, 도망가!」

이 정도 가까운 거리에서 두트라가 실수할 리 없었다. 첫 번째 총알이 릭의 가슴 정 중앙에 박혔고, 그는 바닥에 쿵하고 쓰러졌다. 그리곤 두 번째 총알이 박혔을 때는 움직이지도 않았다. 질리언은 공포로 얼어붙었으나, 다음 순간 수풀 사이로 뛰어들었다. 엎드려 손과 무릎으로 기어나갔다.

벤의 지시가 귓가에 쟁쟁하게 울렸다. ‘동굴로 향해. 무조건 그들보다 앞서야 해. 악착같이 뛰어!’ 벤! 절망적인 생각이 들었다. 오, 세상에! 그가 시킨 대로 동굴 밖으로 나갈 테지만, 혹시 그가 바로 쫓아오지 않으면 애써 잡은 기회는 아무 소용없었다.

총소리가 계속해서 울려 퍼졌다. 그리곤 무시무시한 침묵이 뒤따랐다.

그녀는 동굴 입구에 도착하자 어둠 속으로 돌진했고, 손에 있는 손전등을 떠올리기도 전에 무턱대고 달려가다가 벽에 부딪쳤다. 누군가가 뒤쫓아온다면 쉽게 그녀를 발견하리라는 생각에서 전등을 켤 수 없었다. 대신 한 손으로 더듬더듬 벽을 짚으며 나아갔고, 진짜 봉사라도 되는 것처럼 신중한 보폭으로 살며시 걸어나갔다. 그리고 눈을 감는 게 더 적응하기 쉽다는 걸 알았다. 사실 온통 시커먼 어둠 속에서 눈을 뜬 채로 걷는다는 건 뇌를 더 혼란스럽게 하는 것 같았다. 모퉁이 근처까지 도달했음을 확실히 감지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손전등을 켰다. 칠흑 같은 어둠 속을 안내하는 희미한 전등 빛은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냈지만, 밤의 어둠을 제압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있었다.

그녀는 심장이 쿵쾅거리고 귀가 울릴 정도로 달렸다. 시커먼 바위벽들을 무수히 스쳐 지나갔지만, 밝은 세상과 연결되는 출구는 눈에 띄지 않았다. 마치 끝없는 미로 속에 갇힌 것 같았다.

오, 세상에, 이럴 수가! 릭.

벤은 절망적으로 온몸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

벤은 페페와 부딪혔고, 어스름한 새벽의 미명 속에서 그를 미처 알아보지 못하고 쏠 뻔했다.

「세뇨라는….」

작은 인디언의 어깨를 움켜잡고 씩씩거렸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거야?」

「도망갔어요. 시커멓고 긴 굴속으로요.」

페페가 동굴을 가리키며 말했다.

「수고했어. 내가 그녀를 뒤쫓아갈 테니, 조심해. 페페.」

페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릴게요, 세뇨르. 악당들이 없어지면, 이곳을 떠나 마나우스로 돌아갈 테니, 세뇨라를 꼭 찾으셔야 해요.」

「그래.」

벤은 암담하게 말하고는 동굴로 향했다. 케이츠가 아직 뒤에 남아 있었고, 두트라도 캠프에 있을 것이다. 자신이 허깨비를 겨냥해서 사방으로 총질을 해댄 걸 생각하자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이제 질리언을 찾는 일에 모든 걸 집중했다.

마침내 질리언은 동굴 밖으로 빠져나왔고, 허파는 불타고 심장은 폭발할 것만 같았다. 입구를 감추고 있던 거대한 표석에 기대어 잠시 숨을 가다듬었다. 그녀가 입구를 밀치고 나오자, 새들이 깜짝 놀라서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푸드득 날아올랐다.

이제 어슴푸레한 새벽의 미명이 수풀 사이로 서서히 번지고 있었다.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더 환해졌지만, 수풀 아래쪽에는 어스름한 미광만이 계속되고 있을 뿐이었다. 손전등으로 표석 주변에 있는 길을 비추며 밖으로 나아갔다. 너무 숨이 차서 누가 쫓아오고 있는지 뒤돌아보지도 못했지만, 이젠 확인해야 했다. 우선 숨을 만한 곳을 찾아야 했다. 이대로는 계속 달아나지 못할 만큼 숨이 찼던 것이다. 위험을 무릅쓰고 그녀는 울창한 수풀 사이로 기어갔고, 공포에 지쳐 기진맥진했다.

「염병할, 도망쳤다니 무슨 말이지?」

케이츠가 고함쳤다.

「루이스가 그 빌어먹을 다이아몬드를 가졌단 말이야! 그 자식은 여기 어딘가에 있을 수도 있지만, 아마 지금쯤 마나우스로 돌아가는 길일 거야. 실실 웃으면서 돌아가고 있을 거라구!」

「내가 그들을 잡을 거요.」

두트라는 그렇게 말하면서 머리통을 앞으로 돌진하려는 황소처럼 숙였다. 그의 천박한 눈에는 붉은 핏발이 서 있었다.

「아, 물론이지.」

케이츠가 비꼬았다.

「아마 루이스는 통로 바로 바깥에 가만히 서서 기다리고 있을 거야. 우리가 나오길 말이야. 그놈은 대수롭지 않게 우릴 날려보낼걸. 우린 이제 여기에 갇힌 거야. 젠장! 아니, 기다려. 셔우드 말에 의하면 다른 통로가 있다고 했어. 사원에서 찾아낸 거라던데. 좋아, 우리도 나갈 수 있겠군.」

「좋아요.」

두트라는 말하면서 음흉한 앞니를 드러내며 야릇한 미소를 다시 지었다.

케이츠는 역겨운 표정으로 캠프를 바라보았다.

「네 임무는 텐트에서 기어나오는 놈들을 쏘는 게 전부였는데, 그것도 똑바로 처리하지 못하다니. 겨우 두 명만 해치웠어. 우리가 몇 놈이나 잡아야 하는지 알기나 해?」

두트라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더니, 권총을 들어올려 아무 말 없이 케이츠의 이마 중앙으로 총탄을 내뿜었다. 케이츠가 퍽 꼬꾸라졌고, 잠시 경련을 일으키는가 싶더니 곧 영원한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개자식!」

두트라는 케이츠의 몸에 침을 뱉으며 말했다.

「네 놈이 없으면 루이스를 더 빨리 찾아낼 거야.」

시체 세 구를 없는 것 마냥 거들떠보지도 않고, 두트라는 침착하게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몇 주 동안 루이스가 제멋대로 날뛰도록 놔두었지만, 이제 기다림은 끝났다. 그 자식을 뒤쫓아가서 놈을 죽이고, 보석을 빼앗은 뒤 여자와 재미를 보고 나면 그녀 역시 죽일 것이다. 케이츠는 자신이 두트라를 제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멍청이였다. 두트라가 정글에 대해 무지하다고 생각하는 루이스도 곧 케이츠와 같은 교훈을 배우게 될 것이다. 두트라는 그놈을 동물처럼 능숙하게 추적할 것이고, 빠져나갈 길이라곤 없을 것이다. 루이스 놈이 어디로 갈 건지 훤히 알고 있기 때문에 그가 할 일이라곤 거기에 먼저 도착해서, 그를 기다리는 게 전부였다.

벤은 동굴을 빠져나와, 손수건에 싼 다이아몬드를 셔츠 깊숙이 안전하게 집어넣고는 권총을 쥐었다. 추호도 반복하고 싶지 않은 악몽 같은 탐사였다. 케이츠가 먼저 덤볐을 때 손전등을 떨어뜨려 그에게는 암흑으로 일관된 행로였다. 이마에서 내돋기 시작한 땀이 눈 속까지 흘러내렸다. 길을 달려 내려가면서 모든 신경을 발 밑에 집중시켰고, 생매장될지도 모르는 초조한 공포에서 벗어나려고 애썼다. 무조건 질리언이 동굴로 들어갔을 거라는 사실만을 생각하며 계속 나아갔다.

아침 햇살이 그를 반기자 천국을 만난 것 같았다. 빛을 다시 볼 때까지 자신이 얼마나 긴장했는지, 또한 얼마나 안도감을 느꼈는지도 몰랐다. 표석 근처까지 도착해서 나뭇가지와 덩굴이 두텁게 얽힌 숲을 빠져나오자 아침 햇살이 밝게 비치기 시작했고, 숲 속은 햇빛으로 얼룩덜룩 명암이 함께 하고 있었다.

하지만 질리언의 흔적이라곤 없었다.

스톤 시티에 처음 도착했을 때 그는 밤에 살짝 빠져나와, 동굴 바깥에 식량이 든 배낭을 숨겨두는 사전조치를 취해 놓았었다. 그리고 지금 배낭을 비밀장소에서 꺼내어 다이아몬드를 적당한 주머니에 숨긴 후, 재빨리 배낭을 지고 죔쇠를 단단히 죄었다. 그녀는 아주 멀리 가지 않았을 테지만, 질리언을 빨리 찾아내지 못한다면 아마 흔적도 없이 밀림 속에서 사라질 것이다. 그의 심장이 거세게 뛰면서, 계속해서 더 세게 방망이질을 해대고 있었다.

그녀를 찾아야만 했다.

누군가 동굴 밖으로 빠져나왔다. 질리언은 꼼짝도 않고 얼어붙은 채 감히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공포로 옴짝달싹도 않고 있었다. 뺨을 바닥에 대로 눈을 감자, 혈관에서 크게 펌프질을 해대는 소리가 자신의 귀에 크게 들렸다. 숨소리를 죽이며 맥박을 진정시키자, 뭔가 부스럭대는 소리를 더 잘 감지할 수 있었다. 벌레들의 움직임이 귀밑 촉촉한 부식토에서 바로 느껴졌다. 그녀의 손가락이 흙 안으로 파고들었다.

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기 시작했다. 첫 번째 총성으로 벤이 살해당했다는 무시무시한 두려움으로 모든 게 마비되어, 분명한 사고조차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벤은 막강하고 유능했으며, 케이츠나 두트라보다 먼저 동굴을 빠져나가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움직일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해서 그의 생사를 확인해봐야 했다.

조심스럽게 천천히 고개를 들고 시야를 가리고 있는 잎사귀를 걷어냈다. 아직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멀리 떨어진 곳에서 뭔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절망적으로 몸을 일으켜, 그녀는 숨었던 장소에서 반쯤 기어나왔다. 배낭을 진 넓은 어깨 부분이 수풀 사이로 막 사라지고 있었고, 넓은 어깨 위에는 셔츠 깃까지 굽이치는 어둡고 약간 긴 머리칼이 보였다.

안도감이 온몸을 꿰뚫고 기나갔고, 어찌나 예리하게 파고들었던지 좀전의 공포만큼 그녀를 기진맥진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벤!」

그녀의 목소리는 무기력하게 쥐어짜는 듯했지만, 그는 그 소리를 들었는지 아니면 딴 소리를 들었는지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더니 갑자기 몸을 숙이며 숨으려 했다. 그녀는 손전등을 쥐고 간신히 일어섰다.

「벤!」

그가 되돌아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고, 성큼성큼 서너 걸음 걷더니 그녀 옆에 다가와 그녀를 확 끌어안고 고개를 숙여 뺨을 그녀의 머리 위에 댔다. 그녀는 뜨거운 눈물을 글썽이며 그에게 매달렸고, 강한 몸에서 주는 안도감으로 이대로 그를 놔주고 싶지 않았다. 새벽녘 지옥 같은 한 시간 동안, 그녀는 벤의 생사도 알지 못한 채 고통에만 휩싸여 있었다. 그녀는 릭을 잃었고, 게다가 벤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감당할 수도 없었다.

「쉿!」

그가 속삭였다.

「당신을 찾았으니, 이제 모든 게 다 잘 될 거야.」

「릭이 죽었어요.」

그녀는 그의 가슴에 기대어 잠긴 소리로 말했다.

「두트라가 릭을 쐈어요. 내가 봤어요.」

그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개인적으로는 릭의 일이 유감스럽지도 않았지만, 어쨌든 젠장, 그는 질리언의 오빠였다.

「유감이오.」

그는 그녀를 재촉하기 시작했다.

「자, 자, 진정해, 질리언. 여기서 이러고 있을 순 없소. 움직여야 해. 빨리 말이야.」

그녀는 움직이려다가 다시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여기 있다가 그들이 동굴 밖으로 나오면 숨을 수도 있잖아요?」

그녀는 그렇게 말해 놓고 곧 다른 통로를 떠올렸다.

「아니, 그들이 어떤 통로로 나올지도 모르잖아, 안 그래?」

「틀림없이 다른 통로로 빠져 나올 거야. 우리는 그 통로가 어디로 나오는지 모르니 빨리 도망가는 편이 가장 안전할 거야. 아마 그들은 그 통로로 나왔다가 여기로 되돌아 와서 우리를 추적할 지도 모르니까 가능한 한 간격을 넓혀야 해.」

「그런데 조르지와 다른 일행들은 어쩌죠?」

「페페는 두트라와 케이츠가 떠날 때까지 숨어서 기다리겠다고 했어. 그런 뒤 강으로 돌아갈 거야. 그들은 밀림에 대해 잘 아니까 괜찮을 거야.」

그녀는 입을 다물고 힘을 아꼈다. 벤은 그녀를 앞세우고 거의 뛰다시피 걸었다. 걱정은 접어두고 정신을 온통 걷는 일에만 집중했다.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충격의 여운이 서서히 가시고 더 이상 릭에 대한 생각으로 슬퍼하고만 있을 수 없었다. 애도의 시간은 나중에도 충분히 있을 것이다. 안전이 보장될 때 말이다. 당장 그녀가 해야 할 일은 최대한 빨리 한 발 한 발 내딛는 것이고, 평소처럼 한 발자국 내딛기 전에 앞이나 발 밑을 살필 여유조차 없었다.

마침내 벤은 총탄이 뒤에서 날아올 위험이 어느 정도 가신 것 같자, 그녀의 팔을 잡고 속도를 늦추며 앞에 섰다.

「이제 좀 괜찮을 거야.」

그가 목소리를 낮추며 중얼거렸지만, 추적 당하고 있는 위협적인 상황을 조사할 수도 없었다.

「이제 천천히 가자고. 갈 길이 멀잖소.」

맥 빠지는 사실이지만, 그들 앞에는 아주 먼 길이 남아 있었다. 그들은 아주 먼길을 여행했고, 지금 전혀 뜻밖의 상황에서 되돌아가고 있었다. 아무런 생활 필수품도 준비하지 않은 채 말이다. 벤이 간신히 배낭을 지고 왔기는 하지만, 되돌아갈 때까지 그들이 먹을 충분한 식량을 가지고 있진 않을 것이다. 그들은 식량을 사냥해야 하지만, 총소리를 듣고 케이츠나 두트라가 곧장 달려올 수도 있었다. 질리언은 다른 가능성을 생각해 보았다. 조르지와 나머지 일행이 케이츠와 두트라보다 숫자도 많았고, 힘을 합쳐 둘을 막았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녀와 벤은 쫓기는 상황이 아닐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함부로 장담하거나 확인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젯밤만 해도 그녀는 이보다 더 행복할 수 없으리라 생각하면서 잠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충격으로 온몸이 마비될 지경이었다. 오빠는 바로 자신의 눈앞에서 살해당했고, 자신과 벤은 지금 죽기살기로 도망가는 중이었다. 이 얄궂은 상황에 그녀는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그것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계속 걸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살아남는 것만이 두트라에게 정의라는 걸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오늘 절벽을 지나야 해.」

벤이 말했다.

그녀는 절벽을 떠올리자 그곳에서의 기억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먼 거리는 무리예요. 그 길은 하루 이상 걸렸잖아요. 생각나요? 우린 이틀하고도 반나절을 걸려 절벽을 지났고, 그후에 동굴을 발견했잖아요.」

「그래, 그땐 아주 쉬운 행보를 했고, 휴식도 많았지. 당신 어깨 때문에 말이야. 보통 하루 정도 걸리지만, 이번에는 더 빨리 지나갈 거야. 혹시 거기서 잡힌다면 할 수 없지만, 일단 절벽만 벗어나면 우릴 찾을 수 있는 병목지점이 없어.」

「절벽을 지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려요. 잘못하면 해가 떨어져 어두운 절벽에 남아 있는 꼴이 될 거구요.」

그녀가 지적했다.

「알았소.」

그가 냉랭하게 말했다.

그녀의 주장은 무조건 논쟁하자는 게 아니라 그가 선택한 길의 어려운 점을 말했을 뿐이었다. 일단 말을 꺼낸 후 그녀는 그 사실을 말끔히 잊어버렸고, 다시 걷는 일에만 집중했다. 그가 어떤 길을 택하든지, 그녀는 그를 따를 것이다.

한 시간 가량 흐른 뒤 그는 잠시 멈추었고, 각자 물 한 모금씩 들이켰다. 식량이 있었지만, 둘 다 입에 대지 않았다. 벤이 날카로운 눈초리로 살펴보니, 그녀의 표정은 창백하긴 했지만 굳은 의지가 엿보였다. 그녀는 잘 견뎌낼 것이다.

이튿날 아침은 계속되는 악몽의 연속이었다. 밀림을 지나 절벽까지 허둥지둥 달려가는 지옥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었다. 그녀는 공포의 느낌이 이렇게 각양각색이고, 악몽이 이렇게 오래 계속될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릭과 벤에 대한 끔찍한 두려움. 동굴과 공포. 그리고 지금은 지치고 굶주린 데다가, 지금까지 일어난 사건들로 망연자실해 있으면서도 이 끈질긴 추격전을 앞으로도 계속해야 했다. 악몽들은 각양각색의 형태와 내용들이었지만, 모두 다 끔찍한 꿈 그 자체였다.

두세 시간이 지나자, 그들은 다시 멈춰 물과 과일 통조림을 먹었다.

「내일은 식사할 시간이 있을 거야.」

벤이 약속했다.

「알았어요.」

그녀는 일어서서 떠날 채비를 했다.

「전 괜찮아요.」

커다란 손이 살짝 미소짓고 있는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는가 싶더니,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끊임없이 계속되는 폭우 속을 걸었고, 흠뻑 젖은 생쥐 꼴로 추위와 비참함에 떨어야 했다.

한참만에 드디어 절벽에 도착했다. 마르팀의 생명을 앗아갔고, 릭마저 위태롭게 했던 그곳에 도착한 건 해 질 무렵이었다. 그때 그녀는 오빠의 생명을 구했었지만, 유감스럽게도 일주일 후에 그를 잃어버렸다. 더 이상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들은 잠시 멈춰 절벽을 응시했다.

「명심해. 벽에 딱 붙어 서야 해.」

벤이 당부했다.

「잠깐 동안 손전등을 켜야 할 거예요. 뒤쫓아오는 사람이 볼 수도 있겠지만요.」

그녀가 말했다.

「그래야겠군. 그 빌어먹을 동굴은 온통 새까매도 무작정 지나왔지만, 절벽에서는 그렇게 걸을 수 없을 거요.」

그는 동굴 밖에 숨겨뒀던 배낭에다 손전등을 넣어 두었었다. 대부분 손전등에는 무거운 전지가 들어 있긴 하지만, 얼마나 갈지는 몰랐다. 우선 절벽에서 하나만 사용하고, 나머지는 아끼기로 했다.

그녀는 줄곧 걸었다. 새벽부터 걷기 시작했고 지금은 해질녘이었다.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지만 멈추지 않고 손전등을 조심스레 비추면서, 절벽이 시작되는 길과 자신들 사이에 구불구불한 각도가 충분해서, 감추려고 해도 감출 수 없는 이 빛이 그나마 추적자들에겐 보이지 않기를 바랐다.

그녀의 다리가 피로로 후들후들 떨리고 있었다. 작은 과일 통조림 하나로는 충분한 힘을 낼 수 없었다.

「사탕 같은 거 있어요?」

어깨너머로 그녀가 물었다.

「아니. 밥 모아둔 건 있어.」

「꺼낼 수 있어요?」

그는 작은 주머니를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그녀는 아슬아슬하게 그걸 받아 쥔 뒤 한줌을 꺼내어 둥근 주먹밥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주머니를 그에게 돌려주었다.

「고마워요.」

그녀는 차가운 주먹밥을 우적우적 씹기 시작했다. 비록 맛은 시원찮았지만 그래도 식량이었고, 더군다나 그녀의 몸은 탄수화물을 필요로 했다.

뒤에 있는 벤도 마찬가지로 먹고 있었다. 착 달라붙은 보기 흉한 겉보기에 비하면 끔찍할 정도로 차갑고 끈적이진 않았다.

순간, 전등 빛에 번쩍이는 황색 눈이 잡히자, 그녀는 머리털이 쭈뼛해지며 그대로 꼼짝없이 얼어붙었다.

「진정해요.」

벤이 중얼거리며 권총을 꺼내 안전장치를 풀었다.

「코아티(라틴 아메리카산 곰의 일종)라는 동물이지. 위험하진 않지만 날카로운 발톱을 조심해야 하지. 괜히 건드리지 말자고.」

그녀는 너구리 같이 줄무늬 꼬리가 달린 길다란 주둥이의 짐승을 전등으로 비추었다.

「이놈들은 나무에 사는 줄 알았는데.」

「보통은 그렇지. 혼자 여기서 뭘 하는지 모르겠군. 쉿!」

그는 돌을 집어 코아티에게 던졌다. 놈은 물러서긴 했지만 아직 절벽의 중간쯤에 머물러 있었다.

다시 돌을 던져 놈의 발을 맞췄다.

「쉿!」

코아티는 눈을 번쩍이며 그대로 있었다. 벤은 한숨을 쉬며, 더 큰 돌을 집어들었다.

「널 다치게 하고 싶지 않지만, 딴 곳으로 쫓아내야겠구나.」

세 번째 돌이 놈의 엉덩이를 때리자, 코아티는 깜짝 놀라 고통의 소리를 내더니 재빨리 한쪽으로 도망쳐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덤불 가지들의 스치는 소리가 가까이 나자, 이제 절벽 아래가 완전히 가파른 벼랑 길이 아니란 걸 알게 되었다.

한숨 돌리면서 다시 길을 재촉했다. 만약 도중에 표범이나 스라소니를 만나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그녀는 걱정에 사로잡혔다. 그럼 그놈들을 어떻게 피하지?

절벽은 끝없이 계속되는 것 같았다. 하루종일 생각하기조차 싫은 일들만 있었고, 밤에도 마찬가지였다. 이젠 이 길이 어서 끝나기를 바란다거나, 얼마나 오랫동안 절벽을 걸어가야 할지는 접어 두기로 했다. 어쨌든 계속 걸을 수밖에 없었고, 때가 되면 절벽이 끝나고 이 고달픈 하루가 끝날 것이다.

뒤에 있는 벤의 존재는 바위벽처럼 든든했다. 계속 걸어나가면서 그녀는 처음 절벽을 건널 때 시간이 지체된 건, 폭풍으로 발이 묶이고 마르팀의 죽음과 그녀의 부상, 그리고 릭의 사고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어깨 통증은 거의 나았고, 이전보다 빨리 움직이고 있으니 지난번보다는 시간이 덜 걸릴 거라고 스스로 위안했다.

혼자 생각에 깊이 빠져 그녀는 절벽이 끝나고 다시 밀림이 눈앞에 펼쳐진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벤은 무의식적으로 계속 걸어가고 있는 그녀를 세우고는, 그녀의 머리 뒤로 손을 넣고 목덜미를 부드럽게 주물러주었다.

「대견해. 이제부터 괜찮을 거요. 오늘밤 묵을 곳을 찾아봐야겠군.」

벤이 부드럽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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